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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1 예수께서 가라사대,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2 찾았을 때 그는 고통스러우리라.
3 고통스러울 때 그는 경이로우리라.
4 그리하면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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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는 현몽 속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고, 계시받은 문장을 병사들의 방패 위에 그려 그의 아내의 오빠인 막센티우스(Maxentius)의 군대를 무찌를 수 있었다. 그는 다리 밑 테베레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익사한 자기 처남의 시체를 다시 참수하여 그 대가리를 창 끝에 꽂고 로마에 입성함으로써 6명의 황제가 1인의 황제로 통일되어 가는 결정적 계기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불가침의 신성한 1인 절대권력의 꿈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예수 덕분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콘스탄티누스 본인이 이러한 신앙을 직접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에게 고백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밀비우스 다리의 무속적 계시가 313년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의 실제적 계기였다. 그리고 기독교는 공인되었다.
그러나 대승기독교의 이론적 틀은 이미 요한복음에서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요한은 이미 바울신학에서 제시된 부활사상의 심오하게 철학적인 영지주의 측면과, 마가복음으로부터 시작된 내러티브 가스펠의 화려한 대중성과,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사상가 필로(Philo Judaeus, c. BC 20~AD 40)가 유대교의 인격신 개념과 플라토니즘적 세계관을 결합하면서 인간의 이성과 신적 사유의 매개체로서 설정한 로고스(logos), 그리고 당대에 네오플라토니즘의 유출설적 연속성과 낙관론이 단절된 상황에서, 신의 자기구원(the selfsaving of God)의 상징으로서 등장한 영지주의의 대속자신화(the Gnostic redeemer myth) 등등, 이 모든 당대의 조류를 창조적으로 결합하였다. 그것은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공인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대승적 발전의 탄탄한 대로를 예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도마복음서를 이러한 대승적 조류와 대비되는, 대승 이전의 소승적 조류로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스리랑카의 소승불교도들이 자신을 소승불교도라고 인지하지는 않는다.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가 발전되었다고 소승불교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팔리어장경에서 불교의 초기모습을 보다 리얼하게 파악할 뿐이다. 니까야(nikaya)를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 개념으로 접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종교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길거리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로 아무 생각 없이 외치는 전도사의 고함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냥 무조건 교회에 나가 간구하기만 하면 3중, 5중, 천중, 만중의 현세적 축복이 쏟아질 것인가?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만사가 다 이루어진다는 사람이 줏대 없는 간교한 이기주의자요, 출세만을 지향하는 기회주의자일 수도 있다. 물론 교회의 문은 두드리기만 하면 열릴 것이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일 수도 있다. 교단의 세력이 확장되고 연보돈이 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마가 만난 ‘살아있는’ 예수의 첫마디는 천국의 문은 아무리 두드리고 또 두드려도 쉽게 열리지 않는다고 하는 경고이다. 두드리고 또 두드려라! 열릴 때까지.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쳐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쉽게 즉각적으로 결론이 주어지는 과정이 아니다. 어렵고 지루한 추구의 과정이다. 보통사람 같으면 중도에 포기하고 말 그러한 과정이다. 그래서 예수는 중도에 포기하지 말 것을 강하게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그토록 어렵게 구하고 또 구해서 드디어 찾았을 때, 우리에게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는가?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은 무엇인가? “찾았을 때 너는 고통스러우리라!” 아니 이건 또 웬 말인가? 어찌하여 천국을 찾았는데, 구하려고 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데, 구한 것을 얻었는데, 왜 고통스럽단 말인가?
천국은 맘몬(Mammon)이 아니다(Q74, 마 6:24, 눅 16:13). 돈을 구해서 얻는 것과도 같은 기쁜 세속적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 “고통스럽다”(will be troubled)는 것은 “당혹스럽다” “번민에 휩싸인다”는 뜻이다. 구하는 것을 얻었을 때 우리는 당혹스럽고 고통스럽게 된다. 왜냐?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바로 나라는 인격주체의 근원적인 변화(the transformation of one’s subjectivity)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자아의 몸으로서는 천국의 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 아이디 카드(identification card), 즉 자기동일성의 증표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디 카드를 새로 발급받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관습과 관행을 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고통스럽지 않다면 나의 구함은 진정한 구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옛 관습과 관행의 지속일 뿐이다.
새로운 자아의 건설(the construction of an alternative subjectivity)은 고통스럽다. 붓다는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말하지만, 살아있는 예수는 인간의 현존재를 고(苦, duhkha)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창조적인 고통을 말할 뿐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갈 때,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환될 때 인간은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의 순간 때문에 비로소 인간은 천국의 경이로움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고통스러울 때 너는 경이로우리라!”
경이(驚異)는 타우마제인이다. 모든 참된 앎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갈파했듯이, 타우마(thauma, 놀람·경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천국이란 바로 일상적 자아가 고통스러운 주체의 변환(變換)을 통하여 얻는 경이다. 그러나 경이는 경이로서 완료되지 않는다. 경이는 타 동식물에게서 발견되지 않는 인간의 특권이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다. 경이는 끊임없이 새로운 경이를 낳아야 하고, 경이는 다른 지속태로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 지속태란 무엇인가? 예수는 말한다: “경이를 체험하면 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 여기 ‘다스림’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