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20장
유대인들의 관념 속에서 백향목의 이미지는 절대적이고 신성한 그 무엇이다. 사막지대에는 높은 것이 없다.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라는 높고 영원한 석축물을 만드는 그 마음에도 고딕 건물을 짓는 사람들의 향상심(向上心)과 비슷한 그 무엇이 있다. 피라미드도 그들에게는 하늘을 찌르는 듯한 백향목의 다른 표현이었다. 에스겔 31장에 나오는 야훼의 예언을 보라. “너 사람아! 이집트 왕 파라오와 그 무리에게 일러라! 네 큰 위엄(威嚴)을 무엇에 비교할까? 가지가 멋지게 우거져 그늘이 좋고 키가 우뚝 솟아 꼭대기 가지는 구름을 뚫고 뻗은 레바논의 백향목만큼이나 크다고 할까?”(겔 31:2~3).
|
우선 재미있는 사실은, 도마자료와 마태·누가의 공통자료인 큐자료와 마가자료, 이 셋을 비교하여 보면, 도마자료는 큐자료보다 마가자료에 오히려 더 가깝게 간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누가에 없고 마가에 나타나는 “가장 작은-가장 큰”의 최상급 대비(superlative contrast)가 드러나 있으며, 정원이나 채마밭의 원예가 아닌 야생의 상황도 마가에 더 접근한다.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 선행의 가르침인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연속선상에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이 대붕의 등 길이가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날개를 한번 퍼득여 수면을 치고 날면 3천리, 한번 떴다 하면 9만리(九萬里)를 간다. 그런데 『이아』나 『설문』에 “곤”을 해설하기를 “물고기로 태어나기 이전의 어란을 가리킨다(魚子未生者曰鯤, 鯤卽魚卵)”라고 했다. 명태 알주머니에 들어 있는 알갱이 하나가 곧 곤이다. 곤이야말로 겨자씨보다 훨씬 작은 것이다. 그런데 이 곤이 하늘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도 같은 대붕으로 화(化)하는 것이다. 마이크로 코스모스와 매크로 코스모스가, 고양된 인간의 정신세계 속에서는 하나로 융합되는 것이다. 명태알 하나가 천지를 소요할 수 있다. 이것은 전 우주를 호령할 수 있는 육척단구 인간의 정신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장자의 메타포이다. 물론 예수의 겨자씨 비유도 이러한 장자적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보통 겨자씨의 비유는 천국운동이라는 사회적 맥락에서만 해석되어 왔다. 천국운동의 작은 씨라도 뿌려만 놓으면 결국 레바논의 백향목이 우거지듯 거대한 결실을 맺고야 만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도마텍스트에 있는 “그것이 잘 갈아놓은 땅에 떨어지면”이라는 구문은 이 비유가 사회적 맥락에서 발설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정신 내면에 관한 것일 수 있다는 심증을 굳게 해준다. 예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정신적 토양을 지닌 사람이라면 결국 그 내면의 세계는 하늘의 새가 깃들 수 있는 백향목과도 같이 웅장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붕의 소요와도 같은 정신의 고양(高揚)을 상징하는 것이다. “공중의 새”가 아닌 “하늘의 새”라는 표현도, 하늘적 인간정신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씨의 썩음”을 씨의 트랜스포메이션의 결정적 계기로 규정한다(고전 15:35~44).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한다 …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바울은 부활을 육과 영의 희랍철학적 사유로 정당화시키고 있다. 육의 썩음이 곧 영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겨자씨의 썩음이 곧 백향목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겨자씨 초본→관목→교목에로의 질적 비약은 “썩음” 혹은 “죽음”이라는 계기로써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과연 이러한 바울의 논리를 선포한 사람이었을까? 나는 팔레스타인에 가서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겨자씨를 연구해 보았다. 예수가 비유에서 활용한 겨자는 야생식물로서 학명이 브라씨카 니그라(Brassica nigra)라고 하는 흑겨자이다. 우리가 현재 흔히 먹는 황갈색의 겨자는 브라씨카 준케아(Brassica juncea)라는 것으로 히말라야 원산인데 미국·캐나다·헝가리·영국 등지에서 재배되고 있다. 동양에서 약재로 쓴 것은 백개자(白芥子, Sinapis alba)이다. 흑겨자는 근원적으로 재배의 대상이 아닌 잡초에 불과하다. AD 200년경에 편찬된 유대인 랍비의 계율서, 『미쉬나』에도 겨자씨는 정원이나 밭에는 뿌려서는 안 되는 금지종에 속해 있다. 흑겨자는 벌레나 이파리 병을 타지 않으며 악조건의 기후에도 자유롭게 번식하며, 타 식물의 영역을 마구 침범하기 때문에 밭을 금방 망쳐버린다. 거대한 평원에서 잡초로서 자유롭게 자라지 않으면 아니 되는 운명의 종자인 것이다.
이러한 팔레스타인 야생 겨자의 특성을 생각할 때 예수의 비유는 본시 매우 상식적인 의미맥락에서 이루어진 메타포였을 것이다. 자기가 선포하는 천국운동의 잡초적 성격, 즉 아무 데나 씨를 던지기만 해도 무성하게 자라 평원을 휘덮고 만다는 대중운동적 신념을 말한 것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수평적 확산을 말했는데 복음서기자들은 이것을 수직적 확대로 변형시킨 것이다. 그러한 변형태에 도마는 인간 정신의 고양이라는 내면적 성격을 추가하였는데, 결국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은 바울의 부활론과 함께 종말론적 맥락을 첨가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