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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7)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 세기적 영웅들의 로망 간직한 비감의 도시

YOROKOBI 2009. 7. 9. 06:42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7)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세기적 영웅들의 로망 간직한 비감의 도시

 

도올 김용옥 | 제14호 | 20070616 입력

 

 

파로스 등대 자리에 세워진 카이트베이 요새 1층 옥상의 베란다에서 내다보이는 지중해. 이집트 여인들이 한가로운 정취를 만끽하고 있다. 임진권 기자
카이트베이 요새 1층 모스크의 천장. 파로스 등대의 분위기가 반영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는 우리나라 해운대를 연상케 하는, 해변을 따라 길게 뻗친 도시였다. 그러나 해운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길게 뻗쳐 있다. 해운대 해변이나 그 앞바다의 오염된 모습에 비한다면 알렉산드리아 해변의 지중해 모습은 너무도 청정하다. 물론 종교적ㆍ정치적 구속력이 강해 그러한 측면도 있겠지만,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시민의식의 수준이, 폭죽이나 터뜨려서 모든 해변을 불결한 소음의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민도보다는 더 높은 것 같았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는 국제도시답게 매우 개방적이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밝았고 내가 카메라를 들이대도 적극적으로 응해주었고 유머가 풍부했다. 옛 도서관이 있던 지중해 해변에서 나는 서너 명의 활달한 소년들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 나는 한국에서 왔다.
“남에서 왔냐? 북에서 왔냐?”

― 한국이 남북으로 갈렸다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그런 것쯤은 누구나 다 안다. 우린 학교 역사책에서 그렇게 배웠다. 당신이 우리나라에 올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당신 나라에 갈 수 있으면 너무도 좋겠다.”

(사진 上)도올과 담론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소년들. 뒤로 파로스섬과 제방이 보인다. (사진 下)1721년에 피셔 에르라흐(Fisher Von Erlach)가 그린 파로스 등대 모습. 그러나 이것은 상상도에 가깝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 여비만 있으면 되지 않나?
“여권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 한국에 대한 인상은?
“남한은 매우 잘사는 나라이고 북한은 매우 못사는 나라라는 인상이 강하게 박혀 있다.”

― 그대들은 콥틱 크리스찬인가?
보통 종교적 문제를 건드리면 매우 경직되니까 묻지 말라고 가이드가 말해준다.
“우리는 이슬람이다.”

― 기독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은 똑같다.”
매우 간결한 대화였지만 이집트 사람들의 기독교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잘 나타내준다.

예로부터 알렉산드리아는 그 항구 앞에 있었던 파로스(Pharos)라는 섬에 세워진 등대로 유명했다. 내전에서 알렉산드리아로 도망간 폼페이우스를 무찌르기 위해 시저가 로마 군단을 상륙시킨 곳도 바로 이 등대섬이었다. 시저의 승세(勝勢)를 감지한 이집트의 왕 프톨레미 13세는 시저가 파로스섬에 상륙하기 6일 전에 이미 폼페이우스의 모가지를 쳤다. 그리고 파로스섬에 올라오는 시저에게 그 모가지를 바친다. 폼페이우스는 비록 정적이었지만 전우였으며, 사위였으며, 절친한 친구였다. 시저는 그 비운의 모가지를 붙잡고 오열하며 비통한 눈물을 흘린다. 시저의 통곡 소리가 알렉산드리아의 푸른 하늘을 뒤흔들었을 것이다. 시저는 매우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정감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나는 파로스섬에 서서 그 장면을 연상하면서 파란만장한 인간세의 성쇠를 그려보았다. BC 48년 10월 4일의 사건이었다. 시저는 그 자신의 전쟁 기록인 『내전기』(Commentarii De Bello Civili)에서 파로스 등대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

“파로스섬에는 경탄할 만한 건축물이자 그 섬의 이름을 따 파로스라 불리는 매우 높은 등대가 서 있다. 알렉산드리아 앞바다에 떠 있는 파로스섬은 항구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이집트의 선왕들은 이 섬에서 도시까지 약 1.4㎞의 제방을 쌓았다. 섬 위에는 이집트인들의 집과 도시 규모의 주거지가 있는데, 앞바다를 항해하던 배가 부주의나 궂은 날씨 탓에 조금이라도 길을 잘못 들면 섬 주민들이 마치 해적처럼 달려들어 배를 약탈한다. 또한 섬과 육지 사이의 해협이 워낙 좁아 파로스섬을 지배하는 자들이 허락하지 않으면 어떤 배도 항구로 드나들 수가 없다.”

시저는 친구 폼페이우스의 모가지를 벤 프톨레미 13세를 오히려 실각시키고, 그와 대결하고 있었던 그의 누이 클레오파트라를 왕위에 올린다.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21세의 토실토실한 미녀였다. 벽화를 보아도 그 리얼한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는데, 마리아 칼라스를 연상케 하는 시원한 희랍 미녀상과 비옥하고 단단한 나일강의 검은 흙의 싱그러움이 결합된 그런 모습이다. 하늘로 치솟다시피 한 젖꼭지에서 흐르는 유방의 선율은 이집트 미녀의 강렬한 기력(氣力)을 발산하고 있다. 시원하게 찢어진 눈, 우뚝 솟은 매부리코, 도톰한 입술, 의젓한 바위처럼 단단하게 자리 잡은 광대뼈, 마케도니아의 섬세함과 나일강의 풍요로움이 결합되어 있는 매력적인 모습이다. 시저는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포옥 빠져버린다. 그리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유일한 아들인 카이사리온을 낳는다. 그러나 4년 후 아이러니컬하게도 폼페이우스의 거대한 석상 아래서 로마 원로원 배신자들에게 둘러싸여 수십 군데나 찔리고 선혈이 낭자한 가운데 최후로 “브루투스 너도냐!”를 외치면서 절명한다.

시저가 죽자 그의 옥좌를 둘러싸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세기의 대결을 벌이지만 결국 악티움 해전이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귀결되면서 모든 것은 끝나버린다. 사가들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을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들만의 세기적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절망 속의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칼을 세우고 가슴을 던진다. 그리고 피 흘리는 몸을 이끌고 자살을 시도하려는 클레오파트라의 능묘로 달려가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라고 권유하면서 숨을 거둔다. 그러나 이미 클레오파트라는 39세, 옥타비아누스의 차가운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능묘 속 죽음의 침상 위에 누운 채 장엄하게 보석으로 치장하고 충직한 시녀로 하여금 그녀의 오른쪽 손목 요골동맥에 날카로운 이집트 독사의 이빨을 물리게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와 합장케 해달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긴다. BC 30년 8월 30일의 사건이었다. 냉혹한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유언을 거룩하게 거행하기는 했지만, 줄리어스 시저의 유일한 아들인 카이사리온은 가차없이 죽여버린다. 이 옥타비아누스가 바로 누가복음 2:1에 나오는 “가이사 아구스도”이다. 이 모든 영웅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곳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원래 이집트의 해변은 수심이 얕고 숨은 암초가 많아 지중해의 항해사들에게는 악몽이었다. 알렉산드리아를 지중해 물류의 중심항구로 만들기 위하여 프톨레미 1세는 파로스섬에 거대한 등대를 만들게 했다. 설계자는 크니두스의 소스트라투스(Sostratus of Cnidus)로 알려져 있다. 12년의 공사를 거쳐 BC 283년에 완공되었는데 그 높이가 자그마치 135m에 이른다. 이 파로스 등대를 고대 사가들은 ‘세계 7대 불가사의(the Seven Wonders of the World)’ 중 하나로 꼽았다. 그 모습은 현재 베니스에 있는 상 마르코 성당의 벽화에 남아 있다.

아마도 처음에는 이 등대는 단순한 표식의 기능만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꼭대기에 알렉산더 대왕 혹은 프톨레미 1세의 석상을 태양신 헬리오스의 모습으로 만들어 올려놓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AD 1세기에 로마인들이 기름횃불을 태우는 봉화대를 만들고 그 배경에 반들반들하게 빛나는 동판을 세워 불빛을 반사시켰다고 한다. 그 뒤로 이 파로스 등대는 모든 등대의 원형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사원의 첨탑인 미나렛이 모두 이 등대를 모델로 해서 발전한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3단의 거대한 기단이 있고 그 위에 4각형의 성채가 있고 그 위에 8각형의 높은 타워가 있고, 그 위에 원통형의 봉화대가 있는데 나선형의 램프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이 장엄한 건물은 모든 풍랑과 해일을 17세기나 견디어냈다. 그러나 1303년 동부 지중해 전역을 뒤흔든 지진으로 무너져버렸다. 아직도 그 잔재가 주변 바다 속에 파묻혀 있다.

1480년 맘룩크 왕조의 술탄인 카이트베이(the Mamluk sultan Qaitbey)는 그 유적지에 군사목적의 요새(Fort Qaitbey)를 지었다. 파로스 등대의 석재 적색화강암을 재활용한 흔적을 그 요새의 외벽 기둥에서 찾아볼 수 있다. 1층은 이슬람학교 양식의 모스크, 2층에는 갤러리와 병사들의 막사, 3층에는 무기고와 지휘관들의 집무실이 자리 잡고 있는, 너무도 견고하고 고색창연한 건물이었다. 그 우윳빛 사암이 동굴처럼 갤러리를 이루고 있는 그곳 성채의 아름다운 창문을 통해 비쳐 들어오는 지중해의 물결은 너무도 찬란했다.
출처 : (7)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 세기적 영웅들의 로망 간직한 비감의 도시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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