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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장
1 Jesus said, “Blessed is the one who came into being before coming into being. 2 If you become my disciples and listen to my words, these stones will minister to you. 3 For there are five trees in Paradise for you; they do not change, summer or winter, and their leaves do not fall. 4 Whoever knows them will not taste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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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도마복음을 복음서로서 이름 짓는 것은 원 텍스트의 말미에 “유앙겔리온(복음)”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기 때문인데, 도마복음의 복음의 의미와 공관복음서의 복음의 의미는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다른 함의를 지닐 수 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good news)”이다. 마 11:5에는 종말에 대한 기쁜 소식이 전파되며, 눅 16:16에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이 전파되고 있다. 그러나 도마의 기쁜 소식은 종말론이나 기독론적 함의를 지니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이 신화적 담론에서 벗어나 있다. 따라서 도마복음은 결코 영지주의적 담론의 소산으로 보기 어렵다. 영지주의라는 것 자체가 일괄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대부분 유치한 신화적 코스몰로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도마는 그러한 신화적 코스몰로지를 전제로 하기보다는 매우 견고한 우리의 상식에 호소하는 측면이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장의 성격은 그러한 방식으로 도마를 규정하는 상식적 담론의 틀을 깨버린다. 도마도 역시 중층적으로 담론의 틀들이 엇갈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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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상의 배경에는 영지주의가 깔려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고전 15:44~49에는 바울이 이러한 세계관을, 희랍적 영육 이원론의 틀 속에서 철저히 부활을 정당화하는 논리로서 사용하고 있다.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대비시키고 있는데 첫 사람 아담은 육의 인간이며 땅의 사람이고, 마지막 아담, 즉 부활한 인간은 영의 인간이며 하늘의 사람이다. 도마의 존재-전-존재는 바울의 마지막 아담과 상통한다. 요한은 로고스를 예수에게만 국한시키고 있지만 도마는 그러한 가능성을 모든 인간에게 허용한다. 그래서 존재하기 전에 존재한 자들이야말로 복되도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한 로고스적 가능성을 소유한 인간이 “나의 제자가 되어 내 말을 듣는다면, 이 돌들도 너희를 섬기게 되리라.”
“내 말을 듣는다”는 것은 제1장에서 말한 바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진지한 과정이다. 인간과 돌 사이에는 또다시 존재의 하이어라키가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도마는 암암리에 인간의 차원과 돌의 차원을 대적적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큐 자료에 속하는 마 3:9(눅 3:8)에는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식의 표현이 있고, 예수의 광야 시험 장면에서도 사탄은 예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유혹한다(마 4:3, 눅 4:3). 마 7:9에는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겠는가”라는 식의 표현이 나온다.
이러한 표현은 모두 돌과 떡을 대비시키며, 또 영에 대하여 육의 욕구인 떡을 비하시키고 있다. 그러나 도마는 돌이야말로 떡이라고 하는 생명의 일체감을 암시하고 있다. 돌과 같은 존재조차도 나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데 필요불가결의 것이다. 사람은 광물을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말씀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돌과 같은 저차원의 물질과도 생명적 일체감을 형성하게 된다.
파라다이스의 다섯 그루 나무라는 표현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창 2:9에는 “야훼 하나님께서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에덴의 땅에 돋아나게 하셨다”는 표현이 있다. “파라다이스”라는 표현은 원래 페르시아말로서 “정원”이라는 뜻이다. 그 페르시아말이 셉츄아진트 번역자들을 통하여 에덴의 동산을 가리키는 말로서 유대문화권에 들어왔다. 신약에서는 지상의 정원이 아닌, 지상의 모든 죄악이 말소된 새로운 차원의 낙원을 의미한다. 예수는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파라다이스에 있으리라”고 말한다(눅 23:43). 묵시문학에서는 파라다이스의 상실은 인간의 체험 속에서의 신의 존재의 상실을 의미하며 구원을 파라다이스의 복원으로 생각한다. 실낙원(失樂園)과 복낙원(復樂園)이라는 드라마가 생겨나는 것이다.
나는 본 장의 “파라다이스 다섯 그루의 나무”를 인간의 오관(五官·five senses)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색·성·향·미·촉에 상응하는 오관이 세속적 죄악에 물들지 않는 상태를 “계절에 따라 변하지도 않으며 그 잎사귀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 불멸성·불변성을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다”고 다시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불멸을 말한 것이 아니라, 맛본다고 하는 삶의 행위 속에 죽음의 요소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1장, 18장, 19장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라는 표현을 마지막에 공유함으로써 그 상관성을 과시하고 있다. 관련된 표현이 요 8:52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