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를 넘어서>를 읽고 |
한국교회 십일조관에 대한 신학적 논의에 활기 기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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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0년 10월 29일 (일) |
성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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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계 내에서는 쉽게 거론할 수 없는 문제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십일조 문제다. 한국 기독교 역사상 교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심각하게 다루어진 적은 전혀 없지만, 마치 기독교신앙을 떠받드는 영구불변의 교리나 신념처럼 자리를 잡고 요지부동인 것이 또한 십일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 속에서 조누가씨의 <십일조를 넘어서>(이하 <십일조>)는 한국교회의 오래되고 잘못된 관행을 깨고 교회개혁이라는 새 바람을 불어넣을 만한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하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실상 <십일조>가 '잘' 팔려나간 것에 비해, 그 효과나 반응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미미하다는 점은 불가해한 면이 있다.
이 책은 학구적인 책은 아니나, 논쟁의 여지가 많고 혼란스러운 주제를 역사적으로, 그리고 주석적으로, 성경신학적인 측면에서 차분하고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이 쉽게 생각하고 읽을 만한 책은 아니다. 그의 주장과 전개는 아주 진지하고 도전적이고 심지어는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저자는 한국교회의 십일조를 신앙의 자발적인 헌신의 모습으로 보지 않고 물신주의(mammonism)로 정의한다. 한국교회의 십일조 관행은 성경에 기초를 둔 것도 아닐 뿐더러, 지켜야 할 아무런 의무나 의미도 없는 것이며, 오히려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을 율법주의의 족쇄와 올무에 걸리게 할 뿐이며, 바른 연보관과 교회관도 갖기 못하게 한다고 본다.
이제 그의 책을 펼치고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본서는 총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서론격으로 십일조의 유래와 거기에 관련된 문제점들(1장)을 다룬다. 여기서는 간단한 문제제기와 함께 고대근동에서의 비히브리적 십일조의 관행과 조세로서의 종교적, 정치적 기원과 의의를 다루고 심리학적, 성경적 기원에 관한 문제도 논의를 한다.
1장의 성경의 유래부분(pp. 22ff.)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성경상의 십일조 구절들을 조목조목 논리정연하게 다루어서 기존의 십일조 관행에 관한 주장들을 논박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의 논증은 창세기 첫부분의 아벨과 가인의 제사 문제에서 비롯된다.
지금까지 모세 이전 시대의 십일조 관행을 살펴본 후로는, 토지소산과 가축의 1/10을 십일조로 바치게 된 근거(2장)와 십일조가 음식에 국한된 이유(3장)에서 모세의 율법 내에서의 십일조 규정의 개념과 의의를 다룬다.
4장과 5장에서 저자는 주로 포로 이후 시대 즉 에스라-느헤미야시대와 말라기시대의 십일조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5장부터 7장까지는 구약과의 연관 속에서 저자가 복음서에 나와 있는 바리새인들과의 대화에서 언급된 예수의 십일조 언급으로 전환한다.
8장에서는 교회사적인 연구가 나온다. 저자는 바리새인들과 랍비들에 의해서 오해되고 왜곡되기 시작한 십일조에 대한 이해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가를 세계교회사적인 측면으로 조목조목 다루고 있다. 역사적 고찰은 주로 제임즈 헤이스팅즈(James Hastings)가 편집한 <종교와 윤리대백과사전>(Encyclopedia of Religion and Ethics)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 초대교회에서 도입된 후 십일조법이 확대되고 왜곡되었다는 면에서는 이미 우리는 세계교회사에서 그 증거와 선례를 발견하게 된다는 점은 이러한 역사적 탐구가 주는 생생한 교훈일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교훈은 역사 속에서 수차례 어김없이 교회들이(건물로서) 거대화되면서 즉각적으로 채용하게 되는 것이 십일조법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십일조법의 도입에 있어서 개신교가 카톨릭교회화하고 십일조법의 폐기에 있어서 카톨릭교회가 오히려 개신교의 정신을 되살리고 있다고 한탄한다.
저자는 9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신약적인 측면에서 십일조법의 모순성과 폐지된 증거들을 다루며 작금의 십일조법에 대한 대안으로서, 감사한 마음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연보의 원칙(12장)을 논의하면서 본 책을 마친다. 9장은 모든 소득의 십일조(all tithes)의 모호성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성경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못한 것이다.
10장과 11장에서 저자는 신약의 증거들을 더 살펴보면서 십일조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초의 공의회에서도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없을 뿐더러, 바울의 교훈와 그 어디에서도 십일조를 강조하는 구절이 없다는 것은 신약시대에 특별히 이방인출신 기독교인들에게 십일조의 시대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저자는 제사장과 성전이 없어진 마당에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저자는 한국교회가 십일조에 목맬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연보(捐補)의 패러다임(paradigm)을 만들고 실천하는데 몰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서가 지니는 참신성, 개혁성, 그리고 전문성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아쉬운 점들이 있다. 우선은 구성에 있어서 필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부분들(한국교회에서의 십일조법의 기원과 발전과정이라든지, 모세율법에서의 십일조 규정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주석적 논의라든지)이 간과되어 있다든지, (특정한 부분들만을 상대적으로 많이 다루고 또 다른 부분은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든지하는 면) 논리전개에 있어서 좀 느슨하고 방만한 점이 보인다. 또한 옥에 티로 십일조를 마하세르(원래 마아세르[maaser]다)라고 읽는다든지, 말라기 3장 9절의 온 백성(고이; goy)을 '교'라고 음역하는 사소한 실수도 보인다.
마지막으로는, 십일조의 유효성에 대한 논의에서, 필자는 십일조의 규정의 유용성은 제사장과 성전의 존재유무와는 상관이 없이 지속될 수 있다고 보는 점(조누가씨와)에서는, 또 고아와 과부와 객을 위한 십일조가 구제의 그것이 아니라 언약공동체 내에서의 교제의 수단(means of fellowship)이라고 이해하는 점에서는 다른 분들과 견해가 다르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 내재해 있는 이러저러한 약점들과 서평자와의 이견들, 그리고 사소한 실수들은 결코 조누가씨의 <십일조>로 인해서 제기된, 개혁적인 주장과 선구자적인 노력을 반감시키기보다는 더욱 빛나게 해주는 것들이며, 아울러 한국교회의 헌금관에 대한 재고와 십일조에 대한 신학적 논의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하였고 또 조만간 할 것이라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본서가 제기한 십일조에 대한 문제점들에 대한 한국교회 내의 전반적인 침묵과 무관심은 반드시 추방하고 조속히 깨뜨려야 할 문제거리라고 생각하며,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기독교인들이라면 본서를 반드시 일독할 것을 권한다. |
글 위치/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