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29주년이 되는 아침.
조중동 신문을 보는 심정은 너무나도 처참하다. 특히 조선일보는 지켜보기조차 괴롭다. 조선일보는 29년이 흐른 지금도 29년 전과 조금도, 한치도 변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눈 앞의 지면을 통해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과정은 참담할 따름이다. 박종태 화물연대 광주지회장이, 대한통운 택배 노동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이른바 '특수고용직'이라 불리는 화물노동자들의 처지가 다시 한 번 사회적 논란으로 떠올랐다.
한 두번이 아니다. 노동삼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화주나 대형운송회사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는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비인간적 노동환경이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된 것은 한두번이 아니다. 파업도 하고, 투쟁도 하고, 협상도 하고, 타협도 이뤄졌다. 하지만 그동안 달라진 것은 없고, 사람이 죽어나간 뒤에야 세상은 좀 있음 다시 사그라질 관심을 가질 뿐이다. 그나마 조중동은 사람이 죽어도 못본 체 했다. 그러다, 화물연대가 조중동 신문 1면을 장식했다. 5.18 29주년이 되는 날이다.
조선일보는 <죽창, 3년8개월만에 또 등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1면 머릿기사로 걸었다.
'죽창'이라...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동학농민군이라도 된단 말일까. 농민들의 피와 땀을 수탈한 지주놈들의 배때기에 꽂아 넣었던 죽창을 정녕 손에 들었단 말일까. 조선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16일 오후 6시30분쯤 대전동부경찰서 인근 도로는 '죽창'이 등장하면서 전쟁터로 변했다."
"시위대는 죽봉에서 '생존권 쟁취' 'MB정권 심판' 등의 글이 적힌 검은색 천을 떼어낸 뒤 바닥에 내려치기 시작했다. 죽봉은 끝이 날카롭게 갈라지면서 '죽창'으로 변했다."
개념을 분명히 하자.
노동자들이 든 '도구'는 '만장용 대나무 막대기'였다. 만장을 떼어내면 그냥 '대나무 막대기'다. '대나무 막대기'라고 표현하는 게 불편하면 줄여서 '죽봉'이라고 부를 수는 있다. 하지만 '죽창'이라니?
조선일보 기사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죽창'이 3년8개월만에 다시 등장했다고 한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투쟁 때 등장한 '죽봉'을 두고 조중동과 경찰은 '죽창'이라고 불러 재미를 봤다. 이번에도 조중동과 경찰은 그렇게 다시 재미를 보려고 하고 있다.
2009년 5월 18일 중앙일보 1면 기사. '죽창' 1000개가 제목
조선일보가 1면에 내건 사진만 봐도 노동자들이 든게 과연 '죽창'인지 '대나무 막대기'인지는 한눈에 들어온다. 그 어디에도 끝이 날카롭게 잘려나간 '죽창'을 볼 수 없다. 심지어 '바닥에 내리쳐 끝이 날카롭게 갈라진 죽창'도 확인이 안된다. 조선일보는 큼지막한 볼드체의 '죽창'이란 단어를 전면에 내세워 사진속 노동자들이 든 물건을 '죽창'으로 인식하게끔 만드는 세뇌작업까지 서슴치 않고 있는 셈이다.
고인이 된 미술가 구본주의 작품 '갑오농민전쟁'. 죽창을 든 갑오농민군의 모습이다. 저 정도가 되어야 죽창이라 불러야 하는 것 아닐까. 조선일보는 29년 전에도 이런 짓을 서슴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광주에서 피의 학살이 자행될 때도 계엄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한 광주의 진실을 외면하고, 광주시민을 '폭도'로, '무법자'로, '난동자'로, '불순분자'의 선동에 휘둘린 분별력 없는 사람들로 몰았다.
1980년 5월 25일 조선일보. 제목은 '무정부 상태 광주 1주', 부제는 '바리케이드 너머 텅빈 거리엔 불안감만'이다. 이 기사는 김대중 기자가 썼다.
지금 조선일보 고문으로 있는 김대중이 쓴 1980년 5월 25일 <바리케이드 너머 텅빈 거리엔 불안감만/「무정부 상태 광주」1주>는 “쓰러진 전주, 각목, 벽돌 등으로 쳐진 바리케이드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며 광주시민을 ‘난동자’로 표현했다.또 같은 날 사설에서는 “(남파 간첩들이) 민심을 흉흉케 함으로써 사태를 격화시켰으리라는 것도 십분 짐작이 가기도 한다”며 “피 흘림을 보고, 불길이 솟고 군중의 격앙된 심리상태에서 이성을 잃게 되면 냉철한 판단력이 요구되는 분별력이 없는 법이다”고 주장해 광주항쟁을 이성을 잃은 사람들의 분별없는 난동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전남도청이 진압된 뒤 5월 28일 조선일보 1면
(관련글 : "광주 비극 전하려 애썼다"는 조선일보를 보고)
그리고, 계엄군이 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을 학살하고 광주를 완전히 제압한 뒤 조선일보는 "새벽 3시 30분 군병력 투입을 개시, 1시간 40분 만인 5시 10분 광주시내 일원을 완전 장악하는 데 성공했으며, 군 투입과정에서 무장저항하던 폭도 17명을 사살하고 2백95명을 체포, 보호 중"이라는 계엄군의 발표를 그대로 인용해 '광주시민'을 '폭도'로 규정했다. "시위대가 '죽창'을 사용해 격렬한 시위를 벌인 것은 2005년 6월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시위와 같은 해 9월 인천 맥아더 동상 철거 시위 이후 처음"이라는 '경찰청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하기에 급급한 지금과 똑같다.
29년 전, 조선일보는 공수부대의 만행에 의해 얼마나 많은 광주시민들이 무참히 죽어갔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29년이 지난 지금 집회가 끝나고 식당에서 밥 먹는 노동자들까지 잡아가는 등 경찰의 무차별 폭력진압에 의해 무려 457명 연행되고, 피흘리는 부상자가 속출했던 화물연대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29년 전 광주에 대해서 그랬듯 계엄 상태나 다름없었던 5월 16일 대전의 상황을 조선일보는 오로지 외눈으로만 바라보고 있다.
2009년 5월 16일 대전. 진압봉으로 노동자들을 후려 갈기고 마구잡이로 연행하는 등 무차별 폭력진압을 자행한 경찰 강산이 세번 바뀔 시간이지만, 조금도 변하지 않은 조선일보. 하지만 오히려 29년 전보다 힘이 더 강해져 여론을 좌지우지하고 권력을 움직이는 조선일보. 그리고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댓글들 가운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냐'는 '항의'성 글들이 몇 건 있어, 그날 상황을 언론보도를 인용해 소개합니다. 다만 제가 현장에 없어 소개하는 기사가 100%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특히 지금 소개하는 기사는 노동자들의 편에 서 있는 언론의 기사로 '편향됐다'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조중동에서는 볼수 없는, 그리고 5월 16일 상황과 관련해 모든 언론 가운데 그나마 현장 상황을 가장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민주노총 쪽에서 5월 16일 상황을 바라보는 평가도 소개하지요.
(전략..)
이날 경찰의 작전은 '대한통운까지 유인해 때려잡기'인 것처럼 보였다. 실제 경찰들은 이날 화물연대 조합원 등을 선두로 한 1만여명의 집회 참가자들이 대한통운까지 행진할 때까지 별로 막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후략)
-관련기사 링크 : 연행자 수 460명 넘어.."경찰이 미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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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임성규 위원장은 "유태열 대전경찰청장은 청장 자격이 없는 비열한 사람"이라고 맹비난하며 16일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중략)
민주노총은 "노동자 민중대회에선 무려 486명에 이르는 참가자들이 연행됐고, 부상자만 100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조합원 A씨는 전경에 둘러싸여 곤봉으로 집단구타를 당해 어깨탈골, 발목이 부러져 입원 치료 중이며, 조합원 B씨는 곤봉에 가슴을 가격당해 갈비뼈가 부러져 입원치료 중이다. 조합원 C씨는 방패에 가격당한 머리가 찢어져 봉합수술을 받았고, 조합원 D씨는 고막이 손상됐다. 조합원 E씨는 턱뼈에 금이 가는 등 전치 6주의 부상을 당했다.
(...후략)
-관련기사 링크 : 민주노총 "5.16 연행사태..경찰의 기획폭력·함정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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