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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장
1 Jesus said, “I shall choose you, one out of a thousand, and two out of ten thousand, 2 and they will stand as a single one.”
도마복음서에서 나타나는 각자(覺者)들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고독한 실존이다. 깨달음이란 내면적 사태이기 때문에 집단적일 수 없다. 도마복음 속의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은 해석의 대상이며 발견의 대상이며 추구의 대상이다. 그것은 개인의 고독한 주체(the solitary subjectivity of an individual)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극히 소수만이 선택되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사상은 모든 종교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정서이다. 지극한 경지를 말하면 필연적으로 비의성(秘儀性)을 배제할 수 없고, 비의성을 강조하는 것은 오의(奧義)를 깨닫는 자가 소수라는 전제가 있다. 마태 22:14을 보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플라톤의 『파에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사실상 용기와 자기절제와 정직함, 그러니까 진실한 도덕성을 확립하게 만드는 것은 지혜이다. 쾌락이나 공포와 같은, 그따위 느낌이 있고 없고는 도덕과는 별 상관이 없다. 상대적인 감정적 가치에 기초한 도덕성의 체계라는 것은 단순히 환영에 불과한 것이다. 그 자체로서 진실성이나 건전성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철저히 세속적인 관념일 뿐이다. 진실한 도덕적 이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자기절제이든 정직이든 용기이든, 결국은 모든 세속적 감정으로부터의 정화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지혜라는 것 자체가 결국은 정화(purification)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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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린 이러한 플라톤의 기술 속에서 우리는 헬레니즘 시대 종교적 성향의 일반적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감정과 도덕의 대립, 정화와 해탈, 철학적 삶과 저승의 관계, 이 모든 주제들이 매우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바쿠스의 지팡이(나르테쿠스)를 휘두르는 자는 많으나 진정으로 바쿠스신에게 헌신하는 자는 소수이다”라는 말은, 곧 본 장의 주제를 말해주는 동시에 도마복음서의 예수운동가들의 삶의 목표나 양태에 관해 많은 구체적 내용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천 명 가운데서 하나를, 만 명 가운데서 둘을”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언어에도 나타나는데 다자와 소수의 대비를 강조하는 데 쓰이는 일종의 정형구일 것이다. 신명기 32:30에 “어떻게 혼자서 천 명을 몰아내고, 둘이서 만 명을 쫓아낼 수 있었으랴”라는 표현이 있고, 전도서 7:28~29에는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1785년 영국박물관에 의하여 구매된 아스큐 코우덱스(The Askew Codex) 콥틱문헌인 『피스티스 소피아』(Pistis Sophia)에도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 속에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여! 누가 과연 이 세상에서 살면서 죄를 안 지을 수 있겠나이까? 모든 죄악으로부터 완벽하게 순결할 수 있겠나이까? 한 가지에 순결해도 다른 것에 순결치 못할 수 있지 않겠사옵나이까?”
구세주께서 대답하여 마리아에게 가로되,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제1의 신비의 신비를 달성한 자로서, 천 명 가운데서 하나를, 만 명 가운데서 둘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Ch.134).
『피스티스 소피아』는 여성명사로 의인화된 “피스티스 소피아”(믿음의 지혜)의 타락과 구원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회개와 구원을 이야기하는 경전이다. 2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한 초기기독교 사상가 발렌티누스(Valentinus)학파 계열의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매우 체계적인 우주론이 전제되어 있고 빛의 세계로 진입하는 열쇠인 그노시스가 설파되며, 예수 이전에는 빛으로 진입한 인간의 영혼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선포된다. 도마복음서의 출현은 이러한 문헌에 관해서도 새롭게 연구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본 장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은 하나된 자로서 서있게 되리라”라는 제2절의 표현인데, 발란타시스(Richard Valantasis)와 같은 주석가는 선택받은 소수들이 하나의 동일한 집단적 아이덴티티(unity to the corporate subjectivity)를 갖게 된다는 뜻으로 풀이했는데, 그것은 과도한 해석이다. “그들-하나”의 관계를 복수적 집단의 단수화로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공통의 지향점을 가질 수는 있겠으나, 역시 “하나된 자”는 모든 대립이 초월된 무분별심의 원융한 존재(4·22·106장)이며, 이 세상의 가치와 타협하지 않는 고독한 실존(16·49·75장)으로서 “그들” 개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독립개념적 술어로서 풀어야 마땅하다. 도마복음은 역시 집단보다는 개체의 내면에 강조점이 있다. 그리고 “서다”(to stand)는 16·18·28장에서도 예시(例示)되고 있듯이 어떤 “신적인 당당함”을 나타내는 “섬”이다. 세속에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실존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