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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1 예수께서 가라사대,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2 찾았을 때 그는 고통스러우리라.
3 고통스러울 때 그는 경이로우리라.
4 그리하면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
1 Jesus said, “He who seeks should not stop seeking until he finds.
2 When he finds, he will be troubled.
3 When he is troubled, he will marvel,
4 and he will rule over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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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제1장에서 우리는 기록자인 도마가 독자에게 이 은밀한 말씀을 대하는 우리 삶의 자세에 관하여 권유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 진지한 노력의 보상이 무엇인지를 기록자인 도마의 말을 통하여 들었다. 그것은 은밀한 말씀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석되어야 하고, 끊임없이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가로 우리는 죽음을 맛보지 않는 생명의 환희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발견’이란 ‘끊임없는 추구’를 의미한다. 상기의 도마서 인용에서 예수가 도마에게 하는 말을 상고하여 보면, 이 끊임없는 추구는 결국 도마 자신의 존재의 내면적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과연 지금 나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존재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도마의 권유에 뒤이어 나타나는 예수의 첫마디는 “구하라!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라”라는 선포였다. 여기서 우리는 도마복음서의 놀라운 구성력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앞서(제47편) “컨스트럭션과 디컨스트럭션의 긴장감”이라고 표현한 그 절묘한 연결고리를 엿보게 된다.
제1장에서는 “그리고 그가 말하였다.”(And he said,)로 시작하였지만 제2장에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Jesus said,)로 시작하고 있다. 전자는 3인칭 지시대명사를 썼지만, 후자는 명료하게 화자 ‘예수’를 특칭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예수에 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곧바로 “예수께서 가라사대”로 시작하는 이 복음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대 1세기에 이 문헌을 접하는 사람들은 우리보다도 예수에 관하여, 그 삶의 역정에 관하여 정보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부지불식간에 주어지고 있는 2천 년의 누적된 권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전기적 정보나 권위가 없는 상태에서 곧바로 “예수께서 가라사대”로 직입(直入)하는 도마복음서의 구성력은 오히려 매우 강렬하고 파격적이며 더 체험적일 수 있다.
예수가 누구인지, 어떠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독자는 알 필요가 없다. 그러한 허접스러운 내러티브 없이 곧바로 예수를 등장시킨다는 것은, 예수라는 인간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열쇠로서, 진리의 도구로서, 진리의 방편으로서의 예수를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라는 인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말한 ‘은밀한 말씀들’이 중요한 것이다. 독자는 직접 그 말씀들과 맞부딪쳐야 하는 것이다.
이 “예수께서 가라사대”라는 부분은 물론 형식상 도마의 기록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내레이터의 도입이다. 예수의 말씀인 것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말씀과 말씀 간에 인터벌을 줌으로써 텍스트를 구분시키는 효과를 내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체험세계를 풍요롭게 만드는 휴식과 반성과 재고의 공간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밥 먹고 똥 싸고 민중들과 어울려 다니고 예루살렘에서 못 박혀 죽은 인간이 아니다. 그 인간은 도마복음서의 대상이 아닐 뿐 아니라, 도마기독교 공동체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는 오로지 말씀의 주체이며, 또 진리의 계시자(Revealer of Truth)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가 아니요 살아있는 자다. 그가 선포하는 진리는 단순하다. ‘천국’ 그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도마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살아있는 예수의 선포의 핵심주제였던 ‘천국’이라는 문제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도마복음의 제1장에서 제시한 총론적 메시지는 이미 ‘천국의 은밀한 해석’이었고 ‘천국의 은밀한 발견’이었다.
발견은 끊임없는 추구의 과정이다. 그래서 예수 가라사대의 제1탄은 “구하라”로 시작된다. 그러나 예수가 가르치는 우리의 ‘구함’의 행위는 결코 단순한 한 시점의 행위일 수가 없다. 그것은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일 뿐이다. 그것은 발견될 때까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만 하는 추구의 과정이다. “구하는 자들이여!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공자는 말한다: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일단 물을진댄 확연히 알 때까지는 그것을 놓지 말지어다.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일단 생각할진댄 확연한 해답을 얻을 때까지는 그것을 놓지 말지어다.”(有弗問, 問之, 弗知, 弗措也. 有弗思, 思之, 弗得, 弗措也. 『중용』 제20장).
그러나 이미 큐복음서에 속하는, 비교적 공관복음서에서 오리지널한 층대에 속한다고 하는 마태·누가의 파편 속에,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와 같은 예수의 로기온이 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마다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문은 열릴 것이다.”(Q35, 마 7:7-8, 눅 11:9-10. 도올 역주 『큐복음서』 p.174).
큐에서는 인간의 구함과 찾음과 두드림에 대한 결론이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쉽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서에서는 이러한 쉬운 방식은 허용되지 않는다. 아가페적 해방의 논리가 아닌, 고독한 개인의 실존적 내면의 고투가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과연 “구함을, 찾을 때까지 그치지 말라”는 명제와 “구하기만 하면 쉽게 주어진다”는 명제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더 원래적 예수의 말씀에 근접하는 것인지는 독자들 스스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나 도올은 바로 여기서 소승기독교가 대승기독교로 확대되어가는 제1세기의 발전 경로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