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증거> 1914년, KOREA가 아니라 COREA 였습니다...일본놈들이...

YOROKOBI 2009. 5. 20. 07:43

 

 

<증거> 1914년, KOREA가 아니라 COREA 였습니다...

           쥐새끼 명바기의 일본놈들이 COREA를 KOREA로 만들었습니다

           JAPAN 보다 뒤로...A B C D E F G H I J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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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겟꾼 그림엽서
기다랗고 무거운 짐을 지겟꾼 두 명이 같이 지는 그림이 정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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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엽서 이야기 <24> 일제시대 민초들의 생활상 2
송광호 칼럼 <24> 일제시대 민초들의 생활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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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호 칼럼 <24> 일제시대 민초들의 생활상 2

이번 칼럼에서는 지난 번에 미처 다 보여드리지 못한 일제시대 우리 선조들의 다양한 생활상이 담긴 엽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소개하는 엽서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제시대에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많은 엽서들이 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엽서 제작 열풍은 비단 일본뿐만이 아니었고 극심한 사회변동을 겪던 20세기 초의 세계적 추세였다고 합니다. 사진 문화가 발명되어 빠른 속도로 발전되어가던 시기였던 만큼 당시의 급변하는 생활상을 영원히 기록해두기 위함이었겠지요.
게다가 조선에서 발행된 엽서는 거의 대다수가 일본인들에 의해 촬영되고 제작된 엽서이기 때문에 조선의 객관적인 생활상이 찍힌 모습뿐만 아니라 때론 조롱거리로 삼기위해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이 또한 당시 조선 사회의 객관적인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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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생학교 소녀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조선의 기생은 예인 대접을 받았습니다. 기생학교는 그야말로 어릴때부터 악기와 문학, 서예 등 다양한 기예를 가르는 예인양성학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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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춤추는 기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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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당(취학이전)
대청마루에 빽빽이 모여 앉아 글을 배우는 어린 학동들의 모습이 정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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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당에서 글을 배우는 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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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의 인삼밭
1906년 개성상인들에 의해 종삼회사(種蔘會社)가 설립되면서부터 개성 인삼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어려웠던 일제시대에도 개성의 삼농인들은 조선의 인삼을 지키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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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 피로연
앳된 신부와 꼬마 신랑의 화려한 의상이 돋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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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 고관대작 가마
고려시대부터 이용되어온 것으로 알려진 가마는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서민들이 혼례를 치를 때 가마를 타고 시집, 장가를 갈 수 있었던 것은 조선 후기에 와서야 허용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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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부인 가마
가마 내부의 바닥에는 보통 숯과 목화 씨를 넣고 그 위에 방석을 깔았습니다. 또 장시간 여행하는 부인들을 위해 가마 한 구석에는 가마요강을 넣어두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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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반이 이용하던 가마
가마는 빼어난 기능과 아름다움으로 훌륭한 소목공예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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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출하는 부인 / 남자 가족사진 엽서
일제시대에도 부인들은 외출시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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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출하는 부인 / 남자 가족사진 엽서 뒷면
이 엽서 뒷면에는 같은 종류의 다른 엽서에 없는 태극문양이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시대상황에서 이러한 태극문양이 인쇄된 사실이 매우 특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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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방
일제시대 약방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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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방
일제시대 필방은 글씨를 배우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원래 필방(筆房)은 붓을 만들어 파는 가게를 의미했으며 문구용품 판매와 문방구(文房具)  등도 취급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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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당포
조선시대에는 따로 대부업이 없었지만 1894년 청일전쟁 이후에 일본인이 한국에 들어와서 전당포 형태의 사채업을 시작했습니다. 서민들이 돈을 빌려 쓸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었으나 일제시대에 와서는 일본 자본이 조선을 침탈하는 창구 구실을 하기도 했습니다.
구한말과 이제 강점기 특히 도시 서민들 사이 돈을 빌려쓰는 수단이 됐으나, 전당포의 높은 이자율로 인해 고리대금의 대명사처럼 여겨졌으며, 담보로 맡기는 물건은 예나 지금이나 귀금속이나 명품 류가 주종을 이룬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전당포는 자주 범죄인들의 표적이 되어 왔습니다. 대한민국에선 지난 1961년 경찰서장의 허가를 받아야하는 전당포 영업법이 존재했으나, 1999년 폐지됐으며 누구나 신고만 하면 전당업을 할 수 있으며, 이자도 월 5.5%를 넘을 수없게 돼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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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가집
일제시대 전통 초가집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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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치는 모습
현대보다는 드물었지만 일제시대에도 이렇게 상업적으로 점을 치는 역술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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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례식
지위가 높은 사람의 장례식일까요? 길고 화려한 장례행렬이 지금의 장례풍속과는 사뭇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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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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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겟꾼 그림엽서
기다랗고 무거운 짐을 지겟꾼 두 명이 같이 지는 그림이 정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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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재판 태형

우리나라에서 태형은 고구려 시대 때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공법상으로 제정된 형벌이기도 했지만 재력이나 권세가 있는 집에서 노비들을 다스리기 위해
사적으로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이 형벌은 소위 '곤장(棍杖)치기'로 고려와 조선시대에 태형, 장형의 형벌이 뚜렷해
일반적으로 10-60대까지를 태(笞)라 하고, 70-100대까지를 장(杖)이라 했습니다.
한일합방 후엔 장형이 폐지 됐으며, 태형은 새로운 법으로 제정됐으나 비교적 경미한 범죄에 대해
구류, 감금, 복역대신에 1920년까지 한국인에 대해서만 이 형벌을 적용해 집행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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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평양까지 - 노찾사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 오만원 소련도 가고 달나라도 가고 못가는 곳 없는데 광주보다 더 가까운 평양은 왜 못가 우리민족 우리네 땅 평양만 왜 못가 경적을 울리며 서울에서 평양까지 꿈속에라도 신명나게 달려볼란다. 분단세력 몰아내고 통일만 된다면 돈 못받아도 나는 좋아 이산가족 태우고 갈래 돌아올 때 빈차걸랑 울다죽은 내 형제들 묵은 편지 원혼이나 거두어 오지 경적을 울리며 서울에서 평양까지 꿈속에라도 신명나게 달려볼란다. 경적을 울리며 서울에서 평양까지 꿈속에라도 신명나게 달려볼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