무조건 미국이민? - 비자면제 협정의 함정
요 아래에 '지금이 이민 가기 좋은 때인가'라는 글이 올라왔더군요. 이 글과, 관련된 다른 글들을 보니 반응은 완전 극단에서 극단이었습니다. 미국이 사람 살기 좋은 나라가 결코 아니라는 글이 있는가 하면, 자기는 시민권 땄기 때문에 행복하고 한국에서 그런 식으로 미국 욕 하는 사람들은 찌질한 사람이라는 식의 글들이 올라와 있더군요. 그러나, 그것이 과연 감정들을 극복하고 좀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본 것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솔직히, 이민 오기에 좋은 시절은 아니라는 것에 기본적으로는 동의합니다. 미국은 대공황 이후 가장 나쁜 경제적 난관을 겪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쪽으로 지금 이민을 오더라도, 자본을 꽤 가지고 있는 사람조차도 어떤 비즈니스를 새로 창업한다거나, 기존의 비즈니스를 인수한다 해도 그것을 성공의 반열로 올려놓기 힘들 때이긴 합니다. 그나마 자본이 없는 경우, 임노동자로 일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일인데, 일자리가 과거처럼 풍부해서 아무 곳에서나 일단 일을 시작해서 자리를 잡고, 그 돈을 모아 사업자본을 만든다는 것은 이곳에서도 이미 '옛날 이야기'로 치부하고 있는 정도니까요. 정말 실력이 특출나다면 모르거니와, 사실 그런 실력이 있다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비빌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겠지요.
문제는, 지금 이민이라는 이슈가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한국이 그만큼 살기 어렵다는 이야기의 반증일텐데, 문제는 서민 살기에는 여기나 거기나 별 다름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특히 초기이민자의 경우 직장 잡기도 어려운데다 이들에게는 각종 사회적 보장 장치가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나마 국가 의료보험이라도 쓸 수 있는 우리나라가 나은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민이란 것이 갖는 나름으로의 매력은 또 다른 의미입니다. 일단 이민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나의 삶의 터전을 바꾼다는 이야기이며, 다시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제가 지난 90년 3월에 미국에 왔으니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 온지 18년을 넘어서 19년이 되어가는 시점입니다만, 처음 3년 동안 우리나라가 그리워서 힘들어했던 시기를 지나고 나서는 자연히 이 나라에 적응이 됐고, 그러면서 나름으로 개인적인 경험들도 쌓게 됐고, 그러면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제 입지를 천천히 다져나갔던 것을 기억합니다.
아무튼, 이 시점에서 미국 정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부시 행정부는 한국에 대해 무비자 입국을 허용했습니다. 9.11 이후 거의 전면폐쇄하다시피 했던 비자개방이 몇개국엔가는 이뤄진 걸로 알고 있는데, 아무튼 한국도 그 대상이 된 것이지요. 물론 여기엔 몇가지 선제 조건이 있었던걸로 압니다. 우선은 생체정보가 담긴 전자여권 문제였는데, 아마 그 문제가 해결된 모양이지요. 이것은 미국에서 자기 나라로 입국하는 사람들의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게 됨을 뜻합니다. 변조가 쉬운 구여권이 아닌 새로운 형식의 전자여권... 이 문제야말로 사실 미국이 무비자 입국 허용의 가장 큰 변수임과 동시에,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불법체류자 양산을 막겠다는 미국 정부의 사전포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비자입국에 있어서 따르는 조건 중 하나가 '재산증명'일 것입니다. 저희가 미국에 처음 올 때도 그랬거니와, 미국에서는 입국시 '재산증명'을 요구해 왔습니다. 이런 제약조건으로 인해 그동안 한국에서 비자를 받아야 할 경우 퇴짜맞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같은 경우가 나중엔 꽤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제가 보기엔 이 '재산증명'에 바로 미국 정부가 원하는 것이 숨어있습니다.
만일, 미국 '이민'을 원하는 분이 있다면, 반드시 적법한 '이민절차'를 밟으시길 바랍니다. 절대로 이곳에 무작정 무비자 방문 혜택을 이용해 눌러앉을 생각 따위는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애초부터 미국의 이 정책은 '불평등조약'일 수 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 처음으로 미국으로 무비자입국의 혜택을 받아 오게 된 사람들은 사회에서 꽤 잘 나간다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생체인식 여권이 발급되고, 아무런 제약없이 미국에 올 수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사회의 유력층이고, 재산도 상당히 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미국 측에서 무비자로 국경을 열면서 이곳에 한국으로부터의 '탈출' 이민이 감행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이 조치를 시행했을까요? 이들도 뻔히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이번에 비자면제조치의 조건으로 생체정보인식 전자여권을 요구한 겁니다. 물론 당신은 '무비자'로 미국에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한국 공항에서 미국으로 오는 건 자유지만, 미국 공항의 입국 심사대를 자유롭게 통과해 나올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만일 입국시에 '부적격자'로 판정되면, 아마 이민국 당국은 해당 여행객을 그대로 한국으로 돌려보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왜냐면, 일단 미국 입국을 어떤 이유로든 거부당하면 다시는 미국으로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올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다시 허가되는 과정은 매우 까다롭고 힘든 과정입니다. 변호사를 사야 할 만큼 일이 복잡해집니다. 그리고 생체정보가 실린 여권은 재발급이나 복제, 위변조가 어렵기 때문에 과거처럼 '이민 브로커' 따위가 나설 수 없게 됩니다.
설사, 이곳에 입국했더라도 정상적 입국시한이 지난 사람을 쫓는 데 있어서, 이 신여권은 사람들의 소재파악을 더욱 쉽게 하는 장치가 될 것입니다. 과거와는 달리 전산화된 입국 과정은 미국 연방 이민 귀화국(ICE)이 입국자의 소재파악을 더욱 쉽게 해 주고 있습니다. 이 경우 역시 잡히면 추방이고, 일단 추방되면 다시 재입국은 불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설사, 이곳에 어떻게 불법 입국해서 일을 잡는다 해도, 계속되는 이민국의 단속으로 인해 불법체류자들이 잡을 수 있는 일이란 뻔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3D 업종을 벗어날 수 없고, 고생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기란 아마 하늘의 별따기가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애초부터 이 무비자 입국 조치는 불평등조치인 것입니다. 삶의 터전을 미국에선 잡을 수 없고, 미국에 와서 관광하고, 돈 쓰고, 제때 네 나라로 돌아가라... 하는, 돈 있는 이들에 대한 선심 조치일 뿐이죠.
그렇다면, 이 조치가 생긴 배경은 무엇일까요? 그냥 제 개인적으로 보기엔, 미국이 지금 그만큼 달러 고갈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고, 또 지금의 신자유주의 체제 및 이를 보조하는 글로벌라이제이션 조치로 인헤 보장된 자본의 자유이동을 보완하는 장치로서 인적 자원의 이동을 어느정도 허용하겠다는 것으로도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진 자'들을 위한 조치인 셈입니다. 실질적으로 그들이 '세계화'를 이루면서, 그것은 '체제 자체의 세계화'를 가져오고, 동시에 '양극단의 세계화', 즉, 빈곤한 이들은 세계 어딜 가든 빈곤하도록, 가진 자들은 세계 어디에서든 가질 수 있도록 한 조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실질적 변화'는 결국 '불평등'을 수식어로 달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사조의 변화 때문에도, 신참 이민자들이 '자본이 있을 경우에는' 그들의 위치를 수직 상승시키는 변화를 만들어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 그 시작 자체가 임노동자일 경우 미국에서 살기가 참 힘든, 그런 세상이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에서는 내가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하는가에 따라 내게 조금 다른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사실이며, 적어도 한국과 같은 살인적 사교육비나 혹은 주거비, 주거환경 문제 때문에 시달리는 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LA 나 뉴욕 같은 대도시에 살지 않는다면 말이죠.
대신, 만일 여러분께서 이민의 길을 선택했다면,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어떤 '틀'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내 스스로가 완전히 변화한다는 정신적 무장이 되어있지 않다면, 이민생활은 그저 지금까지 살면서 갖고 있었던 환상 하나 깨 버리는 이외에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정말 내 발로 뛰어, 뭐든지 해 보겠다는 사람에게, 이민은 아직도 조그만 희망 하나는 줄 수 있을 법 합니다.
혹시 이민을 생각하고 계신 분이라면, 보다 현명한 생각과 사려깊은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는, 그런 어려운 시절이군요. 건승하세요.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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