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단절성과 연속성에 대한 바른 이해에 의한 올바른 주일성수와 헌금'
이천우 목사
'율법의 단절성과 연속성에 대한 바른 이해에 의한 올바른 주일 생활과 헌금 생활'이란 다소 긴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교회 제도'라고 말하게 되면 상당히 포괄적 개념으로 다루는 범위가 넓고 다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주일성수와 헌금으로 한정했습니다. 이는 이 두 가지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으로서 교회 제도의 하나들이기 때문입니다. 본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할 수만 있으면 주일성수와 헌금의 총체적인 이해를 가져나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어 주시는 인내를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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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의 주일성수와 십일조 헌금 사상의 흐름
우리 나라 교회가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어떻게 해서 신자들에게 강조하여 말하고 신앙의 당연한 의무로 하도록 가르쳐 왔는가를 알기 위해서 먼저 한국 개신교의 주일성수와 십일조 헌금 사상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교사에 의하여 전해지고, 그 결실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져 온지가 어언 100년이 훨씬 넘어섰습니다. 우리 나라에 선교사로서 첫 발을 디딘 분이 독일 선교사인 구츠라프 목사이며 그때가 1832년이요, 그후 30여년이 지나서 또 한 분의 다른 선교사가 있었으니 영국 선교사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목사입니다. 그는 1865년에 우리 나라 땅을 밟았습니다. 그 후에도 몇 몇의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나라에 공식적인 선교의 문이 열려진 때는 1885년입니다. 북장로교회로 불리우는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파송되어 온 첫 선교사가 있었으니 그는 언더우드(Horce G. Underwood) 목사입니다. 그는 한국으로 오는 중에 들른 일본에서 미 감리교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아펜셀라(Henry G. Appenzeller) 목사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니 벌써 100년을 훌쩍 넘어서 110주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 개신교가 들어온 100년이 되었을 때는 기독교 100주년 기념행사이니 무엇이니 하며 한창 시끄러웠었습니다.
글의 시작을 굳이 우리 나라의 기독교의 전래로부터 끄집어 내는 것은, 지금 개신교가 100년을 훨씬 넘어선 이 시점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단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예배 모범의 한 조항과 관련해서입니다. 우리 나라에 들어온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은 이 분들이 속해 있는 신학교와 관련이 있습니다. 다행히 개혁주의 신앙을 지녔고 또한 청교도적 정신 속에 있었던 것은 그래서입니다.
고신교단에서 장로교회(고신) 50주년 희년 기념으로 발행한 '한국장로교회사'에서는 미 북장로교 외지 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A. J. Brown)이 1911년까지의 한국 초대 선교사들에 관하여 언급한 것을 소개하기를 "나라가 개방된 이후 첫 25년간의 선교사는 전형적인 퓨리탄형의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1세기 전 그들의 조상들이 뉴잉글랜드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안식일을 지켰으며, 춤과 담배, 그리고 카드놀이에 기독교 신자들이 빠져서는 안될 죄라고 보았다. 신학과 성경비평에 관해서는 철저히 보수적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전천년의 견해를 없어서는 안 될 진리라고 주장했다. 고등비평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으로 생각되었다"고 하였습니다.(한국장로교회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출판국, 2002, p.70)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안식일'은 우리 나라 개신교단의 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중요하고도 철저하게 다루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선교사의 안식일 준수의 가르침은 그들이 성경관에 철두철미한 '오직 성경'이란 개혁주의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사실 언더우드 목사 자신은 장로교를 전하기 위해서 한국에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의 복음을 공포하기 위해서 한국에 왔을 뿐입니다(Ibid, p.73). 이렇게 그는 처음부터 교파적 이해 관계에 의하지 않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잇는 초기 선교사들의 성향은 개혁주의 입장에 있으며 청교도적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로 교회가 형성되었는데, 노춘경은 1886년에 언더우드 목사에 의하여 세례를 받은 첫 세례자였습니다. 그리고 그해에 계속해서 솔내교회에서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1887년에 서울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 목사 자택에서 14명의 세례교인들이 모여 조직교회를 설립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조직교회의 설립은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로 그 기록이 남습니다.
언더우드 목사에 의하여 시작된 한국의 교회는 장로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이 장로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배우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그런가 하면 성경의 가르침을 좇아서 신앙에 신실하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한 분 하나님이신 여호와 신앙에서 이방 종교적이고도 이방 풍속적인 삶에서 떠나는 생활을 해 나갔습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미신인 제사 생활을 금하고, 술과 담배를 끊는 절제와 경건 생활을 가져왔습니다. 고신 교단에서 발행한 '한국장로교회사' 에서는 이를 "처음부터 주초가 죄가 되기 때문은 아니었고, 이것들이 바른 생활과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었다"고 하면서, "경제상으로나 도덕상으로 보면 술은 없이할 물건이었다"고 하고 있으나(Ibid, p.97) 실은 필자가 어렸을 적부터 듣고 배우며 경험한 바로는 주초는 제사와 함께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죄악으로 가르쳐졌습니다.
이러한 것은 장로교회(고신)가 주초를 하는 사람에게 권징을 시행한 사실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1916년에 이은 제 5회 총회에서 술로 인한 권징건이 있었는데 "치리:금년 책벌 467인이요. 출교가 189인이온데, 혼인 위반죄와 주일 범한 죄와 술취하는 죄가 많사오며, 해벌은 133인이오며"라고 회록은 기록하고 있습니다(Ibid, p.97)
초기 선교사에 의한 가르침으로 인한 '안식일'은 '안식일 성수' 곧 기독교의 안식일인 '주일성수'로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주초문제보다 더욱 철저하였습니다. 주일성수에는 과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목숨을 걸었으니깐요. 필자는 한국예수교장로회 총공회의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면서 6.25 전쟁 때 거창 지역에 있은 한 사건을 자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거창 지역에 사는 집사 한 분이 계셨는데 그 이름은 배추달입니다. 이분이 주일에 북한군이 마당을 쓸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함으로 인해서 총살을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일에 마당을 쓸라는 명령이 주일성수에 대한 시험으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주일성수를 위해 죽을 것을 각오하고 순교를 당했다는 내용은 어렸을 당시 필자에게서는 큰 감동과 감명을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성수에 의한 순교자적인 신앙 정신을 더욱 갖게 했습니다. 그에 따라서 주일에 시행되던 각종 시험(자격증 시험)이나 학교 행사 동원에서도 주일성수를 위해 받는 해(害)를 무릎 쓰고 애를 썼습니다. 주일성수를 위해 고난의 해를 받고 목숨의 위협을 받았던 사례는 찾으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필자의 경우에서 주일성수는 곧 구약의 안식일 성수였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 개념으로서의 주일이었으며, 따라서 안식일 성수로서의 개념으로서 주일성수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교단 헌법의 예배 모범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 바입니다. 필자가 소유한 교단 헌법에서 예배 모범을 보면,
제1장 주일을 거룩히 지킬 것
1. 주일을 기념하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의무이니, 미리 육신의 모든 사업을 정돈하고 속히 준비하여, 성경에 가르친 대로 그대로 그날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없게 하라.
2. 이 날은 주일인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찌니, 공동회집으로나 개체로 예배하는 일에 씀이 옳으며, 종일토록 거룩히 안식하고 위급한 일 밖에 모든 사무와 육신적 쾌락의 일을 금할찌니, 세상 염려와 속된 말도 금함이 옳다.
3. 먹을 것까지라도 미리 준비하고, 이 날에는 가족이나 집안 사환으로 공동 예배하는 일과 주일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되지 않도록 함이 옳다.
4. 주일 아침에는 개인으로나, 혹 권속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히 저희 목사가 그 봉직하는 가운데서 복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함으로 공동 예배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준비하라.
5. 개회 때부터 일심 단합함으로 예배 전부에 참여하기 위하여 정한 시간에 일일이 회집함이 옳고, 마지막 축복 기도할 때까지 특별한 연고 없이는 출입함이 옳지 않다.
6. 이와 같이 엄숙한 태도로 공식 예배를 마친 후에는 이날 남은 시간은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영적 수양서를 읽되 특별히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며, 성경문답을 교수하며, 종교상 담화하며,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를 것이요, 병자를 방문하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무식한 자를 가르치며, 불신자에게 전도하며, 사랑으로 교제하며, 은혜로운 일을 행함이 옳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일을 어떻게 지내야 잘하는 것이며 성수하는 것이냐 하는 것은 논외이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다만 주일성수를 왜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본 글의 중심이기 때문에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킬 것'의 1항에서 3항은 그 근거가 구약의 안식일 규정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이런 규정에 따라서 이렇게 지켰으니까 신약시대에 있는 오늘날의 교회는 그 안식일 규정에 따라서 주일 또한 이렇게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며 또한 지배적입니다.
사실 주일성수는 안식일 규정에 의한 성수 개념으로 가르쳐져 왔고, 그래서 그에 따른 주일성수를 해 왔습니다. 안식일 규정은 시내산 언약의 체결과 함께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적 관계를 맺으면서 백성들이 마땅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의를 이해하고 순종으로 살아야 할 것으로서 율법을 수여하셨습니다. 이때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어떤 사상과 정신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종교법인 십계명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서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사는 관계 속에서 지켜야 할 사회법과 그들을 언약의 백성으로 맺어주는 제사와 관련한 제사법, 그리고 제사 보존을 위해서 필요한 절기법, 그리고 절기를 좇아서 제사를 드려 가는 일을 위해서 성전법을 주셨습니다.
안식일 규정은 십계명의 제 4항이며, 1-3항과의 연계 속에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안식일 규정은 신명기에서 다시 한번 다루어지고 있는데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 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2-15)라고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갖는 애굽의 종으로부터의 구원과 관련하여서 주어집니다.
교단 헌법의 예배 모범에서 '주일을 거룩히 지킬 것'은 바로 이러한 안식일 규정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인 십계명에서 '안식일 규정'에 관한 율법 조항을 충실히 지키는 것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배모범의 '주일을 거룩히 지킬 것'은 율법의 문자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일 법의 조항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소교리문답을 통해서 교리적으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제4계명인 안식일에 관하여 질문하고 답하는 것에서 말입니다(참조, 소교리문답 제57-61문답)
그렇다면 말입니다. 여기에는 이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서 올바르게 지켜야 할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그에 따른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무엇이기에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가에 올바른 이해 속에서 올바르게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해석과 설명이 없이 단지 안식일법[안식일 규정]이 이러니까 이를 좇아서 주일을 이렇게 성수하라는 식입니다. 여기에서 주일을 지키는 문제에서 율법주의에 관한 불필요한 논쟁이 생깁니다.
주일성수 문제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일조'에 관한 것입니다. 헌금에 관해서도 필자가 소유한 교단 헌법의 예배모범에서는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이,
제 18장 헌금
1. 교회의 각 신도는 주께로부터 받은 재물을 가지고 정칙(定則)대로 헌금하는 일을 배양할찌니, 이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하신 대로 복음을 천하 만민에게 전파하는 일을 도움이 옳을찌니, 주일마다 이 일을 위하여 회중으로 헌금하는 기회를 정하는 것이 합당하고 매우 아름다운 일이라, 성경에 가르치신 대로 이와 같이 헌금하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엄숙히 예배하는 일부분으로 한다. (이하 생략)
라고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가 소유한 교단 헌법이 장로교회(대신) 것이기 때문에 여타의 장로교회의 교단 헌법도 유사하리라 봅니다.
그런데 주일성수와 함께 십일조는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성도의 본분이요 의무로서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세례를 베풀기 위한 학습 과정에서 세례문답에서 가르쳐지고 있는데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공용으로 나온 '학습세례문답'(성광문화사, 1981)에 보면, 세례(입교)교인의 의무와 권리로 공동예배 참석의무와 함께 헌금할 의무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례교인은 모든 수입에 대한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으로 성별(性別)하여 진실하게 드리고, 감사헌금, 일반헌금, 특별헌금 등을 정성껏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하나님께 헌금하는 일에 인색함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교인의 의무와 권리로서 십일조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한 교회 생활로 "십일조와 감사헌금 등 교회의 천국 사업을 돕고 축복을 받는 헌금 생활에 힘써야 한다"라고 말하여서 십일조 헌금 생활을 천국 사업을 돕는 선한 일이요 축복을 받는 생활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십일조는 교인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권리요 이 헌금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요 축복을 받는 비결로 인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십일조 헌금 생활을 구약시대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십일조 규례를 주신 것에서 말하여 신약시대인 오늘날에서도 좇아야 할 것으로 가르치는 한에는 그 누가 십일조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이를 고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일과 십일조 헌금을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시고 있는가?
그러면 말입니다. 이제는 이 문제를 성경에서 풀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일과 헌금 생활을 성경에 의한 신앙으로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네 교회가 전통있게 그래서 제도적으로 지켜 나가고 있는 주일과 십일조 헌금은 과연 성경적입니까?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서 신앙으로 하고 지켜 나가는 것입니까?
1. 구약에서의 안식일에 대한 살핌
(1)창조 사역에서 계시하여 주시고 있는 안식 개념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6일 간에 걸쳐 창조하신 사역의 내용을 각 날을 통해서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2장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그 대략을 언급하십니다. 천지와 만물은 6일 간에 걸쳐 창조되었습니다. 각 날마다 하나님의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는 사역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여섯째 날에 이르러 마지막 창조 사역을 하시고 마침내 모든 창조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복을 주시고 그날을 거룩히 여기셨습니다. 이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일을 다 마치시고 안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안식하심에 대하여 우리는 바른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 안식하심은 구약의 율법에서의 '안식'이나 오늘날 우리들이 주일에는 '안식'한다고 하는 것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안식한다고 하는 것을 어떤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가 하면, '휴식', '휴면', 또는 '휴양'의 차원에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쉰다'는 개념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동작을 중지한 상태에서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편안한 쉼'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교회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였었는가 하면 "주일은 안식하는 날로서 편안하게 휴식하여 몸을 회복시키는 날인데 성도들이 예배 외에도 여러 기관에서 봉사하므로 실은 안식하기보다는 파김치가 되어 주일 저녁 때만 되면 나가 골아 떨어지니 이는 주일을 잘못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에는 성도들이 예배 후에 참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시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여 주일 예배 후에 가족 간에, 또는 성도 간에 야외에 나가 거닌다든지 레저 스포츠를 즐기는 것을 허용한 적이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권장하였습니다.
우리가 안식을 잘못 이해하면 이런 실수나 잘못을 범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하심'을 잘 이해를 하여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안식하심 속에서 함께 안식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두 번을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하시던 동작을 중지하고,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셨다'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안식하심은 그냥 '안식하시니라'란 말만 보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앞의 말씀과 반드시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안식하심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라고 하셨고, 또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보면 말입니다. 그동안 창조 사역이 행해진 여섯 날은 하나님 안에 들어 있습니다. 창조 사역에서 등장하는 처음의 이 여섯 날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는 사역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동일한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한 창조 사역을 시작하고 마치실 때마다 '아침'이 되며 또한 '저녁'이 되는 날의 개념을 가졌습니다. 이는 여섯째 날에 이를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이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이 날에 안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일곱 번째의 날이 되어서, 그래서 그 날이 와서 사람들이 땀 흘려 일한 후에 손에 묻은 먼지를 털고 물에 씻으며 두 팔과 두 다리 쭉 뻗으며 '아이구, 이제 좀 쉬겠구나!. 이제 살만하다'고 하는 그런 인식 속에서 이제 '모든 일을 마쳤으니 이제는 쉬자'고 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고 평안히 쉬셨다는 의미에서 안식을 하셨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는 모든 사역이 마쳐지고 그래서 여섯째 날에 이어서 일곱째 날로 불려질 그 다음 날이 창조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갖는 개념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또한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안식하셨다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기를 '안식하시는 하나님'으로 말씀하여서 엿새 동안의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 있는 피조물인 천지 만물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있어서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존재'의 관계에 놓여 있는 '날'에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말씀과 함께 또한 '(그)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하나님의 안식 개념이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창조하시는 일을 다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게 복을 주시고 그날을 거룩히 여기신 것과는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히 여기신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관계성이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이 특별히 '거룩히' 여겨지는 것은 그날에 복을 내리시는 일이 있기 때문이며, 이는 천지 만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의 관계에 있게 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에서입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주이십니다. 천지 만물은 자신들의 주이신 하나님의 복 속에서 존재합니다. 일곱째 날은 이런 관계성이 확인되는 구별되는 특별한 은총이 베풀어진 날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앞서의 엿새와는 확실히 다른 거룩한 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모든 만물의 주로서 복 있게 다스려 가시는 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천지 만물에게 복을 내리신 것 그 성격은 다름 아닌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데서 찾아집니다.
그러면 말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고 있는 하나님의 '안식'과 그분 안에서 천지 만물이 누리는 '안식'은 어떤 의미에 의한 것일까요? 먼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곱째 날이 갖는 날의 의미부터 알아야 하겠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일곱째 날은 창조 사역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대로 순서상으로는 여섯째 날 다음에 오는 일곱째 날입니다. 그러나 이 일곱째 날은 그 다음에 다시 첫째 날로 이어지고 그래서 다시 둘째 날이 되고 셋째 날이 되고…해서 또 다시 일곱째 날을 맞이하고 하는 그 일곱째 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하나님의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는 사역에서 자연스럽게 "아침이 되며 저녁이 되니 이는 ○째 날이니라"였으나, 여섯째 날 이후에는 다시 "아침이 되며 저녁이 되니 이는 ○째 날이니라"는 더 이상 언급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날인 일곱째 날은 창조 사역을 마친 이후에 천지 만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의 복을 누리게 되는 '안식하는 날'로서 날의 총체적 개념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일곱째 날은 새로운 시작의 날입니다. 창조의 사역은 여섯째 날로 마쳐졌습니다. 일곱째 날이 창조 사역이 마친 끝 날이 아닙니다. 엿새간에 걸친 천지 만물의 창조 사역이 마쳐지고 이제 그 천지 만물에게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의 복을 누리는 날이 주어져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곱째 날은 천지 만물에게는 안식하는 시작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일곱째 날은 일곱 번째의 날이요 그래서 다시 여섯 번의 날이 지나고 나서 일곱 번째에 맞이하는 그런 날이 아닌[이때는 하루, 이틀...이 지나서 며칠 째이고 하는 개념이 없다. 날이 사시와 연한을 이루지만 창조 당시에는 '아침이 되며 저녁이 되니'외에는 날수를 세고 연수를 세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천지 만물이 안식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복을 누리는 날을 살아가는 날의 총체적 개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안식, 그리고 천지 만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안식은 어떤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 용어인지를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의 창조 사역을 이루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창조 사역을 마치셨을 때에는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만족해하시며 기뻐하시는 모습의 극치를 알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만족하심과 그로 인해서 갖는 기뻐하심은 하나님 자신이 원하시는 창조의 뜻대로 되어진 것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만족하심과 기쁨을 그때만 갖는 것이 아니라 일곱째 날에 복 주어 그 창조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해져 가는 것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가지십니다.
여기에서 날의 거룩성이 있습니다. 날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날이 '거룩한 날'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한 천지 만물에 복을 내리시는 날을 삼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곱째 날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날을 거룩히 여기셨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기 때문에 그 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 날을 거룩히 여기시는 것인데, 그것은 곧 안식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식 속에 천지 만물을 안식하게 하는 복을 내리시는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이 되며 저녁이 될 때까지 그 날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 만물은 하나님이 내리신 복인 안식 속에서 존재를 합니다. 이것에 의해서 천지 만물은 복 있는 존재로 다루어지며, 이렇게 하나님이 내리신 복을 받아 복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날들은 함께 거룩히 여김을 받습니다. 일곱째 날을 거룩히 여기신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과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안식과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일곱째 날과는 서로 연결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셋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식입니다. 그러니까 창조물인 천지 만물은 자신을 창조하신 주이신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복을 받음으로써 이러한 복을 누리는 날을 살아가는 복 있는 존재인 것이요 그런 날로서의 날은 거룩히 여김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천지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안식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관계 속에 있게 하는 것으로서의 날에 있을 때에 비로소 날은 의미가 있습니다. 거룩한 날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창조 받은 천지 만물은 안식하는 날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의 상태에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안식하시고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 만물이 안식하는 이 안식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날에서 안식하시는 하나님과 그가 지으신 피조물의 관계를 맺어주는 안식은 단순히 그냥 있는, 그러니까 단순히 피조물이 하나님 안에서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분명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조물이 존재하는 목적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안식일 해석에서 명백하게 드러난 것입니다만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서 있으며, 그 안식일의 주인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날이 의미를 지니고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에게 안식하게 하는 것으로서 날을 주신 것은 천지 만물로 하여금 안식하는 그 날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게 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이것의 이해는 우선 첫 번째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에서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날에 복을 주셨다든지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든지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창조하신 천지 만물이 아주 만족스러워서 대단히 흡족해 하시는 상태에 놓여있는 것을 표현하는 언어적 묘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에 의해 되어진 창조가 온전한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계속하여 드러냄을 의미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는 것이요 이러한 창조 상태를 지속해 나가시는 것으로 일곱째 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데서 찾아집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 만물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신 그 기쁨을 주는 일을 천지 만물은 이제 날에서 해 나갑니다. 날이 사시를 이루고 일자를 이루고 연한을 이루는 그 속에서 말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우리는 그 이해를 다음 두 번째로 창세기 1장 26-30절에서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심히 만족스러워하시고 흡족해 하시는 기쁨을 가지신 것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상태에 계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과 다른 피조물이 각각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는 말씀을 하신 위치에 있으면서 본성을 발휘해 나가는데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안식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표한 존재요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행사하는 대리자로서 만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리는 것에서, 그리고 모든 자연 만물은 그의 다스림을 받아 각각의 위치에서 제 기능과 역할을 다하는 것에서 안식합니다. 사람에게서 이는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는 것을 금지하는 말씀에 의해서 나타났습니다. 사람은 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지키는 한에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관계성이 성립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한에는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도 정상적으로 성립된 상태에 있었고 이런 세상은 행복이 극치에 이르는 세계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존재하는 데서, 곧 하나님이 주신 복에 따라 각각 그 존재 목적대로 본성을 발휘하면서 살아가는데서 하나님께서 심히 만족스러워하시며 흡족해 하시는 안식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평안이 조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과 자연 만물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선포되어 온 세상에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이 선양됩니다. 그 세상은 평화로 충만한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이 평화를 기뻐하시고 또한 충분히 즐기십니다. 그러한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며 기뻐하고 즐거움을 갖는 사람과 자연 만물의 행복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그 안식 안에서 함께 안식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이렇습니다.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이랬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특별히 사람이 안식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함께 안식을 누리는 것과 관련하여서 생각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심으로 자신을 안식하시는 분으로 계시하시고 또한 그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사람을 하나님의 안식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사람이 안식을 하게 하신 것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본성으로 지니고 있는 종교성을 자신을 창조하신 주 하나님을 향하여 표현하며 발휘해 나갈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창조 사역을 마치신 하나님은 이제 모든 피조물들과 교통하시는 가운데서 자신의 거룩한 속성을 나타내시고 친히 영광을 받으실 일을 하시므로 영광을 받으시니 곧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경배]하는 것에서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적 개념에서 안식은 휴식이나 휴면이나 동작의 중지와 같은 정적(靜的)인 것을 의미하지 않고 동적(動的)이며 진행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이제 그 일을 행하신 목적에 따른 결과를 계속 누리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신 데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 하나님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즐기고 하나님을 공경하여 높이며 받들어 섬기는 예배[경배]적인 삶을 사는 것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셨으며 그 하나님께서 그 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그래서 사람이 날을 안식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함께 안식한다는 것은 이런 질적인 것입니다.
(2)십계명의 제4계명으로 제도화된 안식일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함으로 인해서 안식이 제공해 주는 축복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고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로 있는 한에는 그들에게 안식을 충분히 맛볼 수 있도록 일련의 조치를 취해주셨습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십계명에서 안식일 규정을 말씀하셔서 제도적으로 이러한 안식일을 가져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 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차지하게 하시는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나가는 삶의 내용으로 있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안식일 규정은 시내산에서 언약식을 체결하고 율법을 주시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에 준행하여서 살 것을 명령하실 때 십계명을 선포하신 것에서(출 20:1-17), 그리고 가나안 입성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가운데 가나안을 차지할 새로운 이스라엘 세대와 언약의 재확인을 시켜 주시며 십계명을 선포하게 하실 때(신 5:1-21),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서 십계명을 선포하실 때 다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안식일 규정에 있어서 이런 저런 금지의 규정을 두어서 규제하는 말씀을 두신 것은 사실 그런 어떤 것으로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일에 훼방을 받을 수 없다는 하나님의 뜻의 강한 의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식일 규정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앎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께 악을 행하여 죄를 짓는 일로 나가도록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 백성을 그 악으로부터 지켜 가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성실함으로 지키는 모습을 통하여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그러한 신실한 자들이 있지만,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 규정에 의해서 제도적으로 하나님의 배려를 받아 나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렸습니다. 어떻게인줄 아십니까?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는 것에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안식일 규정을 제도적으로 어기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것은 그들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매주 지키는 국가와 민족적인 절기이니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만이 아니라 이와 연관되어 있는 각종 절기를 철저하게 지켜나갔습니다. 안식월, 안식년, 희년을 지켰으며, 삼대 명절로 불리우는 큰 절기를 지켰으며, 대속죄일을 지켰습니다. 그외 이스라엘은 1년 전체가 절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절기 생활이 이스라엘의 생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제도적으로 지키지 않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 규정을 주신 하나님의 배려를 저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왜입니까?
선지자 이사야는 이사야 1장 1-2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이러한 탄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를 지키지 않은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하는데 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각종 절기를 성회로 모여 지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를 받지 않고 물리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름지고 살진 가축들!, 다 필요 없다고 손을 내저으십니다. 아무리 많은 제물을 가지고 나와서 하나님께 이런 것 저런 것을 구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귀를 막고 듣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왜입니까? 그런 그들에게 정작 있어야 할 것들, 그러니까 성회로 모이는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일을 외면하는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악을 멈추고 의를 행하며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와 인과 신을 행하라고 말입니다. 이것 없이 기름지고 살진 가축들을 매번 성회로 모일 때마다 가져온다 한들 그들의 검은 속내만 뻔히 드러낼 뿐입니다. 자기 욕심에 이끌려 탐욕으로 가득찬 그들의 속내에 하나님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드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함이 없이 나간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외면하십니다. 기름지고 풍요한 축복!, 전혀 기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에게 원수를 붙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이 산당 제사에서나 취급되는 그런 분으로 인식되고 있는 한에는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계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으로 맺어지는 관계성 속에 있는 것인데 그 확인을 율법 준수를 통해서 해 나가십니다.
(3)안식일 제도와 예수 그리스도
그런 까닭에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탐욕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제도를 그대로 두십니다. 다른 절기와 함께 말입니다. 그리고 절기가 있는 한에는 제사 또한 존재하며 성전도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그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 안식을 모형으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체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형으로 하고 있고 예표하고 있는 내용을 성취하실 때까지 한시적으로 주십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과 절기의 주인으로 계시며 자신의 몸으로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하신 후에는 더 이상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도와 관련한 율법은 폐지가 됩니다. 그런 까닭에 성전을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시오 그 성전 안에 모든 자신의 백성들이 성전의 각 일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또한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 불러모은 자들로 성전을 이루게 하고, 이제는 더 이상 천막이나 돌로 지은 성전에 있지 않게 하십니다. 그러면 어디에 있게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게 하여서 그 몸의 한 부분으로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몸의 머리로 계십니다. 곧 주이신 것이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을 이룬 관계성에 의해서 이제는 '교회'란 용어로 말씀하십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2-23).
그렇다면 말입니다. 성전 제도가 없어진 것은 이것을 필요로 하게 하였던 절기가 없어졌기 때문이며, 절기의 폐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드려 하나님에게 화목제물이 되게 하심으로써 더 이상의 제물이 필요하지 않게 하신 데 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로 계시며 그분의 몸으로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섬김에서 직접 제사와 절기와 성전이 갖는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누립니다. 그에 따라서 안식일 제도는 더 이상 날의 의미를 갖지 않으며 따라서 안식일을 성수한다는 개념은 더 이상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안식일 성수의 개념에서 주일성수한다고 하는 것은 주일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며, 주일을 아직도 안식일로 여긴데 따른 잘못된 것입니다.
2. 구약에서의 십일조에 대한 살핌
이제 구약에서의 십일조 헌금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에서 제일 처음 언급된 십일조는 창세기에서의 아브라함 때이며 야곱에게서 다시 한번 언급이 됩니다. 그런 십일조가 제도화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고 율법을 받으면서부터입니다. 그것은 십일조가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의 생활을 책임지는 것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십일조의 시작을 아벨의 제사에서부터 거론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런가요? 그러기에 여기에서부터 다루어 나가겠습니다.
(1) 아벨의 제사에 사용된 가축의 첫 새끼
구약 시대에서는 처음부터 십일조 헌금이 명령되지는 않았습니다. 아벨의 제사에서 언급되는 짐승의 첫새끼를 십일조와 연관하여서 말하는 이도 있으나, 사실 아벨이 드린 짐승의 첫새끼는 십일조와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아벨의 제물은 그가 형인 가인과 함께 드린 제사에서 언급이 됩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제사의 시작이 된 것은 아닙니다. 아담의 제사부터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아버지인 아담이 드리는 제사에 어렸을 적부터 참여하면서 그 제사가 갖는 의미를 배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추측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명령과 규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마음에 의해서 드려진 것입니다. 이 제사가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 의한 타락 후 하나님의 심판에 이어 구원의 약속(원시 복음; 창 3:15)을 주신 것에 의한 믿음의 표현이었다고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렇게 제사를 드려라!"고 하는 명령이 주어져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순전한 마음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제사를 드린 데 따른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사용된 제물에 하나님의 평가를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히 11:4). 여기서 '믿음으로'라는 말을 그 앞의 3절에서 설명하기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믿음으로 압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믿음으로 아벨은...'이라고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곧 하나님께서 가인이 드린 것보다 훨씬 더 기뻐하시는 제물을 드린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예물을 열납하심으로써 그가 의로운 자라는 사실을 중명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론의 제사가 믿음으로 행해진 것으로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것은 그가 행한 이 보이는 일은 보이지 않는 일로 말미암습니다. 그것은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로 나타나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벨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믿음으로 그는 제사라고 하는 현상적 행위를 통하여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세상에 증거하는 삶을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이러한 믿음은 형인 가인과 함께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인 아담에게서 하나님과 교제의 필요성과 그 생활을 교육 받아온 데 따른 것이었을 것이며, 아담은 이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기 직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원시 복음과 함께 하나님께서 한 짐승을 잡아 가죽 옷을 입히신 사건에서 하나님과 화목[화평]을 누리는 계시적 의미를 깨닫고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하나님이 보이신 방식인 짐승의 희생의 방식으로 그대로 가져 나갔을 것입니다. 이러한 아담의 삶은 가인과 아벨에게서 교육적 영향을 끼쳤으며, 이는 곧 세월이 흐른 후 독립하여 가정을 이루었을 때도 각기 제사를 드리는 것에서 '제사를 드리는 자'로 보이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다 같이 이렇게 제사로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가져 나간 것은 제사가 이 두 아들이 우연히 생각해 낸 것이 일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카일·델리취(Keil and Delitzsch)의 창세기 주석에서 설명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비를 가죽 옷, 즉 짐승의 가축으로 만든 옷을 두 사람에게 입히심으로써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 옷을 지으셨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손으로 옷을 깁으셨다는 식으로 순전히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단지 '사람의 처음 옷은 필요한 재단 방법과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사역이었다'는 사실을 확증할 뿐이다. 이 옷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수치의 감정에 각성된 양심의 가견적 징표를 또한 벗은 몸을 덮으려는 필연적인 필요성에 죄인에게 적합한 훈련의 높은 사역을 부여하셨다. 첫 사람의 옷을 위해 짐승의 가축을 선택하심으로서 따라서 그 목적을 위해 짐승을 죽이심으로써 하나님은 어떻게 그 들이 그들 자신의 선을 위해 동물들이나 인간의 보존을 위해 희생 동물의 생명에 대해 소유하였던 주권을 사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행동은 비록 첫 옷이 우리의 궁극적 '덧입는 것'(고후 5:4)을 예표하거나 가죽 옷이 의(義)의 옷을 예표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희생 제사에 대한 근거를 놓았다"고 말한 것은 일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는 처음부터 짐승이란 특정한 것으로 제물로서의 인식을 갖지 않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보는 대로 제물은 그들이 생활해 나가기 위하여 갖는 노동에서 자연스럽게 취(取)해져 사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려는 마음은 아벨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그의 형인 가인에게도 있었으며, 이것의 믿음에 의한 행함인 제사는 아벨은 가축을 기르는 자로서 자연스럽게 가축에서, 그리고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로서 자연스럽게 곡식에서 취했습니다. 게다가 모세의 율법에서 제사에 비로소 속죄의 의미를 나타내시기까지는 속죄의 의미 또한 담고 있지 않았기에 반드시 희생 제사여야 한다고 하는 규정을 띠고 무언적(無言的)으로도 띠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아벨과 그의 형인 가인은 자신들이 지금 하나님과 교제하는 중에 하나님을 힘입으며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에 사용되어진 제물[예물]은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에 감사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는 감사의 헌물의 성격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벨과 가인이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과 화목하는 제사였으며 거기에 사용되어진 제물은 가축과 곡식 등 종류가 구분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벨과 가인의 제사가 서로 다른 제물이 동원되고 사용되었을지라도 그 차이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열납하시고 안 하시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열납하신 그 기준은 그 제사가 '믿음으로' 드려진 것이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제사를 열납하신 기준인 '믿음'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아벨이 믿음으로 가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인 하나님 나라를 지금 가축을 사용하여 제사를 드리는 일로 보여 나간데 있습니다. 아벨은 제사에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표현해 나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주로 섬기는 하나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삶을 살아나갔던 것입니다. 아벨에게서 제사의 행위로 하나님에게 제물을 드리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에게서는 제사의 행위로 제물을 드리는 것에서 경건의 모양을 가져나가기는 하였으나 그야말로 종교적인 형식에 불과했습니다. 그러기에 제사를 드리는 행위에 집착하였지 제사가 믿음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세상에 말해 나가는 '의로운'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제사에 바친 제물이 아무리 풍요한 곡식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열납하지 않은 것은 그 까닭에서입니다.
이렇게 아벨의 제사에 사용된 짐승, 그리고 그 짐승으로 사용된 양의 첫 새끼는 십일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 제물인 가축의 첫 새끼를 십일조의 근거로 삼다니요?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의 표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원과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벨의 제사 이후 제사는 창세기 4장 26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한 대로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가 116편 17절에서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라고 한 그 '감사제'였습니다.
(2) 노아의 제사에서 감사제는 구원의 언약의 성격을 띰
더욱 세월이 흘러 노아 시대에서 노아가 행한 제사를 볼 수 있습니다. 노아가 홍수의 심판에 의한 멸망에서 구원얻고 1년 17일 만에 방주에서 나와 땅을 밟고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창 8:20-21)의 제사를 드린 일이었습니다. 이 제사 또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믿음의 행위였는데 여기서는 제사의 성격이 좀더 의미를 담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심판에서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아벨의 제사가 자원과 자발적인 면에서의 제사였다고 하면 노아의 제사는 한층 더 나아가 그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하심을 본 가운데 자발적으로 드려진 (감사)제사였다고 할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바친 제물의 향기를 맡으시고 기뻐하시면서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십니다. 그리고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성치해 나가실 것으로 무지개를 표징으로 하여서 노아와 생명의 보존 언약을 체결하십니다. 이렇게 노아의 시대까지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제물의 '첫 새끼' 또는 '첫 곡식단'이 십일조라고 하는 개념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2) 아브람[아브라함]의 십일조
성경에서 십일조란 공식 용어가 등장하기는 아브라함 때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말하면 헌금[연보]의 형태가 비록 특정한 때에 있은 한 차례의 일에 불과하지만 표면화 된 것은 아브람의 십일조 사건에서입니다. 아브람의 조카인 롯이 소돔에 거하는 중 당시 시날왕 아므라렐과 엘라살왕 아리옥과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고임왕 디달이 연합한 군대에게 소돔왕 베라와 고모라왕 비르사와 아드마왕 시납과 스보임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왕이 연합한 군대가 전쟁에서 패하는 바람에 소돔이 노략 당할 때 롯도 사로잡혔었습니다. 아브람은 그 소식을 도망쳐 나온 사람을 통하여 듣고서는 가신인 용병 318명을 거느리고 나가 네 나라의 왕이 연합한 군대와 싸워 크게 이기고 모든 빼앗겼던 사람과 재물을 되찾아 왔습니다. 돌아올 그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에 나와 아브람을 영접하였고,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는데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 14:19-20)라고 축복하여 말하니 아브람이 전쟁에서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취하여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소돔왕이 아브람에게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하자 아브람은 소돔왕에게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오직 소년들의 먹을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창 14:22-24)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린 십일조 사건이 처음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표현으로 말하면 헌금을 드린 것이 표면화된 처음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의 십일조는 제도화된 십일조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아브람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이 축복하여 말하기를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하여 "아브람 당신의 승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승리를 준 것이다"라고 하는 데에 대한 "과연 그렇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과 승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십분의 일을 떼어서 멜기세덱에게 드려서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소돔왕이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할 때 그가 하나님을 멜기세덱이 말한 그대로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한다"고 말하여서 자신의 승리가 자신의 힘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한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품 중에서 실오라기 하나 취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것으로 치부하였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이며, 이는 그가 자기의 힘으로 싸워서 이겼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으로 전쟁에서의 승리에 대한 감사, 하나님께서 대적을 자기의 손에 붙여주셔서 승리하게 하신 데 대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니의 제사장으로서 아브람을 만나 복을 빈 자인데 그 이름을 번역하면 의의 왕, 평강의 왕으로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히 7:1-3). 멜기세덱은 왕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의 예표로 보내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기에 그에 대하여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만 그가 아브람에게 복을 빎으로써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해 주심을 깨닫게 하였으며, 그 일은 훗날에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있을 사단에서의 승리와 그로 인한 구원을 예표로서 보여주는 일이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장래 있을 그 일의 의미를 그때는 알지는 못하지만 당시 전쟁에서 승리하고 롯과 그리고 그와 함께 포로가 되고 탈취당했던 물품을 되찾아올 수 있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서 물품의 십분의 일을 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람의 십일조에서 나타난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요 자원과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4) 야곱의 십일조
아브람의 십일조에 이어서 그의 손자인 야곱에게서도 십일조가 언급이 됩니다. 창세기 28장 10-22절의 벧엘 노숙 사건에서 야곱의 십일조의 언급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형인 에서에게로부터 장자권을 팥죽을 사고 형으로 위장하여서 아버지로부터 형이 받을 축복을 빼앗은 사건으로 인해서 형의 미움을 받아 화(禍)를 면하기 위해 밧단아람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야곱은 도망 중 벧엘에서 하룻밤을 지나는데 이곳은 아브람이 단을 쌓던 곳으로서 야곱이 이곳에서 노숙하던 중 하나님이 그에게 계시하시는 꿈을 본 후 돌을 취하여 단을 쌓고 기름을 부으면서 벧엘이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습니다. 벧엘의 본래의 이름은 루스였습니다.
야곱이 벧엘에 이르러 밤이 깊어 노숙하게 되었는데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야곱과 함께 하여 주시고 그가 복을 받을 것이며 모든 자손이 야곱과 그의 자손으로 인하여 역시 복을 받을 것이며, 야곱이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계시하여 주었습니다. 야곱에게 허락한 모든 것을 다 이루기까지 그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먼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지금 약속을 하고 있는 것이 벌써 그의 조부 아브라함 때부터 맺어온 약속이요 부친 이삭과도 더불어 맺은 약속으로서 이제 너에게 약속을 맺는다는 것을 상기키시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조부 때부터 맺은 허락한 땅인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한다, 곧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며, 조부로부터 하나님의 백성 삼은 것을 이제 너와 네 모든 자손과도 맺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너하고 맺는 이 약속에 의해 너의 모든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너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삼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축복을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그런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약속에 근거하여서 하나님과 더불어 서원합니다. 그리고 그 서원의 증표로서 그는 기둥으로 세운 돌로 하나님의 전을 삼겠다고 하였으며, 또한 자신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야곱의 십일조는 아브라함의 십일조와 같이 감사의 뜻이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약속을 믿고 그에 따라서 믿음으로 따르며 살겠다고 하는 서원적인 약속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십일조 역시 어떤 명령에 의해서이거나 규정에 의해서 드려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서원한 십일조를 어떻게 드렸겠습니까? 그가 서원하는 것에서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맹세하였으나 그 어디에서도 십일조를 정기적으로 드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것은 야곱의 십일조는 훗날 십일조 규정에 의해서 십분의 일이라는 '분량'의 개념이 아닌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표'였으며 또한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의 표'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제사 생활이었다고 할 것이며 그것은 자원과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5)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십일조 제도
야곱에게서 열 두 아들이 나오고 이들은 열 두 지파를 형성하며 이들 지파가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게 됩니다.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야곱 이후로 더 이상 나오지 않다가 야곱의 후손이 애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민족으로 크게 번성한 후 하나님의 불러내심으로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진행 중 시내 광야에서 모세에게 명하여 십일조를 명령하여 언급하실 때에 다시 나옵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서원의 증표로 맹세한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율법의 규정으로 주어져서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과 제사장의 일을 돕는 레위인을 섬기는 일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돕고 절기를 지키는데 필요한 비용을 지는 일과 고아와 과부의 가난한 자들을 도우는 일로 지켜 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열 두 지파의 대표자인 야곱의 십일조 맹세는 지켜졌습니다.
그러면 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에게, 그래서 가나안에 입성할 이스라엘에게 그와 같은 의무가 주어졌을까요?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세상 나라와 전혀 성격이 다른 한 나라를 세우십니다. 하나님 나라로서의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왕국은 아브라함 안에서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성되는 신정국가의 개념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 왕국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야 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셨던 '제사 제도의 보존 언약'과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로 하나님과 언약한 백성입니다(시 50:5).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제사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어 그 언약 관계에서 의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확인하고 확증해 나가셨는데 그 언약의 관계를 순종과 충실을 표현하는 제사에 의하여 유지해 나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당시 이 제사 제도를 통하여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대로 계시해 나가시는 방식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제사 제도를 보이시는 것을 통하여 장차 인간의 죄를 속죄할 어린양 되신 독생자의 '헌제사역'을 계시하셨습니다. 제사 방식에는 5대 제사가 사용되었는데 이들 각종 제사 규례가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어린양의 희생 사역을 통하여 장차 이 땅에 오셔서 자기의 생명을 십자가에 드리실 그리스도의 희생을 모형적으로 예표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르러 세상에 오시고 자신을 희생 제사의 제물로 드려지기까지는 하나님께서는 제사 제도를 이스라엘 역사에서 대대로 지속적으로 계승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헌제사역에 의한 희생 제사가 드려짐으로 제사의 마침이 될 때까지는 제사 제도가 지속적으로 계승되어와야만 했고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서 제사 제도가 보존되어야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제사법들이 보유하고 있는 규례들을 주셨습니다. 곧 제사의 절차에 관한 규례, 제물들에 관한 규례, 제사에 사용되는 각종 기구들에 관한 규례,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들에 관한 규례 등 부수적인 규례들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절기 제도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절기에는 가장 큰 절기로 지켜지는 유월절, 칠칠절[맥추절, 오순절], 수장절[초막절, 장막절] 삼대절기를 비롯하여서 이 삼대절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무교절, 초실절이 있고 또한 부림절과 수전절이 있으며, 대속죄일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안식일, 안식월, 안식년, 희년의 절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사실상 1년 전체가 절기로 되어 있어 절기 속에서 생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절기 제도 속에 두는 것은 절기를 통하여 제사가 멈추지 않고 시행되어 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가 하면 절기에 이스라엘 온 백성이 집중하고 제사를 드리도록 하기 위하여서 성전 제도를 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이었습니다.
a. 첫 번째 십일조
이렇게 하여서 이스라엘 백성이 자손 대대로 제사를 유지하고 보존해 나가게 하였는데, 이때 성전을 관리하고 제사를 주관하는 자들이 있어야 하기에 열 두 지파에서 레위지파를 성별하여 제사와 관련한 일만을 하며 성전 중심의 생활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레위인은 그런 면에서 다른 열 한 지파에게 영적인 기업이 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반면에 레위지파를 제외한 다른 열 한 지파는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땅을 분배받아서 땅의 분배가 없는 레위인의 기업이 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역할을 십일조 제도를 통해서 하게 하셨는데, 그것은 레위인들이 먹고 사는 생계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고 보장이 되는 속에서 오직 성전 중심의 생활에만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민 18:24). 그래서 십일조 제도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십일조 제도에서 첫 번째 십일조입니다. 그러나 십일조 제도를 지켜 나가는 것은 열 한 지파만이 해 나가야 하는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십일조 생활을 하는 것은 레위인들도 마찬가지 였기 때문입니다(민 18:26). 그들도 역시 받은 십일조에서 다시 십일조를 취하여 제사장들에게 하였습니다. 이는 민수기 18장 3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그들이 '회막에서 일한 보수(報酬)'였습니다. 레위인으로서 같은 레위지파인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하게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에게 기업으로 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나님께로 돌린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 제사장을 하나님이 먹이신다고 하는 의미에서입니다. 그래서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민 18:26)라고 말씀하신 것인데, '거제(擧祭)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라고 한 것은 모든 제물 전체를 여호와께 돌린다고 하는 의미에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의미에서 하라고 하셨으며, 그렇게 한 십일조를 하나님은 제사장의 양식으로 제공하여서 그들의 생명을 보살피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십일조의 준수는 열 두 지파 모두인 이스라엘 전체가 지켜 나가야 하는 민족 공동체적인 제도였습니다.
이때 십일조 제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레위인들에 대한 생계의 책임을 지는 '조세'로서 의무 조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국가에 의해서 시행되는 강제 규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를 즐거운 마음으로 하게 하였으며 자원과 자발적으로 하게 하였습니다. 십일조 제도가 조세의 성격인 의무 조항이지만 '자원하는 마음에 의한 헌물'로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아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자신들의 생명이 보존되는 까닭에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감사함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자신의 소유물이 사용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는 자원적인 헌상으로 지켜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레위기 27장 26절, 30절, 32절에서 '여호와께 돌릴 첫새끼, 곧 여호와의 것 ', '성물',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숫자, 분량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것으로 하나님께 돌릴 것이라는 의미에서입니다. 따라서 이 십분의 일은 전체의 대표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십분의 일을 취하여 레위지파에게 주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따로이 기업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에게 십일조를 하여 그들의 기업의 양식으로 공궤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위하여 일하는 그들에게 응식(應食)이 되게 하였습니다.
십일조 제도에 의해서 레위인들은 일생을 제사에 종사해 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일조 제도 또한 제사와 관계하여 있게 하신 절기 제도와 성전 제도와 마찬가지로 제사 보존을 위한 제도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는 십일조 제도가 제사 제도와 그 효력의 기능을 같이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제사 제도가 존재하고 시행되는 한에는 또한 십일조 제도도 시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 제도가 그리스도의 헌제사역에 의해서 더 이상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짐으로 폐지될 때는 제사 제도와 함께 해온 십일조 제도도 더 이상 시행되어야 할 필요성이 없어 폐지가 됩니다. 제사 제도의 폐지는 절기 제도의 폐지를 가져왔고 또한 절기를 좇아서 제사를 드렸던 성전 제도의 폐지도 가져왔기에 이곳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담당하였던 레위인들과 여기서 다시 성별된 제사장들의 봉사의 직무도 더 이상 행하여지지 않기에 십일조 제도 또한 더 이상 조세의 성격을 띤 의무 조항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가 유독 십일조 제도의 유지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제사도, 절기도, 성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십일조만큼은 존재해야 한다니요?
b. 두 번째 십일조
십일조 제도에는 이외에도 다른 의미에서 드리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십일조를 두 번째 십일조라고 명명하여 말할 수 있는데, 신명기 12장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제물을 드리되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제물을 먹으며 즐거워하라고 하면서 그 즐거움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릴 것을 드리는 가운데서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곧 번제, 희생, 십일조,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택하여 지정한 한 곳에 가져다가 땅에 들어오게 된 즐거움에 의하여 즐거움을 함께 갖고 나누는 축제의 분위기에서 할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이는 가나안에 들어온 즐거움을 누리는데 그 즐거움을 누리게 하신 분이 누구시냐고 할 때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공궤의 목적에 의해서 하기도 하지만 즐거움을 같이 갖고 나누는 누림에 의해서 하게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십일조는 절기의 축제 속에서 바칠 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가족들과 함께 공동식사를 하고 그들이 수고한 모든 일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복주신 것을 기뻐하며 그 자리에 레위인들도 참여시켜서 하여 함께 기쁨을 갖게 하는데 쓰여졌습니다(신 12:4-12).
c. 세 번째 십일조
신명기 14장 22-29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드릴 십일조로 또 한 가지의 십일조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십일조를 세 번째 십일조라고 명명하여 말할 수 있는데, 이 십일조는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와 같은 연약하고 외로운 자들을 구제하게 하기 위해서 명령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한 이스라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연약한 가운데 있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도와 보살필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며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데 힘이 부쳐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도록 도우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 십일조는 매3년마다 하게 하셨으니 그해 수확의 모든 십일조를 모아서 마을의 창고에 쌓아 놓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토지를 기업으로 받지 못한 레위인과 마을에 함께 사는 객[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마음껏 가져다 먹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신 14: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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