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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 중의 한 사람인 그가 그의 계시록 가운데서 이렇게 예언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새 예루살렘에서 일천 년을 살게 될 것이다.’”
동시대의 마르시온은 이 묵시문학이 유대교적이라는 이유로 정경의 자격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광열한 재림주의와 성령주의와 금욕주의의 야만성을 드러낸 몬타니즘(Montanism)이 요한계시록을 그들 운동의 근거경전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러한 묵시문학의 부작용에 대하여 당시 이미 거부감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2세기의 교부 파피아스(Papias), 이레나에우스(Irenaeus), 이그나티우스(Ignatius), 유스틴(Justin) 등은 계시록의 정경으로서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나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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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타나시우스가 요한계시록을 27서 정경에 편입시킨 이유는 매우 명료하다. 기원전후 세기는 유대인 역사에 있어서 피세적인 환상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던 극심한 탄압의 격동기였으며, 모든 메시아니즘은 묵시문학적 표현양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BC 250년경부터 AD 200년 사이의 유대인사회는 묵시문학의 시대라고 규정해도 좋을 만큼 많은 계시록이 생산된 세기였다. 현재 구약 속에 편입되어 있는 다니엘서도 이 시대에 성립된(BC 164년경) 대표적 묵시문학 중의 하나다. 그 외에도 에녹묵시록, 제파니아묵시록, 에스라4서, 바룩묵시록 등 수많은 묵시문학이 생산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묵시문학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역사 속에서 믿는 하나님의 계시이지만, 요한계시록은 제1장 1절에 명시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라는 점에서 유대교의 묵시문학과 근본적인 성격을 달리한다.
그리고 유대교의 묵시문학은 예언전통과 상통되는 것이지만, 기독교의 묵시문학은 예언문학이나 지혜문학과 그 근원적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당대의 하나님의 자녀들, 즉 당대의 이스라엘민족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묵시라고 하는 것은 당대라는 시간이 아닌, 시간의 종료인 종말의 때에 벌어질 사건에 관한 계시이다. 그러니까 예언은 하나님의 의도를 역사의 지평 속에서 구현하려고 한다. 그러나 묵시는 역사의 지평을 말살하고 역사를 넘어선 하나님의 초자연적·초시간적 영역에로의 회귀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언은 철저히 역사적인 반면 묵시는 철저히 비역사적이다.
묵시란 “아포칼립스”(apocalypse)란 말의 번역어인데, 그것은 “비밀스러운 것이 드러난다”는 희랍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꿈이나 천사나 환상의 매개를 통하여 탁월한 개인에게 계시되는 것이다. 이 계시는 현존하는 세계를 악마나 사탄이나 악의 세상으로 규정하고 그것이 반드시 선의 세력에 의하여 종료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선·악 이원론의 극렬한 대립이 있으며, 반드시 종말론적이며, 현세와 내세라는 두 개의 세계가 대적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동학이 선천개벽과 후천개벽을 대비시키는 것이나, 원불교가 음세계와 양세계를 대비시키는 것과도 비슷하지만 동학이나 원불교의 선천·후천, 음·양은 모두 역사적 지평 내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종말론적이라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왜 이러한 종말론적 묵시문학이 당대 그토록 성행하였고, 아타나시우스가 정경 속에 그중 하나를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나 하는 문제를 역사적 맥락에서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당시 초대 교회의 가장 큰 위협은 히브리서 6장이 경고하고 있듯이 배교(apostasy)의 문제였다. 로마의 박해 속에서 배교하지 않고 기독교신앙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순교(martyrdom)였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에게 순교란 공포스러운 것이다. 그 공포감을 제거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긴박한 종말의 도래를 선포하고 그 종말의 날에는 순교자가 궁극적으로 승리자로서 부활케 되리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당대의 로마황제교참배는 우리나라 일제시대의 신사참배와 비슷한 것이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것은 곧 죽음이다. 사실 묵시록의 언어는 “일본법제의 틀 속에서 상고하는 것은 일본제국을 인정하는 것이니 차라리 빨리 죽음을 택하라”고 울부짖는, 여순감옥에서의 안중근 모친의 숭고한 애통의 언사와도 같은 것이다. 순교의 종용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주체적 의지보다는 하나님 공의(公義)의 숙명론을 강조한다. 묵시문학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지독한 환난과 박해와 역경을 견디고 헤치어 나갈 수 있는 희망과 용기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로마제국의 권력과 세력에 항거하는 신앙의 충성과 정절이었다.
사실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박해 상황에서 소아시아의 7 교회에 보낸 낭송문학의 걸작이며, 그 당시에는 매우 구체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로마 관원의 박해의 눈길을 피하기 위하여서는 그들이 해독할 수 없는 상징언어가 필요했다. 그 언어를 당시 기독교도들은 소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코드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코드가 사라져서 해괴망측한 언어로만 들리게 된 것이다.
더구나 선·악의 종말론적 이원론은 오히려 평화로운 세계를 악마의 지배로 규정하고 저주시하며, 세속적 질서를 왜곡하며, 극악한 전도주의를 조장하며, 인간의 합리적 이성을 마비시키며, 타 종교의 공존을 죄악시하는 성령주의의 파렴치한 질곡 속으로 기독교를 빠뜨리는 비극적 역사를 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축복의 코드일까 저주의 코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