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도' 노조가 있습니다. 언론자유가 뿌리째 뽑힐 위기에 처해 있는 시국, 비록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노조지만, 있기는 있습니다. 물음표가 생깁니다. 원래 <조선일보> 노조는 이랬던 것일까요?
갑자기 <조선일보> 노조를 이야기하는 이유, 있습니다. 조선일보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 날이 바로 5월 15일이기 때문입니다. 1989년이었습니다. 조선일보 노조가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 내용은 이랬습니다.
하나, 회사는 3.6 운동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을 위한 정당한 투쟁이었음과 32명의 기자들을 해고한 회사측의 조치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하라.
두울, 회사는 이같은 사실을 본지에 게재, 조선일보 독자는 물론 전 국민들에게 3.6 운동의 진실을 공표하라.
세엣, 회사는 당시 해직된 기자들에 대한 물질적 배상과 함께 원상회복 조치를 취하라.

송건호와 신홍범의 포옹. 두 사람 모두 조선일보 기자로 일했었다 Photo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5.15 선언입니다. 일단 3.6 운동이 무엇인지부터 잠깐 소개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1975년이었습니다. <동아일보>가 광고탄압 사태를 겪고 있을 때, 조선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를 지키기 위해 경영진과 맞섰던 사건입니다. 그 결과 결국 32명의 기자들이 조선일보를 떠납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조선투위'였습니다. 그들에 대한 물질적 배상과 원상회복 조치, 공개 사과 등이 1989년 조선일보 노조의 요구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일보 노조는 분명히 밝힙니다. "회사가 이런 요구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에 돌입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실제 그랬습니다. 5.15 선언과 집행부의 신임을 연계하여 조합원 투표를 실시합니다. 조합원의 80.9%가 당시 노조를 지지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회사 내부에서도 얼마나 정당한 '싸움'으로 인정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51일 철야농성' '5일 단식농성'이 이어집니다.
어쩌면 그 때가 조선일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언론자유와 '사주자유'가 그나마 균형을 이룰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허나 그 기회는 '어설픈' 합의로 날아가고 맙니다. 파업 돌입 직전, "조선일보사는 1975년 발생한 3.6 문제를 1989년 5월 15일 노조가 제시한 원칙을 바탕으로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고 합의한 것입니다.

정태기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 역시 조선투위로 활동했다 Photo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조선투위 황헌식 위원장과 조선일보 김대중 편집국장이 대화를 시작합니다만, 다음해인 1990년 창간기념일을 고비로 사측은 일방적으로 대화를 중단합니다. 언론계에서는 당시 합의에 대해 조선일보 노조가 사측에 '당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이 합의문은 사실 3.6 운동을 '3.6 문제'로 표기한 것은 물론 아무런 구체적 내용도 없었다는 점에서 사쪽의 노회한 협상 전략에 노조가 말려든 것이다. 그 후 사측의 3.6 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 노조 활동이 급격하게 퇴조했다는 점에서도 이는 입증된다."
그래서 당시 노측 대표가 누구였는지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대중 편집국장과 '어설픈 합의'를 한 주인공은 바로 김효재 초대 노조위원장(당시 사회부 기자)이었습니다. 그 다음 이력을 살펴보니, 그다지 '찍힌' 것 같지 않네요.
1992년 사회부 차장 대우, 1996년 사회부 차장, 1997년 국제부 부장 대우, 1999년 기획취재부 부장, 2000년 편집국 부국장 대우, 2004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일광 대표이사 사장). 비교적 순탄한 승진 가도를 달렸다고 할 수 있겠지요. '월담'도 합니다. 2007년 이명박 후보 경선 선거대책위 언론특보단, 18대 총선을 거쳐 한나라당 국회의원(성북 을)이 되지요.

김효재 의원 Photo 김효재 의원 홈페이지
이상이 조선일보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51일 농성 투쟁'을 주도한 노조위원장 출신 '김효재'의 화려한 이력입니다. 그리고 국회에서는 미디어 '악법'의 조속한 처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중 언론사 겸영을 금지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라고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말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다시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고스란히 '확대재생산' 됐지요. '언론자유'의 선봉에 섰던 이가 '조선일보 자유'의 전도사로 완전히 변신한 셈입니다. '조선일보 자유',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의 자서전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조선일보의 원칙'입니다.
"3.6 사태는 언론자유에 대한 열망이 쌓이고 쌓여 폭발한 것으로 한 번쯤은 겪어야 할 시대적 숙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언론자유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기자들이 스스로 신문제작을 거부해서 신문사가 문을 닫으면 남는 게 무엇이겠는가. 언론자유가 중요할수록 어떤 경우에도 신문은 나와야 하고, 또한 언론자유를 지켜줄 수 있는 재정독립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3.6사태의 쓰라린 교훈으로 간직하고 있다."
조선일보 노조의 역사적인 5.15 선언이 왜 어설픈 합의로 끝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언론자유'보다 '조선일보 자유'가 먼저라는 '그들만의 원칙'에 합의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조선일보 '초대노조위원장'이 찍힐 리 없었던 것이고, 화려한 변신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조선일보 노조가 '식물노조'로 변태를 시작한 출발점에 '5.15 선언'이 있다는 것은 그래서 역설적입니다.

한겨레신문 창간호 Photo 한겨레
붙임. 마침 5월 15일은 <한겨레> 창간 기념일이기도 했습니다. '사주자유'에 맞서 '언론자유'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 모여 만든 신문이 <한겨레>입니다. 그 중에는 정태기, 성한표 등 조선투위 출신들도 있습니다. '그 신문사'는 2009년 창간 기념 사설을 통해 이렇게 밝힙니다.
"인간적 가치가 꽃피는 행복한 공동체를 향한 헌신과 희생의 다짐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는 이 시대의 모순을 짊어진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소모품이 돼버린 비정규직, 꿈을 빼앗긴 청년들, 경계 밖으로 내몰린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 이들이야말로 그 모순을 극복하고 공동체를 한 단계 성숙시킬 수 있는 주체다."
<조선일보> 창간일이었던 지난 3월 5일, 조선일보 사설에서는 볼 수 없는 '다짐'입니다. 창간특집은 넘쳐났지만, 이같은 '다짐'은 없었습니다. 이런 사설만 눈에 띕니다. "MBC 불량방송 최종 심판은 소비자가 내려야". 한편, 답답합니다. 이 정도면 눈치 챌 수 있지 않을까요. 서민들을 조금이라도 더 생각하는 신문이 어떤 신문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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