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스크랩] (67) 묵시를 완성치 말고 낙원을 회복하라 - 자웅동체의 시간관

YOROKOBI 2009. 7. 11. 18:28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67) 묵시를 완성치 말고 낙원을 회복하라

 

자웅동체의 시간관

 

 

 

| 제74호 | 20080810 입력

 

 

이곳은 에데사왕국의 수도였던 우르파이다. 우르파의 왕 아브가르 우카마(Abgar Ukkama)는 피부병으로 심하게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팔레스타인을 들락거리는 상인들로부터 이적을 행하는 예수의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예수를 초청한다. 예수는 팔레스타인의 사역을 포기할 수 없어 가지는 못하겠으나, 자기를 보지도 않고 믿고 초청하는 에데사의 왕을 축복하는 편지를 보낸다. 그 예수가 직접 쓴 편지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발굴된 골동문서로서 실려있다. 예수는 편지와 함께 자기의 얼굴이 그려진 손수건에 땀을 닦아 보낸다. 그 손수건으로 상처를 어루만지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또 이곳 우르파는 아브라함이 탄생한 곳이다. 바빌로니아의 왕 니므롯(Nimrod)이 아브라함이 태어날 때 유일신을 퍼뜨릴 아이가 탄생하리라는 현몽의 예언을 듣고 아기 밴 여자와 아기를 다 죽이게 한다. 아브라함의 엄마는 임신을 숨겼고 몰래 동굴에서 아브라함을 낳았다. 헤롯 영아살해의 옛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장성하여 니므롯이 숭배하는 우상들을 파괴한다. 그러자 니므롯이 아브라함을 우르파 성에서 체포하여 성벽 밑에 타오르는 거대한 불구덩이로 그를 던진다. 이때 하나님이 불구덩이를 연못으로 변하게 했고 장작들을 잉어로 변하게 했다. 더 멋있는 버전에 의하면 아브라함을 사모하는 니므롯의 딸이 자기 몸을 성벽에서 던졌다고 한다. 임진권 기자


제4장
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이 먹은 어른이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삶의 자리에 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아니한다면, 그 사람은 생명의 길을 걸을 것이다.
2 첫째의 많은 자들이 꼴찌가 될 것이요,
3 또 하나된 자가 될 것이니라.”

성교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합일이요, 합일의 오르가슴을 통해 남성성과 여성성이 모두 사라지는 합체불(合體佛)의 체험이며, 음(陰)과 양(陽)이 끊임없이 왕래하고 소통되는 도(道)의 경지다. 도는 음만으로, 또는 양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끊임없이 음이 되었다가(一陰), 양이 되곤(一陽) 하는 것이다. 고대인들에게 성교가 단지 생산성의 컬트일 뿐 아니라 죽음과 부활, 그리고 모든 성스러운 제식의 심볼리즘으로 나타나는 것은 성교가 개인적 욕망의 분출이라기보다 어떤 코스믹한 차원의 의미체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후대의 기독교가 성교라는 행위를 단순히 인간 몸의 욕망의 어두운 그림자로 보고, 사망의 죄악의 주체로 파악한 것과는 전혀 다른 기독교의 모습이 도마복음서에는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도마복음은 종말론적 기독론(eschatological Christology)이 지배하기 이전의 원시기독교(proto-Christianity)의 다양한 운동의 실상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원시기독교’라는 말을 ‘초대기독교’(primitive Christianity) 이전의, 예수 사후 다양하게 발전한 예수운동들을 총괄하여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이것이 바로 그 연못이고 아직도 잉어가 우글거린다. 이 잉어들은 성물이라서 잡을 수 없다. 아마도 이곳은 에데사왕국 시절에는 도마기독교의 본산이었을 수도 있다. 이곳 우르파와 도마복음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우리는 사춘기 때, 주로 남성에게서 이러한 에로틱 판타지가 나타나겠지만, 자기 몸이 자웅동체(androgyne)였으면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성욕은 분출되고 메이팅의 짝은 구해지지 않고…. 그러나 이러한 에로틱 판타지는 신화의 세계에서는 코스믹 아키타입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창세기로 돌아가보자! 사실 창세기는 유대민족의 역사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바빌로니아로부터 페니키아에 이르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신화적 세계관의 한 전형일 뿐이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한 후에 진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어 만들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어 사람이라는 생명체를 만들었다(창 2:7). 그 사람이 곧 진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담아”(’adamah)에서 유래된 아담이다. 원래 아담이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일반명사이며, 특정한 개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아담, 즉 사람은 자웅동체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야훼 하나님은 본시 자웅동체인 사람 즉 아담을 만들었다. 그런데 자웅동체인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심심해 보이므로(창 2:18), 그의 갈빗대 하나를 뽑아서 여자를 만든 것이다(창 2:21~22). 그러니까 여자는 독자적인 존재로서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분화된 것이다. 즉 아담(사람)에 내재하는 여성성이 객화된 것이다. 그리고 아담과 여자의 분화야말로 인간의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고 역사의 시원이었다.

동양적 세계관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태극의 양면으로서 태초로부터 동등하게 존재하였다. 남(男)은 밭(田)과 보습(力)의 상형자를 합친 회의자(會意字)로서, 쟁기로 밭을 가는 힘센 일꾼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남성성인 아니무스의 모든 속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女)는 하늘하늘 굽이굽이 날씬한 이미지를 형상화한 글자라 하기도 하고, 무릎 꿇고 애기 낳는 생산의 모습의 상형이라고도 풀이된다. 여(女)라는 글자에 젖을 강조하면 두 젖꼭지가 나타나는 모(母)라는 글자가 된다. 하여튼 이것도 인류의 아니마적인 독자적인 아키 타입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 말을 보면, 창세기적 세계관이 영어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과 ‘남자’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 ‘맨’(man)이란 단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man)은 곧 남자(man)이고, 남자는 곧 사람인 것이다. 이에 비하면 여자는 ‘우맨’(woman)일 뿐이다. ‘우맨’이란, 여(女)와 남(男)이 독자적인 음·양의 구현체로서 엄존하는 것과는 달리, ‘맨’에 종속되는 개념이다. ‘우맨’(woman)은 ‘위프맨’(wifman)이라는 고대영어(OE)에서 왔는데, 위프(wif)와 맨(man)의 합성어이다. ‘우맨’은 맨의 배우자로서, 즉 성교의 짝으로서 분화된 종속적 존재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맨은 맨의 불완전한 형태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여성은 어떠한 속성의 결여이며, 그 결여 덕택에 여성은 여성이 될 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사도 바울에게도 명료하게 나타나고 있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남자는 머리에 베일을 덮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남자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하여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드러낼 뿐이므로 머리를 가려야 한다. 남자는 원래 여자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며, 여자가 바로 남자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남자는 여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며 여자야말로 남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고전 11:3~9).

오늘날 인권운동가나 여성운동가가 접하면 격분해야 할 이러한 바울의 메일 쇼비니즘(male chauvinism)은 사실 유대인 남자의 평범한 상식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초기기독교운동은 과연 이러한 쇼비니스틱한 바울의 수준에서 전개된 부활신화운동이었을까?

그러나 놀랍게도 도마복음서는 우리에게 원시기독교의 사상이 결코 이렇게 유치한, 메일 쇼비니즘의 권위주의를 표방한 운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도마기독교인들은 남자 속에 하나님의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공재한다면 여자 속에도 똑같이 하나님의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공재한다고 믿었다. 맨에서 우맨이 분화된 것은 불완전한 상태이므로 다시 원래의 아담, 원래의 맨, 원래의 사람으로 회복될 때만이 우리 인간의 몸은 온전하게 된다고 믿었다. 이 온전한 자웅동체, 즉 합체불, 즉 고양된 인간의 의식 속에서 나의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합일되는 엑스타시야말로 온전한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믿었다. 도마복음서 제22장은 이렇게 말한다:
“여성과 남성을 하나된 자(a single one)로 만들어라. 그리하여 남성이 남성이 되지 않고, 여성이 여성이 되지 않게 할지어다.”

여기 22장에서 말하는 ‘하나된 자’와 본장 즉 4장 3절의 ‘하나된 자’는 동일한 어휘를 사용한 동일한 표현이다. 바로 이 ‘하나된 자’라는 말을 바르게 해석할 때만이 제4장의 수수께끼들이 술술 풀려나가게 되는 것이다.

크로상은 말한다: “마태와 누가복음에 이미 들어있는 텍스트인 큐복음서만 해도 종말을 바라보고 있다. 모든 것이 종료된 이후의 완벽한 세계를 미래에 투사시켜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마복음서는 그 반대의 길을 선택하고 있다. 도마는 온전한 시작(a perfect beginning)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묵시를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 낙원을 회복시키려는 것이다. 이 현재 세계의 정상적 틀 속에서 창조의 여명으로(the dawn of creation) 되돌아 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Unearthing the Lost Words of Jesus, p.96). 적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출처 : (67) 묵시를 완성치 말고 낙원을 회복하라 - 자웅동체의 시간관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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