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1장
1 그리고 그가 말하였다: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혹자는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과정을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집단적인 과정으로 주해하기도 한다. 당시 문맹률이 95% 이상을 차지했던 사회에 있어서 문서기록을 해석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극히 제한된 인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운동은 궁극적으로 대중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 즉 포퓰리즘과 엘리티즘의 괴리는 고대사회에 있어서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나 예수가 살았던 그레코 · 로만의 1세기는 과거 어느 시대에 비교하여도 문자와 지식의 보편화가 일어났던 시기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도마의 기록을 일반대중들이 직접 읽고 해석했다는 것은 당대의 현실 상황에서는 어불성설이었다.
이미 내가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서는 나의 저서 『기독교성서의 이해』(서울: 통나무, 2007)에서 설진(說盡)하였다. 제9장 “낭송문화와 복음서”를 참고하면 당대의 실제 정황을 숙지할 수 있을 것이다. “도마가 기록하였다” 할 때, 그 기록은 주로 양피지(parchment) 위에 쓴 것인데(2~4세기 콥트어 코우덱스는 파피루스를 사용한 것이지만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사용한 소재는 주로 양피지였다), 그것은 매우 고급 소재였으며 가격이 높았다. 그래서 대중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은 아니었다. 게다가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은밀한 말씀의 해석”은 실제로 집단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 |
그러나 도마공동체는 쿰란공동체와 같이 엄격한 규율을 지키면서 집단생활을 했던 그러한 공동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예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의 매우 느슨한 정신적 유대관계 내지는 무형의 조직, 혹은 시나고그와 같은 어떤 커뮤니티 센터를 활용한 연대 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다. 이들의 신념은 예수의 말씀 전파 그 자체에 있었으며, 예수의 말씀을 미끼로 해서 사람을 공동체의 울타리나 규율 속으로 묶어두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조직을 최소화시켰다. 도마기독교에 관해 깊은 연구를 한 패터슨(Stephen J. Patterson) 교수는 이와 같이 단언한다: “특별하게 도마공동체라고 집어 말할 수 있는 조직은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느슨한 연대를 지닌 방랑자들의 운동이었다.”(There is no Thomas community per se, but rather a loosely structured movement of wanderers. The Gospel of Thomas and Jesus, p.151)
따라서 나는 “해석의 발견”도 집단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이 메시지를 접하든지 간에,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실존적 각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살아 있는 예수의 말씀은 살아 있기에 은밀하고, 은밀하기 때문에 해석되어야 하고, 끊임없이 발견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자기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는 이와 같이 외친다: “이놈들아! 너희들은 너희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나를 외면하고, 죽은 자만 이야기하는도다!”(도마복음서 제52장. 略號 Th.52)
이 살아 있는 예수를 만나는 대가(代價)는 무엇이냐? 기록을 읽고 해석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고통스러운 것이다. 기록자 도마는 독자들에게 자기 기록의 해석의 고통에 대한 보상이나 미끼를 던져야 한다. 진리도 알고 보면 ‘판촉’의 대상이다. 프로모션이 잘돼야 널리 수용되고 오래가는 진리가 되는 것이다. 도마가 판촉의 미끼로 독자에게 던지는 상금은 정말 두둑하다: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많은 주석가들이 제1장에서부터 은밀한 영지와 영생이라는 테마를 끄집어내서 도마복음이 영지주의 문헌임을 입증하려 한다. 그러나 고대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죽음이라는 문제는, 개인주의적 인권의식이 발달한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영생이라는 문제는 부활·재림·최후의 심판이라는 황당한 시간의 사건들과 연계되어 있다. 그리고 요상하게도 과학적 상식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이런 말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더욱 신화적 사유에 매달린다. 기독교인들이 영생한다는 것은 살아 영생한다는 것이 아니라(물론 물리적 영생을 주장하는 광신 사교집단도 일시적으로 현대사회에 성행하기도 한다), 죽되 죽어서 천당에 가서 부활한 예수나 온전하신 하나님과 재결합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후 천상 재결합” 사상은 구약에도, 즉 유대교 전통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은 사상이다. 사후의 미래적 삶과 천국의 결합은 아주 기독론적인 초대교회 사상인데, 미안하게도 도마복음은 이러한 초대교회의 재림사상 이전의 기술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영생의 개념으로는 도저히 접근해서는 안 되는 문헌인 것이다. 도마복음의 예수는 이와 같이 말한다: “아버지의 나라는 이 땅 위에 깔려 있다.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니라.”(Th.113)
인간은 누구든지 물리적으로 죽음을 경험치는 아니한다. 죽는 순간까지 인간은 살아 있을 뿐이다. 인간에게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물리적으로 일어나는 사태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순수의식일 뿐이요, 관념일 뿐이다.
도마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다”라고만 기술하였다. 맛본다는 인간의 행위는 삶의 행위이며 생명의 감각적 과정이다. 죽은 사람은 맛볼 수가 없다. 살아 있는 자만이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다는 것은 ‘죽지 않는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라, 맛보는 삶의 행위 속에 ‘죽음’이라는 메뉴나 광우병 쇠고기 반찬 같은 것이 들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죽음’을 먹으면 인간은 빨리 죽어갈 것이요, ‘생명’을 먹으면 인간은 삶의 희열을 느끼게 될 것이다.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물리적 사태의 부정이 아니라 ‘삶의 환희’를 강조하는 상징적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나의 주석은 결코 궤변이 아니다. 내 해석을 궤변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늘날 기독교의 이해가 얼마나 교조화되어 있고 얼마나 신화화되어 있으며 얼마나 영생을 실체화하고 있나 하는 것을 입증할 뿐이다.
도마복음서의 기술은 고도의 은밀한 심벌리즘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고대인들의 기술이라고 해서 오늘날 우리의 사유에 못 미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오늘날 우리들의 유치한 사유를 반증할 뿐이다. 어찌 고대인들이라고 사람이 죽는다는 이 단순한 사실 하나를 몰랐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