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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리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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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폴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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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라 했는데 여기 우리는 “주의 도(the Way of the Lord)”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동양인들이 말하는 도(道)와 거의 유사한 개념으로 쓰는 “호도스”(길, 행위, 삶의 실천방식)라는 단어가 선택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 도”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것이 정확하게 기독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만약 “주의 도”를 기독교라고 해석할 수 있다면 바울이 활약하던 AD 50년대에 이미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사회에 기독교가 성립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물론, 이 사도행전의 기록은 초기기독교의 입장에서 기술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 저자의 기술방식은 놀랍게도 편견이 없다.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이 한 문장에서 상반절인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는 별 의미가 없는 진술이다. 그 핵심은 주절인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는 진술이기 때문이다. 실상 알렉산드리아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소아시아의 항구도시인 에베소로 온 아폴로라는 유대인지식인은 “주의 길”을 선포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주”는 실상 “예수”가 아니라 “세례요한”이었다. 그가 선포하는 “주의 길”, 즉 주님을 믿고 따르고 실천하는 삶의 방식은 다름아닌 “요한의 세례”였다.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라는 표현에서 “만(only)”이라는 부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알렉산드리아의 석학 아폴로는 실상 예수의 교도가 아니라 세례요한의 교도였던 것이다. 이 사도행전의 정확한 기술에 의하여 우리는 AD 50년경에는 이미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다이애스포라에 세례요한의 종파가 성립해 있었다는 역사적 실제 정황을 추론할 수 있게 된다.
공관복음서가 모두 예수가 그의 공생애를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받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다. 그 시인은 실상 예수가 현실적으로 세례요한의 제자였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세례(baptism)라는 것은 유대교 전통에는 부재하였던 전혀 새로운 혁명적 발상이었다. 세례는 오로지 세례요한으로부터 시작된 뉴에이지 무브먼트(New Age Movement)였다. 요단강 강물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는 것만으로 율법(토라)이 규정하는 모든 인간의 죄가 씻겨져 사함을 얻는다는 새로운 구원의 사상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에 대한 최대의 반역이었다. 이 반역적 세례운동이 당대 로마학정과 바리새의 형식적 율법주의의 기미 속에서 신음하던 민중의 광범한 지지를 얻고 있을 당시, 예수는 깨달음을 얻은 후 그 요한의 세례운동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물의 세례”가 아닌 “불의 세례”라는 새로운 영성운동, 즉 물리적 죄사함의 논리를 뛰어넘는 새로운 천국의 논리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따라서 공관복음의 기술은 예수가 세례요한의 추종자였다는 역사적으로 엄연한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기에, 그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그 수세(受洗)장면의 의미구조를 역전시켜 놓았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 1: 7~8).
그러나 이 사도행전의 기술은 AD 50년대의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사회에 예수종파는 존재하지 않았어도 세례요한종파는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폴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코스모폴리탄적인 감각을 가지고 세례요한의 “세례구원사상”을 선포하러 다녔고, 에베소에까지 전도여행을 왔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 전도그룹과 맞부닥치게 되었던 것이다.
아폴로는 “담대하게” 에베소에 있는 유대인회당에서 선포하였다. 그 선포의 내용은 예수의 멧세지가 아닌 세례요한의 멧세지였다. 그리고 그것은 소아시아의 유대인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따라서 아폴로의 무서운 감화력을 감지한 바울파의 사람들은 그를 “예수의 길”로 인도한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행 18:26). 그리고 그를 그의 소망에 따라 고린도교회로 파송한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알렉산드리아의 개방적 지적 분위기를 잃지 않았다. 바울 자신이 그의 고린도서한에서 아폴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아폴로는 결코 바울의 제자로서 예수를 설파하지는 않았다. 아폴로는 바울과 동급의 또 하나의 지적 거성이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 속한다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폴로에게 속한다 하니 너희가 속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리오? 그런즉 아폴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 나는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도다. …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로라.”(고전 3:4~9)
신약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알렉산드리아의 분위기는 이와 같다. 아랍권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나기브 마푸즈(Naguib Mahfouz, 1911~2006)도 알렉산드리아 사람이었다. 그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평화공존을 외쳤고, 사회주의, 호모섹스, 신(神) 등 당시 금기시되었던 모든 테마를 깊이 있게 다루었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