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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플라톤(화자는 소크라테스)은 참주정체적 인간을 묘사하는데, 마치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서 에고(Ego)와 이드(Id)의 관계를 말하는 듯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잠들었을 때 깨어나는 욕구들일세. 혼의 다른 부분이, 즉 이성적이고 유순하며 지배하는 모든 부분이 잠들 때면, 짐승 같고 사나운 부분은 잔뜩 먹고 마시고서는 발딱 일어나 잠을 물리치고 나가서는 제 기질을 충족시키려 꾀하지. 그런 때에 그것은 일체의 부끄러움과 분별에서 풀려나고 해방된 터라, 무슨 짓이든 감행한다는 것을 자네는 알고 있네. 그것은 상상하게 되는 데 따라 어머니와도, 그 밖의 인간들이나 신들 중의 누구와도, 또는 짐승들 중의 어떤 것과도 섹스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누구든 살해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거니와, 어떤 음식이든 삼가는 일도 없다네. 한마디로 말해서, 어리석거나 파렴치한 짓을 빼놓지 않고 저지른다네.”(Republic 571c)
그는 참주적 인간의 탄생을 내부의 양심적 절제를 숙청하고서 밖에서 들여온 광기로 자아를 가득 채우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혼(魂)의 상(像, eikon)을 세 측면에서 형상화한다. 하나는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형태의 짐승으로 형상화하고, 하나는 사자의 형태로, 또 하나는 사람의 형태로 형상화한다.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짐승은 인간의 혼의 다양한 욕구를 상징하고, 사자는 격정을 상징하고, 사람은 헤아릴 줄 아는 이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세 형상을, 키마이라(Chimaira), 스킬라(Skylla), 케르베로스(Kerberos)가 여러 형태가 하나로 합쳐진 것과 같이, 하나로 합쳐서 하나의 생물로서 자라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의 생물은 하나의 인간으로 보이도록 외피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외면으로 보면 하나의 인간이지만, 그 내면에는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짐승과 사자와 사람의 세 형상이 들어 있어 제각기 싸우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 속에 사람과 사자와 다두수(多頭獸), 세 존재가 같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셋이서 서로 물어뜯으면서 싸우다가 서로 잡아 먹도록 내버려 두라고 말한다(589a).
나는 도마복음을 읽으면서 본장을 접했을 때, 심한 당혹감과 함께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본장이 해독되는 순간의 짜릿한 감동을 독자들에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기 사자는 주로 인간에 내재하는 정욕, 욕정, 특히 성적 갈망(sexual desire)을 상징한다. 이러한 상징성은 당대의 문헌들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사실 순수하게 색정(色情)에 빠져본 일이 있거나 아편 중독에라도 걸려본 사람들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메타포의 강렬함에 깊은 공감을 느낄 것이다. 인간의 색정은 인간에게, 즉 플라톤이 말하는 내면의 사람에게, 사자처럼 덮친다. 성서에서도 사자는 항상 위험과 괴력의 상징이다. 삼손도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사자를 맨손으로 갈기갈기 찢어버린다(사 14:5~6). 맹자(孟子)도 고자(告子)와 식색지성(食色之性)에 관하여 논쟁을 펼치지만, 하여튼 인간에게 항상 사자처럼 덮치는 것은 식색의 욕정이다. 고자는 그것을 인간의 본성으로 규정하려 하지만, 맹자는 그것이 인간의 본래적 바탕일 수는 없다고 전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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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말한다: “사람에게 먹힌 사자여! 그대는 복되도다! 그대는 사람이 되었기에.” 사자가 사람에게 먹히면, 사자는 사람이 된다. 즉 욕정이 이성으로 고양되는 것이다. 주석가들은 여기까지 제1절의 해석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문제는 제2절의 해석이다.
1절에서는 사람이 사자를 먹었지만, 2절에서는 사자가 사람을 먹는다. 욕정이 이성을 잡아 삼키는 상황은 분명히 비극적 상황이다.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이제는 사람이 사자가 되어야 한다. 사람이 사자를 먹어서, 사자가 사람으로 고양되었다면, 사자가 사람을 먹으면 당연히 사람이 사자로 비하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주석가들은 제2절은 텍스트 코럽션(text corruption)이 개재되어 있다고 본다. 콥트어 사경자들의 에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자가 된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사람 내부의 문제이기 때문에 실제로 사람이 사자로 변형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제2절의 “사자가 사람이 될 것이로다”(and the lion will become human.)는 결국 사람다운 사람은 사라지고 사자가 되어버린 사람만 남는다는 것이다. 2절의 ‘사람’은 플라톤이 형상화한 언어를 따르자면, 내면의 사람이 죽어버린, 사자가 사람 노릇을 하는 그러한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스테반 데이비스는 말한다: “제2절은 무지와 악이 인간을 점령하여 인간을 인간 이하로 변모시킨 그 무엇을 말하고 있다.”(The second clause speaks of ignorance and evil taking over a human being and turning a human into something less than human. Stevan Davies, The Gospel of Thomas, p.8)
인간의 죄악은 궁극적으로 모두 내 속에 있다.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다(도 14, 마 15:11, 막 7:15). 본장의 주제는 내 실존의 내면의 추구와 발견이라는 도마복음의 전체 테마와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 세례 요한이 금식과 절제를 행한 금욕주의자였다면 예수는 당시 비방인들로부터 “게걸스러운 탐식가”(pharos, a glutton)요, “술주정뱅이”(oinopotes, a drunkard)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금욕이라는 문제를 경시한 식탁교제운동가였다(마 11:19, 눅 7:34, Q26). 그러기에 금욕주의적인 본장이 예수의 오리지널한 로기온이 아닐 것이라고 말하는 주석가들도 있으나, 예수는 타인에게 금욕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본인은 끊임없이 사자를 삼켜 먹을 수 있는 절제의 인간이었다.
사자를 먹자! 덮치는 사자를 삼키자! 나는 이 말 속에서 무위진인(無位眞人) 임제(臨濟 ?~867)의 날카로운 할성(喝聲)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