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스크랩] (63) 천국은 네 안에 있고, 네 밖에 있다 - 안과 밖

YOROKOBI 2009. 7. 11. 18:27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63) 천국은 네 안에 있고, 네 밖에 있다

 

안과 밖

 

 

| 제70호 | 20080713 입력

 

 

지금 이 지구상에서 ‘악의 축’으로 규정된 두 나라가 있다. 시리아와 북한! 두 나라는 역사적으로 매우 친근하다. 30년 절대권력을 휘두른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를 계승한 바시르 알 아사드(Bashir al-Assad) 정권의 성격도 북한 정권과 비슷하다. 시리아에서 ‘코리안’의 인기는 좋다. 물론 북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남한에서 왔다고 하면 시리아 사람들은 나에게 이런 충고를 한다: “도대체 왜 남북한이 갈라져 싸우는지 모르겠군. 대포동 미사일을 쏠 줄 아는 북한의 깡다구와 남한의 경제력을 합치면 짱일 텐데.” 여기는 아브라함이 살았던 하란 지역이다. 땡볕이 쏟아지는 척박한 사막에 토담집 몇 채씩 짓고 옹기종기 산다. 내가 동네를 지나는데 사람들이 날 불러 생명의 물을 주었다. 이들이야말로 천국이 “네 밖에도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외부인에게 적대적이라는 가이드의 경고와 달리 이들은 너무 친절했고 개방적이었다. 우리가 시리아를 사랑할 수 있다면 당연히 북한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은 최근 북한에 대한 적성국가교역법을 종료시켰다. 그리고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의미 없는 이데올로기 덫에 걸려 남북문제의 이니셔티브를 다 상실했다. 한국의 경제소생은 남북문제의 진전 없이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곳 아브라함의 고향에서 통감했다. 임진권 기자

제3장
3 진실로, 천국은 네 안에 있고, 네 밖에 있다.
4 “네가 너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는 네가 곧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5 그러나 네가 너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그리하면 네 존재는 빈곤 그 자체이니라.”

천국이 하늘에 있다 하면 새들이 우리보다 먼저 가고, 천국이 땅속에 있다 하면 물고기들이 우리보다 먼저 가리라 하는 이야기는 판에 박힌 기독교 교리만을 신봉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사실 이런 얘기는 도마복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4복음서에 이미 들어 있다. 도마복음서는 생동하는 예수의 말을 생생하게 전했을 뿐이다. 누가복음 17장을 펼쳐 보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그리고 ‘하늘 위, 바다 속’ 운운하는 수사법도 성서에 이미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다. 지혜문학인 욥기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산들을 뿌리째 파헤쳐도 지혜를 찾을 길 없고, 물속의 용도 이같이 외친다. ‘이 속에는 없다.’ 바다도 부르짖는다. ‘나에게도 없다.’”(욥 28:9~14).

기름값이 치솟는 한국의 실정에서 시리아는 참 부러운 나라다. 휘발유 1L당 70원, 한국 휘발유값의 30분의 1. 휘발유값이 싸니까 주변 터키에서도 운전자들이 트럭을 끌고 와 기름을 넣는다. 시설이 빈곤해서 드럼통으로 붓는다. 주유소는 만원일 수밖에. 그런데도 코리안인 나에게 먼저 넣게 해주었다. 그리고 자기 집에 가서 밥 같이 먹자고 서로 끌었다. 못사는 것 같지만 풍요로운 삶을 이들은 즐기고 있다.
하나님의 계명에 관해서도 모세의 말씀은 이러하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법을 내려다 주지 않으려나?’라고 말하지 말라. 바다 건너 저쪽에 있는 것도 아니다. ‘누가 이 바다를 건너가서 그 법을 가져다 주지 않으려나?’라고 말하지도 말라. 그것은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신 30:11~14).

사도 바울도 믿음의 말씀에 관하여 우리에게 이와 같이 증언한다.
“믿음을 통해서 얻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누가 저 높은 하늘까지 올라갈까 하고 속으로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기 위해서 하늘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누가 저 깊은 땅속까지 내려갈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죽음의 세계에서 모셔 올리기 위하여 땅속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롬 10:6~7, 공동번역, 이후 ‘공역’으로 略. 비슷한 표현들이 바룩서 3:29-32, 35-37, 시라크서 1:1-3에도 있다).

신실하다 하는 많은 기독교인이 도마복음서와 같은 정경 외의 성서들을 성서로 간주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소위 ‘외경’에 대한 편견이 아니다. ‘정경’에 대한 곡해요 왜곡이요 무지인 것이다. 도마복음서의 출현이 정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경이라고 믿고 있는 문헌들의 이해를 풍요롭게 만들고 맥락적으로 더 심오하게 만든다.

가장 결정적인 사태는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신약성서 27서조차 제대로 읽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일요일 날 교회에 나가 들은 성서와 무관한 목사들의 설교로써 자기들의 신앙의 기준을 삼으며, 외부로부터 잡다하게 주입된,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과 말일 뿐인 그러한 가치관을 잣대로 하여 자기를 크리스천으로 규정하면서, 비록 교회는 나가지 않지만 성서를 깊게 상고하는 경건한 수행자들을 보고 크리스천이냐고 묻고 따지고 야단을 치는 것이다. 유대교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은 있으나, 신약에 주일을 지키라는 말씀은 없다. 큐자료 가설로부터 시작하여 양식사학운동, 역사적 예수의 탐구, 나그함마디 성서와 쿰란 사해문서의 발견, 영지주의의 재해석, 예수세미나운동 등등 20세기 한 세기 동안의 찬란한 신학논쟁사는 2000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해부하지 못했던 금단의 영역에 걸쳐 있던 금줄을 낱낱이 끊어놓았다는 기적 같은 사실을 이제 우리 조선 사람들도 정확히 인지해야 한다.

이미 기독교는 20세기 현대신학의 탐구를 통하여 다시 넘을 수 없는 다리를 넘었다. 프린스턴대학 석좌교수 엘레인 페이겔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도마복음서를 포함한 나그함마디 성서들이 1000년 전에 발견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이 소중한 성문서들은 이단서로 몰려 확실하게 불태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절묘하게도 이 문헌들은 땅속에서 잠자고 있다가 20세기 중엽에나 빛을 보았다. 바로 인간세의 문화적 진보가 이 문헌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관하여 참신한 시각을 제공할 수 있는 바로 그러한 시절에 발굴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성서들을 다른 눈을 가지고 읽는다. 광기나 불경으로서 내치는 것이 아니라 1세기의 신실한 기독교도들이 경험한 방식대로 읽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여태까지 알고 있었던 정통기독교 전통에 대한 강력한 얼터너티브가 아닐 수 없다.”(The Gnostic Gospels, pp.154~5).

누가복음의 예수 말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사람들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이해가 쉽다. 즉 세속적 인도자들이 천국을 외재화시키는 데 반하여 철저한 내재화·내면화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은 ‘내 맘속에 내 몸속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도마복음은 우리의 이러한 상념을 여지없이 깨버리고 만다. “진실로, 천국은 네 안에 있고, 네 밖에 있다.” 언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외재화를 반대하여 내재화를 주장했는데 어찌하여 또다시 “네 밖에”를 동시에 말하는가? 천국은 내 밖에 있는가? 또다시 저 푸른 하늘 위에 있단 말인가?

도마복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일상적 가치관은 또다시 전도된다. 그것은 우리 사고의 근원적 전환을 의미한다. 천국이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줄 안다면 동시에 천국이 바로 내 밖에 있다는 것도 깨달을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우리 동방사상에서는 전관(全觀)이라고 부른다. 일면의 상대적 논리로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相對)의 양단(兩端)을 동시에 긍정하는 것이다.

천국은 물론 내 안에 있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동시에 내 밖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의 천국운동은 식탁교제운동이었고, 소외와 빈곤의 극복이었고, 나눔이었고, 율법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이것은 나 밖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천국인 것이다. 천국은 내 ‘안의’ 관념이 아니라, 내 ‘밖의’ 실천이기도 한 것이다. 천국은 네 안에 있고, 동시에 네 밖에 있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출처 : (63) 천국은 네 안에 있고, 네 밖에 있다 - 안과 밖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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