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율법의 단절성과 연속성에 대한 바른 이해에 의한 올바른 주일성수와 헌금(2) /이천우목사

YOROKOBI 2009. 8. 4. 22:13
3. 신약에서의 십일조와 주일 개념

우리는 지금까지 구약에서의 안식일과 십일조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신약에서의 주일성수와 헌금의 개념을 보겠습니다.

(1)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가져온 의식법의 폐기[개혁]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고 죽음을 당하시고 장사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이루신 구속 사역으로 율법의 마침이 된 것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누구나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가리킨 후손인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만 유효한 것이요(갈 3:19),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법으로 죄에서 자유하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갈 3:21-29). 여기에 있어서 이 은혜로운 일이 있기까지 이스라엘에게 적용되고 작용되어 왔던 율법의 의식법들은 이제 그 기능과 역할이 끝났습니다.

그러므로 벨직신앙고백서 제25장은 의식법의 폐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의식이나 율법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끝났다는 것과 그 분명치 않았던 일들이 모두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따라서 율법의 참 진리와 그 실체는 이 모든 것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기는 하되, 이 율법의 의식을 지키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필요 없다고 믿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가르침을 확증시키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영광을 높이기 위한 생활을 규정해 나가도록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얻은 그 모든 증거들을 여전히 사용하는 바이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1-19절에서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고 또한 살리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율법을 무효화시켰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끊임없이 우리 죄를 고발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셔서 다시는 정죄를 받지 않게 하셨으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에게서 할례는 무의미합니다. 더 이상 먹고 마시는 일이나 절기를 지키는 문제나 안식일과 월삭을 지키는 문제로 남의 비난을 받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것은 다만 앞으로 올 일에 대한 상징이요 그 본체이신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0장 1절에서 "율법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실 그 좋은 것들을 보여 알게 해 주시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뿐 실체는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만 존재하기로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개혁될 때까지 임시로 맡겨진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7장 18-19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사람을 구원할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율법은 무력하고 무익하므로 폐지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8장 6-7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두 번째 언약인 하나님의 새 언약에는 더 나은 약속이 들어 있기 때문에 첫 번째 언약인 옛 언약은 이제 효력이 없다는 의미로 "첫 번째 언약이 무흠[결함이 없음]하였다면 두 번째 언약을 요구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13절에서는 "두 번째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제 첫 번째 언약인 옛 언약은 낡아진다"고 하였고,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두 번째 언약으로 주어진 새 언약에서 '새롭다'를 뜻하는 '새'는 최종적인 개념입니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마지막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말입니다. 땅 위에 아직도 제사장들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대제사장이 되시지 않았을 것이며, 땅 위에 앞으로도 성전이 있어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성전을 무너뜨리며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앞으로도 절기가 계속해서 지켜져야 하는 것이라면 자신을 헌제제사로 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전히 절기를 지키도록 제도를 더욱 굳게 하셨을 것이며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십일조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 자들을 엄히 책임을 묻고 죽음의 형벌로 다스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유대교가 아닌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제사 제도를 지키고 절기를 지키고 성전 생활을 하고 제사장이 활동하고 하는 곳은 없습니다. 당연히 여기에 종속되어 있는 십일조 제도도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속 사역을 완수함으로써 은혜로운 복음의 새로운 시대가 펼쳐지는 신약 시대의 전 시대인 구약 시대에서 이스라엘 왕국에 한하여 주어진 구시대의 제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새롭고 더 나은 길을 가지고 오실 때까지는 사람들은 옛 언약에 의한 이 제도를 지키며 살았습니다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제 더 나은 제도의 제사장이요 제물이요 성전이 되신 후에는 여기에 종속되어 있는 십일조란 옛 언약의 제도는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만일 십일조란 옛 언약의 제도를 고집한다면 그것이 효력을 발휘해야 하는 까닭에 다른 제도들 곧 제사법과 절기법과 성전법에 의해서 지키는 이 제도도 여전히 지켜져야 할 것이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증명할 피가 계속해서 뿌려져서 제단을 피로 물들이고 흘러 내려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신약 시대에서도 십일조를 드릴 것을 명령하였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

우리 나라의 교회는 개신교로 자신들을 말합니다. 이는 개혁파 신교라는 것으로 개혁교회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개혁교회 됨을 구교[카톨릭]에 대항하고 구교의 잘못된 교리와 예배 의식을 개혁한 것에서 주로 찾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이는 바른 교리로 믿고 따르며 바른 예배 의식을 갖는다는 것인데 정작 역사적 전통을 잇는 신조와 교리를 따르지 않으며 여기에 근거하여서 예배 모범을 바르게 가져 나가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십일조도 그렇습니다. 앞서 벨직신앙고백서 제25장에서도 본 것입니다만 의식법의 폐기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십일조 제도를 여전히 고집할까요? 그 첫째 되는 요인은 예수님께서 신약 시대에서도 십일조를 드릴 것을 명령하였다는 것을 듭니다. 과연 그럴까요? 마태복음 23장 23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구절은 누가복음 11장 42절에서도 기록되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또 누가복음 18장 12절입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지금 이 세 구절은 단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 때문에, 그런가 하면 예수님 당시에 언급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신약 시대에서도 십일조를 할 것을 말씀하셨으며, 또한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십일조를 하면서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이 구절들은 십일조 제도를 교회가 계속해서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말해 주고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십일조 언급은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서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옛언약을 성취하시기까지는 모든 율법을 준수하는 자의 위치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당시 예수님은 아직은 구속 사역을 진행해 나가는 때에 있으므로 예수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율법의 요구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여전히 의식법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자신도 친히 여러 절기들을 지키셨으며 또한 의식 규례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율법 아래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의 바른 준수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신명기 14장 22-23절에서 명령하고 있는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리는 데 곡식과 새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드렸으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양념에 쓰이는 채소에 이를 만큼 십일조의 적용을 세세한 부분에까지 적용하여서 지켜나갔습니다. 그래서 박하 꿀풀과에 속하는 1m 크기의 다년초로 단맛을 내는 식물인데 줄기와 잎에서 향료를 채취한다. 유월절 축제 때 먹는 쓴 나물에 넣는 양념 중 하나이다]와 회향[미나리과의 식물로 운향이라고도 하는데 1-15m 크기의 다년초로 "궁궁이"라고도 불리우며 뿌리에서 향료를 채취하여 구충, 통경(通經) 등에 약재로 쓰기도 하고, 양념으로 쓰인다]과 근채[미나리과에 속하며 '구민초'라 불리움. 양념과 약재로 쓰인다]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십일조 생활을 인정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그러하듯이 그들이 아직은 율법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해온 대로 그 모든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단지 그러한 십일조를 하라고 하는 것에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율법에 따라 바치는 그들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율법의 준수는 그야말로 작은 일입니다. 이보다 더 크고 가장 중요한 율법의 준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의(정의)와 인(자비)과 신(믿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설사 십일조만이 아니라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기까지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을 무시하고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가 하면 의와 인과 신을 행하여 나가는 참으로 큰 율법을 지켜 나가고 있는데 양념에 쓰이는 채소의 십일조를 하는 세세한 규정들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여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여기에서 보는 대로 예수님의 십일조 언급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이루실 구속 사역의 진행 과정에서 바리새인의 외식하는 믿음을 책망하는 데서 있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종교 지도자의 외식을 지적하거나 그리스도 사역의 본질을 말하고자 해서이지 십일조 제도의 시행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3)말라기 선지자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것을 명령하였다는 것에 대한 반론

신약 시대에서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강력히 내세우는 또 하나의 근거는 다름 아닌 말라기 선지자가 선포한 온전한 십일조의 언급입니다. 말라기는 선포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제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3:10-12)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온전한 십일조를 할 것을 명령하셨으며, 이것으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지 안 주시는지를 시험해 보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십일조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온전한 십일조'의 기준을 소득의 십분의 일을 정확히 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만일 소득의 십분의 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그 십일조는 온전하지 않은 십일조를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럴 경우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 '온전한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 그러니까 10%를 말하는 것이 아닌 '세 가지의 십일조'[레위인의 십일조를 포함하면 네 가지의 십일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왜 이 십일조를 온전히 하라고 선포하고 있는가 하면, 이 십일조를 온전히 해야 제사장과 그리고 제사장을 도와 성전의 각종 일을 돕는 레위인이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고, 절기에 쓰일 비용[성전에서 자신들의 가족들과 그리고 레위인의 가족들이 함께 공동식사를 하며 즐거움을 누림]을 충당할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자들 중에서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보살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일조를 온전히 하지 않으면 제일 먼저 제사가 온전히 보존되어가지 못합니다. 그것은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생계에 위협을 느끼고 성전을 지키지 않고 일상 생활의 일터로 나가 성전 봉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황폐하게 될 것이 자명한데 과연 그러했습니다(느 13:10-11). 말라기 3장 10절의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는 다름 아닌 '너희는 수확한 십일조를 온전히 나의 성전에 갖다 바쳐서 제사장들에게 먹을 양식이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 선지자의 온전한 십일조 준수의 선포는 신약 시대에서도 십일조를 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십일조의 양[액수]을 정확히 십분의 일을 하여서 그것으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지 주시지 않는지를 시험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당시의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주어진 세금[조세]의 의무인 십일조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악을 행함으로써 제사장들이 성전을 지키지 않고 레위인들이 성전 봉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성전이 황폐화되는 죄를 책망하였던 것입니다.


(4)구약 시대의 안식일 율법이 신약 시대의 주일이라는 견해에 대한 반론

이제 십일조와 함께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인 주일에 관하여 보겠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주의 날'인 주일(主日)을 지킵니다. 그런데 그러한 까닭으로서 구약 시대의 안식일 율법을 근거로 내세웁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은 십계명에서 네 번째 계명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입니다. 그리고 안식일 준수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신 데 따라서 합니다. 구약 시대에서 안식일 준수는 분명히 그러한데, 신약 시대에서 주일을 구약 시대에서의 안식일 준수에 맞추어서 그대로 지켜 나가려고 하는 것은 왜 입니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회는 기독교의 안식일인 주일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일이 기독교의 안식일인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에는 구약 시대에서의 안식일을 준수하는 규정까지도 그대로 주일 준수법으로 받고 있다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성수, 곧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데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 나가는데 필요했던 규정에 의해서 주일 또한 거룩히 지켜나가고자 합니다. 그러기에 주일을 제도적으로 지켜나가는데 힘씁니다.

다른 또 하나는, 주일을 엿새가 되는 6일 다음의 날인 '제 칠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안식일 율법이 주어졌을 때 안식일은 유대력에 의해서 제도적으로 '제 칠일'에 지켜졌습니다만, 신약의 교회에서 주일은 그 '제 칠일' 다음 날인 안식 후 첫날로서 더 이상 '제 칠일'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엿새 날인 토요일 다음 날 '제 칠일'을 기독교의 안식일인 주일로 삼고 안식일 규정에 의해서 주일로 지킨다는 것은 개념상 맞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주일이 '제 칠일'이라는 개념을 갖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곧 새벽 미명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을 하시고 그 부활의 생명이 누리는 안식에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두심으로써 더 이상 안식일 제도에 얽매이지 않게 하셨습니다. 사도 시대의 초대 교회가 주의 날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하는 모임을 가져 나간 것은 그들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혜를 기념하는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을 띠어 갔습니다만, 이때의 '주의 날'은 안식일 제도에 의한 '제 칠일'의 개념에서가 아니었습니다. 초대 교회가 주의 날을 가진 초기 모습은 '날마다'였습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곧 모든 날이 그들에게서는 '주의 날'이었습니다.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모여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며 기도하고 떡을 떼는 날은 그 날이 어떤 날이든지간에 '주의 날'이었습니다(행 2:46).

'주의 날', 곧 주일이 한 날로서 공적인 날로 자리잡아 나간 것은 이방지역에 교회가 세워지면서입니다. 이와 관련한 성경 구절을 우리는 세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20장 7절의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와 고린도전서 16장 2절의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에서 '안식 후 첫날'과 '매주일 첫날'에 공적 예배의 모임을 가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방 교회에서 안식 후 첫날은 공중 예배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0장 7절과 달리 고린도전서 16장 2절은 안식 후 첫날이라는 설명이 없이 '매주일 첫날'로만 언급되고 있어서 이 날이 매 안식 후 첫날로서의 매주일 첫날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매주일'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인 제 칠일 후 첫날에 부활하신 '그 날'이라는데 대한 확증을 갖지 못합니다. 매주간에 어느 한 날을 '주의 날'로 가졌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매주일 첫날'이 안식 후 첫날이라고 분명하게 여긴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사도들은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되었으며(요 20:19), 그 기억에서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안식 후 첫날을 '주의 날'로 삼고 공중 예배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신앙적인 모습을 가져 나갔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서 안식 후 첫날은 이제 유대인들이 지키고 있는 안식일과는 전혀 다른 날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이 지키는 안식일 개념으로서의 주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에게서 안식일 다음 날은 전혀 새로운 개념으로서의 날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매주일 첫날'이란 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매주일 첫날에 규칙적인 공중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의 일인 요한계시록 1장 10절의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에서도 '주의 날'이 언급되고 있는데, 다분히 의도적인 묘사입니다. 그는 요한계시록 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받고 있음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는 밧모섬에 유배됨으로 해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을 함께 가져나가고 있지는 못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특별한 은혜를 주의 날에 받았습니다.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가 있는 시점이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매주일 첫날을 규칙적인 공중예배를 드려간 때 이 후이기에 그가 '주의 날'에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계시를 받은 그 '주의 날'은 단지 그가 한 주간의 어느 한 날을 주의 날로 삼고서 주님을 묵상하는 중에 있었다고 보기 보다는 '매주일 첫날'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에서 언급되고 있는 '주의 날'[주일]은 그때의 그 날이 오늘날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듯이 구약 시대의 안식일을 주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럴 경우 사도들이 안식일 제도를 주일로 그대로 옮겨 놓았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며, 단지 토요일이 일요일로 전환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일요일은 기독교의 안식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안식일이라고 말하는 주일은, 이 날이 구약 시대에서의 안식일과 같은 개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요일을 주일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말입니다. 토요일이니 일요일이니 하는 요일의 의미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경험하며 그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기에 '날'에 의하여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실체이시오 모든 날의 주인이십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모든 날에서 안식합니다.

해서, 신약 시대에서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일을 지키는 의무를 지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의무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어떤 명령도 내려져 있지 않고 따라서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새 언약 안에서는 어떤 법에 의해서와 어떤 방법으로 고정시켜 놓은 날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가 주로 모시고 섬기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일생을 주의 날로 가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매주일 첫날을 주일로 삼고 규칙적으로 공중예배를 드리는 것은 전적으로 자의적인 것이요 자원과 자발적입니다. 구약 시대의 안식일 율법에 의한 강제적인 의무가 아닙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태양력을 따르고 있으며, 일요일을 공휴일로 가지고 있는데 이 날을 매주일로 삼는 첫날로 택하여 지키는 것은 전적으로 자의적입니다. 이 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고 이 날을 주일로 삼으라는 명령이 주어져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에 그분의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이 새로운 삶을 가져나가기 위해서인데 이 일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연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은 이 날이 구약의 안식일이어서가 아니라 주의 날의 공중예배를 위하여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이기에 공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되는 연합을 하여서 예배를 드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으며 교회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일을 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느 한 날을 주의 날로 정하여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모범이 되는 표준문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옛 언약의 율법입니다. 안식일 제도는 그런 면에서 주일의 모형과 그림자 역할을 합니다. 어떤 원리 속에서 주일을 지켜야 할지를 알게 해 줍니다.

'주일', 곧 '주의 날'을 그리스도인은 가졌습니다. 이것이 날마다 모임을 가졌던 초기 때와 그 후인 점차 어느 한 날을 택하여 정기적인 모임을 가져 나간 때와는 모임의 성격에서 변화가 있었겠습니다만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날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주일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였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기념을 가졌습니다. 당시 이들에게서 주의 날을 갖는 것은 의무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관계된 문제였습니다. 그러기에 주일을 기억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였습니다.


(5) 오늘날 '주일성수'의 폐단을 가져온 큰 원인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 7-8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 안식일과 그날을 지키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7절. "보통 시간의 일부분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자연의 법칙에 합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적극적이고 도덕적이고 항구적인 명령으로써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명령하여 이레(7일)중 특히 하루를 안식일로 택하여 하나님께 거룩한 날로 지키게 했다. 이 날은 창세때부터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까지는 일주간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부터는 일주간의 첫날로 변경되었다. 성경에서는 이날을 주일이라고 부른다. 이날은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교도의 안식일로 지켜질 것이다. "

8절. "이 날을 신자는 마음으로 잘 준비하고 미리 모든 일을 정돈해서 주님께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이 날에는 하루 종일 모든 일이나 말이나 생각에서 떠나서 거룩하게 쉬며 이 세상의 고용주나 오락에서도 떠나 쉬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쓰며 필요한 의무에나 자비를 베푸는 일에 바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신앙고백서. 대,소교리문답]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이는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회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헌법에 선언되어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교회선언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교회의 유일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제신조중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교리적 면에서 역사적 개혁주의요, 교회사적 면에서 전통적 정통주의이며 보수주의이다." "우리는 성경 원리 면에서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근본주의이며, 세대주의에 비하여 개혁주의 입장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러한 장로교회가 신앙고백의 기준으로 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크게 의존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안식일과 지키는 방법'에서는 이 제목 자체부터 수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목이 이러하기에 내용 또한 구약 시대에서 이스라엘에게 적용하였던 안식일 제도법을 그대로 신약 시대의 주일에서도 적용하는 우(遇)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일은 일주간에 마지막 날에서 단지 첫날로 변경되었을 뿐이지 구약의 안식일 율법 그대로 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안식일에 대하여 봅니다. 첫째, 여기서는 안식일 준수는 적극적이고 도덕적이고 항구적인 명령으로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안식일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까지는 일주일의 마지막 날이었으나 그리스도의 부활부터는 일주간의 첫날로 변경되었는데 그 날을 주일이라고 부르며 이 날은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교도의 안식일로 지켜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음으로 안식일을 준수하는 방법에 대하여 봅니다. 첫째, 이날을 그리스도인은 마음으로 잘 준비하고 미리 모든 일을 정돈해서 주님께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둘째, 이날에는 하루 종일 모든 일이나 말이나 생각에서 거룩하게 쉬며 이 세상의 고용주[노동]나 오락에서 떠나 쉬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셋째, 모든 시간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쓰며 필요한 의무에서나 자비를 베푸는 일에 바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안식일과 지키는 방법'은 돌트 회의(1619년)에서 채택한 돌트 신조에서 안식일에 대한 진술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율법의 제4계명 안에 의식적이고 도덕적인 요소가 있다.
2. 창조 후에 일곱째 날에 안식과 유대 백성들이 특별하게 지킨 그 날에 대한 엄격한 준수는 의식적이었다.
3. 그 명확하고 지정된 날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서 구별되었고,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그리고 거룩한 묵상을 위하여 필요한 만큼 안식이 요구되어지고 이 요소는 도덕적이다.
4.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구별되었고, 기독교인들은 진지하게 주일을 거룩하게 하도록 의무로 정하였다.
5. 이 날은 사대 시대 이래로 초대교회에서 항상 지켜졌다.
6. 이 날은 사람들이 자비에 의해서 요구되어지는 것과 현재적 필요들을 제외한 모든 노예적인 일로부터, 또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오락으로부터 안식하는 근거 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바쳐져야만 한다.

주일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할 때 그 모범을 안식일 율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을 의식적이며 의무적인 안식일 개념에서 그대로 지키게 하고 더욱이 항구적으로 지키게 할 때 이는 분명 유전(遺傳)에 의한 형식주의에 집착하게 됩니다. 십계명의 제4계명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은 분명 항구적입니다. 십계명이 언약의 율법인 한에는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준칙(遵則)을 제시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관계성을 지속해 나갈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십계명에서 다른 계명이 그 효력을 발휘하는데 4계명인 안식일 계명만이 무효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다른 계명이 그러하듯이 항구적입니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법 정신이요 사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본의(本意)를 알게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를 계시해 주고 있는 것이 십계명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 나라의 법치주의(法治主義)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규례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띠고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어두는 역할을 합니다. 안식일에 온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합니다. 이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기 위해서, 그러니까 안식일을 제대로 지킬 수 있게 하기 위해 여러 규례는 필연적입니다. 제도는 그래서 존재합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한 큰 원칙 속에서 이런 저런 규례를 세칙으로 만들어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규례를 지키는 전통을 좇을 때, 곧 유전을 좇아서 안식일 계명을 지킬 때는, 가령 안식일에 노동이나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저 옛날 유대인들이 일정한 거리 이상은 걸을 수 없었으며 일정한 무게의 짐 이상은 들고 갈 수 없었듯이, 일정한 거리 안에는 차를 타서는 안 되고 걸어야 한다든지 하는 논리가 팽배하게 되며 이를 신앙 양심 문제로 끌고 나가게 됩니다. 그럴 때 여기에는 편법이 횡행하게 됩니다. 저 옛날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일정한 거리 이상이 넘게 되면 잠시 쉬었다 다시 걷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안식일에 성전을 향하여 여행하는 동안에는 음식을 가지고 가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이는 아무리 배고픔을 겪을지라도 금지를 하였습니다. 이는 사람에게서만이 아니라 가축에게서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안식일에는 먹이도 주지 않으며, 암탉이 알을 낳으면 먹지 않는다든지 하였습니다. 참으로 지나친 규제이며, 심히 부정적인 규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안식일 규례는 전시대적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전시대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해 나간 폐단을 우리 한국 교회는 지금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율법은 유대인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에게는 율법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구약 시대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타국의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이 누리고 있는 특혜를 동일하게 받으려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언약 안에 들어와야 했습니다. 그 중요한 표식이 할례였습니다. 할례를 받은 이방인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안식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은 설사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좋게 여겨서 그 모습을 본 따 자기들 나름대로 안식일을 지키며 살지라도 그들이 언약의 백성이 아닌 한에는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신약 시대에서는 율법을 이방인들에게 멍에로 씌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아직도 유대주의적 사상 속에 있는 자들이 이방인을 교회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각종 율법의 규례로 이방인들을 묶어두려고 했으나 사도는 이를 금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이루신 후에는 율법은 더 이상 정죄의 기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네 귀퉁이에 매여 있는 보자기에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먹지 못하도록 금지한 뱀과 새 등 온갖 종류의 짐승이 들어있는 것을 보여주며 "내가 깨끗하게 하였으니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잡아 먹으라"고 하시는 환상을 보여 주신 것에서(행 10:9-16)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은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선물로 받는데 있음을 알게 해 나갔습니다. 그러기에 정결법을 폐기하셨습니다. 이제 유대인에게서는 여러 율법의 규례를 지키는 것에서 그들의 의로움이 있지 않기에 이방인에게 여러 율법의 멍에를 씌우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안디옥에 있은 교회의 첫 번째 회의(바리새파에 속해 있다가 신자가 된 사람들 몇 몇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된 이상 모세의 가르침대로 할례를 받고 유대인의 관습과 의식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일로 인해서 이 문제를 결정하기 위하여 회의를 열었다)에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인 우리와 이방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시지 않았고 우리들에게 하셨던 것과 똑같이 그들도 믿음으로 깨끗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어째서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가 다 질 수 없었던 무거운 짐을 그들에게 지게 하여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제 멋대로 뜯어고치려 합니까?"(행 15:9-10)라고 하였으며, 야고보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 사람들에게 유대인의 율법에 복종해야 한다고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먹지 말고, 음행을 하지 말고,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행 15:19-20)는 결의를 이끌어 냈습니다. 야고보는 유대인의 율법을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을 아무 소용이 없는 형식에 얽어매는 것은 단지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에 복종할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야고보가 그럼에도 4가지의 금지 규정을 둔 것은 율법 준수의 차원이 아닌 다만 약한 양심을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거나 음행의 악행에 미혹되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시험의 요소를 안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마시는 것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을 자극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이는 안식일 규례에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이런 저런 안식일 규례로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는 율법의 모든 규제에서 해방되어 자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율법이 멍에가 될 수 없듯이 이는 유대인에게서도 율법이 멍에로 작용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의 의식법에 관해서는 분명 그렇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38주일 103문답에서는 제4계명과 관련하여 가르치기를 "제4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에 "첫째로, 복음의 사역과 가르치는 일이 지속되고 특별히 내가 안식일 곧 안식의 날에 하나님의 교회에 부지런히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례에 참여하고 공적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구제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로, 나의 일생 동안에 악한 행위를 중지하고 주께서 성령을 통하여 내 안에 역사하시도록 하여 이 세상의 생애에서 영원한 안식을 시작하게 하는 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이 4계명과 관련하여 주일에 대하여 갖는 이해는 형식에 집착하는 안식일 준수의 잘못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신중하게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구약에서의 안식일 규례에 의하여 지키는 안식일 준수란 뉘앙스를 갖지 않도록 '안식일 곧 안식의 날'이라고 하여 이 안식의 날 준수를 의식적이고도 의무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언급을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안식일 곧 안식의 날'이라고 표현한 것은 물론 주일의 의미에서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나의 일생 동안에', '이 세상의 생애에서 영원한 안식을 시작하게 하는 일'이라고 말하여서 구별된 안식의 날이 갖는 개념을 구약 시대의 안식일과 달리 하고 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날에 그리스도인들이 안식하면서 특별히 행하는 일은 지극히 교회 중심적이니 하나님의 교회에 부지런히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례에 참여하고 공적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구제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일생 동안에 악한 일을 중지하고 주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역사하시도록 하여 이 세상의 생애에서 영원한 안식을 시작하게 하는 가치와 유익을 갖고 있는 날이 우리가 한 날을 구별하여서 안식의 날로 삼는 주일이라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6) 제 칠일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차이에 대한 칼빈의 견해

교리와 교회 생활에서 종교개혁을 이룬 사람으로 보는 칼빈은 제 칠일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차이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가졌는지를 봅니다. 그는 기독교 강요 2부 8장 3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날(제 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를 가지고 그리스도 신자들을 심판의 기준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그것은 '장래 일의 그림자'인 때문이라고 했다(골 2:17). 이러한 이유로서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아직도 날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갈라디아인들에게 한 '수고가 헛된 것'이 될까 염려하였다(갈 4:10-11). 그리고 그는 로마인들에게 누구나 한 날과 다른 날을 낫다, 못하다고 구별을 한다면 그것은 미신이라고 언명하였다(롬 14:5)."

기독교 강요 2부 8장 34절에서는 주일을 지키는 신령적인 뜻이 무엇인지를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사람들이 안식일을 '주일'이라고 부르기로 대치한 것은 신중한 검토 없이 한 것이 아니었다. 옛날 안식일에 의하여 묘사된 참 안식은 주님의 부활로서 종국하고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 그림자를 끝장낸 바로 그날(무일;無日)은 그림자인 의식에 집착되지 않도록 하라고 그리스도 교도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나는 또 '7'이란 수에 붙잡혀서 교회로 하여금 그것에 얽매이게 하려는 생각도 없다. 그리고 나는 만약 미신만 믿지 않는다면 축제의 날을 정한다고 해서 교회를 정죄할 마음도 없다. 그것은 그날이 단지 훈련과 잘 조성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되는 경우에 그런 것이다."

칼빈의 견해를 보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안식일 계명(제 4계명)에 의하여 묘사된 참 안식은 종국하고 완성되었기 때문에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이 폐지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안식일은 '날'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의 그림자인 의식에 집착하지 않을 것을 말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안식의 실체이시므로 그가 계시는 곳에서는 이제 모든 상징은 사라집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안식의 본체이시기 때문에 그가 나타나신 지금은 더 이상 그림자를 좇을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날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을 철저히 피해야 할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 칠일'이란 수에 교회가 붙잡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교회의 유익과 질서를 위해서 하루를 정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여 모일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제 칠일'에 모여야 한다는 것을 고집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날을 절기로 지키는 미신을 타파하는 것이 적당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성일들이 폐기되었다고 하면서, 주일을 가장 엄격하고 신중한 의식으로서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며 다만 교회 내의 질서 유지에 필요한 대책으로서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지어 주일을 거룩하다고 믿어 미신화 하는 사람들을 미친 사람이라고까지 서슴없이 말하였습니다(기독교 강요 2부 8장 3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