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1968년 혁명 <노동자 연대> 39호
오늘날, 당신은 대개 '혁명'이라는 단어를 누군가 닥쳐올 사건을 이야기하는 데서 듣기 보다는 영화의 사운드트랙이나 최신 음반에서 듣기가 쉬울 것이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사람들이 혁명을 역사 속에 깊이 파묻힌 것으로 생각하 기 때문이다. 그러나, 25년전만 하더라도 프랑스에서는 1,200만명의 노동자가 파업 을 벌이고 122개 공장이 점거 중이었으며, 학생들은 자신들이 속한 빈사상태의 구체제에 맞서 투쟁하는 등 총체적 반란의 벼랑에 서 있었다.
60년대 후반 프랑스는 실질임금은 상승하였으나, 노동자계급의 대부분은 여 전히 저임금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대외무역은 3배나 증가했음에도 말이다. 전 체 노동자의 25%는 500프랑도 안 되는 월급을 받고 있었다. 어떤 비숙련 노동 자들은 단지 400프랑 밖에 못 받았다. 전후 호황기로 간주되던 그 시기에 실업 자는 50만에 이르렀다. 노동조합 가입자수는 1945년의 7백만에서 3백만 내외로 떨어질 정도였다. 68년 이전에는 별다른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미 슐린 회사는 노조와 30년 동안 딱 3번만 협상하였다고 자랑하였다. 그렇다면, 1968년 프랑스에서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그토록 빨리 변할 수 있었을까?
학생들의 분노
낭트르는 파리 외곽의 대학으로, 증가하는 학생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건 설한, 전통이 짧은 대학이다. 그곳은 그 유명한 라뗑 지구(센느강 좌안)의 격정 적인 문화적 생활과는 달랐다.
1968년 3월 22일에 8명의 학생들이 얼마전 전국 베트남위원회의 회원 6명이 연행된 데 항의하러 데앙 학부장의 집무실로 쳐들어갔다. 그들 가운데 다니엘 콘-방디라고 불리는 사회학과 학생이 있었다. 그는 1967년 11월에 학생과밀에 반대하여 10,000-12,000명이 참여한 동맹휴업을 조직했던 그룹의 일원이었다.
68년 이전 10년 동안 학생수는 170,000에서 514,000으로 증가하였다. 국가는 재정 일부를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로는 거대한 학생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으며, 대신 대학교와 칼리지가 이를 떠맡을 것을 요구했다. 1962년 이후 대학 면적은 두배로 늘어났지만 학생수는 거의 세배가 되었다. 편의시설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으며, 학생과밀은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데앙 집무실 점거 엿새만에 경찰이 투입되어 캠퍼스가 봉쇄되었다. 대학 내 부의 학생 500명은 토론그룹으로 갈라졌다. 사회학과 학생들은 시험을 보이콧 하고, '우리는 왜 사회학도가 되려고 하는가?'라는 제목의 팜플렛을 제작했다. 학생들은 강의실을 상설 정치토론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
강사들은 편이 갈리기 시작해, 일부는 학생들의 요구를 지지했다. 대학은 공 간을 제공했지만, 결국 4월 2일 학생 1,200명이 대강의실 중 한 곳에 모였다.
3.22 운동
부활절이 지나자, 선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점거 한달이 되는 4월 22일에 B1 강의실에서 집회가 열렸다. 1,500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자본주의적 기술 대학의 전면거부'를 요구하는 결의문이 제출되었으며, 잇따라 노동자계급과의 연대를 호소하였다. '3.22운동'(반권위주의적 사회주의 학생들이 느슨한 형식으로 결집)은 캠퍼스 내 동료 학생들로부터 지지를 얻고 있었다.
대학은 콘-방디를 포함한 관련 학생 8명을 징계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5 월 3일 소르본느의 징계위원회에 출석하도록 요구받았다. 이들을 변호하기 위 해 강사 4명이 자원했다.
동맹휴업은 교육부장관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 이전해에 로디아세따와 사비엥에서 중요한 공장파업이 있었다. 로디아세따(리용에 있는 화학섬유공장) 의 파업에는 23일간에 걸쳐 14,000명이 참여했다. 경영진은 그 해말에 파업노동 자 92명을 해고하고, 공장폐쇄로 맞서기도 하였다. 1967년 6월 프조공장은 협상 기간에 전투경찰이 투입되어 두명의 노동자가 사망하였다.
1968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르노 비이앙꾸르 자동차공장에서 모두 8건의 쟁 의행위가 있었다. 알랭 뚜렝(학생들의 행동을 자진하여 방어했던 낭트르 교수) 이 말한 '프랑스인은 지도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라는 지적은 점점 명확해 져 가고 있었다. 이 지도자들은 막 긴 잠에서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흑적기, 개선문에 내걸리다
5월 3일 금요일 소수 학생들이 소르본느 앞 광장에 모였다. 낭트르에서 온 학생들은 그곳 소르본느의 활동가들과 결합하였다. '낭트르의 8인'은 다가오는 월요일에 징계를 받을 예정이었다. 여덟 학생과 낭트르에서 온 일부 동료들은 임박한 월요일에 대처하기 위해 소르본느의 학생 활동가들과 만나고 있던 중이 었다.
군중들이 불어나기 시작해서 대학당국은 마비상태가 되었다. 오후 4시경 경 찰과 CRS 폭동진압경찰이 소르본느를 봉쇄하였다. CRS는 학생들을 체포하였 는데, 그들은 헬멧을 쓰고 요소에 분산배치되었다. 소식이 급속히 퍼져 시내 전 역에서 학생들이 몰려왔다. 연행자를 구출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학생과 대학을 폐쇄하고 있는 경찰 사이에 벌어진 이 전투는 대단하였다.
소르본느가 강제로 폐쇄된 것은 700년 역사에서 이번이 두번째일 뿐인데, 다른 한번은 나치가 파리를 점령한 1940년의 일이다.
전국학생연합(UNEF)와 전국고등교육 교원조합(SNESup)은 즉각 파업에 돌 입하여 다음과 같은 요구를 제출하였다.
1. 소르본느의 재개
2. 경찰 철수
3. 연행자 석방
이 단체들은 3.22 운동과 함께 하였다. 최초의 불만은 학생과밀로부터 제기 되었지만, 이제는 더 넓은 전망 위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폭력 경찰
5월 6일 월요일, '낭트르의 8인'은 인터내셔날가를 부르면서 경찰 방어선을 통과했다. 그들은 대학징계위원회에 출석하러 가는 길이었다. 학생들은 파리 시 내를 행진하기로 결정했다. 라텡 지구로 되돌아오는 길에 생 쟈크 거리에서 경 찰로부터 야만적인 습격을 당했다.
학생들은 보도블럭을 깨고, 바리케이트를 만들기 위해 차를 뒤엎었다. 경찰 은 최루가스를 쏘아대고 증원을 요청했다. 생 제르멩 거리는 유혈전장이 되었 으며, 공식발표에 따르면 그날 하루 422명이 체포되고 경찰 345명이 부상당했 다. 이 날은 '피의 월요일'로 68년 운동사에 기록되고 있다.
화요일에는 대행진이 뒤따랐고, 경찰을 조롱하듯이 흑적기가 개선문에 내걸 리고 인터내셔날가가 도로 곳곳에서 울려퍼졌다. 그 주는 비슷한 투쟁이 계속 되어, 거리는 군중들로 생동감이 넘쳤고 정치토론이 활발하였다. 수요일 경 여 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투욕
중간계급은 경찰이 학생들에게 휘두른 야만성에 진저리를 쳤으며, 대다수의 노동자계급은 국가에 맞서는 학생들의 전투욕에 고무되었다. 5월 10일 금요일 고등학생을 포함한 학생 3만명이 당페르-로쉬로 근처에 모였다. 그들은 생 제 르멩 거리를 따라 소르본느를 향해 행진했다. 생 제르멩 주위의 모든 도로는 충돌에 대비한 무장경찰이 차단하였다.
시위대는 경찰의 공격에 대비해 50개의 바리케이트를 세웠다. 장 자크 르벨 기자는 새벽 1시경 "문자 그대로 수천명의 사람들이 바리케이트를 함께 쌓았 다. 여성, 노동자, 구경꾼, 파자마 바람의 사람 등이 인간사슬을 이뤄 돌, 나무, 쇠붙이를 날랐다"고 적었다.
한 목격자가 전하길, "우리 바이케리트는 이중이다. 하나는 3피트 높이의 돌 무데기이고, 다른 하나는 20야드 뒤에 나무, 자동차, 쇠기둥, 쓰레기통으로 쌓아 올린 9피트짜리이다. 우리의 무기는 돌, 쇠붙이 등 거리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다."
라디오 리포터는 거리에 60개의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다고 말했다. 프랑스는 유럽1 방송의 보도와 뤽상부르 라디오를 청취하기 위하여 밤을 세웠다. 정부는 요구사항 3가지 중 2가지를 양보했으나, 연행자는 석방하지 않았다. '동료를 석 방하라!'는 요구는 실현되지 못했다.
탄압은 계속되고
바리케이트는 경찰의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최루가스와 CS탄을 사용했다. 학생과 시위대는 신경가스로부터 보호하고자 베이킹 소다수에 적신 손수건을 사용했다. 싸움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주택가에 경찰이 들이닥쳤고, 사람들은 끌려가 경찰차 안에서 두들겨 맞았다. 경찰, 특히 CRS는 가장 야만적으로 시위 자들을 다뤘다.
임산부가 맞았다는 보도도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옷이 벗겨졌고, 일부는 결 박당할 때까지 사타구니를 걷어채였다. 가투가 끝날 때까지 367명이 부상당하 고 460명이 연행되었다. 토요일 아침, 바리케이트를 치우기 위해 병력 수송차량 이 들어왔으며, 생 제르멩 거리를 내달릴 때에는 야유와 조롱을 받았다.
5월 13일 월요일 학생들은 석방되었으나, 한점 불꽃은 이미 들판을 태우고 있었다. 노동조합은 하룻동안 파업을 지시했고, 같은날 파리에서 가두행진이 있 었다. 적게 잡아 20만이 '드골 퇴진'을 외치며 가두행진에 참여했다. 지금 정부 지도자는 적으로 간주되었다. 행진 후에 해산 요구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따 랐으나, 학생들 대다수는 소르본느를 점거하기로 결의했다.
낡은 속임수를 부리는 공산당
프랑스 공산당(PCF)은 낭트르의 시위학생들을 처음부터 비난했었다. 총비서 예정자, 조르즈 마르셰는 '폭로되어야 할 엉터리 혁명'이라는 글을 출판했다. 그 는 이 글에서 3.22운동이 대부분 대부르조아의 아들들이며, 노동자계급 출신의 학생들을 경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아버지 사업체의 지배인이 되기 위해 혁명의 불길을 곧 잠재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5월 8일 당지도부는 운동의 규모를 보고나서 기조를 바꿔 봉기를 장 악하려 들었다. 그들은 지금 학생들의 선례가 작업장에서도 반복되는 것을 보 았다. 그들은 사태를 방치해 공산당의 통제를 벗어나게 하기보다는 행동을 편 들고 있는 양 보여지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태를 또한번 오판했다. 노동총연맹(CGT, 공산당이 좌우하 는 노조)지도부 또한 노동자들이 이미 주도권을 잡고 난 직후에라야 작업장에 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행동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루이 아라공(프랑스 에서 가장 유명한 공산주의 작가)은 오데옹에서 열리는 집회에서 연설하기 위 해 파견되었다. 집회에 참석한 3.22운동 사람들은 '전 인민의 아버지, 스탈린 만 세'라는 풍자 섞인 외침으로 그를 조롱하고 야유했다.
당 정치국원 로제 가로디는 학생들이 주장한 경제의 자주관리, 자치위원회 와 탈집중화 원칙을 수용했다. 또한 학생들의 목표와 일치감이 확산됨에 따라 '프라하의 봄' 사건에 대해서도 사죄했다. 그는 곧 PCF에서 쫓겨났다.
당에 봉사하는 것만이 진실이다
PCF는 학생운동을 대개 '바쿠닌, 트로츠키주의, 단순 모험주의의 극좌, 쁘띠 부르조아적 혼합물'로 분류하였다. 이즈음 당기관지 '뤼마니떼'에 익명의 글이 실렸다. 이 글의 필자는 청년부 장관이 콘-방디와 '접촉'했으며, 3.22운동에 자 금이 건네졌다고 주장했다. 이런 비난은 완전히 날조된 것으로 매우 불순한 상상력의 극치였다. 물론 공산당이 이런 류의 전술에 의존하기는 이번이 처음 도 마지막도 아니었다.
소르본느는 마르크스, 레닌, 마오의 포스터가 전면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오 래된 기둥들을 장식함에 따라 밤새 변해갔다. 흑적기가 베트콩 깃발과 나란히 걸렸다. 트로츠키, 카스트로, 체 게바라 사진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금지하는 것은 금지되었다'라는 구호와 함께 나란히 벽을 도배하였다. 소르본느의 이러한 사진들은 학생운동의 이데올로기적 혼란상태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15인 점거위원회가 5월 14일 선출되었으며, 위원회의 활동은 24시간으로 제 한되었다. 중앙 원형극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 정치토론으로 요동쳤다. 시험제 도는 '자본주의 사회에 편입되는 의식'으로 비판받았다. 3.22운동은 더 많은 노 동자의 자식들이 자본가가 되기보다는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구별이 철폐되 기를 바랬다.
혁명적 수집품
예술학교(Ecole de Beaux Arts)는 5월 14일에 점거되었다. 매일 아침 자유 주제로 집회가 열렸다. 그리고 나서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만든 포스터가 제작 되었다. 이 포스터들이 거의 즉각적으로 수집가들의 수집품목이 되어 부잣집에 서나 발견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아이러니이다.
포스터들은 '인류는 최후의 자본가가 최후의 관료와 함께 처형된 후에라야 자유롭게 살 수 있다', '1인 독재자에 반대하는 보편적 의지(The general will against the will of the general)', '상품은 인민의 아편이다' 등과 같은 슬로건 으로 뒤덮였다.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는 급진적 의사, 건축가, 작가들의 점거가 이어지고 있 었다. 1968년에는 장 뤽 고다르와 프랑스와 트뤼포가 전국적 파업을 지지하기 위해 영화제 홀을 장악하는 바람에 깐느 영화제까지도 중단되었다.
파업
5월 14일 낭트 근처, 남부항공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였다. 뒤이어 클레 옹, 플렝, 르 망, 불로뉴가 모두 파업에 들어갔다. 클레옹의 청년 노동자들은 작 업 교대시 공장을 벗어나길 거부하고서 경영진을 사무실에 감금하였다. 노조 지도부는 노동자들의 분위기에 눌려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남부항공 같은 곳에 서는 노조 간부의 자문없이도 무기한 파업을 결의하였다.
CGT지도부는 완전히 기습을 당했으나,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주도적으로 요구안을 제시하고 행동을 이끌었다. 노조 지도부는 짧은 시간이지만 주인을 지키는 개처럼 따라다녔다, 왜냐하면 이것이 노동자들에 대한 얼마간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 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5월 16일 몇 천명의 학생들이 35,000명의 노동자가 파업 중인 불로뉴 비이 앙꾸르로 몰려갔다. CGT 간부들은 교류를 저지하기 위해 공장출입문을 봉쇄하 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공장지붕에 올라가 환호성을 외쳤으며, 위험한 철제난 간에서까지 토론이 벌어졌다. 연대란 바로 이런 것이었으며, 소수가 가로막고 출입문을 봉쇄한다고 해서 막을 수는 없었다.
노르망디, 파리, 리옹의 공장은 집단적으로 사실상 문을 닫았다. 5월 18일 석탄생산이 중단되었고, 파리의 공공운송 또한 멈췄다. 전국철도가 뒤이어 파업 에 동참했다. 가스, 전기부문 노동자들도 직장을 장악했지만 가정용은 계속 공 급하였다. 만명이 일하고 있는 생 나제르 조선소에 적기가 내걸렸다. 5월 19일 주말에는 파업노동자가 이백만명, 122개 공장이 점거중이었다고 보고되었다.
파업의 물결이 프랑스를 휩쓸다
프랑스은행의 파업 가능성이 사람들을 패닉상태로 몰고감에 따라 예금인출 은 500프랑으로 제한되었다. 운송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자 석유비축분이 곧 바 닥을 드러냈다. 5월 20일 월요일 해협을 운항하는 여객선이 뜨지 않았으며, 여 행객들은 브뤼셀, 제노바, 바르셀로나로 가는 버스나 긴급수송차량을 타기 위해 줄지어 있었다.
포르투갈, 북부 아프리카, 유고 출신의 이민노동자들이 많은 시트로엥 공장 은 여전히 가동 중이었다. 5월 20일 아침 6시, 이민노동자들은 작업교대를 위해 공장으로 가는 길에 그들을 환영하는 학생들의 피켓시위을 만났다. 외국인 청 년 노동자들이 학생들의 리플렛을 보고 출근을 망성이고 있을 때, 인근 공장에 서 동료들의 시가행진이 들이닥쳤다. 시트로엥 공장도 그렇게 파업에 들어갔다.
5월 21일 금요일, 섬유산업과 파리의 대형백화점들도 눈덩이처럼 불어가는 총파업의 물결에 동참했다. 오를리 공항의 항공관제사와 프랑스TV(OPTF)는 이미 그 전날 목요일에 투표를 통해 파업에 돌입했다.
5월 20일 프랑스TV 스탭진은 다음과 같은 요구안을 제출했다.
1. 일주일 40시간 근무
2. 퇴직연령 하향조정
3. 1963년에 제정된 파업금지법 폐지
4. 최소임금 일주당 1000프랑 보장
5. 정부간섭 철회
교사들은 노조의 요청으로 학생들과 계속 만나기 위해 학교에 나갔지만 5월 22일에는 파업에 들어갔다.
지금은 죽기에 적당한 때가 아니다
2주간에 걸친 총파업에 9백만 이상의 노동자가 참여했다. 어떤 사람은 "수 요일에는 장의사까지도 파업했다. 지금은 죽기에 적당한 때가 아니다"라고 말 할 정도였다.
노동자들은 위대한 능력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가스와 전기부문 노동자들 은 파업에 동참했지만, 몇번의 짧은 공급중단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파리에서 식료품 공급은 초기엔 중단되었으나 정상으로 재개되었다. 체신노동자들은 긴 급전보를 배달하는데 동의했다.
인쇄노동자들은 TV와 라디오의 미디어 독점을 원하지 않았으며, 신문사가 '정보전달이라고 하는 본연의 역할을 객관성을 가지고 수행'하는 한에서 신문을 찍는데 동의했다. 일부에서는 신문을 인쇄하기 전에 헤드라인과 기사내용의 수 정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일은 대개 '르 피가로'나 '라 나시옹' 같은 우익 신문 에서 일어났다.
어떤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따라 생산이 이루어졌다. 브레스에 있 는 CSF공장에서 노동자들은 파업참가자들이나 시위자들 모두에게 중요한 워키 토키를 생산했다. 생 우엥의 왱더 건전지공장 파업위원회는 CGT의 개혁주의 노선에 찬성하지 않았으며, 노조관료들과 대화하려하기 보다는 관계를 끊기로 결정했다.
노동자 도시
1968년의 모든 운동과 사건들은 낭트에서 그 정점에 도달했다. 5월의 일주 일간 그 도시와 그 외곽지역을 노동자가 혼자 힘으로 통제하였다. 권력과 정권 의 낡은 바람막이들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과 도시를 장악하는 광경을 무기력 하게 방관하였다. 5월 24일 농민들이 노동자와 학생들간의 연대에 대해 항의함 에 따라 도시 둘레에 장애물이 설치되었다.
운송 노동자들이 도로 장애물을 차지하고 모든 진입차량을 통제했다. 가솔 린 공급도 통제를 받아 노동자들의 허락없이는 유조차가 들어 올 수 없었다. 유일하게 가동되는 가솔린 급유기는 의료용으로 확보되었다. 노동자와 농민은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음으로써 식료품 가격을 인하할 수 있었다. 80쌍띰므였던 우유가 이제는 50쌍띰므에 팔렸다. 토마토는 킬로당 48쌍띰므로 떨어졌다.
이같은 가격인하를 보증하기 위해, 가게는 파업위원회가 만든 스티커를 눈 에 잘 띄는 곳에 붙여야만 했다. 그 스티커에는 "이 가게는 영업을 허가 받았 습니다. 이곳의 가격은 조합에서 항상 감독하고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교 사와 학생은 탁아소를 차려서 휴교기간 중에 파업노동자의 아이들을 보살폈다. 여성들은 도시 곳곳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데, 파업에 참여하는 것뿐 아니라 식품공급을 담당하는 위원회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정말 너무도 짧았던 낭트에서의 일주일은 그렇게 상이한 조건에서도 노동자 들이 지역을 접수해서 사회주의 방식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최고의 본보기이 다. 사회를 다양한 방식으로 창조할 수 가능성은 낭트 한 곳에 그쳤으며, 불행 하게도 68년의 그날 이후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가 버렸다.
어르고 뺨때리기
정권유지에 두려움을 느끼며 사라져가는 권력을 무디게 관망하고 있던 드골 은 5월 24일 텔레비젼을 통해 전국에 연설을 하게 된다. 그는 '국민들의 보다 광범위한 시위참여와 그러한 행동으로 초래될 결과에 대해 보이고 있는 직접적 인 관심'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리고 나서 드골은 '개혁과 변화를 위한 조치' 로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같은 날, 3.22운동은 3만명이 바스띠유 궁까지 행진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경찰은 정부청사들(the Ministries)을 최루가스나 경찰을 동원하여 방어하였으 나, 증권거래소는 무방비상태로 방치되었다. 이즈음 도끼, 각목, 쇠파이프로 무 장한 다수의 시위대가 증권거래소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
일부 좌익그룹의 기가 꺽인 것도 이즈음이었다.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JCR (혁명적 공산주의청년단)은 시위대를 라텡 지구로 되돌렸다. 전국학생연합과 통 일사회당 같은 그룹은 재무부, 법무부 건물의 장악을 막고 나섰다. 콘-방디는 이 사건을 두고서, '우리(3.22운동)가 보기에, 이 모든 하찮은 것들을 쓸어버리 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만약 5월 25일에 파리의 가 장 중요한 정부청사들이 점거되었더라면, 드골 정권은 그 즉시 짜부라져 버렸 을텐데...'라고 말했다. 콘-방디는 그날 밤 이후 강제로 추방당했다.
이러한 점거로 3.22운동 소속의 학생들이 드골 체제를 붕괴시킬 수는 없었 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이 보여준 투쟁정신에 고무되었던 대다수 전투적 청 년노동자들의 의식은 고양시켰을 것이다. 학생들의 투쟁은 비록 혼란스러웠고 가지각색의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포괄하고 있었지만 시사하는 바가 컸다. 다이 너마이트가 있었고 학생 봉기는 그 도화선이었다.
정부청사로
정부청사를 점거했더라면 사회혁명을 향한 일보전진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파업 중인 1,200만 노동자 가운데 이전부터 조합과 관련있던 노동자는 단지 3 백만명 뿐이었다. 전국을 마비시켰던 총파업 과정에서 제출된 노동자들의 요구 는 노조 지도자들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였다.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시위의 물 결 속에서 노동자들의 기대치는 상승하였다.
정부청사를 점거했더라면 투쟁의 목적이 단지 자본가와의 경제적 협정만은 아니라는 인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행동이 취해졌더라면 노동자들을, 당시 관건은 체제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지 단지 그것을 어떻게 땜질할 것인가의 문제는 아니라는 깨달음으로 좀 더 접근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1968년에 목격했던 모든 봉기에서, 여론전의 승리를 획득하기 위하여 그리고 이러한 의식을 행동으로 촉발시켜 무엇을 획득할 수 있는지, 어떤 승리가 가능한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조직화된 그룹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학생운동이 만약 정부건물을 장악했더라면 이러한 방향으로 한 발자욱 나가 는 것이었으리라. 노동자들이 가두의 학생들이 벌인 투쟁에 고무되었다면, 전투 적 노동자들은 관청 점거에 힘을 얻을 수 있었을텐데. 그리고 자본가로부터 임 금인상말고도 더욱 많은 것을 쟁취할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더라면 프랑스를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었을 것이다.
종결
5월 27일 월요일, 정부는 최저임금 35%, 통상임금 10%의 인상을 보장했다. 이틀 후 CGT 지도부는 50만 노동자가 파리를 가로지르는 가두행진을 조직했 다. 파리는 '인민의 정부'를 요구하는 포스터로 뒤덮였다. 불행하게도 대다수 사 람들은 여전히 그들 스스로가 장악하려 나서기 보다는 지배자를 교체하려는 관 점에서 사고하고 있었다.
드골과 그의 충복들은 혁명의 가능성에 질겁해서 생 디지에 전투비행장으로 피신했으며, 육군참모총장과 협의를 통해 만약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육군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면 의지할 수 있을런지 타진하였다. 5월 30일 그는 다시 프랑스 텔레비젼에 나타나서 국민투표 계획을 철회하는 대신 40일 내의 총선거 를 약속했다.
드골은 상투적인 방식으로 만약 '학생들의 공부를 방해하고 노동자들이 일 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세력(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때문에 프랑스 국 민들이 정상생활을 하지 못하고 고생을 한다면', 더욱 강력한 조치를 강구하겠 다고 공언했다. 드골의 연설이 있고 나서, 공장에 남아있는 파업노동자들을 해 산하기 위해 CRS가 파견되었다.
6월 5일, 대부분의 파업이 끝나고 자본주의 내부에 평상시 같은 분위기가 다시 찾아들었다. 그날 이후까지 계속된 파업들은 무장차량과 화기가 동원된 군사작전으로 파괴되었다. 고립되어 벌이는 각개전투들은 이길 가능성이 없었 다.
일보직전에서 날아가 버린 승리
모든 거리시위가 금지되고, PCF는 잔존하고 있는 행동위원회를 파괴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체면을 차리려 하였다. 6월 말경 대학은 다시 문 을 열었고, 흑적기는 소르본느에서 끌어내려졌다.
사람들은 이러한 패배와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보수주의의 확실성으로 돌아 섰다. 총선거에서 드골은 투표의 60%를 획득했다. 권력 장악력은 다시 강화되 었다.
1968년 당시의 사회체제는 오늘날 대다수 서구 유럽국가에 복제되었다. 5월 소요기간 중에 그 체제는 격랑에 휘말렸고, 드골은 대중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해야 할 거라고 예측했었다. 그랬더라면, 거리는 5년후의 칠레처럼 유혈이 낭자했으리라.
콘-방디와 3.22운동은 지시자와 복종자 간의 노동분업이 사라진, 노동자평의 회에 기반한 무계급사회를 고무하였다. 그러나 명백하게도 미래사회에 대한 이 러한 비전은 다른 좌파와 공유되지 못했으며, 그들이 수행한 역할은 기존의 장 애물을 극복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많은 난관을 조성했다.
국가권력이 붕괴되어 가자 낭트의 경우처럼, 노동자계급이 직접 주도하여 도시를 제어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었다. 가장 활동적인 파업 노동자는 가장 진보적이었으며 노조 지도자들보다도 더욱 통찰력이 깊었다. 노 동자계급은 단순한 요구 이상으로 쟁취해야 할 것을 보여주었으며, 그러한 투 쟁으로 자본가와 맞섰다.
전면통제를 요구한 스탈린주의자
궁극적으로 68년 혁명은 왜 실패하였는가? 사태가 결정적인 국면에 이르렀 을 때 의견, 혹은 전술상의 협조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당한 영향력이 있던 PCF는 선거에서 자신들의 의석이 늘어나리라 믿었기 때문에, 그들이 통제하고 있지 못한 운동들에 대해서는 모두 적대적이었다. 노조 지도부는 노동자들의 관심을 '빵과 버터'에 국한시킴으로써 그들의 요구를 가라앉혔으며, 폭넓은 정 치적 이슈들로부터 멀어지도록 조장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열정을 가졌지만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풍부하게 사고하고 있지 못했다. 너무 많은 것들이 우연에 내맡겨졌고, 전체 운 동은 터널 끝에 존재할 것만 같은 자유의 횃불을 필사적으로 찾아나서는 눈먼 장님처럼 휘청거리는 듯 했다. 68년 반란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까? 우리는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가 민중들의 전체제에 대한 문제제기 속에 반 란의 격랑에 휘말리는 것을 보았다.
학생들의 기개와 대담함에 불이 붙은 노동자계급이 현체제의 한계 내에서는 수용될 수 없는 요구를 제기함에 따라 68년 사건은 매우 급속하게 전개되었다. 총파업은 노동자계급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아주 단호하게 보여주었다. 그러 나, 더 많은 협력과 조직이 필요하였다.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 간 연대조직의 건설과 대표자가 실질적인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메커니즘을 창조하길 원했 다.
타협에서 반란으로
반권위주의 좌파는 비록 매우 활동적이었지만, 파업 노동자들 가운데에서 너무나 미약했다. 파업 중인 여러 노동자들은 행동을 통일하여 국가를 무너뜨 리려 하였다. 프랑스는 이미 경제적으로 혼란에 휘말렸으며, 국가는 약화되어 가고 있었다. 노동자위원회와 작업장의 실질적 민주주의 덕분에 좀 더 강력하 게 협상에 임할 수 있었으며, 드디어는 전면적인 반란을 가능하게 하였다.
일단 공장이 자주관리 상태에 들어간다면, 국가는 패배하는 꼴이 된다. 앞서 설명한 바대로 자주관리안은 제출되지 못했다. 기층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관점 을 대변해줄 효과적인 민주주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원했다. 노조 지도부는 이를 두려워하여 교묘하게 회피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적으로 선출된 대표자 를 통해 공장위원회는 국가가 수용할 수 없는 요구사항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것은 '누가 프랑스를 책임져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자본가의 가 면을 벗길 기회가 왔을 때, 확실하게 잡아채야만 한다. 체제가 약점을 노출했을 때, 그것을 파괴하고 대체해야만 한다. 그것은 단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위한 길이다.
더모트 스리넌(Dermot Sree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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