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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2 첫째의 많은 자들이 꼴찌가 될 것이요,
3 또 하나된 자가 될 것이니라.”
누가복음 10장에는 어린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다른 맥락에서 전개되고 있다. 큐복음서에 속하는데, 마태보다는 누가 텍스트가 더 오리지널에 가깝다.
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더라.(눅 10:21~22, Q32)
여기서 이미 우리는 도마복음 자료가 큐복음서 자료로 변형되어 간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도마에서는, 어린 아이가 자각적 추구의 대상이며 나의 존재의 측면으로서 나타난다. 추구(seeking)와 발견(finding)의 실존적 결단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어린 아이는 존재의 웅혼한 원초성의 기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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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 자료에 속하는 또 하나의 파편을 살펴보자! 마가를 변형시킨 마태의 텍스트를 인용하겠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마태 18:1~5, cf. 막 9:33~37, 눅 9:46~48)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이라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도마의 원형의 자취를 읽을 수 있다. ‘돌이킨다’는 표현 속에 어떤 원초성으로의 복귀, 상향이라는 역방향이 암시되어 있다. 그러나 마가(누가)에서는 제자들끼리 누가 더 위대하냐 식의 유치한 분별심의 경쟁을 하는 전체 맥락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마태에서는 천국 입장이라는 초대교회의 종말론·재림사상의 맥락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어린 아이의 이미지가 ‘자기를 낮춤’이라는 겸손과 복종의 도덕적 가치로 전락되었다. 지금도 대부분의 신학도가 이 구절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이상적인 어린이의 덕성의 맥락에서만 해석하고 있다.
순결(innocence), 무구(purity), 무조건적 신앙(unconditioned faith), 겸손(humility),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무관심(unconcern for social status)… 이러한 도덕적 개념이 어린이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도마의 내면적, 원초적, 본질적 웅혼함의 맥락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자잘한 도덕관념들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어린 아이를 영접함이 곧 나를 영접함이라는 예수의 메시지는 교조화된 기독론의 전제가 없이는 생겨날 수 없는 말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가 너무 외재화되어 있다.
도마복음의 본장은 1절의 ‘갓난 아이’ ‘삶의 자리’ ‘생명의 길’이라는 메시지를 대전제로 깔면서 2절의 ‘첫째’와 ‘꼴찌’의 논의를 통하여 3절의 ‘하나된 자’에서 클라이막스에 오르는 장쾌한 논리적 구조를 과시하고 있다. 그런데 첫째와 꼴찌의 논의는 큐복음서에도 이미 언급되어 있다.
지금 꼴찌 된 자들이 첫째가 되고, 지금 첫째 된 자들이 꼴찌가 되리라.(Q65, 마 20:16, 눅 13:30)
그런데 여기서는 분명 꼴찌가 나쁜 것이고 첫째가 좋은 것이라는 가치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현세에서는 별 볼일 없는, 꼴찌 된 자가 천국에서는 첫째가 될 수 있고, 현세에서 잘나가고 부귀권세를 누리는, 첫째 된 자가 천국에서는 오히려 꼴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메시지가 현세적 가치의 전도와 천국의 실존적 의미를 결합시키는 메타포로서 사용될 때는 탁월한 표현이 되지만, 예수의 재림이나 최후의 심판이라는 역사적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전후상황을 말한 것으로 해석하면 치졸하기 그지없는 메시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최후의 심판 전까지는 별 볼일 없는 꼴찌로 살아도, 예수만 잘 믿으면 최후의 심판 후에는 첫째가 될 수 있다는 종말론적 신앙이 이 구절을 해석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도마복음에서는 맥락상 ‘첫째’라고 하는 것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어른의 무리요, 죽음의 무리요, 하향의 무리다. 오히려 ‘꼴찌’가 되는 것이 갓난 아이 쪽으로 가깝게 가는 것이요, 생명의 무리요, 상향의 무리다. 첫째의 모두(all of the first)가 꼴찌가 되는 것이 아니요, 첫째의 일부만 선택되어 꼴찌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첫째의 많은 자들”(many of the first)이라는 표현에 우리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이것과 동일한 표현이 그 의미맥락은 같지 않지만, 마 19:30과 막 10:31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꼴찌를 가치적으로 긍정하는 맥락이 막 9:35에도 나타나고 있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꼴찌가 되어야 하며….”
도마복음 콥트어 텍스트에는 첫째가 꼴찌가 된다는 말만 있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말은 없다. 그러나 옥시린쿠스사본에는 후자가 병기되어 있다: “첫째의 많은 자들이 꼴찌가 될 것이요,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같은 하나가 될 것이다.” (For many of the first will be last, and the last first and will become one and the same.)
희랍어 텍스트는,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것이, 결국은 첫째와 꼴찌가 하나로 융합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모든 분별이 사라져버린 웅혼한 원초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콥트어 사본의 ‘하나된 자’(a single one)나 희랍어 사본의 ‘같은 하나’(one and the same)는 결국 어른과 아이, 죽음과 생명, 첫째와 꼴찌의 융합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웅동체의 원초성(androgynous primordiality)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결국 상향의 동경을 가지고 하향의 길을 걸어간다. 아이에게 물어가면서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발랄함을 지니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상향과 하향, 아이와 어른, 생명과 죽음이 결국 하나의 혼돈(Chaos)이라는 것을 도마복음의 예수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