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먼 소프 前 AWSJ 기자…`젊은세대 진심으로 감사해야`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때 숨진 시민의 유가족이 통곡하는 모습과 현장에서 시신 수를 헤아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6.25전쟁 이후 서울 상주(fulltime) 특파원으로 일한 최초의 서양 기자인 노먼 소프(63·미국·Norman Thorpe)는 30년 전 광주를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다.
1968년 한국에 처음 온 소프는 1970년대 초반까지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하다 1978∼1982년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AWSJ) 기자로 근무했다.
1980년 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빛고을' 광주를 직접 보고 들었다.
현재 미국 워싱턴의 위트워스대에서 겸임교수로 있는 소프는 17일 연합뉴스와 두 차례에 걸친 이메일 인터뷰에서 "지금은 언론계에서 은퇴했지만 민주화운동 때 한국 정부의 많은 압력에도 저를 비롯한 많은 헌신적인 기자들이 외국 독자들에게 한국 상황을 알리려고 노력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기억으로는 일요일이었던 1980년 5월18일 서울 주재 외국 기자들은 대부분 광주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렴풋이 광주에서 시위가 벌어진 사실을 알게 됐고, 시민의 저항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는 소식도 접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프는 수도에서 더 중요한 일이 터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서울에 머물기로 하고 광주에는 현장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인턴 기자인 존 마콤을 보냈다.
기차를 타고 20일 새벽 광주에 도착한 마콤은 때마침 역을 지키던 무장군인과 거리의 탱크, 연기에 휩싸인 승용차와 트럭을 발견했다. 마콤이 목격한 내용을 전해들은 소프는 광주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홍콩에 있는 AWSJ의 에디터에게 연락했다.
마콤은 당일 오후부터 연락이 닿지 않았고, 소프는 마콤이 머문 여관의 전화는 물론 광주와 연결된 모든 통신선이 끊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때 소프는 "한국 정부가 광주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정보를 숨기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고 확신했다.
소프는 정부 관료 등을 만나 취재를 하고 나서 광주에는 다음날인 21일 내려갔다. 그날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날이었다. 소프는 카메라 두 대를 목에 걸었고 팔에는 '보도'라 쓰여 있는 띠를 착용했다. 이를 본 광주 시민은 앞다퉈 그에게 "학생과 시민이 죽어가고 있다"고 외쳤다.
"어떻게 사망자를 확인할 수 있는가"라고 소프가 묻자 시민은 지나가던 차를 세우고 그를 광주 기독교병원으로 데려갔다.
소프는 "병원에 가 보니 사상자가 이미 도착하기 시작했고 남성과 여성을 포함한 시신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 더 많은 시신이 계속 도착했고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시민을 진압하던 군인들의 잔혹함이 시위를 촉발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부가 자국민을 죽인다는 것은 뉴스로서 정말 중요하다. 충격을 받았지만 최대한 취재에 집중하려 했다."
다음날 소프는 다른 한 명의 기자와 광주의 다른 병원을 방문했고 사상자 수도 계속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군인들이 전남도청에서 물러나고 시위대가 도청을 본부로 삼자 소프는 그곳에서 학생 지도자 등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소프는 "그때 만났던 한 사람은 지금도 친구다. 5.18 당시 만난 사람 대다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취재수첩에 이름을 기록했을 때 군이 그 수첩을 압수할 것을 우려해 일부러 적지 않았다"고 했다.
취재수첩과 노트가 군경의 증거물로 사용되길 원치 않았던 소프는 광주에서 전화선이 끊겨 취재 보고를 하려고 광주 인근의 마을 우체국에 가 전화를 걸었다.
이를 위해 소프는 매일 광주와 인근마을을 도보로 드나들면서 시민과 군대의 양측 저지선을 모두 통과했다. 소프는 "취재 노트가 압수당할까 봐 항상 불안에 떨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소프는 1980년대 신군부가 외국 언론을 감시했던 사례도 설명했다. "외국 잡지나 신문을 한국에 들여오는 과정에서 군 관계자들이 배포 전 모든 자료를 검열했다. 광주에 대한 기사나 전두환을 비판하는 기사 등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가 있을 때는 배포 전 지면에서 빠졌다는 것이다.
또 "검열을 통과하려고 한국측 배포자들은 해당 기사를 흑색 잉크로 인쇄하거나 잘라내야 했다. 1980년대 AWSJ에 기사가 빠진 공간이 있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외신 기자들이 쓰는 기사도 감시의 대상이었다. 서울의 한 호텔에서 '텔레타이프'라는 기계로 기사를 작성할 때 자신이 작성한 기사의 내용을 묻는 직원도 있었다고 소프는 기억했다. 주거비자가 나오는 것도 몇 달씩 걸려 30일마다 출입국을 반복했다고 한다.
그는 "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의 민주화를 향한 길고 긴 투쟁의 일부분이다. 앞세대가 자유선거를 확립하고 민주주의를 꽃피우려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지금 젊은 세대가 배우고 진심으로 감사하길 바란다"는 말로 인터뷰를 끝냈다
출처 남깁니다 퍼온글입니다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176604&cloc=rss|news|socie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