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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타나시우스가 “외경적”이라는 말을 했을 때, 그 원어는 “아포크리팔(apocryphal)”이라는 표현을 선택하고 있다. 본시 “아포크리파(apocrypha)”라는 것은 “숨겨진 것들(things hidden away)”이라는 뜻인데, 우리 전통적 언어로 번역하면, 그것은 “외경”보다는 “내경”의 뜻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포크리파로 분류된 경서들이 결코 당시에 숨겨진 책이거나 비밀스러운 책들은 아니었다. 실제로 아포크리파라는 말은 “신앙의 척도가 되기에는 부차적인 경전”이라는 뜻으로, “듀터로캐노니칼(deuterocanonical)”이라고 불릴 정도의 의미맥락에서 쓰인 말이었다.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증되고 전승되어 온 정경”이라는 표현에서 “정경”의 언어는 “카논(kanon)”인데, 이 카논이라는 말은 원래 “갈대” “지팡이” “막대기 자”라는 뜻으로 “기준”이나 “규범”의 의미를 지닌다. 카논은 정경이라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신앙의 잣대가 되는 경전”이라는 뜻이다.
우리말의 경(經)이라는 것도 위(緯)에 대비되는 것이다. 천을 짤 때 먼저 경을 세워놓고 거기에 위를 접속시키기 때문에 경이 위보다는 항상 더 근본적인 것이다. 경(經)은 만물의 길(徑)이며, 항상 그러한 것(常)이며,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법(法)이다. 그래서 경서(經書)니 위서(緯書)니 하는 표현이 있게 되었다. 경(經)과 카논(Canon)은 상통하는 표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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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앙의 잣대(regula fidei)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의 구현체이며 계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어느 저작이 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인지를 가리는 것도 지극히 주관적인 문제에 속한다. 이 문제를 놓고도 초대교회에서는 논란이 매우 많았다. 히브리서 1장 1절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되는 방식 자체가 매우 다양하고 많아서(in many and various ways) 과연 무엇이 참된 계시인지를 인간으로서는 가리기가 어렵다. 그 종국적인 기준은 히브리서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통하여 계시된 말씀일 것이나, 예수의 말씀조차 당대에 기록된 것이 없고, 결국 인간의 언어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 카논 저작자들의 주관적 의도가 적극적으로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주관적 인식이 빠진 객관적이고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은 인간의 언어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초대교회에서 논증되고 있었다.
결국 정경과 외경의 구분으로서 가장 현실적으로 설득력을 지니는 기준은 제3의 항목이 될 수밖에 없다. 교회 내의 의견의 일치인 것이다. 다시 말해 정경을 성립시킨 것은 교회였다. 정경이 교회를 성립시킨 것이 아니라, 교회가 27서 정경을 만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오늘날 시중의 큰 건물 속에 들어앉아 연보나 받고 있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정경을 형성시켜 간 교회” 즉 에클레시아(ekkl
그러나 교회가 인간공동체인 이상, 교회 내에도 내분이 있게 마련이고 다시 정통과 이단의 싸움이 있게 마련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를 들여다봐도 큰 교회이건 작은 교회이건 꼭 쌈박질이 있게 마련이다. 장로와 목사가 싸우고, 장로와 장로가 싸우고, 또 아무개 권사가 목청을 높인다. 이런 쌈박질의 주장들을 살펴보면 서로가 자기만이 정통이고 상대방은 이단이라고 삿대질한다.
그런데 이러한 싸움에서 정통과 이단을 가를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을 찾아내기란 극히 어렵다. 이런 문제는 초대교회 내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했으며 바울 서한의 대부분이 이런 주제와 연관되어 있다. 결국 정통과 이단의 쌈박질에서 우리가 흔히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이다: “목소리 센 놈이 정통이다.” 목소리 센 놈이라니 그놈이 세다는 것은 무엇으로 아는가? 목소리 세다는 것은 목소리 약한 놈에 비해 지지자를 더 많이 확보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그렇다면 결국 정통과 이단은 다수(majority)와 소수(minority)의 문제로 결착 나는 것일까? 다수파에 밀려 소수파가 떨어져나가 새롭게 교회를 개척하는 상황도 비일비재하지만 초대교회의 문제는 결코 이러한 숫자의 문제로 해결될 수는 없다. 시간의 함수를 넣고 본다면 다수가 금방 소수로 바뀔 수도 있고, 소수가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곧 다수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칼한 사실은 초대교회에서 우리가 정통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소수파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에 비하면 소수였다. 당시는 정통과 이단이 항상 티격태격하면서 공존하는 상황은 있을지라도, 일자가 타자를 이단으로 규정할 수 있는 그러한 배타적 권위가 부재했다. 이러한 분위기가 오히려 초기기독교의 생명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