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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3) 정경과 외경 - 성경이 교회를, 교회가 성경을?

YOROKOBI 2009. 7. 9. 06:44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13) 정경과 외경

성경이 교회를, 교회가 성경을?

 

도올 김용옥 | 제20호 | 20070728 입력

 

 

“정경을 규정하는 기준으로 세 항목이 있었다. 첫째는 사도저작성, 둘째는 신앙의 잣대, 셋째는 교회 내 의견의 일치.”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으면서 그토록 궁금했던 사해를 바라보다. 사해는 고립된 내륙의 호수인데도 바다처럼 크다. 더욱 놀라운 것은 수면이 일반 바다보다 392m나 낮다는 것이다. 길이가 75㎞. 폭이 15㎞. 염도가 30%나 되며 일반 바다보다 10배가 짜다. 브로민·마그네슘·아이오다인 등 고체성분이 33%나 된다. 들어가면 몸이 둥둥 뜨고 관절염·피부병에 특효가 있다. 호수 주변 공기도 산소가 10%나 더 많고 그 물은 청정하기 그지없다. 임진권 기자
이제 우리는 아타나시우스의 말을 세밀하게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흔히 외경(外經)이라고 말하면, 우리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뜻 때문에 “밖으로 벗어나버린 경전”이라는 이미지가 머리에 쏘옥 들어온다. “외경”이란 당연히 “내경(內經)”과 상대를 이루는 말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의미맥락에서 내·외는 정통과 이단이라는 뜻을 지니지는 않는다. 내경이란 내부적인 사람들만 비밀스럽게, 은밀히 보는 경전이라는 뜻이고, 외경이란 외부적인 사람들도 볼 수 있는 개방적·대중적 경전이라는 뜻이다. 한대(漢代)의 의서(醫書) 중에 『황제내경』이니 『황제외경』이니 하는 경전이 있었는데 모두 그런 뜻이었다. “내”는 “esoteric”으로, “외”는 “exoteric”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런데 아타나시우스가 “외경적”이라는 말을 했을 때, 그 원어는 “아포크리팔(apocryphal)”이라는 표현을 선택하고 있다. 본시 “아포크리파(apocrypha)”라는 것은 “숨겨진 것들(things hidden away)”이라는 뜻인데, 우리 전통적 언어로 번역하면, 그것은 “외경”보다는 “내경”의 뜻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포크리파로 분류된 경서들이 결코 당시에 숨겨진 책이거나 비밀스러운 책들은 아니었다. 실제로 아포크리파라는 말은 “신앙의 척도가 되기에는 부차적인 경전”이라는 뜻으로, “듀터로캐노니칼(deuterocanonical)”이라고 불릴 정도의 의미맥락에서 쓰인 말이었다.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증되고 전승되어 온 정경”이라는 표현에서 “정경”의 언어는 “카논(kanon)”인데, 이 카논이라는 말은 원래 “갈대” “지팡이” “막대기 자”라는 뜻으로 “기준”이나 “규범”의 의미를 지닌다. 카논은 정경이라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신앙의 잣대가 되는 경전”이라는 뜻이다.

우리말의 경(經)이라는 것도 위(緯)에 대비되는 것이다. 천을 짤 때 먼저 경을 세워놓고 거기에 위를 접속시키기 때문에 경이 위보다는 항상 더 근본적인 것이다. 경(經)은 만물의 길(徑)이며, 항상 그러한 것(常)이며,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법(法)이다. 그래서 경서(經書)니 위서(緯書)니 하는 표현이 있게 되었다. 경(經)과 카논(Canon)은 상통하는 표현들이다.

혹설에 의하면 예수도 사해 가까운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았고, 다윗도 사울을 피해 사해 근처를 헤매었다. 소돔과 고모라도 사해 지역.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도 여전히 소금기둥의 모습으로 사해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다(창 19:26).
대체적으로 카논을 규정하는 기준(criteria of canonicity)으로서 다음의 세 항목을 꼽는다: 1) 사도저작성(apostolicity) 2) 신앙의 잣대(the rule of faith) 3) 교회 내의 의견일치(the consensus of the churches). 이 세 항목 중에서 첫째의 사도저작성은 온당한 기준이 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1세기로부터 4세기에 걸쳐 모든 경서의 저작자들이 사도의 저작을 가칭(假稱)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위서(僞書)나 표절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에는 너무도 당연시된 공적 행위였다. 베드로니 바울이니 요한이니 하는 이름들은 “철수”처럼 매우 흔한 보편적 이름들이었으며, 그러한 사도 중의 한 이름을 책 제목이나 저자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은 저작 그 자체를 영예롭게 하는 고귀한 행동이었다. 그러한 위작의 방식은 당연시된 한 양식적 표현이었다. 그러므로 사도저작성의 기준만으로 외경과 정경을 구분하기는 어렵다.
두 번째 신앙의 잣대(regula fidei)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의 구현체이며 계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어느 저작이 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인지를 가리는 것도 지극히 주관적인 문제에 속한다. 이 문제를 놓고도 초대교회에서는 논란이 매우 많았다. 히브리서 1장 1절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되는 방식 자체가 매우 다양하고 많아서(in many and various ways) 과연 무엇이 참된 계시인지를 인간으로서는 가리기가 어렵다. 그 종국적인 기준은 히브리서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통하여 계시된 말씀일 것이나, 예수의 말씀조차 당대에 기록된 것이 없고, 결국 인간의 언어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 카논 저작자들의 주관적 의도가 적극적으로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주관적 인식이 빠진 객관적이고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은 인간의 언어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초대교회에서 논증되고 있었다.

결국 정경과 외경의 구분으로서 가장 현실적으로 설득력을 지니는 기준은 제3의 항목이 될 수밖에 없다. 교회 내의 의견의 일치인 것이다. 다시 말해 정경을 성립시킨 것은 교회였다. 정경이 교회를 성립시킨 것이 아니라, 교회가 27서 정경을 만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오늘날 시중의 큰 건물 속에 들어앉아 연보나 받고 있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정경을 형성시켜 간 교회” 즉 에클레시아(ekklsia)이며, 그것은 선택받은 인간들의 모임 즉 그리스도에 의하여 규정되는 휴먼 네트워크이다. 이 에클레시아는 디모데전서 3:15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것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공동체이며, 진리의 기둥이며 터전(the pillar and bulwark of the truth)이다. 정경은 바로 이 에클레시아에 속한 사람들의 절실한 요구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 교회의 권위가 정경의 권위를 확보한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권위는 궁극적으로 그 교회에 임재하는 성령의 권위에 의하여 확보된다고 그들은 믿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그러나 교회가 인간공동체인 이상, 교회 내에도 내분이 있게 마련이고 다시 정통과 이단의 싸움이 있게 마련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를 들여다봐도 큰 교회이건 작은 교회이건 꼭 쌈박질이 있게 마련이다. 장로와 목사가 싸우고, 장로와 장로가 싸우고, 또 아무개 권사가 목청을 높인다. 이런 쌈박질의 주장들을 살펴보면 서로가 자기만이 정통이고 상대방은 이단이라고 삿대질한다.

그런데 이러한 싸움에서 정통과 이단을 가를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을 찾아내기란 극히 어렵다. 이런 문제는 초대교회 내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했으며 바울 서한의 대부분이 이런 주제와 연관되어 있다. 결국 정통과 이단의 쌈박질에서 우리가 흔히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이다: “목소리 센 놈이 정통이다.” 목소리 센 놈이라니 그놈이 세다는 것은 무엇으로 아는가? 목소리 세다는 것은 목소리 약한 놈에 비해 지지자를 더 많이 확보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그렇다면 결국 정통과 이단은 다수(majority)와 소수(minority)의 문제로 결착 나는 것일까? 다수파에 밀려 소수파가 떨어져나가 새롭게 교회를 개척하는 상황도 비일비재하지만 초대교회의 문제는 결코 이러한 숫자의 문제로 해결될 수는 없다. 시간의 함수를 넣고 본다면 다수가 금방 소수로 바뀔 수도 있고, 소수가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곧 다수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칼한 사실은 초대교회에서 우리가 정통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소수파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에 비하면 소수였다. 당시는 정통과 이단이 항상 티격태격하면서 공존하는 상황은 있을지라도, 일자가 타자를 이단으로 규정할 수 있는 그러한 배타적 권위가 부재했다. 이러한 분위기가 오히려 초기기독교의 생명력이었다.
출처 : (13) 정경과 외경 - 성경이 교회를, 교회가 성경을?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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