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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6) 셉츄아진트와 콥틱기독교 -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이집트 콥틱기독교의 초대 교황

YOROKOBI 2009. 7. 9. 06:42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6) 셉츄아진트와 콥틱기독교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이집트 콥틱기독교의 초대 교황

 

| 제13호 | 20070609 입력

 

 

알렉산드리아는 희랍ㆍ로마세계의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항구도시였으며, 가장 선진문명을 자랑하는 문화도시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통성을 계승한 프톨레미1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디미트리오스의 도움을 받아 전대미문의 위대한 도서관을 지었다.

당대에까지 전해 내려온 모든 희랍ㆍ유대ㆍ이집트ㆍ인도ㆍ페르시아 기타 모든 아시아 문명권의 소중한 문헌을 50만 권이나 소장했다. 이 도서관 덕분에 기하학의 원조 유클리드, 위대한 수학자이자 발명가인 아르키메데스, 네오플라토니즘의 거장 플로티누스, 르네상스시대의 관측을 선구하여 지구의 둘레를 계산한 천문학자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BC 276~194), 매우 정교한 지구중심설의 천체이론을 수립한 천문ㆍ지리ㆍ수학자 프톨레미(Ptolemaeus, AD 127~145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와 같은 위대한 학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배출되었고, 성서문헌학의 획기적 저술인 히브리 바이블의 희랍어역 셉츄아진트(Septuagint)가 성립되었다.

나일강 위로 떠오르는 태양의 모습으로 설계된 알렉산드리아의 국립도서관. 벽면에 세계문명을 상징하는 모든 나라의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글씨로는 ‘세월’이 들어가 있다. 매우 잘 지은 건물이었다. 우리나라 파주 출판도시에 이 정도 수준의 국립도서관이 새로 들어서기를 나는 갈망한다. 사진=임진권 기자
셉츄아진트는 보통 ‘70인역’이라고 불리는데 로마숫자 LXX로 기호화한다. 70인역은 정확하게는 72인역이다. 이집트의 왕 프톨레미2세(PtolemyⅡ, BC 285~246)는 유대인 12지파에서 각각 6명씩을 선발하여 그 72인을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독방에 각기 따로따로 가두어놓고 72일 동안 히브리 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하게 했다는 것이다. 72일이 지난 후에 72인의 번역을 맞추어보니 모두 일치했다는 것이다. 이 거짓말 같은 설화는 BC 2세기경에 쓰여진 『아리스테아스書』(Letter of Aristeas)에 쓰여져 있지만, 결코 신빙성이 없는 거짓말은 아닌 것으로 학자들은 추론하고 있다. 그만큼 엄밀한 문헌학적 고증과 다수 학자들의 철저한 대조를 거쳐 성립한 공동번역이었음을 방증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엄밀하게 고증을 해보면 셉츄아진트도 일시에 한꺼번에 성립한 것은 아니다. 모세5경에 해당되는 부분이 제일 먼저 성립했고, 그 후로도 그 모세5경을 포함한 셉츄아진트의 전 체계는 BC 3세기로부터 시작하여 AD 1세기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의 개정을 거친 것으로 사료된다.

이 셉츄아진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성립했다는 사실은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너무도 중요하다.

성 마가교회의 벽화. 왼쪽에는 마가가 구두수선공 아니아누스에게 세례를 주고 있고 오른쪽에는 마가의 순교 장면이 그려져 있다(위). 알렉산드리아 성 마가교회의 지하에 있는 마가무덤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는 필자(아래).
첫째, 당시까지만 해도 구약이라는 문헌이 토라(모세5경)를 제외하고는 각기 개별적 독립 편들로서 산재해 있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구약이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체제를 갖추어 한군데 모아진 문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유대교 경전들이 모두 한 책으로 집대성되었다는 사실은 문헌학적으로 최초의 사건이며 그것이 히브리어가 아닌 희랍어로, 더구나 이집트 땅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둘째, 알렉산드리아에서 최초의 구약집대성인 셉츄아진트가 성립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알렉산드리아 지역에 얼마나 방대한 유대인들의 다이애스포라(교민집단)가 성립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얼마나 프톨레미 왕조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헬라화되었는가를 말해준다. 이것은 LA지역에 한국인 다이애스포라(교포사회)가 광범하게 성립한 것과 유비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교포자녀들이 점점 한국말을 모르고 한국인 아이덴티티를 잃어가게 되자, 그곳의 지도층 사람들이 영어만 아는 자녀들을 위하여 『조선왕조실록』을 영역했다고 한다면, 그러한 사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교민사회 지도자가 아닌, 프톨레미2세 자신이 그 유대교 경전 희랍어번역 집대성 작업을 주도했다. 그만큼 유대인 사회의 정치적 영향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셋째, 바로 이러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다이애스포라의 사람들에 의하여 초기기독교의 원형이 성립했다고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유대인들은 당시 영어인 희랍어를 말하는 헬라화된 개방적 전통의 사람들이었으며, 협애한 율법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문화전통을 흡수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로마군단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마사다 요새에서의 처참한 최후항전(AD 74), 바르 코크바(Simon Bar Kokhba)가 주도한 독립전쟁의 좌절(AD 135) 이후, 유대인을 멸절시키려는 듯한 탄압이 강화되자 유대인들은 이미 해방구를 형성하고 있었던 알렉산드리아의 다이애스포라로 대거 몰려들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화된 유대인들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사회는 점점 기독교화되어 갔을 뿐 아니라 주변의 헬라화된 이집트 지식인들에게도 기독교는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이 기독교화된 이집트 지식인들이 헬라어의 자모를 이두식으로 빌려 쓰는 최초의 어문일치형의 이집트말 표기법, 콥틱어(the Coptic language)를 만들었다. 우리의 도마복음서는 바로 이 콥틱어로 쓰여진 것이다. 물론 콥틱어 번역의 원본에 해당되는 희랍어 텍스트가 있었을 것이지만, 그 원본은 극히 일부 이외는 발견되지 않았다.

넷째, 구약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념의 형성은 모두 헬라어 구약성경인 셉츄아진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초기기독교의 구약전승 중시 사상은 모두 알렉산드리아에서 성립한 셉츄아진트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신약성서에 인용되고 있는 구약성서의 구절은 거의 모두가 히브리성경에서 인용된 것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에서 성립한 셉츄아진트를 인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신약성서 자체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다이애스포라의 문화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그 총체적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다.

다섯째, 뿐만 아니라 셉츄아진트의 성립과 그에 따른 기독교인들의 구약에 대한 이해방식의 특수성, 그리고 부수적인 곡해와 왜곡이 바로 역으로 유대교 정통을 고집하는 보수주의적 학자들에 의한 히브리정경 편찬작업을 촉발시켰다는 재미있는 사실도 같이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구약의 체제도 희랍어 셉츄아진트가 히브리어 텍스트의 편찬작업을 선구한 것이다.

내친김에 한마디 하자면, 이 초기기독교의 전승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콥틱기독교는 아직도 이집트에 엄청난 성세를 유지하고 있다. 로마교황청에 필적되는 콥틱본산교황청이 있으며 그 인구는 이집트 전체인구의 13%나 되는 1000만 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집트는 결코 이슬람국가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은 마태복음서가 말하고 있는 헤롯왕의 진노를 피한 예수 성가족,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피난생활로부터 콥틱기독교의 시원을 잡는다. 헤롯대왕이 BC 4년에 죽을 때까지 예수 가족이 3년 동안 이집트에서 머문 삶의 족적에 모두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마가복음의 저자 성 마가(St. Mark)가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포교를 했고, 그곳에서 순교를 당했다고 믿고 있다. 베드로의 순교지에 로마 베드로성당이 세워진 것처럼, 마가의 순교지에 알렉산드리아 마가성당이 치립(峙立)하고 있다.

마가는 생의 초반에도 이집트에 온 적이 있고, 기나긴 전도여행 끝에 결국 이집트에 안착했다고 한다. 바울 혹은 베드로와 전도여행을 마치고 로마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왔다는 설도 있다. 그가 라코티스라는 지방의 돌길을 걷는데 그의 샌들 끈이 끊어졌다. 그때 구두수선공 아니아누스(Anianus)가 마가의 구두를 꿰매다가 송곳으로 자신의 손을 찔렀다. 그때 피가 솟구치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외쳤다: “아이쿠! 하나님!” 그러자 마가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으시는군요.” 그 순간 피가 멈추었다: “사랑을 전파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으시오.” 아니아누스는 최초의 수세자(受洗者)가 되었고 그의 집은 최초의 교회가 되었다.

마가는 인간평등을 외쳤고 그의 교회신도는 급격히 불어났다. 그러자 이집트의 세라피스신도들과 로마병정은 마가를 잡아 밧줄로 목을 매어 길거리를 질질 끌고 다녔다(AD 68년 부활절사건으로 기술되고 있음).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시신을 태우려 했다. 그러자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졌고, 그의 시신은 온전히 보존되었다. 그의 시신은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아니아누스 집으로 모셔져 봉헌되었다.

이 마가의 시신을 AD 828년, 이슬람이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던 시절, 베니스사람들이 훔쳐갔다. 이슬람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돼지고기로 그 유해를 덮어 갔다고 한다. 이 마가의 유해를 봉헌한 성당이 바로 베니스에 있는 상 마르코성당(Basilica di San Marco)이다. 상 마르코에 있던 마가의 유해는 1968년 6월 22일 116대 콥틱교황 키릴로스(Pope Kyrillos Ⅵ of Alexandria)의 끈질긴 노력으로 로마교황 바오로6세에 의하여 원위치로 봉환되었다. 현재 마가는 콥틱교황청의 제1대 교황으로 모셔지고 있다. 나 도올은 그 마가의 두개골이 모셔진 알렉산드리아 무덤성소 앞에 엎드려 기도를 했다. 이와 같이 기독교전승에 관한 다양한 설화의 실마리는 끝을 모른다.
출처 : (6) 셉츄아진트와 콥틱기독교 -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이집트 콥틱기독교의 초대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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