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율법의 단절성과 연속성에 대한 바른 이해에 의한 올바른 주일성수와 헌금(3)/ 이천우 목사

YOROKOBI 2009. 8. 4. 22:25
4. 안식일과 십일조의 단절성과 연속성에 대한 이해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율법의 의식법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주일성수와 온전한 십일조 헌금 생활의 준수를 강조하지만, 사실 이는 율법의 의식법에 대한 성경의 이해의 부족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주일성수와 십일조 헌금 생활의 준수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구약의 안식일과 십일조의 단절성과 함께 연속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구약의 안식일과 십일조의 단절성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이후에는 더 이상의 구약의 안식일이나 십일조를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계명임을 내세워 안식일과 십일조의 준수를 구약 시대에서만이 아니라 신약 시대에서도 온전히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에서 율법의 의식법은 한시적으로 존재하였던 것으로 그 역할을 끝내고 폐기[폐지]되었다는데 동의합니다. 여기서 '폐기'는 국어 사전의 의미로서는 오래된 서류 같은 못쓰게 된 것을 없애버리거나, 조약이나 법령 따위를 무효로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율법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8장 13절에서는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옛 언약을 새 언약으로 바꾸시면서 새로운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이제 옛 언약은 더 이상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또한 10장 9절에서는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훨씬 더 나은 제도를 세우시려고 첫 번째 제도를 폐지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변역'[바꿈]으로 말해지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7장 12절에서 "제사 직분이 변역(變易)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계통의 제사장을 보내실 때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하여서 하나님의 율법도 바꾸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꾸는 뜻인 변개, 변경으로 쓰이는데 제도를 바꾸는 개념에서 '개혁'이란 용어로 사용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의식법의 폐기'란 더 나은 새로운 법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더 나은 새로운 법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옛것인 의식법 자체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어서 없애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다'는 참된 의미는 율법의 의식법은 그 자체가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법은 이제 더 나은 새로운 법으로 바뀌어서 주어졌기 때문에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새로운 법입니다. 그러니 설사 율법의 의식법을 좇아서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릴지라도 이 제도의 준수가 그에게서는 폐기 처분한 종이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제도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의식법의 단절성과 함께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연속성입니다. 율법의 의식법은 문자적으로는 더 이상 지켜져야 할 필요가 없어졌으나 율법의 원리와 정신은 영구한 것으로 그 원리와 정신은 신약 시대에서도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과 십일조의 원리와 정신은 신약 시대에서도 변하지 않으면서 더욱 의미 있게 지켜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강조하여 하는 말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원리에 따라 십일조를 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렇지만 안식일과 십일조 문자 그 자체에 구속(拘束)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되 율법적인 의무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날과 모든 것을 주셨으니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깨닫고 그것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심지어는 "믿음이 아직 어려서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성도에게 안식일과 헌금의 원리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주일을 온전히 성수하지 않고 십일조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율법의 잣대를 적용해서 정죄하거나 위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구약의 안식일과 십일조의 원리와 그 정신에 따라서 안식일[주일]과 십일조를 의무는 아니지만 해야 하며 또한 하도록끔 가르쳐야 한다는 아주 이상한 괴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율법의 원리와 정신은 영구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과 십일조의 원리와 정신은 신약 시대에서도 변하지 않고 적용되어서 더욱 의미 있게 지켜져야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적용과 더욱 의미 있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원리'와 '정신'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리와 정신을 적용함에 있어서 구약의 안식일이 갖는 '제 칠일'과 십일조가 갖는 '십분의 일'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끌어다가 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율법의 의식법의 단절성에서 '더 이상 문자적으로 지켜져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하면서도 구약에서의 모세 율법이 규정한 제 칠일로서의 안식일과 십분의 일로서의 십일조로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안식일과 십일조가 지닌 기본 원리와 정신을 좇아서 하나님 앞에서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고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최소한의 도리와 의무는 제 칠일인 일요일은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안식하는 날로서 이 날을 주일로 구별하여 주셨기 때문에 엿새 동안은 우리가 땀 흘려 일하고 최소한 일곱째 날은 거룩히 지켜 '주일성수'하고, 모든 소유는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 모든 소유에서 최소한의 기준인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헌금하게 하여서 교회를 섬기게 하였기 때문에 '십일조' 헌금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정해진 날과 헌금」에 '최소한'이라는 제도의 기준을 갖습니다. '최소한'이란 그야 말로 가장 적은 것을 뜻합니다. 그 이하로 내려가서는 안 된다는 뉘앙스를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이면 더욱 좋다는 뉘앙스도 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이는 안식일과 십일조의 원리와 정신을 잘못 적용하고 있는 것이요 이렇게 해서는 그 원리와 정신의 의미가 제대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주일이란 말입니다. 구약의 제 칠일이란 날의 안식일이 신약의 제 칠일이란 날의 안식일로 변경된 것이 아닙니다. '제 칠일'이란 날의 기준은 문자적으로 없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규례가 없어진 것이요 이제 그 규례에 의한 제도는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엿새 동안은 땀 흘려 일하고 일곱째 되는 날을 새로운 안식일로 삼는다는 것은 더 이상 제도화되고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날을 변역[개혁]하지 않는 한에는 바뀔 수 없는 그런 '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십일조도 그렇습니다. '십분의 일'이란 양의 기준은 문자적으로 없어졌습니다. 더욱이 십일조는 제사와 절기와 성전이 없어진 상태에서 여기에 종속되어 있던 조세 제도로서 당연히 함께 없어졌습니다. 제사와 절기와 성전이 없어졌는데 그 종속되어 있던 십일조 제도만 살아 남아 있어서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안식일과 십일조의 원리와 정신의 연속성은 신약 시대에서 어떻게 적용되는 것일까요? 우선 구약의 안식일은 그 자체가 의식법이란 제도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지기 전에 그것은 하나님만을 섬기는 경배[예배]의 종교성을 띠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성격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의 의식법으로서의 안식일 규례는 그것이 표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 안식을 모형하고 예표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칼빈은 십계명의 제4계명에는 모형(typical)의 요소들이 있다고 하였으며, 안식일 계명을 예표(figure)라고 부른 초대 교부들에게 동의했습니다. 안식일에서 진정 알게 해 주려고 한 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그 분 자신이 진리이며 그 분의 임재로 모든 모형들이 사라진다. 그가 몸체이며 그의 출현으로 그림자는 뒤로 제쳐진다. 감히 말하건데, 그는 안식일의 참된 성취이시다."고 말하였습니다. 제4계명에서의 안식일이 규례에 의해서 의식법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지만 이것이 참 안식을 모형하고 있고 예표하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마침내 참 안식의 실체가 드러나고 나타났을 때 모형적 요소는 폐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의식들(ceremonies)이 예표했던 것들의 실체들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눈 앞에 제시되었다”고 말하였으며, 어떤 날들도 '그 자체로서 거룩한' 것은 아니며 날들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의 일부'는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제4계명인 안식일이 종교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의식법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그래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과 관련하여서 '이렇게 지키라'는 방법이 제시되고 있습니다만, 이는 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주어진 것이지 전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만고불변의 원리로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의식법이라는 것은,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은 더 나은 새로운 법이 주어지면 그것을 따라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안식일이 갖는 의식법 자체가 신약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지는 연속성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과 연속성을 갖는 것은 의식법이 아닌 종교성입니다.

신약 시대의 교회에서는 구약의 안식일에서 계시되고 있는 참 안식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이루신 구속 사역이 가져다 준 부활의 생명에 의하여서 다시는 정죄를 받지 않고 죽음 아래 있지 않으며 영원히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참 안식의 기쁨을 누리는 자로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주어진 더 나은 법인 새로운 법이 지닌 원리와 정신에 의해서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안식일을 구약의 방식에 의해서가 아닌 교회에서 새롭게 적용하여서 가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제 칠일'이란 한 주간의 한 날, 그날이 한주간의 마지막 날이든 또는 첫날이든, 그래서 매주일 마지막 날이든 매주일 첫날이든지간에 한 날[하루]을 안식의 날로 삼고서 그 날을 '주일'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이제 모든 날이 율법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에서 자유하여 안식의 기쁨을 누리는 날입니다. 그러기에 '제 칠일'이니 '매주일 첫날'이니 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더 나은 법인 새로운 법이 지닌 원리와 정신에 의해서 새로운 제도를 자신들에게 적용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셔서 자신들을 만나 자신이 다시 살아나신 것과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신 주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자 신자들이 모여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며 기도하며 성찬을 기념할 수 있도록 '날마다' 모임을 가질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점차 이방 지역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면서 일정한 날에 모임을 갖고 공중예배를 드릴 필요성이 대두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 안식 후 첫날이요 이 날에 주님을 만나 뵙고 기뻐하며 평안의 은혜 속에 있는 기억을 갖고 있는 그들로서는 이 안식 후 첫날을 '매주일 첫날'로 인식하고서 '주의 날'로 정하여 정기적인 예배 모임을 가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다른 이방 지역의 그리스도 교회들도 따랐으며 그리스도 교회에서 '주의 날'은 '매주일 첫날'로 공적화 되었습니다.

'주의 날'을 '매주일 첫날'로 삼고, 그래서 '주일'로 지켜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오랜 교회의 전통입니다. 그리고 태양력에 의한 일요일을 주일로 삼고 매주일에 교회가 공중예배[공적예배]를 드리온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오랜 교회의 전통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은 일요일을 '주일'로 부르며 그 주일을 지켜온 '그 날'[일요일]만은 아닙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날이든지간에 주의 이름으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중예배의 모임을 가지면 그 날은 '주의 날'입니다. 가령 우리네 교회는 일요일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적 모임을 갖고 있으며 그래서 이 날을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듯이 또한 교회가 수요일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적 모임을 갖습니다. 그렇다면 그 수요일이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몸을 이루는 일을 위하여 모임을 갖는 날로 삼고 있다면 그 날은 주일로 지내는 일요일과 마찬가지로 '주일', 그러니까 '주의 날'입니다. 이 주의 날은 다른 요일에도 가질 수 있습니다.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목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에도 말입니다. 모든 날을 주의 날로 가지면 좋지요. 그런데 그 모든 날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할 수가 없어서 일요일과 수요일에만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면 그 날은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이 함께 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는 공적 성격을 띠게 되어서 주의 이름으로 함께 하는 '주의 날'[주일]이 됩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일요일에 한하여서 '주일'로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의 날', 또는 '주일'이란 용어가 지닌 의미를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주의 날'이라는 표현으로 말하고 있는 곳은 요한계시록 1장 10절인데 이 표현에서 '주의'라고 번역한 단어는‘퀴리아케’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헬라어 형용사 '퀴리아코스'의 여성형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요한계시록 1장 10 이외에서는 고린도전서 11장 20절의 '주의 만찬'이라는 표현에만 나타나는 형용사로 그 의미는 '주님께 속한'입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날'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몸으로서의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날을 뜻합니다. 따라서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하여서 그분과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지 않는 한에는 '주의 날'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공중예배를 위한 공적 모임을 갖지 않는 날은 '주일'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느 날이든지간에 교회가 공적으로 어느 날을 '주일'로 정하고서 그 날을 '주의 날'로 삼는다고 하면 그 날에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을 이루는 실질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과의 관계성에서 보게 되는 율법의 단절성과 연속성은 구약의 십일조와 신약의 헌금(연보; 이후의 글에서는 연보란 용어로 주로 사용한다)와의 관계성에서도 동일하게 보게 됩니다. 신약에서는 구약에서 지켜왔던 율법의 제도와 그에 따른 의식을 행하는 것으로서의 십일조 이행은 없습니다. 그래서 문자적인 십일조에는 더 이상 매임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절성이 곧 십일조 율법에 나타내신 율법의 원리와 정신이 단절된 것은 아닙니다. 율법의 원리와 정신은 십일조에서도 연속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교회 시대에서 십일조가 언급된 적은 없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십일조 제도가 폐지되었다는 언급도 없다고 말하면서, 그러기에 십일조 제도는 신약 시대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합니다만 이는 억지입니다. 십일조 제도의 폐지를 말했을 필요가 없는 것은 이것이 종속되어 있었던 제사와 절기와 성전 제도의 폐지가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쉽게 말해서, 수명을 다한 오래된 옛날 기차를 기차 박물관에 전시해 두었는데 이런 기차에다 기름을 넣지 말라는 말은 없었다고 하면서 경유 기름을 가득 집어넣어 채워둘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또한 이제 새로 도입한 기차는 전기에 의해서 가고 자기장에 의해서 달리고 하는데 그 기차에 경유 기름을 집어넣어서 달리게 해야 하겠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이제 이 새로운 기차에는 여기에 사용될 수 있는 맞는 것을 갖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십일조 율법에서 그 단절성과 연속성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옛 것은 지나갔으며 새 것이 왔습니다. 이 옛 것과 새 것은 전혀 별개의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같은 것인데 옛 것에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전혀 새로운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입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란 공동체를 섬겨 가는 일을 위하여 필요해서 제도적으로 사용하셨던 십일조의 개념은 신약 시대의 교회에서는 아예 없는 것이며 따라서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일까요?

신약 시대에서는 분명 구약 시대의 십일조 개념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십일조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게 하였던 봉사의 직무는 신약 시대의 교회에서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구약 시대에서의 십일조가 갖는 최종적인 완성이 이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므로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말라기 3장 10절에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온전한 십일조’는 장차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계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맞는가 하는 것은 먼저 ‘온전한 십일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그 의미의 바른 이해부터 가져야 하겠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책망하고 있는 십일조 문제는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들의 지도자로 있는 제사장들의 부패한 악과 하나된 것에서 이들의 악도 함께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와 함께 헌물을 바칠 것을 요구받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십일조는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일조로 바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연보에서 행하는 재물(돈)이 아닌, 오직 ‘토지 소산과 가축’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토지 소산과 가축을 바칠 것이 요구되고 있는 것은 이것이 땅의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과 제사장,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을 돕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에 의한 십일조는 곧 그 연약한 가난한 자들의 양식으로 삼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땅의 기업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래서 소출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제사장, 그리고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있었던 땅을 잃고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토지 소산과 가축으로 십일조를 해서 그들을 도움으로 그것이 그 가난한 자들의 양식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양식이 되는 이 십일조는 특히 주의 성전의 일을 전무(專務)로 하는 레위인들에게는 ‘기업’의 성격을 갖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차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분배하여 주셨는데 열 한 지파에게는 땅의 기업을 주셨습니다만,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을 해야 할 레위 지파에게는 땅의 기업을 주시지 않고 열 한 지파가 땅에서 소유하고 있는 토지 소산과 가축이 그들의 기업이 되게 하여서 그 십분의 일로 기업을 삼게 한 데 따른 것입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은 십일조와 함께 헌물 생활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헌물이란 ‘희생제물’을 의미합니다. 이 희생제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성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신 모든 제물 곧 번제물과 화목제물과 십일조와 거제물과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한 예물을 말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와 함께 이 헌물을 드린 경우, 그 드린 자는 그의 자녀와 종도 함께 레위인들과 함께 성전에서 먹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사는 날 동안에는 언제까지나 잊지 말고 레위인들을 돌볼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명령받았습니다(신 12:11-12, 18-19). 그것은 그들은 토지, 곧 땅의 기업이 없는 자들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으로서 그들의 기업으로 제공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헌물은 십일조와 헌물로 구분되어 사용되는 것으로 말해지기도 하는가 하면, 민수기 18장 24절, 26-29절에서는 십일조 자체를 헌물(개역성경은 ‘거제물’, heave-offering)이라고도 했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에게 바쳐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헌물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이 자신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받은 기업인 십일조에서 다시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성소에서 봉사하는 제사장에게 바치는 예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레위인들이 제사장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인 것입니다(참고. 느 13:7).

그런데 선지자 말라기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온전한 십일조’를 할 것을 명령받고 있는 것은 소위 말하는 “소득한 것에서 십일조 생활을 완전하게 하라, 그래서 십일조 생활에 흠이 없게 하라“는 것에서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온전한 십일조’에서 ‘온전한’은 ‘모든’이라는 뜻으로 곧, ‘모든 십일조들’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바친 것은 토지 소산과 가축인데 토지 소산으로 드려진 십일조에 해당되는 품목은 곡식과 새포도주와 (올리브)기름입니다. 즉 곡식과 새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가축이 십일조의 품목입니다.

이 십일조를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레위인들을 위해서와 또한 절기들을 위해서 각각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드린 10분의 2 외에도 매 3년마다 가난한 자, 곧 고아와 과부들을 돕기위해서도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이렇게 십일조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으며, 십일조로 바쳐지는 품목도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소유인 땅에서 수확을 하고서도 하나님께서 십일조 규례로 말씀하신 대로 바치지 않았으며, 헌물도 제사장의 몫을 제대로 떼어놓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들의 행위는 악했으며, 이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을 하고 있는 행위로 규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악한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들도 백성들이 바친 십일조들을 저희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빼돌림으로 십일조를 보관하는 성전 곳간을 비게 하였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행은 제사장들의 악행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제사장은 곧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을 대표하고 있는 자들인데, 이러한 이들의 악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 범죄와 타락을 가져오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공동으로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 모두가 하나님께 바칠 십일조들을 빼돌리지 말고 그 ‘모든 십일조들’을 창고에 들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일조의 본래의 목적인 레위인들의 기업으로 사용되어야 하고 가난한 자들의 양식으로 쓰여져야 하며, 절기들에 사용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온전한 십일조’는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희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에서 십일조가 속죄 제사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10장 8-9절에서 제사와 함께 예물을 언급하면서 제사와 예물이 함께 폐하여졌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예물은 제사에 드려지는 제물과 함께 다른 예물들도 직간접적으로 죄를 속하는 제사와 관련이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십일조 또한 성전 예물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므로 십일조가 속죄 제사와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가 죄를 속하는 제사와 직접 관련이 있는 예물들과 함께 열거되고 있기도 하며(신 12:6, 11, 17), 십일조는 거제물에 속하는 예물이기도 하였습니다(민 18:24, 26, 28).

그런데 말입니다. 구약에서의 이 십일조는 앞서에서 말한 히브리서 10장 8-9절에서 보게 되는 대로 ‘제사와 예물’이 폐하여진데 따라서 함께 폐하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의 폐하여졌음을 말하면서 오늘날에는 제사는 더 이상 행해지지 않고 있는데, 제사 제도가 지속되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졌던 십일조 제도가 폐하진 것은 인정하지 않고 이것의 계속적인 시행을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며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제사와 함께 십일조도 폐하여진 것은 그보다 더 나은 ‘새로운 것’이 왔기 때문입니다. 옛 것은 폐하여지고 새 것이 온 것입니다. 이것은 ‘옛언약’과 ‘새언약’의 관계성에서 입니다. 옛언약은 새언약이 올 때까지 한시적으로 주어진 것이요 새언약이 올 때까지 그림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에, 옛언약의 실체인 영구한 새언약이 오면 옛언약은 새언약으로 변혁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 말라기는 이것에 대한 예언을 4장 1-6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말라기 4장 1-6절의 예언은 말라기 1장 2-5절에 대한 성취로 있을 것으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으로 로마서 9장 13절, 그리고 14-18절에서 이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할 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가져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희생은 말라기의 십일조 헌금에 대한 내용, 특히 '온전한 십일조'에 대한 문제에 따른 것으로 이것에 계시적 의미를 담은 메시지로써 하나님 앞에 드려질 온전한 십일조로서의 헌금, 곧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온전한 십일조는 맏물이요, 흠이 없으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밖에는 없다는 것을 증거 하려는 목적을 띠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리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지원하여 돕는 기업으로 주어진 것인 동시에 토지 소산과 가축의 십분의 일로서 구별되어 바쳐져 죄를 속하는 제사와도 관련이 있는 예물의 성격을 가짐으로써 십일조는 단지 그냥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한시적으로 존재하였다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안개 사라지듯이 그렇게 폐지되어 그 자체가 사라지는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새언약에 의한 옛언약의 폐지는 새언약으로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옛언약에 속한 종으로 있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자유한다는 것인데 이는 새로운 언약에 속해 있어 이제는 더 이상 종으로서가 아니라 자유한 아들로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새언약을 맺으시기 위하여, 그래서 자신 안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새언약을 세우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헌신제사에 쓰여질 희생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죄인을 대신한 그 흠 없는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죄인된 우리를 주심으로 이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믿는 자, 곧 그리스도인들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과 그 나라의 의로움과 자비에 부요하신 자가 되셔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부요를 공급하여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들로 하여금 평균케 하십니다. 이는 가난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믿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들의 믿음을 세워 견고케 해 나가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한 성령 안에서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자비에 부요한 은사를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곧 성도를 위하여 섬기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신약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는 일에 있었던 연보는 이 성도를 섬기는 봉사의 일로 행하여 나갔던 것입니다(고후 8:1).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죄 아래 있는 자기 백성을 어떻게 자비를 베풀어가셨는가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대로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연보의 원칙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장에서 ‘있는 대로 하라’, ‘미리 준비하여서 하라’,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하라’,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 ‘너희의 유여한 것을 나누는 것이다’를 말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자율적인 믿음의 마음을 말합니다만, 이 모든 것의 대원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그들을 대신해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신, 그리고 이 제사에 친히 자신의 몸을 예물로 바친 것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연보의 대원칙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노라”(고후 8:4-6).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여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심같이) 저희가 먼저 그들 자신을 주께 바치고’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하여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이며 여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봉사하는 자와 그들의 섬김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입고 있는 자와의 관계가 존재하는 데 바울은 이를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상관 관계’로 말하였습니다. 교회에는 삼직(三職)이 존재합니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입니다. 우리나라 각 교단의 교회 헌법이 이외에도 다른 직분도 다루고 있습니다만, 이는 여기서 다룰 내용이 아니므로 하지 않겠습니다.

이 삼직에서 장로와 집사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봉사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그러나 목사는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전무(專務)합니다. 그럼으로써 목사는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는 자들의 ‘영적인’ 기업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런 생업이 없는 목사에 대하여 생업을 가진 신자는 ‘물질적인’ 기업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목사의 직무를 충성스럽게 수행할 수 있도록 신자는 물질로써 돕는 봉사의 직무를 또한 충성스럽게 수행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를 봉사하는 이들을 지원할 필요를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 17-18절의 말씀은 신자들이 목사를 어떻게 잘 대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성경적인 원리는 목회자가 스스로 연구와 목회에 몰두 할 수 있기 위해서 자신과 가족의 필요를 위한 세속적인 일들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 바울이 자급했던 것(천막을 만드는 일)을 말하면서(행 18:3) 그가 그 자신의 사역을 직업을 가지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가 거기서 당시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내린 추방령에 의해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게 이달리야로 쫓겨와 있던 본도 출신의 아굴라라는 유대 사람을 만나 알게 되었는데 마침 그도 바울처럼 천막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바울은 그의 집에 머물면서 같이 일을 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이방인의 세계에도 전하기 위하여 많은 지역을 다녀야만 했던 바울이 천막 만드는 일을 한 것은 그가 생계를 해결 할 길이 막막해서 그 자신 스스로 직업을 가지고 노동을 함으로써 해결해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아무에게도 보수를 받지 않는 만큼 그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고후 9:19). 그런 것이지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14절에서 그의 사역을 위해서 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을 권리를 강조하여 주장하였습니다. 사실상 그는 자주 복음 사역을 위해서 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빌 4:10-19).

이때 목사가, 그리고 신자가 돕는 봉사의 직무는 구약에서의 의무의 법에 의해서가 아닌 ‘믿음의 법’으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믿음의 법으로 해 나가는 원리와 정신을 신약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봉사의 직무는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와의 상관 관계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 간에 부요한 자와 가난한 자와의 관계에서도 이 상관 관계는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연보에 의해서 부요한 자가 가난한 자를 돕는 것에서만이 아니라 ‘은사’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케 하시는 것에 주님의 선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여기에 적용되어야 할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균’케 하는 원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13-15절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하여 고린도교회에 헌금을 하게 했을 때 고린도교회 신자들의 헌금을 거두어다가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평안하게 살게 하고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곤고한 형편에 처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고린도교회가 왜 그들을 도와야 하는지를 알려서 공평[평균]하게 하려는 것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넉넉한 자들은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도울 수 있으므로 자신들의 여유 있는 것으로 돕고 또한 훗날 고린도교회에 어려움이 닥쳐 곤란을 겪으면 이들을 통하여 도움을 받았던 자들이 다시 어려움에 처한 고린도교회를 도움으로써 서로 필요한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한 설명을 출애굽기 16장 18절을 인용하여서 하였습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기에 신자는 이를 모범으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본을 좇아서 하여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린도후서 8:9).

이런 원칙에 의해서 봉사의 직무를 감당하는데 여기에 따라야 할 신앙적인 자세와 태도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연보가 십일조 규례를 통해서 의무로 주어졌는데 이스라엘은 공동체의 일원인 레위인을 책임지고 있는 자들로서 마땅히 섬겨야 할 의무를 짊어지고 그에 대한 본분을 다하여서 행해 나갈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원해서 기쁨으로 십일조를 드려 나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도 이러한 정신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신약 교회는 교회를 봉사하는 이들에 대해서나 또한 한 공동체의 일원인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그들을 섬겨야 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연보해야 할 실제적인 책임으로서 헌신적 지원의 연보가 요청됩니다. 앞서에서 언급을 하였습니다만, 이때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인 고린도후서 8-9장에서 우리가 해야 할 연보에 대한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것은 “주께 먼저 자신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신으로서 교회에도 헌신하는 정신을 가지고 ①힘써서 ②자원함으로 ③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④있는 대로 ⑤준비하여서 ⑥즐거운 마음으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연보라야 하나님께 헌상(獻上)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여기에서 연보 액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전부’입니다. ‘최소한’의 연보가 정해진 기준에 의해서 하는 것도 아니며, ‘최대한’의 연보가 정해진 기준에 의해서 그만큼까지는 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전부’란 ‘믿음의 법’에 의하여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분량’이기에 ‘믿음의 분량껏’입니다. 이 믿음의 분량은 교회가 “우리 교회는 연보 액수의 기준이 소득의 십분의 일입니다. 그러니 십일조를 하십시오!”라고 하여서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은 최소한의 분량도 없으며 최대한의 분량도 없습니다. 믿음의 분량은 주께 먼저 자신을 드리고 또한 교회에도 헌신하는 것이기에 이미 자신을 전부 드린 것으로 출발합니다. 자신의 생명도 모든 소유도 다 주의 것이며, 따라서 주의 뜻을 좇아서 선하게 재물도 사용합니다. 여기에 ‘백분의 일’을 자원함으로 그 마음에 정하여서 있는 대로 힘껏 하면 그에게서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또는 ‘십분의 일’을 자원함으로 그 마음에 정하여서 있는 대로 힘껏 하면 그에게서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또는 ‘이분의 일’을 자원함으로 그 마음에 정하여서 있는 대로 힘껏 하면 그에게서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또는 ‘그 이상’을 자원함으로 그 마음에 정하여서 있는 대로 힘껏 하면 그에게서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얼마를 각각 그 마음에 정하여서 하든지간에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서 연보 액수는 형편 따라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매주, 매월, 매년 똑같은 십분의 일이 아니라 전에는 십분의 일을 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오분의 일을 하고, 앞으로는 그 이상이나 그 이하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보할 수 있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부요함은 언제나 십분의 일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십일조의 율법이 그를 얽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무지 십일조의 개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를 마음에 정하여서 하든지간에 그것이 믿음의 분량껏이라면 그것은 전부입니다. 이 새로운 연보의 법칙을 우리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십일조는 ‘최소한’의 연보가 아닙니다. 그러니 ‘최소한’의 십일조는 하는 것은 신자의 의무라고 가르치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요!. 또한 율법을 외형적으로 좇아가는 율법주의에 근거하여 십일조 문자 그 자체에 구속(拘束)되어서 십일조를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도 구약의 십일조 원리의 연속성에서 신약도 십일조를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요!.

바울이 가르친 연보의 원리와 정신, 그리고 자세와 태도는 “너희가 연보하는 제도로 정해진 규칙이 이런 것이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주께로부터 연보에 대한 세세한 규칙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 바울이 자기 임의로 연보의 규칙을 만들어서 그것을 교회가 따르고 지켜야 할 법으로 갖게 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다만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연보를 고린도교회에 하도록 권하는 데서 그들이 어떤 원리와 정신으로 신앙적으로 연보를 해야 할지를 가르쳐 나갔을 뿐입니다. 그리고 연보의 원리와 정신으로 등장하는 기준은 언제나 그들의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신을 드림에서 찾아집니다. 그래서 주께서 그에게 공급하신 사랑(자비)의 원천에 의해서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한 그와 같이 ‘성도를 섬기는 봉사의 직무’인 헌신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에서의 연보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가르침에 의해서 교회 생활에서 연보 생활을 믿음으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으로 있으면서 교회원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의 안식일 준수가, 그리고 십일조 준수가 신자의 책임이요 의무이기 때문에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는 것과는 분명 다릅니다.


맺는 말

이제 말을 맺겠습니다. 구약의 안식일인 ‘제 칠일’의 준수와 십일조의 ‘십분의 일’ 준수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만일 성경의 가르침과 상관없이 그것이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다만 율법의 후견인의 도움을 받아서 해 나가고자 한다면 그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말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법을 알게 되어서 ‘주의 날’을 일요일에 갖고 주께 속한 자로 살아가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유에서 십분의 일을 하고자 하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하십시오. 만일 일요일만이 아니라 수요일도 ‘주의 날’로 삼고 교회의 몸을 이루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유에서 삼분의 일을 연보하고자 하는 믿음을 갖습니까? 그것이 자신의 믿음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또는 그 이상이든 그 이하이든 그것이 자신의 믿음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 누구도 그러한 여러분의 믿음의 자유를 억압할 수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