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가 日류큐왕국 기초 세웠다. [동아일보] 2007년 07월 18일(수) “고려 삼별초(三別抄)가 만들었던 기와 한 장이 일본 오키나와(沖繩) 류큐(琉球) 왕국의 건국 비밀을 밝혀냈다. 그 건국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들은 바로 삼별초 군대였다.” 12세기까지 신석기시대의 생활 문화 수준에 머물다 15세기 처음으로 국가를 세워 16세기까지 번영을 누린 뒤 19세기 말 일본에 복속된 류큐 왕국. 고려 무신정권의 군대였던 삼별초가 류큐 왕국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새로운 지적이 나왔다. 국립제주박물관은 최근 오키나와 현 교육위원회와 함께 ‘탐라와 유구 왕국’ 특별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같이 확인했다. 이는 국내와 일본 학계에서 처음 제기된 것이어서 앞으로 고려와 류큐 왕국의 교류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연구 성과는 이번 특별전에 출품되는 오키나와 출토 기와를 국내의 고려 기와와 비교 검토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오키나와에서는 최근 ‘계유년고려와장조(癸酉年高麗瓦匠造)’라는 글이 새겨진 암키와 여러 점이 발굴됐다. 명문 내용은 ‘계유년에 고려 기와 장인이 만들었다’는 뜻.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계유년은 1153, 1213, 1273, 1333년 등이다. 하지만 일본 고고학자들은 고려의 기와 장인들이 어떻게 오키나와의 류큐 열도에 넘어와 이 기와를 만들었는지, 어느 계유년인지를 결론 내리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명문 속의 계유년이 1273년임을 확인했다. 그 단서는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13, 14세기 연꽃무늬 수막새 기와와 전남 진도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13세기 수막새 기와. 진도 용장산성은 몽골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 삼별초군이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던곳. 용장산성에서 나온 기와는 삼별초 군의 기와 장인들이 만든 것으로, 오키나와 기와와 제작 기법이나 형태가 동일 계통인 것으로 확인됐다. 손명조 제주박물관장은 “1271년 와해된 삼별초군이 진도를 떠나 오키나와로 건너가 연꽃무늬 수막새 기와를 만들었으며 2년 뒤인 1273년에 계유년 암키와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사토 스스무(安里進) 오키나와현립예술대 교수도 “1273년에 고려 기와 장인들이 기와를 만들어 대형 건물을 지었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삼별초의 대형 건축 공사 참여는 13세기 류큐 열도의 정황으로 보아 큰 의미를 지닌다. 류큐 열도는 12세기까지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신석기시대에 머물렀다. 조개를 먹고 조개껍데기로 생활 도구와 장신구를 만드는 수준이었기에 이때까지의 류큐를 패총(貝塚)시대라고 부른다. 13세기엔 비로소 농경이 본격화되고 인구가 급증하면서 집단 세력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손 관장은 “삼별초의 대형 건축 공사 참여는 제대로 된 건축물을 통해 류큐인들에게 세력의 집단화와 공동체의 의미를 전파한 것으로, 류큐인이 왕국을 건설하는 데 삼별초가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 같은 견해는 이번 전시에 함께 참여한 일본 고고학계도 인정하고 있다. 아사토 교수는 21일 오후 4시 제주박물관에서 이러한 내용을 담아 ‘류큐 왕국의 역사와 문화’란 주제로 강연할 계획이다. 한편, 이번 전시엔 각종 기와를 비롯해 삼채(三彩) 항아리, 자기 촛대, 자기 풍로(이상 일본 국보), 류큐 국왕의 모자, 류큐 사신 행렬도, 칠기, 시신의 뼈를 추려 넣는 장골기(藏骨器) 등 류큐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중국 한국과의 교류상을 보여 주는 유물 240여 점이 전시된다. 전시는 8월 26일까지. 064-720-8100 제주=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오키나와 기와에서 발견된 고려의 흔적, 삼별초의 멸망 기록에 의문 던져
▣ 제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삼별초. 800여 년 전 몽골제국에 끝까지 저항했던 고려의 무장 사병 집단. 국내 빨치산의 원조라고도 농처럼 이야기되는 이 사병 집단은 지금도 한국인에게 민족주의 전사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1260년 원나라의 압력에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려는 고려 조정에 맞서 그들은 남도의 진도로, 제주도로 옮겨가며 3년간 전투를 펼쳤다. 처절한 대몽골 항쟁을 거듭했지만, <고려사> 등의 사서는 배중손이 이끄는 진도의 삼별초군이 1년여 뒤인 1271년 쳐들어온 고려 정부군과 몽골 연합군에 진압됐고, 제주로 도망친 김통정의 잔여세력도 2년 뒤 소탕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말 기록대로 삼별초는 그 뒤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유난히 뜨거웠던 올여름 국립제주박물관(관장 손명조)에서는 기존 사서의 삼별초 멸망 기록에 정면으로 의문을 던지는 사료들이 발굴됐다.
“찾았어요. 같은 기와예요!”
“찾았어요. 연잎 무늬도 배치한 모양새도 똑같습니다. 같은 기와예요!” 지난 6월 초 어느 날 오키나와 해양유물 특별전 <탐라와 유구왕국>(7월17일~8월26일)을 준비하던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실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오연숙 학예사와 민병찬 학예실장은 눈앞에 나란히 놓은 수막새 기와 두쪽에 번갈아 눈길을 돌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키나와에서 빌려온 출토품인 옛 기와 수막새가 이 박물관이 소장한 전남 진도 용장성 출토품인 13세기 고려시대 기와와 거의 똑같다는 사실을 막 확인한 것이다. 오키나와를 지배한 옛 유구(류큐)왕국의 수도 슈리성과 우라소에라는 곳에서 나온 기와들은 막새의 한가운데 둥근 씨방을 두고 주위로 아홉 개의 연꽃잎을 돋을새김하고 다시 바깥에 연속점무늬(연주문)로 테두리를 두른 고려계 기와였다. 용장성의 기와도 연꽃잎, 연주문 무늬 등의 배치가 똑같으나 다만 꽃잎 수가 여덟 개(팔엽연화문)로 하나 적을 뿐이다. 용장성? 삼별초가 고려 조정과 몽골제국과 항전하기 위해 진도에 쌓은 천혜의 요새다. 이곳의 건물터 기와가 왜 수천 리 푸른 바다를 건너 남쪽의 이국땅 섬 곳곳에서 무더기로 나온 것일까. 삼별초 군사들이 망망대해를 넘어 오키나와까지 흘러들어간 것인가? 민 실장은 지난 8월21일 특별전 기념강연을 한 일본 현지 학자 아사토 쓰쓰무(오키나와 현립예술대 교수)에게 앞서 이 사실을 귀띔했다. 용장성 기와를 본 아사토는 놀란 기색이 뚜렷했다. 오키나와에서 나온 수수께끼 고려계 기와들의 주인공은 13세기 삼별초 세력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고 그는 단언했다는 게 박물관 쪽의 전언이다. 오키나와 기와와 모양이 비슷한 비교품을 찾으려고 소장품을 뒤졌다가 거둔 뜻밖의 수확이었다.
‘계유년 고려의 기와장인이 만들었다’
우리에겐 생소해도,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700~800여 년 전의 고려계 기와들이 삼별초 세력의 것이라는 추정은 일본 학계에서 새삼스러운 가설은 아니다. 수십 년 전부터 오키나와 열도 곳곳에서 일본 본토, 중국계와 전혀 다른 문양과 형태를 지녔고 시기도 훨씬 앞서는 고려계 수막새, 암막새가 잇따라 성터 왕릉지에서 출토됐다. 현지 학자들은 수십 년째 이 기와를 만든 주체와 시기를 놓고 논란을 계속해왔다.
이 과정에서 가장 주목된 유물이 특별전에도 선보인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癸酉年高麗匠人瓦匠造)란 글씨가 새겨진 암키와다. 사다리꼴 모양에 물고기 뼈대 모양 무늬가 함께 새겨진 이 대형 기와의 명문은 ‘계유년 고려의 기와장인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옛 유구국 임금의 무덤 속 건물에 쓰였던 이 기와 명문에 고려 장인임을 떳떳이 알린 것으로 봐서 고려 장인의 정치적 지위와 긍지가 대단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계유년’의 구체적인 시기가 언제인지다. 고려 장인이 언제 오키나와에 진출했는지를 알려주는 징표가 되기 때문이다. 정황상 기와의 계유년에 맞출 수 있는 고려의 연대는 1153년, 1273년, 1333년, 1393년이다. 가장 유력한 것은 삼별초가 멸망한 1273년과 조선왕조 건국 직후인 1393년이다. 1273년설은 제주도에서 탈출한 삼별초 선단들이 상당수 오키나와에 표착해 세력을 형성했다는 추정이다. 제주도에서 해류를 타면 갈 수 있는 곳은 규슈와 오키나와 정도이기 때문이다. 정작 일본에서는 1393년설이 유력했다. <고려사>를 보면 오키나와의 첫 교류가 고려 우왕 때인 1389년 유구국 사절을 파견한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 멸망 직전 공식 교류가 시작됐다고 봐야 하므로 양질의 고려 기와를 만드는 고급 기술자 파견은 이런 공식 교류 이후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려 조정의 공식 기술자 파견이나 고려 멸망 뒤 상당수 유민이 정착하면서 생긴 결과물이라는 논지다. 하지만 진도 용장성 수막새 기와의 등장은 1273년설에 더 힘을 실어주게 됐다. 오키나와 출토 수막새가 용장성터의 것과 같은 반면, 중국이나 일본 본토계 기와에서는 이런 유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별초 세력 일부가 곧장 진도에서 오키나와로 흘러들어갈 수 있을까. 동서로 1천km에 달하는 오키나와 열도는 제주도 남쪽으로 평균 780~800km나 떨어져 있다. 하지만 유속이 빠른 해류를 타면 보통 열흘에서 보름, 빠르면 일주일 안에 제주에서 오키나와에 도달한다고 한다. 나름대로 도항 준비를 치밀하게 한다면 상당히 많은 인원이 이동할 수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제주~류큐열도 사이 무수한 표류민 송환 기록이 실려 있고, 드물게 진도에 표류해온 유구국 사람들을 중국으로 보내 현지 유구국 사절에 넘겼다는 기록도 전한다. 게다가 진도를 빠져나와 2년간 더 항전한 김통정의 잔여 세력이 항거했던 제주도 항파두리성은 여지껏 제대로 된 발굴이 이뤄진 적이 없다. 발굴 결과에 따라 제주에서도 오키나와의 고려계 기와가 나올 가능성은 있다.
한을 품고 제주에서 배를 탔을까
흥미로운 것은 삼별초가 역사에서 사라진 13세기부터 오키나와인들은 지역 세력가들이 구스쿠라는 큰 성을 쌓고 경쟁하면서 본격적인 국가체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인구도 적은 조그만 섬에서 곳곳에 거성을 쌓고 경쟁했다는 점은 성 쌓는 기술인 축성술과 전쟁 기술에 능한 외부 세력의 조력 없이는 쉽지 않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오키나와에서는 다량의 고려청자 조각들도 출토되는데, 도식화한 장식과 탁한 빛깔을 보이는 청자들은 출토된 명문 기와의 시기보다 늦은 14세기 쇠퇴기 청자들이다. 또 하나는 ‘대천’(大天)이란 글자가 쓰인 다른 고려계 암수키와의 존재다. 이 기와는 오키나와는 물론 제주도의 제주목 관아터 등에서도 똑같은 것들이 나왔다. 제주목이 조선초의 시설임을 감안하면 시기를 14세기 말에서 15세기까지도 늦출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두 가지 연대에 출토 기와의 시기가 걸칠 수 있어 좀더 정밀한 고고, 문헌 검토가 필요한 셈이다. 경위야 어찌됐건 오키나와에서 삼별초의 흔적이 더욱 확실해진다면, 우리 역사에서는 극적인 엑소더스의 장면이 추가될 것이다. 삼별초 군사들은 몽골군의 압도적 전력에 숱한 동료와 처자를 잃고 분노와 한을 품고서 진도 혹은 제주 해안가에서 푸른 바다 너머로 배를 타고 갔을 법하다. 유구왕국의 역사 시대는 800여 년 전부터다. 7세기 중국의 <수서>에 유구가 조공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사서에 나오는 왕조의 정사는 13세기 이후부터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관건은 고려의 해양 교류사를 어떻게 동아시아 역사 틀에서 보느냐 하는 점이다. 학계 관계자들은 국내에 이런 화두를 연구할 전문인력이 거의 축적돼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와 제작 기술, 삼별초 역사는 물론 당대 오키나와의 정치·경제·사회사도 차분히 섭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조언이다. 윤용혁 교수는 “삼별초가 갔나 안 갔나 식으로 단순히 민족주의적 화두로 접근하면 안 된다. 중세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맥락에서 고려와 오키나와의 교류관계를 결부해 보는 관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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