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저자’를 영어로 ‘오서(author)’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오소리티(authority)’ 즉 ‘권위’라는 개념과 동근의 말이다. 독점적인 저작권이 특별한 권위를 갖는 근대사회에서만 저작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저작성의 개념은 고대문헌의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저작물을 어느 한 특정 개인이 소유한다는 발상 자체가 거부되기 때문이다. 특히 그 저작이 종교적 목적을 송양(頌揚)키 위한 것일진대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자리에 어느 개인이 독점적 자리를 점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초대교회의 저자들이 사용한 가장 현명한 방법은 공인된 저명한 사도의 이름을 빌리는 것이었다.
|
우리는 어떠한 근거 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텍스트를 ‘도마복음서’라고 부르는가? 도마가 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도마복음서라는 책명은 후대에 편의상 붙인 이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도마복음서의 경우는, 그 텍스트의 마지막에 책이름이 명료하게 부기되어 있다: “퓨앙겔리온 프카타 토마스”(Peuaggelion Pkata Thomas: The Gospel According to Thomas). 아마도 이 책명은 이 복음서를 전사한 희랍어 서기관이 첨가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텍스트 자체가 살아있는 예수의 말을 디두모 유다 도마(Didymos Judas Thomas)가 기록한 것이라는 서론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복음서는 최소한 형식상으로는 어떠한 상황에서 누가 기록한 것인지를 정확히 밝혀 놓고 있는 것이다.
우선 도마(Thomas)라는 인물은 공관복음서 속에서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12제자의 리스트 속에 맥락 없이 이름만 적혀 있을 뿐이며(마 10:3, 막 3:18, 눅 6:15, 행 1:13) 그 도마가 어떤 도마인지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쌍둥이(디두모)라 불리는 도마”(Thomas, called the Twin)라는 명칭으로 명료하게 4번 나온다(요 11:16, 14:5, 20:24~29, 21:2). 그리고 4번 나오는 그의 이미지는 일관된 어떤 상(像)을 그리고 있다. 그 상은 후대 기독교역사에 “의심하는 도마”(Doubting Thomas)라고 하는 매우 중요한 심상의 물줄기를 형성했다.
첫 번째는 예수가 돌로 쳐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곤경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평소 사랑하던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살리러 가려 하자 제자들이 만류한다. 이때 도마만이 유독 외친다: “예수와 함께 죽으러 가자!”(11:16). 도마는 용기가 있고 신의가 있었으며, 자기 신상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인간이었다. 공자에게 충직한 자로(子路)와 같은 인간이었다.
두 번째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가 매우 감상적으로 자신의 최후를 예언하며 부활을 암시하는 추상적 메시지를 던진다. 그리고 말한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알고 있다.” 이때 아무도 반문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예수의 말을 알아들었을 리도 만무하다. 이때 오직 도마만이 외친다: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는 모르는디유.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단 말이유?”(14:5) 적시의 안타라 할 수 있다. 도마는 애매한 이야기들을 못 참는 것이다. 이 도마의 퉁명스러운 정직성에 대하여 예수는 그 유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다.” 예수의 대답은 역시 또 추상적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정직한 도마에게 더 매력을 느낀다.
세 번째는 예수가 부활하여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났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예수가 사라진 후에 다른 제자들이 예수를 보았다고 말하자,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외친다. 8일 후에 예수가 제자들 집회소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도마에게 이른다: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0:27) 이 말 때문에 마치 도마를 ‘믿음 없는 자’의 대표주자인 것처럼 천박하게 성경을 읽는 자들이 말하지만, 도마는 의심하는 자가 아니라 실증주의자였으며, 거짓을 모르는 진실한 신앙인이었다. 그의 회의를 통해서만이 예수는 진실한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고백은 모든 의심의 구름을 걷히게 만드는 찬란한 상식의 햇살이었다.
요한복음의 도마의 이미지는 이미 시대적으로 선행하였던 도마복음에서 왔다고 사료된다. 요한이 도마복음을 직접 읽지 않았다 하더라도 간접적으로 그 이미지가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양자의 도마에 어떤 사상적 연관성이 충분히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마는 과연 누구일까?
도마는 원래 아람어로 쌍둥이라는 뜻이다. 이 쌍둥이를 희랍어로 표현한 것이 디두모(didymos)이다. 따라서 “디두모라 하는 도마”라는 표현은 ‘족발’이나 ‘역전앞’과도 같은 표현으로, 2개 국어의 의미를 중첩시킨 동어반복이다. 도마나 디두모나 쌍둥이임을 나타내는 일반명사일 뿐 그 이름(고유명사)은 아닌 것이다. “디두모 유다 도마”에서 그 이름은 “유다”(Judas)이다. 가롯 유다가 아닌 쌍둥이 유다가 있는가? 복음서에서 유다는 예수의 형제로서만 언급된다(마 13:55, 막 6:3).
그렇다면 이 유다는 누구의 쌍둥이일까? 많은 성서학자들이(Koester) ‘쌍둥이 유다’(Judas the Twin)는 바로 예수의 쌍둥이라고 증언한다. 시리아전통의 도마행전(11장)에는 예수의 제자 도마는 예수의 쌍둥이였다고 확언한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에게 쌍둥이가 있었을까? 이 모든 것이 동정녀 설화의 허무개그적 측면을 나타낸다. ‘쌍둥이 도마’의 전통은 동정녀 설화와 무관한 별도의 초대교회의 한 설화양식이었고, 도마복음의 저자는 그 이름을 빌려 예수의 친근한 모습을 그리고자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