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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1 Mary said to Jesus, “What are your disciples like?” 2 He said, “They are like children living in a field that is not theirs. 3 When the owners of the field come, they will say, ‘Give our field back to us.’ 4 They take off their clothes in front of them in order to give it back to them, and they return their field to them. 5 For this reason I say, if the owner of a house knows that a thief is coming, he will be on guard before the thief arrives and will not let the thief break into the house of his estate and steal his goods. 6 As for you, then, be on guard against the world. 7 Arm yourselves with great strength lest the robbers find a way to get to you, 8 for the trouble you expect will surely come. 9 Let there be among you a person who understands. 10 When the crop ripened, the person came quickly with sickle in hand and harvested it. 11 Whoever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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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에서는 주어가 모두 복수로 되어 있는데(아해들, 주인들), Ⅱ에서는 주어가 단수로 되어 있는 것도(주인, 도적), 그 나름대로 합당한 해석의 여지는 있을 수 있겠지만 일차적으로 텍스트의 전승이 다른 데서 오는 문제일 수도 있다. 해석에 있어서도 Ⅱ의 내용을 예수 메시지의 주간(主幹)으로 간주하는 데 모든 주석가들이 일치하고 있지만, Ⅰ의 내용을 긍정적인 맥락에서 볼 것인가, 부정적인 맥락에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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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의 내용을 부정적인 맥락에서 해석하면 “아해들”은 자기의 것이 아닌 곳에서 살고 있는, 즉 비본래적 자아 속에서 살고 있는 거짓 제자들이다. “아해들”(children)이란 번역은 콥트어 “세레 셈”(sere sem)에서 왔는데, 이 말은 희랍어의 “파이스”(pais)에 해당된다. 파이스는 아이, 아들, 또는 종, 노예, 하인(눅 7:7, 15:26, 마 14:2)의 뜻이다. “그들은 그들의 것이 아닌 밭을 위탁받은 종들과도 같도다”의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조차도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인들이 오면 옷과 밭을 다 빼앗기고 만다.
그러나 Ⅰ의 내용을 긍정적인 맥락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 “옷을 벗는다”는 표현은 도마복음 37장에도 매우 긍정적인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 부끄럼 없이 옷을 벗을 때만이 진정으로 예수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해탈”과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말하고 있는 “육신의 집 위에 하늘의 집을 덧입는다”(고후 5:4)는 메타포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것이 아닌 밭”은 “육신의 집”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 육신의 주인이 왔을 때, 그들에게 옷을 벗어던진다는 의미는 “해탈”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본래적 자아의 회복이라 말할 수 있다.
5~9절의 내용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세상과의 대적적 관계가 암시되고 있다. 예수의 제자됨은 필연적으로 세속적 가치로부터의 소외를 동반한다. 코스모스는 방비되어야 할 위협으로 나타난다. 그만큼 예수운동이 실제로도 험난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동시에 세속적 가치로 함몰되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자기수양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도마의 5~9절 내용은 마 24:43과 눅 12:39에도 나타나고 있다(Q55). 그러나 도마자료와 비교해 보면 큐자료는 이미 내면적 수양에 관한 도마의 맥락을 철저히 인자담론의 종말론적 협박으로 변형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눅 12:40). 도마에는 그런 종말론적 맥락이 배제되고 있다.
10절은 또다시 막 4:29에로 변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가의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도마나 도마와 유사한 텍스트를 놓고 마가의 편집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마에는 앞에 있는 겨자씨 비유가 마가에서는 뒤로 붙어 있다. 그 내용도 마가에는 하늘나라의 성숙과 임재에 관한 종말론적 맥락이 암시되어 있으나 도마에는 그런 암시가 없다.
10절의 과거형도 좀 어색하나 강조형일 수도 있다. “낫을 들고 와서 추수한다”는 이미지는 마가에서는 종말의 도래를 암시하고 있는데 반하여, 도마에서는 진정한 제자그룹으로 편입된다는 것을 상징한다. 내면이 성숙한 인간들의 유대감 속에서 예수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표현한 말일 것이다. 11절은 정구(定句)이지만, 제자됨의 비의성(秘儀性)이 암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