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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네가 너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는 네가 곧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5 그러나 네가 너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너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그리하면 네 존재는 빈곤 그 자체이니라.”
도마복음서와 같은 코우덱스에 들어있는 도마서(The Book of Thomas)에는 예수가 그의 쌍둥이 도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네가 나와 일상적으로 걷고 있을 때는 비록 깊은 이해를 결하고 있지만, 너는 이미 앎을 획득하였도다. 그래서 너는 진실로 ‘자기 자신을 아는 자’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자기를 알지 못하는 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자기를 아는 자는 이미 우주의 심오한 진리를 획득하는도다.”(138, 14~19).
도마복음서의 논리가 좀 더 번잡하게 발전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도마서는 변자도마서(The Book of Thomas the Contender)라고도 불리는데 예수와 쌍둥이 도마가 둘이서 변론하는 것을 마타이아스(사도 마태?)가 기록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변자도마서도 도마복음서의 추구와 발견, 그리고 지배와 휴식의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도마복음서보다 후대의 작품이 분명하며 도마행전에는 선행한다. 도마복음서의 내용을 다양하게 편집하면서 발전시킨 흔적이 엿보이는데 이것은 초기 기독교운동이 끊임없이 새로운 텍스트들을 요구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상기의 논리에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이 강조되었다. 자기에 대한 앎(Self-Knowledge)이야말로 지식의 전부이며 그 앎이 곧 전 우주의 심오한 진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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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에도 이와 같이 쓰고 있다:“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전 8:3).
그 유명한 바울의 사랑장에도 이와 같은 표현이 있다:“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이러한 바울의 표현으로 미루어볼 때, 도마복음의 “알려진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 알려진다”는 것을 뜻함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 알려지는 조건이 무엇인가? 바로 너 자신을 아는 것이다. 여기서 도마와 바울은 크게 갈린다.
바울은 하나님께 알려지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사랑이란 암암리 지식, 즉 그노시스를 경계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그치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 지식 즉 그노시스는 사람을 자고(自高)케 만든다는 것이다. 너무 인간이란 존재에게 본질적인 자만심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마복음은 인간의 자기탐구에 대하여 한계를 지으려 하지 않는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알려지는 진정한 길은 인격화된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철저히 탐구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인간은 진정으로 알 때만이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덕을 축적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자기를 제어한다는 뜻이다. 자기를 지배한다는 뜻이다. 내가 나에게 왕이 된다는 뜻이다.
“네가 너 자신을 알 때, 비로소 너는 알려질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너는 네가 곧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여기서 논리적으로 전제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예수는 자기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임을 선포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되돌아보게 유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임을 자각하게 만드는 지혜로운 스승일 뿐이다.
갈라디아서에서도 바울은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매우 미묘한 입장을 취한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평범한 인간도 모두 하나님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아들이 된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진 사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 자신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 인간이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이 두 사태가 근원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또 내가 하나님의 아신 바 된다는 것은 결국 나와 하나님의 궁극적 합일(合一)을 암시하는 것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요 10:14~15).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이러한 요한복음의 상호내재(mutual indwelling)의 언사도 결국 하나님과 예수와 인간이 하나로 합일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발전은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을 허락하지 않았다. 바울도 유대화파나 영지주의적 온갖 분파와의 싸움에서, 확고한 자기의 헬라적 이념체계와 그것에 기초한 교회공동체 조직에 모든 것을 복속시켜야 했기에, 평범한 인간에게 그리스도와 동등한 신성을 부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도마복음은 이와 같이 확언한다. “네가 네 스스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너는 빈곤 속에 살게 되리라. 아니 네 존재는 빈곤 그 자체가 되고 말 뿐이다!”
인간이 부처가 될 수 있는가? 인간이 예수가 될 수 있는가?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너의 대답은 무엇이냐? AD 1세기의 초기 기독교 세계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아무런 금기 없이 논의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