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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1 그리고 그가 말하였다:“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1 And he said, “Whoever discovers the interpretation of these sayings will not taste death.”
‘그’는 누구일까?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을 선포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대뜸 우리는 ‘그’를 예수 본인으로 봐야 한다고 상정하기 쉽다. 물론 그렇게 고집한다면, 다시 말해 그러한 설을 정설로 주장한다 해도 결정적으로 그러한 설을 묵살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기는 어렵다. 고문헌학에서는 하나의 정설이라는 개념은 통용되기 어렵다. 그러나 우선 문법 구조와 단어 선택만 살펴보아도 ‘그’를 예수로 보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 제일 먼저 나오는 말, ‘그리고(And)’는 제1장의 말이 그 앞 프롤로그의 언어와 연결되어 있는 부속적 코멘트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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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 도마는 말한다. 그가 기록한 것은 살아 있는 예수의 말씀이되, ‘은밀한’ 것이다. 은밀하다고 하는 것은 쉽게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은밀한 말씀은 은밀하기 때문에 반드시 해석(interpretation)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해석 자체가 살아 있는 예수의 말씀을 접하는 인간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은밀한 것이다. ‘은밀’과 ‘해석’은 상통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정통 기독교도라고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도마가 권유하고 있는 ‘해석’을 거부한다. 그리고 말한다. 예수의 말씀을 해석하지 말고 곧바로 믿어라! 예수의 말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해석할 필요가 없다. 곧바로 믿어라! 기록자 도마는 바로 이러한 태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열쇠는 예수의 말씀을 해석하는 우리의 내면적 각성의 과정에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왜 오늘날의 기독교는 해석을 거부하는가? 그것은 바로 2000년 동안 ‘빵빠레’를 울려온 요한복음기독교의 승리의 나팔 덕분이다. 로고스기독론에 의하면 예수는 말씀이며 빛이다. 그것은 태초로부터(요 1:1), 아브라함이 나기 이전부터 있었던(요 8:58) 존재이다. 예수가 곧 말씀이라는 뜻은, 예수는 말씀을 매개로 하는 하나님 그 자체라는 뜻이다. 요한의 예수는 끊임없이 외친다. “내가 바로 그라는 것을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 8:28). ‘내가 바로 그라는 것’은, 예수의 자의식 속에서 이미 예수는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청중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명료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이 말을 정면으로 해석하기를 공포스러워하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 예수의 선포는 예수와 하나님의 완벽한 일치(complete identity)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나 의지의 일치(oneness of will or action)를 주장할 뿐이라고 에둘러대지만, 실제로 요한이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은 것은 살아 있는 예수에게 전적인 신성을 부여함으로써 예수를 바라보는 인간들에게 ‘해석’의 여지를 상실케 하는 것이다. 만약 예수가 곧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예수는 신이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예수는 오히려 헛도깨비가 되고 만다. 도케티스무스, 즉 가현설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 가현적 허구성을 방지하기 위하여 요한은 이미 1장에서 육화(肉化)라는 사상을 도입했다. 매우 절묘한 작전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요한복음을 도마기독교 흐름에 대한 안티테제로 생각할 때 요한복음 기술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어법은 “나는…이다”라는 예수의 호언(豪言)이다. 이러한 어법은 타 공관복음서에서 두드러지지 않는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양의 문이다.”(10:7, 9). “나는 선한 목자다.”(10: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내가 참 포도나무다.”(15:1, 5).
이러한 표현은 매우 자랑스럽게 2000년 동안 암송되어 왔지만, 불교의 상식으로 말하면 바라밀(p<0101>ramit<0101>)의 열쇠인 무아(無我·an<0101>tman)의 대전제를 망각하는 망언이요, 아집과 독선과 배타를 구현하는 비어(鄙語)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말은 듣는 사람에게 확신과 믿음과 소망을 준다. 그러나 회의나 모색이나 탐구의 기회를 앗아가 버린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유일한 생명의 떡이다. 너희들은 아래로부터 왔고 나는 위로부터 왔다. 위로부터 온 나야말로 항상 아래로부터 온 너희들 위에 군림한다. 나는 너희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나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다. 너희들이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딴 방법이 없다. 나를 믿고, 나를 따르고, 나에게 복종하고, 나를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서 고백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는 인간의 구원을 독점한다. 이러한 요한의 프로그램은 기막힌 성공을 거두었다. 2세기부터 서서히 모든 기독교운동은 요한의 프로그램에 따라 변질되고 획일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도마복음이 말하려는 진리는 그러한 한 인간이 선포하는 말씀 그 자체의 진리가 아니다. 그 말씀을 해석함으로써 나의 내면에 있는 빛을 밝히는 은밀한 과정에 내재하는 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의 해석은 반드시 발견되어야 한다. 타인이 해석해 놓은 것을 듣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해석을 발견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발견이란 은밀함을 벗겨 가는 과정이다. 발견이란 바로 나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앙가주망이다. 살아 있는 예수의 말씀이 나의 삶의 체험 속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그것은 예수의 말씀인 동시에 나의 삶의 발견인 것이다. 나의 삶 속에 내재하는 우주적 생명의 환희의 발견인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인간은 죽음을 맛보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다시 물어야 한다.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뜻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