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나시우스와 동시대의 성자인 메나가 순교당한 후 묻힌 자리에 세워진 콥틱교도 최대순례지 아부메나 성지. 한때는 치유능력이 탁월해서 예루살렘 성지보다도 더 많은 기독교도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들었다. 밀밭 위로 아련히 보이는 모습이 아름답다. 알렉산드리아 근교. [사진=임진권 기자] |
파로스 등대가 서있는 알렉산드리아의 항구로 들어온 사람들의 이름은 찬란하다. 파로스 등대가 세워지기 이전이긴 하지만 그 리스트는 알렉산더 대왕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파로스 등대에 발을 디디자마자 목이 잘린 폼페이우스, 천신만고 끝에 파로스 등대를 장악한 줄리어스 시저,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의 영접을 받은 안토니우스, 최종의 승자로서 당당하게 군림한 옥타비아누스, 로마를 화염에 휩싸이게 했던 네로 황제, 그 뒤로 동서방의 황제들이 파로스 등대의 빛줄기를 따라 알렉산드리아의 땅을 밟았다. 트라이아누스, 막시무스, 하드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그리고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그리고 동로마제국의 열렬한 기독교 수호천사 유스티니아누스. 그러나 이제 우리는 356년 2월 어느 날 밤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해야 한다(6월 3일 제5편 “파바우 수도원 본부” 참조).
기독교 역사에서 삼위일체(Trinity)라는 것은 참으로 해괴한 논쟁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삼위일체 따위의 이야기를 그의 입으로 말한 적도 없거니와, 신약성서에서 삼위일체의 논쟁거리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사례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는 기독교신앙 자체의 문제일 수 없으며, 오로지 초대교회 조직의 역사인 교회사에서 생겨난 신앙외적 교리문제일 뿐이다. 예를 들면, 구약의 세계에서는 삼위일체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생겨날 수가 없다. 오늘날까지도 유대교에서는 삼위일체니 하는 따위의 교리는 일체 배제되고 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일 뿐이며, 3위가 존재할 수가 없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그런데 정확하게 초기기독교의 상황에서 말하자면 초대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생각한 종교는 전통적 여호와신앙 종교가 아니라, 예수의 새로운 말씀 즉 복음을 신앙하는 예수신앙 종교였다. 그것은 여호와교가 아니라 예수교였던 것이다. 만약 그것이 단순한 여호와신앙 종교라고 한다면 전통적 유대교(Judaism)와 다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늘날에도 ‘여호와 증인’(Jehovah’s Witness)은 기독교의 한 종파로 간주되기 어렵다. 그들의 근원적 신앙체계는 예수의 증인이 아닌,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일차적인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크리스찬”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단지 “증인”이라고만 부른다.
현재의 알렉산드리아 거리. 도시의 역사적 하중이 그래도 느껴지는 분위기다. |
초대교회에서도 이러한 문제는 계속 발생되었다. 특히 초대교회를 형성한 유대인그룹 속에서는 새로운 신앙의 대상으로 가슴에 모신 예수라는 역사적 존재, 그 존재를 구원의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서 생각할 때에, 그 예수 그리스도와 전통적인 여호와 하나님의 관계가 매우 궁금한 문제로 부상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냐 둘이냐? 한 몸이냐 따로따로냐? 그 관계가 무엇이냐? 인간 예수가 곧 하나님이란 말이냐? 인간 예수는 하나님에 의하여 파견된 또 하나의 선지자일 뿐이냐? 아니면 그 이상이냐? 게다가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키는 사실은 초대교회에 팽배한 긴박한 재림사상(Imminent Second Coming)의 기대였다. 곧 예수가 재림할 텐데 그 예수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가 인간의 모습으로 올 것이냐? 그가 오면 이제 이 어둠의 세상은 완전히 끝나버린다는데 그가 곧 하나님이냐? 이러한 초대교회 내의 논쟁이 필연적으로 삼위일체라는 문제를 유발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복음서의 입장은 매우 간결한 것이었다: “아버지와 아들.” 즉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예수는 아들이라는 것이다. 제4복음서인 요한복음은 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주제를 고도의 추상적인 철학적 담론으로 승화시켰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해소될 길이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냐? 둘이냐? 그것이 그냥 하나라고 속 시원하게 해버리면 예수교의 특성이 사라지고, 아예 둘이라고 잘라 말해버리면 유일신교의 원칙에서 벗어난다. 여호와와 예수는 제우스와 아폴로 같은 다신론의 두 이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등대 자리에 재건된 카이트베이 요새.이 속에 이슬람사원이 들어있다. 석재는 지진으로 무너진 등대 원석을 많이 썼다. | |
더구나 요한복음에서는 재림을 시사하면서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원래 법정에서 변호사 역할을 맡는 사람. 요 14:15~17, 25~26, 15:26, 16:4~11, 12~15)를 언급하였고, 그 “보혜사”가 의인화된 성령(the Holy Spirit)으로서 해석될 여지를 남겼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 존재에 관한 문제는 초대교회의 골칫거리였다. 교인들이 만나면 시도 때도 없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싸우고 치고받고 하면서 분당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사실 삼위일체 논쟁의 딮 스트럭처는 요한복음의 로고스기독론(Logos Christology)에 내장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성부ㆍ성자ㆍ성신의 문제에 있어서 성신(聖神)의 항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논쟁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성부와 성자의 관계설정이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했을 때(AD 313), 즉 그토록 집요하게 로마제국을 위협하던 기독교라는 유일신 사상을 공인함으로써, 오히려 분열되어 가고 있던 로마사회에 새로운 응집력을 도입하고 유일황제신앙을 강화시켜 로마제국을 재건하려는 야심 찬 반전을 시도했을 때, 지중해 연안의 기독교세계 그 자체는 이 삼위일체 논쟁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논쟁의 센터가 다름 아닌 알렉산드리아였다.
분열된 로마제국을 하나로 통합하려는데(콘스탄티누스는 분열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끔찍한 살상의 만행을 계속 자행하여 왔다), 분열된 기독교를 가지고서는 도저히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니케아종교회의를 열고 그 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까지, 기독교계에 통일된 정론을 세우려 했다. 그의 목표는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정치적인 것이었다. 사실 그는 니케아종교회의를 열기 전에 이미 알렉산드리아의 격렬한 논쟁의 두 적대세력인 알렉산더 주교와 아리우스 장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각기 보냈다: “그대들의 근본적인 차이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충실하게 조사한 결과, 나는 그 원인이 참으로 사소한 것이며 격렬한 쟁점으로서는 너무도 부족하다는 점을 깨달았소. … 여가를 오용하여 심심풀이처럼 제기한 논점은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만 제한해야 하며, 대중집회에서 서둘러 발표하거나 경솔하게 대중의 귀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될 것이오. 그토록 숭고하고 난해한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오. 실은 이런 질문을 제기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소.”
매우 현명한 조언이 아닐 수 없다. 알렉산드리아의 두 거두가 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현명한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매우 여유로운 기독교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양천년(兩千年)의 고통과 분열과 유혈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호소도 종교적 지도자들의 마음에는 쇠귀에 경읽기였다. 그리고 드디어 325년 5월 20일 니케아에서 대규모 공의회가 열렸던 것이다. 이 공의회에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주교의 비서로서 따라간 사람이 바로 우리의 주인공 아타나시우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