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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68) 아기는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질 않는다 - 어른과 아이

YOROKOBI 2009. 7. 11. 18:28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68) 아기는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질 않는다

어른과 아이

 

도올 | 제75호 | 20080817 입력

 

 

도마기독교의 성지 우르파의 전경. 에데사(Edessa)라는 이름은 알렉산더 대왕이 자기 고향 마케도니아에 있는 지역의 이름을 따라 명명한 것이다. 내가 서있는 곳은 아브라함이 살해될 뻔한 니므롯 성채인데, 니므롯왕의 전설은 창세기 10:8~12에도 나온다. 니므롯 왕이 이 두 기둥 사이에서 대관식을 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현존하는 성채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데 오랜 시간의 누적을 거쳐 만들어진 것으로 사료된다. 기둥은 코린트 양식. 예수를 초청한 아브가르 우카마 왕도 이곳에서 우리의 주인공 도마를 접견했다. 임진권 기자

 

제4장

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이 먹은 어른이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삶의 자리에 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아니한다면, 그 사람은 생명의 길을 걸을 것이다.
2 첫째의 많은 자들이 꼴찌가 될 것이요,
3 또 하나된 자가 될 것이니라.”

제3절의 ‘하나된 자’에 관한 올바른 해석을 내리게 되면, 우리는 이제 4장의 전체적 의미를 해독하는 결정적 열쇠를 손에 쥐게 된다. 많은 주석가들이 영지주의니 무슨 주의니 하는 틀에 따라 타 출전과의 상관관계를 밝히고 세부적으로 구문들을 분류하고 분석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고전의 해석이란 어디까지나 보편적 인간(Universal Man)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시대적 가치관이나 특수한 상징성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소기하고 있는 보편적 인간의 삶의 의미를 우리는 끊임없이 캐물어야 한다. 그들은 도대체 왜 이러한 언어를 구성하여 타인에게, 후대에게 전달하려 했을까? 여기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나이 먹은 어른’(the man old in days)과 ‘칠일 갓난 작은 아이’(a small child seven days old)의 대비다.

나이 먹은 어른이란 많은 날을 산 사람이다(old in days). 우리 통념의 세계에서는 나이 먹은 어른이란 지혜롭고, 인생의 길에 관하여 어린이보다 더 경험이 풍부하고 통찰력이 있다고 전제된다. 그리하여 어른과 어린이의 관계란, 어린이는 어른에 의하여 인도되어야 하며, 어린이는 어른에게 인생의 지혜에 관하여 가르침을 얻어야 하며, 묻기만 하고 함부로 말대꾸를 해서는 아니 된다. 어린이는 어른에게 복종하고 잘 따르기만 하면 착하다 칭함을 얻는 것이다. 도마복음서의 위대성이란 바로 이러한 우리의 통념적 가치관을 전도(Inversion)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전도가 없으면 발견은 일어나지 않는다. 추구와 발견의 대상은 천국이다.

니므롯 성채에 앉아 있는 쌍둥이(디두모). 아버지는 산리우르파의 청년 메흐메트 알리(Mehmet Alli), IT산업에 종사한다고 했다. 나보고 자기 집에 가서 식사를 같이 하자고 조른다. 그들은 아직도 이토록 풍요로운 인심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천국이란 바로 우리의 일상적 가치를 전도시키는 데서 등장하는 신천지인 것이다. 『노자』 제55장을 한번 펼쳐보자! 놀랍게도 우리는 도마복음 제4장의 다른 버전을 발견하는 듯한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덕을 머금음이 도타운 것은 갓난아기에 비유될 수 있다.
벌이나 뱀도 그를 쏘지 않고
맹수도 그에게 덤비지 않고
날새도 그를 채지 않는다.
(含德之厚, 比於赤子. ,
猛獸不據, 攫鳥不搏.)

뼈가 여리고 근이 하늘한데도
꼭 움켜쥐면 빼기 어려우며,
암수의 교합을 알 까닭이 없는데도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오로지게 꼴린다.
정기의 지극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매일 하루가 다 하도록 울어 제키는데
그 목이 쉬질 않는다.
조화의 지극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骨弱筋柔而握固, 未知牝牡之合而全作,
精之至也. 終日號而不 , 和之至也.)

조화로움을 아는 것을 항상성이라 하고,
항상성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고 한다.
삶에 늙음을 덧붙이는 것을 요상함이라고 한다.
마음이 몸의 기를 부리는 것을 강하다 한다.
사물은 강장하면 곧 늙어버리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도(道)답지 않다고 한다.
도답지 않으면 일찍 사라질 뿐이다.
(知和曰常, 知常曰明, 益生曰祥, 心使氣曰强,
物壯則老, 謂之不道. 不道早已.)

여기 ‘칠일 갓난 작은 아이’라는 표현은 그냥 ‘갓난아기’라는 사실적 사태가 아니다. 카를 융이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내 몸속에 내재하는 아키타이프로서 말했듯이, 여기 ‘어른’과 ‘아이’ 또한 내 몸속에 내재하는 이러한 아키타이프를 지칭하는 것이다. 도마복음의 모든 언어는 상징체계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생후 제8일에 할례를 받는다(창 17:12). 따라서 칠일 갓난 아이는 할례라는 문명 관습 체계에 편입되기 이전의 순결한 혼돈 상태를 상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유대인의 습관 속에서 나온 이미지는 아닐 것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야훼 하나님은 6일 동안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창조하였다. 그리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었다. 창조가 6일 만에 완성된 것이다. 여기 ‘칠일 갓난 작은 아이’라는 것은 안식일의 아이(a child of the sabbath)다. 즉 천지의 온전한 모습이 다 구유된, 다 완성된 아이인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정기의 지극함(精之至)과 조화의 지극함(和之至)이 구유된 존재인 것이다. 나는 의과대학에서 소아과학(pediatrics)을 공부할 때 교과서 첫 페이지를 펴보고 거기에 쓰여져 있는 첫 문장에 충격을 받았다: “어린아이는 어른의 작은 형태가 아니다.”(A child is not a small adult.)

도마복음의 살아 있는 예수 말씀의 가장 신랄한 메시지는 나이 먹은 어른이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삶의 자리(the place of life)에 관하여 묻는 것을 주저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삶의 자리”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동일한 표현이 도마복음서 내에도, 또 다른 출전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맥락상 그 의미는 절로 명백해진다.

도마복음 제58장에 이런 예수의 말씀이 있다: “수고하는 자는 복되도다! 그는 삶을 발견했기 때문이로다.” 여기 ‘수고함’이란, ‘추구하고 발견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말한다. 실제로 육체적 노동을 의미할 수도 있다. 우리는 노력을 해야만 비로소 삶의 길, 즉 생명의 길을 발견할 수 있다. 노력 없이 생명은 얻어지지 않는다.
‘삶의 자리’란 곧 삶이 이루어지는 마당이다. 그러나 그 마당은 항상 끊임없이 변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인생의 역정이란 삶의 자리를 찾아 나서는 과정이다. 우리가 어디를 간다는 것도 결국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우리에게 권고하는 것은 삶의 자리를 어른스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삶의 자리를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삶의 자리 그 자체를 항상 어린이답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말했다. 삶에 늙음을 덧붙이는 것은 요상함이다. 마음이 몸의 기를 부리는 것은 강함이다. 그러나 사물은 강하면 곧 늙어버리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도답지 않다고 한다. 도답지 않다, 즉 부도(不道)란 예수에게 있어서는, 천국의 도래를 거부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지칭하는 말이다. 공자(孔子)도 항상 제자 안회(顔回)가 자기를 계발시킨다고 기뻐했다.
출처 : (68) 아기는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질 않는다 - 어른과 아이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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