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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367년 3월 말 이곳 파바우 수도원 본부에는 아타나시우스 대주교의 서한이 전달되었다: “외경적 텍스트들은 이단자들의 날조에 불과한 것들이다. 사도의 이름을 팔기도 하고, 마치 고문서인 것처럼 집필시기를 위장하기도 하여 순박한 영혼들을 타락시킨다. 이제 (마태복음으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27서 이외의 문헌은 읽어서도 아니 되며 소장되어서도 아니 된다. 이제 정경과 외경을 확연히 구분하는 신중한 분별심을 가지고 외경은 없애버려야 한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도마복음서는 이 정경 목록에 편입되는 행운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누누이 말하지만 이 AD 367년의 정경화 목록 발표 이전에는 정경과 외경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정경이 없으니 외경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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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마을 소형버스가 휘익 먼지를 휘날리면서 지나가는데 뒤에 매달린 사람들이 많았다. 왜 저렇게 매달려 가는가 하고 물으니 저렇게 매달린 사람들은 공짜라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그렇게 차 밖에 매달린 사람들을 원숭이처럼 따라잡으며 지붕까지 다 훑어대는 조수가 있었다. 역시 인도보다는 이집트가 덜 계산적이고 더 여유로운 듯이 보였다. 동네 어귀에 파출소가 있었는데 우리 차는 그 앞에 섰다. 파출소 소장이 오케이를 하면 들어갈 수 있고, 그러지 않으면 못 들어간다는 것이다. 나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머리에 사막유목민들이 쓰는 샤알을 뒤집어썼는데 그것이 호감을 준 모양이었다.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나라, 이 이집트의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저는 이집트 사람들의 풍요로운 삶의 모습을 긍정적으로만 담아내겠습니다. 그리고 파바우 수도원 유적은 인류문화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파출소 소장은 비록 시골에 쑤셔박혀 있기는 했지만 카이로 출신의 엘리트였다. 그는 나의 말을 잘 이해했다. 샤알을 쓴 것을 보니 이집트에 호감이 많은 사람인 줄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차를 시켰다. 그것도 시골다방에서 가져오는 모양이었다. 주둥이가 긴 양철주전자로 차를 부어주는데 유리잔에 설탕이 반이나 담겨 있었다. 설탕을 녹여가면서 계속 들이켜는 것이다. 사막에서는 당분이 필요하다고 했다. 길거리에서도 사람들은 사탕수수를 잘 씹어먹는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은 충치가 많다고 한다. 내가 어릴 때도 우리 아버지는 립튼 티에다 설탕을 한 열 숟가락은 넣어 잡수신 것 같다. 나는 파출소 소장의 맥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태음인”이라고 하면서 그 사람의 장부 구조와 성격을 줄줄 읊어댔다. 그랬더니 내가 예언자 마호메트처럼 잘 안다고 신기해했다.
“간이 커서 술을 먹어도 잘 안 취하시겠군요.”
“우리는 술을 먹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아랍국가에 있다는 것을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파바우 유적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곳으로 동네 쓰레기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 정규 시장이 열리는 곳으로 변하면서 동네 곡마당처럼 말끔히 치워진 모양이었다. 그 지역의 어느 누구도 이곳이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인류 최초의 수도원운동 센터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우람찬 돌기둥들이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보면 꽤 훌륭한 수도원이었던 것 같다. 화강암 기둥에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기존의 이집트 신전 건물들의 파편들을 재활용한 듯하다. AD 346년에 열병이 휩쓸어 약 100여 명의 수도승이 희생되었는데 파코미우스도 바로 이곳에서 346년 5월 9일 열병 속에 그들과 함께 영면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관할하에 약 7000명의 남녀 수도승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기독교의 위용을 이 폐허는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나타나자 나를 둘러싼 것은 엄숙한 수도승이 아닌 나귀를 탄 동네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이었다. 그들에게는 사진을 찍어대는 내가 너무도 신기한 이방인이었다. 외계에서 온 이티를 바라보듯 날 바라보았다. 그들은 외국인관광에 노출된 닳아빠진 아이들이 아니라 먼 옛날 순박한 농촌의 나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과 같이 히히덕거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파출소 소장은 여유롭게 관망하면서 나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주었다. 나는 파바우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
아타나시우스를 지원하던 로마의 콘스탄스 황제가 암살되고(350년), 그의 형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독존의 황제가 되면서 아타나시우스는 다시 탄압을 받는다.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대결은 기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세력 대결이기도 했다. 아리우스는 동방교회의 주축 세력이었다. 물론 이집트의 교권도 동방교회에 속해 있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 동방교회의 느슨한 다원적 사유를 이단으로 휘몰고 로마 중심의 서방교회를 주축으로 하여 동ㆍ서 교계를 일원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아타나시우스의 아리우스 비판은 아리우스가 예수의 인성만을 고집하고 예수의 신성을 거부했다는 테마에 집중되어 있지만, 아리우스는 예수를 또 하나의 신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전통적 다신론 사유의 아류밖에 안 된다고 보았다.
예수가 인간일 뿐이다라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예수를 격하시키려는 음모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유일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예수의 인간됨을 통하여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과 합일될 수 있는 신비주의적 가능성을 열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신비주의는 예수가 신적인 권능으로써 인간의 죄악을 대속한다고 하는 구원론적 의미를 약화시키고 기독교적인 독특한 유일신관의 기저를 파괴한다고 보았다. 아리우스 편에 서 있는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아타나시우스를 대주교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해서 북부이집트와 리비아에 주둔하고 있던 5000명의 로마군단을 동원하여 파로스 등대가 있는 해안에 상륙시키고 완전무장한 채 알렉산드리아 중심가로 신속히 입성시킨다. 356년 2월 어느 날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