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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61) 구하는 자여! 그대 ‘몸의 왕국’의 왕이 되라 - 지혜와 왕(王)

YOROKOBI 2009. 7. 11. 18:26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61) 구하는 자여! 그대 ‘몸의 왕국’의 왕이 되라

 

지혜와 왕(王)

 

 

| 제68호 | 20080629 입력

 

 

기독교 박해에 열심이던 유대교도 사울이 다메섹(Damascus)으로 가는 도중에 특별한 계시를 받고 개종하게 된 사도행전 9장의 이야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그러한 사건을 보도하지 않는다.“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나에게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셨다”라고만 고백한다 (갈 1:16). 그리고 개종 직후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아라비아 사막으로갔다. 이 바울이 개종 후 최초로 간 아라비아가 바로 에돔땅 나바태안 왕국(Nabataean Kingdom)이다. 또 고린도후서(11:32~33)에 보면 훗날에 아레타왕(King Aretas)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 했기에 몰래 광주리 타고 피신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아레타왕이 바로 나바태안 왕국의 왕이었다. 그는 헤롯 안티파스의 장인이었다. 헤롯대왕도 본시 이지역 이두메(에돔) 출신이었다. 이 나바태안 왕국의 실체가 오늘 페트라의 장관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이 지역은 십자군이 잠깐 다녀간적은 있으나 그 뒤로 완벽하게 망각의 세계로 사라졌고 베두인의 비밀스러운 성지로만 은폐되고 외부인들에게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아랍어를 노련하게 구사했던 스위스의 젊은 탐험가 버크하르트(J. L. Burckhardt)가 이 지역에 관한 소문을 듣고 무슬림성자로 가장하고 침투한 것이 1812년의 사건이었다. 아론의 무덤에 제사 지낸다는 명목으로 이 검붉은 장밋빛 사암의 웅대한 협곡(The Siq,1.2㎞)에 당도했을 때 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요르단에 속한 페트라는 신(新)7대 불가사의 실제적 1호로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제2장
1 예수께서 가라사대,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2 찾았을 때 그는 고통스러우리라.
3 고통스러울 때 그는 경이로우리라.
4 그리하면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

상식인들이 보통 기독교를 생각할 때, 복음서에 나오는 이적이나 신화적 기술 때문에, 그것을 매우 유치한 종교로 생각하기가 쉽다. 실제적으로도 이적이나 부활 때문에 ‘예수장사’가 잘된다고 북 치고 장구 치는 ‘쟁이’들을 제외하고는, 세계의 상식인들에게 기독교는 유치하게 비친다. 대한민국은 유독 그러한 열렬한 쟁이들이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나의 상식적 언급을 오히려 터무니없다고 말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이 순간에도 북 치고 장구 치며 방언하고 앉아있는 방방곡곡 서낭당 휴거파들의 행태를 비상식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정상인은 이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
그러나 기독교가 탄생된 그레코·로만의 1세기 팔레스타인의 지적 분위기는 그러한 뮈토스가 극복된 매우 성숙한 것이었다. 희랍고전철학의 고도의 논리적 탐구와 추상적 사유가 전달되어 있었으며, 알렉산더 대제의 세계정복 이후에 전개된 헬레니즘의 다양한 삶의 철학사조가 꽃을 피웠다. 이미 폴리스(polis)의 시대는 지나가고 코스모폴리스(cosmopolis)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사유도 다양한 이방문명과의 접촉을 거치면서 거창한 신화적 영웅담을 탈피하여 보다 상식화되고 인간화되고 일상화되는 일련의 담론을 노출시킨다. 우리 동양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구약 중에서 욥기(Job)나 잠언(Proverbs)이나 전도서(Ecclesiasticus)와 같은 문학작품은 크게 신화적 부담을 주지 않는 주옥 같은 금언으로 점철되어 있다. 소위 지혜문학(Wisdom Literature) 전통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BC 6세기로부터 싹을 틔우기 시작하여 예수의 시대에는 만개한 유대교의 중요한 흐름인 것이다. 히브리말로는 호크마(hokma), 희랍어로는 소피아(sophia)라고 부르는 이 지혜란 무엇인가?
아주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원래 지혜란 본시 삶의 지혜인 것이다. 그것은 신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 삶과 행동에 관련한 다양한 사태에 정의롭고 슬기롭게 대처하는 인간적 폭이나 능력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셈족 언어에서 이 지혜는 여성명사이기 때문에, 여성으로 의인화(personification)되는 경향을 보인다: “지혜를 네 신부로 삼고, 슬기를 네 애인이라 불러라.”(잠 7:4, 공동번역).
따라서 지혜는 문학가들의 상상력과 더불어 아름다운 레토릭의 옷을 입으며 독자적인 우주적 인격체로서 발전해 간다. 그러다가 결국 또다시 신적인 속성과 결합하게 된다. 인간의 자족적인 지혜는, 욥기문학이 항변하고 있듯이, 분명 한계가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자신 정통적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이러한 유대적 지혜전통 속에서 이해한 것이 분명하다. 그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만난 예수는 ‘하나님의 지혜’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큐복음서에도 예수는 솔로몬의 지혜보다 더 큰 지혜의 화신이다(Q41, 마 12:42, 눅 11:31).
도마복음서를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지혜문학의 전통 속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나는 그러한 이해방식에 관하여 크게 토를 달 생각은 없지만 너무 지나치게 지혜문학이라는 사조의 틀을 실체화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도마복음을 이해하는 하나의 레퍼런스로 생각하면 족하다. 그러나 내가 지혜를 말하는 뜻은 우리가 도마복음서를 지혜롭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태어나기 직전에 성립한, 헬라화된 다이애스포라의 유대인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집필된 지혜문학서 솔로몬의 지혜서(Wisdom of Solomon)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지혜는 빛을 발하며 시들지 않는다. 지혜는 그녀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쉽게 식별되고, 그녀를 구하는 자들에게 발견된다. 그녀는 그녀를 원하는 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녀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 죽음을 맛보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간다. 지혜의 사랑은 우리를 왕국으로 이끈다.”(6:12~20).
독자들은 솔로몬의 지혜서와 도마복음서 사이에 공통되는 많은 언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도마복음서의 언급과 “우리를 왕국으로 이끈다”는 솔로몬의 지혜서의 언급의 상관관계에 관한 것이다. 옥시린쿠스사본 도마복음서에 사용된 ‘다스린다’에 해당되는 희랍어 단어는 ‘왕 노릇 한다’(βασιλευω)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공관복음서에서 “하나님의 나라” “하늘의 나라”라고 할 때의 ‘나라’, 즉 바실레이아(βασιλεια)와 같은 어원의 말인 것이다.
“경이를 체험한 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는 표현은 결국 ‘왕이 된다’는 뜻이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천국의 꼬붕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나라에서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것은 왕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경이를 체험하면 왕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가 선포하는 천국은 권세와 폭력의 세속나라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혜의 왕국’이었던 것이다. 지혜의 왕국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나’라는 존재의 왕국인 것이다. 결국 이 내 몸(Mom, soma)이야말로 천국인 것이다. 이 천국에서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내 몸 속에 있는 신하들을 완벽하게 제압한다는 뜻이다. 내 몸의 천국 속에서 나는 왕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은 호랑이나 느티나무가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인간이 만들 뿐이다. 왜? 인간이 자기 몸의 왕 노릇을 할 수 없을 때, 내가 나의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다스리지 못할 때, 끔찍한 우주의 모든 죄악이 파생하는 것이다. ‘나’라는 왕국의 왕이 된다는 것은 끊임없는 구함과 찾음과 고통과 경이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옥시린쿠스사본은 콥트어사본과 달리 이 한마디를 첨가하고 있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자만이 휴식할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인복음서(The Gospel of the Hebrews)도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경이를 체험하는 자는 누구든지 다스릴 것이요, 다스리는 자는 누구든지 휴식할 것이다.”(Whoever marvels will rule and whoever rules will rest. 6a).
여기서 ‘휴식’(Rest)이란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언어이다. 많은 주석가들이 ‘다스림’의 본뜻과 그 의미맥락을 확연하게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편협한 기존 성서의 가치관에서만 도마복음서의 언어를 대하기 때문에, ‘휴식’의 의미조차 명료하게 파악지 못하는 것이다. ‘휴식’은 ‘열반적정’(涅槃寂靜, santam nirvanam)의 ‘적정’이다. 그것은 고요함이요, 평온이요, 구극적으로는 해탈이다. 그것은 죽음이 아닌 생명의 원천이다. 인간은 내 몸의 왕이 될 때에만이 비로소 휴식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예수가 도마복음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첫 메시지는 추구와 발견과 번민과 경이와 제압과 해탈이다. 참으로 놀라운 도언(導言)이 아닐 수 없다.
버크하르트의 충격이 보고되자 그 뒤를 이어 간 유명한 화가가 영국인 데이비드 로버트(David Roberts)이다. 1839년 3월 6일 그는 페트라에 도착했다. 이 그림은 다음날 그린 것인데 페트라의 ‘왕들의 묘역’을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로버트의 그림들이 석판으로 출판되자 그것은 모험심에 가득 찬 유럽인들의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출처 : (61) 구하는 자여! 그대 ‘몸의 왕국’의 왕이 되라 - 지혜와 왕(王)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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