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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보라! 씨 뿌리는 자는 나갔다. 한 줌의 씨를 손에 가득 쥐고 그것을 뿌렸다. 2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쪼아 먹어 버렸고, 3 더러는 돌 위에 떨어지매 땅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이삭을 내지 못했고, 4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기운을 막았고 벌레가 삼켜버렸다. 5 그리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그것은 좋은 열매를 내었다. 그것은 육십 배, 그리고 백이십 배의 결실이 되었느니라.”
1 Jesus said, “Look, the sower went out, took a handful of seeds, and scattered them. 2 Some fell on the road, and the birds came and pecked them up. 3 Others fell on rock, did not take root in the soil, and did not produce heads of grain. 4 Others fell on thorns, and they chocked the seeds and worms devoured them. 5 And others fell on good soil, and it brought forth a good crop. It yields sixty per measure and one hundred twenty per measure.”
감격이다! 도마복음에서 그 유명한, 공관복음서의 대표적인 비유로 꼽히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The Parable of the Sower)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감격이 아니고 무엇이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마가(4:3~8)·마태(13:3~8)·누가(8:5~8)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가 공관자료(synoptic materials)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태와 누가에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큐복음자료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마태·마가·누가 중에서는 물론 마가 자료가 조형(祖型)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은 도마와 마가가 된다. 마가복음과 도마복음을 같이 펼쳐 놓고 비교해 보면 도마복음이 마가복음의 원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마태·누가→마가→도마). 이것은 나 도올의 사견이 아니라 예수의 비유를 연구하는 모든 신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마가보다 더 원형에 가까운 예수의 말씀을 도마에서 발견한다는 이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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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막 4:11~12).
남이 쉽게 알아들어 깨닫지 못하게 하고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비유로 말하는 이유라고 하는, 좀 야비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런 말을 예수 입으로부터 듣는다는 것은 도무지 껄끄럽다. 여기 이미 특수집단의 폐쇄성이 전제되어 있다. 즉 제자 집단과 외인 집단의 이원성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비유는 전자에게는 열려 있지만 후자에게는 닫혀 있다. 그러므로 특수한 예수의 설명이 필요하게 된다.
예수는 원래 비유로 말하기를 좋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비유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왜냐? 그것은 어린아이라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너무도 명백하고 단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알아들으라고 말한 것이지 알아듣지 말라고 비유로 말한 것이 아니다. 예수의 비유는 예수의 많은 로기온 자료 중에서도 가장 예수의 생생한 육성을 전하는 오리지널한 자료로서 정평이 있다. 예수의 비유는 어떠한 유대교 전통의 지혜문학이나 어떤 랍비의 교설에 비교해 보아도 그 단순 명료한 강렬함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비유의 전승은 우리를 역사적 예수에게로 가깝게 데려간다. 너무도 단순 명료하기 때문에 어린아이라도 “네, 바로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도록 휘몰아간다.
그러나 예수의 사후, 이미 10년 안에 벌써 이 비유들은 어떤 천국의 비밀을 간직한 비의적인 사태로서 신비화되기 시작하였고 교회 내부의 사람들과 외부의 사람들을 이원화시키는 열쇠처럼 추상화되어 갔다. 마가복음의 기술만 해도 이미 완벽하게 기독론적인 해석(Christological interpretation)을 깔고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에 수록된 예수 자신의 해설을 들어보자!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씨와 말씀이 개념적으로 대응된다.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사탄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미 교회라는 공동체를 수용한 사람과 그 수용자를 박해하는 사탄(Satan)이 이원적으로 대립되고 있다. 결국 예수의 씨 뿌리는 자의 평화로운 비유가 사탄과의 대결이라는 긴박한 사태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를 비유한 것이다.” 이것도 이미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묵시적 경고와 별 차이가 없다. 기독교공동체의 사람들에게는 환난과 핍박이 있게 마련이며, 이 환난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뿌리가 뽑히는 자들의 모습이 이러하다는 것이다. 즉 초기교회공동체에 대한 변절이나 배반에 대한 경고가 들어있는 것이다.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망이 들어와 말씀이 가리워 결실치 못하는 자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인욕(人欲)의 대립관계를 설정하는 바울신학적 해석이 들어와 있다.
예수의 비유가 과연 마가가 제시하는 이러한 해설 속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인가? 도마는 해석은 읽는 자들이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라 했다(도1). 그러나 벌써 마가복음만 해도 예수의 비유의 해석이 마가복음서 기자에 의하여 독자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브레데의 “메시아 비밀”과는 또 다른 차원의 마가복음의 문제점이다. 도마복음서에 일체 이러한 해석이 명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도마복음서의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