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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장
1 Jesus saw some babies being suckled. 2 He said to his disciples, “These babies being suckled are like those who enter the kingdom.” 3 They said to him, “Shall we then, as babies, enter the kingdom?” 4 Jesus said to them, “When you make the two into one, and when you make the inner like the outer and the outer like the inner, and the upper like the lower, 5 and when you make male and female into a single one, so that the male will not be male nor the female be female, 6 and when you make eyes in place of an eye, a hand in place of a hand, a foot in place of a foot, and an image in place of an image, 7 then you will enter the kingdom.”
천국과 아기들의 관계를 논한 구절은 공관복음서에도 있다. 마가 10:13~16을 보라.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이 마가의 기사는 마태 19:13~15, 누가 18:15~17에도 나오고 있다. 누가는 마가를 보다 충실히 베꼈고, 마태는 간결하게 축약하였다. 마가자료 중 15절은 원자료에 없는 것을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누가에는 마지막 안수와 축복의 기술이 없다. 그리고 이 기사의 병행구가 막 9:36~37(마 18:2~5, 눅 9:47~48)에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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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의 질문은 요 3:4에 나오는 니고데모(Nicodemus)의 질문, 거듭나라고 하는 말에 대하여 엄마 자궁 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되느냐고 묻는 그러한 순진한 질문을 연상시킨다. 추상적 함의를 어리석은 듯, 문자 그대로 해석함으로써 그 추상적 함의의 본면(本面)을 더욱 강조시키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의 문학적 기법이다.
“젖을 빤다”는 것도 단순히 어린 아기의 생존 상태의 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몸을 획득하는 변화(transformation)의 과정일 수도 있다. 그것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몸의 재건(reconstruction)이며 궁극적으로 해탈(解脫)의 과정이다.
이 “새로운 몸”은 모든 둘을 하나로 만드는 몸이어야 한다. 양은 양으로서 실체화될 수 없으며, 음은 음으로서 실체화될 수 없다. 도(道)의 경지에서는, 음과 양은 끊임없이 분화와 융합의 과정을 거친다. 음이 곧 양이며, 양이 곧 음이다. 일음(一陰), 일양(一陽)하는 순환의 과정이 곧 도일 뿐이다(一陰一陽之謂道). 왕필(王弼, 226~249)에 의하면 도(道)란 무(無)의 다른 이름이다. 무불통(無不通), 무불유(無不由)의 무차별 경지인 것이다. 주렴계(周濂溪, 1017~1073)가 음과 양을 말하기 이전에 태극(太極)을 말하고, 무극(無極)을 말하는 것도 음과 양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무(無)를 가치의 지향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도마도 “속과 겉이 하나 되고, 위와 아래가 하나 되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 됨”을 말한다. “남자와 여자를 하나 된 자로 만들어”라는 표현에 있어서 “하나 된 자”(a single one)는 자웅동체의 신화적 아담을 말한다기보다는, 남자와 여자의 분별이 사라진 새로운 주체(subjectivity)의 탄생을 지칭한다고 보아야 한다.
남자가 남자로서만 대상화되고, 여자가 여자로서만 대상화될 때, 그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는 끊임없는 욕망이 분출하게 마련이다. “하나 된 자”라는 표현은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새로운 성(a new gender), 새로운 몸, 새로운 인격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물리적으로 제3의 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남녀의 욕정이 극복되는 금욕과 고행의 수련 과정을 암시하고 있다. 음식남녀(飮食男女)에 사람의 대욕(大欲)이 존(存)한다는 『예기』「예운」편의 명언을 상기시킨다.
“눈 있는 자리에 눈을 만들고”라는 표현은 “눈 대신에 눈을 만들고”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눈 대신에 눈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금욕적 수행의 과정을 통하여 기존의 눈이 사라지고 새로운 눈이 생겨나는 신체의 혁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새로운 눈, 새로운 손, 새로운 발을 거쳐, 최후에는 “새로운 모습”에 이르게 된다. 즉 나의 내면적 세계가 혁명된 새로운 자아상을 확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바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본 장의 내용은 제4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제6절의 “모습”은 83·84장에도 나온다. 남녀의 하나 됨에 관하여 갈 3:28과 비교하기도 하지만 그 의미 맥락은 다르다.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차등이 없다는 것을 말했을 뿐, 남녀의 원초적 융합을 말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