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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3) 함라돔의 아이들 - 초기 기독교 수도승의 降魔成道, ‘타리프’ 절벽에 묻힌 비밀

YOROKOBI 2009. 7. 9. 06:41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3) 함라돔의 아이들

초기 기독교 수도승의 降魔成道, ‘타리프’ 절벽에 묻힌 비밀

 

 

도올 | 제10호 | 20070520 입력

 

 

나그함마디 문서 발견지를 탐방하고 내려왔을 때 나를 둘러싼 함라돔의 어린이들. 뒤로 보이는 절벽 밑 바위가 두 개 놓인 곳이 바로 문서 발견지. 사진에 보이는 것보다는 꽤 먼 거리다. 이런 아이들이 도마복음을 발견한 것이다. 사진=임진권 기자
발견지를 안다는 청년보다도 앞서 나는 낑낑대며 바위 절벽을 올라갔다. 올라갈수록 드넓게 펼쳐지는 나일강변의 평원은 정말 풍요로웠다. 그리고 사막의 바위산은 느낌이 강렬하다. 풀 한 포기 없는 붉은빛 나는 강석회암의 강인한 열기는 깎아지른 절벽의 압도적인 웅장함에 위용을 더해준다. 사실 내가 가고 있는 이곳을 두 발로 찾아온 사람은 아직도 생존해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의 제임스 로빈슨(James M. Robinson, 1924~ ) 교수(지금은 은퇴)를 제외하고는 나밖에 없을 것이다.

문서 발견지를 탐색하는 필자.
문서는 이미 발견되었고 그 뒤로 이 문서의 연구가들이, 고고학 발굴 탐색단이 아닌 이상, 이곳을 방문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1975년 로빈슨 교수에 의하여 단 한 번의 탐색이 시도되었지만 사실 대대적 예산이 없는 상황에서 사막의 발굴이란 불가능하다. 더구나 ‘영지주의’로 잘못 분류되고 있는 이 콥틱 문서들은 세계 기독교인들의 환영을 받는 문서가 결코 아니다. 주변 바위동굴 하나에서 구약 시편의 몇 장이 쓰여져 있는 벽 낙서를 발견한 사실은 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 뒤로 나와 같이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찾아온 신학자가 있을 까닭이 없다. 위대한 문서의 발견지로서의 역사유적 팻말 하나가 꽂혀 있질 않았다. 그 문서 항아리를 캐낸 곳을 바라보면서 감개가 무량했지만 나로서도 아무 할 일이 없었다. 이 척박한 바위 절벽에서 도마복음이 나왔다니!

내가 절벽에서 내려왔을 때 나를 둘러싼 것은 총기를 든 괴한들이 아니라 함라돔의 나귀를 탄 귀여운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둘러싸고 빙빙 돌면서 유쾌하게 웃고 장난을 쳤다. 나는 그들의 나귀에 올라타 보기도 하면서 사진을 찍고 재미있게 놀았다. 사막의 여우가 번개처럼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갑자기 안내인이 사색이 되어 뛰어왔다.

안토니의 수행동굴로 가는길. 해발 781m. 우리나라 삼각산 백운대에 가까운 높이(위). 안토니 수행동굴로 들어가는 비좁은 크랙(중간). 안토니의 항마성도지. 완벽한 암흑이었다(아래).
“무궁화가 떴어요!”

나그함마디 전 지역의 무궁화 4개짜리 총경이 떴다는 것이다(그들 계급장으로는 말똥 2개). 갑자기 “우앵~” 하는 경보소리가 들리고 백차가 나타났다. 나보고 얼른 사라지라고 마이크로 소리를 빽빽 질러댔다. 괘씸한지고! 이 위대한 문서 발견지에 관광온 게 뭔 잘못이라고 이리 부산한고! 우리는 십 리 이상을 그 백차 사이렌 소리에 쫓기면서 속력을 내야 했다. 나일강변 수로를 따라 우리는 도망치듯 질주했다. 경찰은 자기 관할지역에서 위험요소가 빨리 제거되기만을 원했던 것이다.

이 나그함마디 문서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파코미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에 관한 역사이야기는 나의 저술 『기독교성서의 이해』 속에 상술되어 있지만 본지만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간략히 서술할 필요를 느낀다. 1세기부터 4세기에 이르는 초기기독교는 이집트지역에 엄청나게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압록강ㆍ두만강 이북의 만주땅이나 저 연해주의 광막한 발해땅이 결코 우리에게 소외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생활터전이듯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시나이반도나 이집트땅은 자기네 삶과 연속성을 이루는 공간이었다. 육로로 그곳을 여행해 보면 실제로 그러한 연속성을 실감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만주ㆍ연해주를 해방구처럼 활용했듯이, 로마의 압정으로 AD 1ㆍ2세기에 나라를 빼앗긴 유대인들은 독립전쟁을 몇 차례 치른 후 이곳으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주했다. 과거 모세 시절부터 집단거주했던 이집트땅은 결코 그들의 역사의식 속에 이방의 땅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이미 철저히 헬라화되어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청년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56~323)은 BC 332년 이곳을 정복했다. 그의 사후 헬레니즘 제국이 3분될 때 이곳은 프톨레미 왕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시대에까지 4세기 동안 이 지역은 철저히 희랍문화의 지배 속에 있었다. 언어도 희랍어가 통용되었고 전통적인 이집트 고전상형문자와 공존했다. 줄리어스 시저, 마크 안토니와 세기적 로망스를 펼친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Cleopatra Ⅶ, BC 69~30)도 알고 보면 이집트 토착민이 아니라 마케도니아 여자였다. BC 6세기부터 이미 이곳에 예레미야 선지자 등 유대인들이 대거 이주하고 또 1ㆍ2세기경부터는 유대계 기독교인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틀면서부터 이곳은 절묘한 문화적 융합이 일어났다. 다원주의적 신화세계의 원조 격인 풍요로운 이집트의 다신론 문화와, 율법주의적인 유일신론의 헤브라이즘과, 사랑의 복음인 기독교 문화의 자연스러운 혼융(混融)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유대교는 쇠퇴하고 기독교공동체가 이 지역의 주류로 부상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신앙적 삶의 형태는 수도원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서 초기불교가 비하라(vihara, 동굴승방) 중심으로 수도하는 비구들의 운동으로 시작되었듯이, 초기기독교도 이집트 아라비아사막의 동굴에서 수도하는 수도승들의 운동으로 시작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초기 수도승은 매우 개인적이었는데, 이러한 개인적 수도생활을 영위하는 자를 앵코라이트(anchorite)라고 부른다. 이 앵코라이트를 대변하는 인물로서 우리는 이집트의 안토니(Antony, c. 251~356)라는 수도승을 꼽을 수 있다.

나는 요번 여행을 통해 홍해 옆 게벨 엘 갈라라(Gebel el-Galala) 지역에 있는 안토니의 수도동굴에 가보았다. 카이로에서 수에즈운하 쪽으로 135㎞를 달리고 다시 홍해를 끼고 아라비아사막을 160㎞ 남하하면 안토니 수도원에 도착하는데 참으로 험난한 사막길이었다. 그런데 그 뜨거운 사막에 수도승들이 자리를 잡는 곳에는 반드시 신비롭게도 샘물이 솟는다. 일년 내내 땡볕만 내려쬐는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서 솟아오르는 맑은 샘물의 경이는 실제로 가보지 않으면 실감하기 어렵다. 그것도 쫄쫄쫄쫄 조금씩 흐르는 우리나라 약숫물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펑펑 솟아나는 청정한 물길이다. 안토니는 그 물길 곁에 예수님을 모시는 사당과도 같은 조그만 움막을 지었고, 막상 수도는 그곳에서 한참 떨어진 돌산 절벽 꼭대기 자연동굴 속에서 했다. 나는 그 동굴까지 기어 올라가 봤는데 참으로 피땀이 맺히는 고행길이었다.

인도에서 싯달타가 우루벨라의 아리따운 처녀 수자타에게 유미죽을 얻어먹고 기운을 회복하고 난 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도생활을 했다는 전정각산(前正覺山, Prag Bodhigiri)의 유영굴(留影窟)의 험준한 모습과 매우 유사한 곳이었다. 그러나 유영굴보다 훨씬 더 가파르고 깊고 캄캄했다. 안토니는 이 비좁은 동굴에서 자그마치 20년을 홀로 수행했다. 안토니의 전기를 쓴 아타나시우스 주교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끊임없이 악의 세력을 대변하는 악마의 형상들과 투쟁하면서 모든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영적 순결성의 완벽한 상태에 도달했다. 욕계의 주인 마왕 파피야스의 요염한 세 딸 등등, 다양한 마왕의 변신들과 투쟁하며 보리수 아래서 선정하는 싯달타의 모습이나 이집트의 초기기독교 수도승려들의 모습은 너무도 흡사하다. 모두 항마성도(降魔成道)의 치열한 투쟁이었다.
출처 : (3) 함라돔의 아이들 - 초기 기독교 수도승의 降魔成道, ‘타리프’ 절벽에 묻힌 비밀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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