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주화

광주에서 고등학교 3학년때 겪은 5.18 민주화 운동

YOROKOBI 2010. 5. 18. 21:55

[서언]

먼저 이 글을 쓰기 전에...

나는 데모와 민주화 운동에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광주 인성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어느 때인가는 정확히 말 할 수 없지만 민주화 운동의 참여에 대한 분노의 불길이 제 몸에도 지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 글을 적으면서 한 글자라도 거짓이 없는 글을 적을 것을 다짐하며...

5월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이 내 글로 인하여.. 아니 내가 미화시킨다는 이미지 없이... 결코 내 글로 인하여 미화 되지 않도록 사실적인 글을 적을 것을 모든 분들에게 약속합니다.

그럼 당시의 상황을 날짜별로 한번 풀어 헤칠까 합니다.(날짜는 27년이라는 세월속에 약간의 착오는 있을 수 있으나 단지 날짜만 다를 뿐이지 내용은 사실임을 알려드립니다) 이 글을 적으면서도 당시의 상황이 광주 시민으로서 대단한 자긍심도 있었고, 통쾌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서글픔 등 여러 정황이 지금도 뇌리에 스칩니다.

어느 덧 2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든 방문 손님들에게  제 순수한 마음을 이해해 주시리라고 믿고... 당시에 공수 부대원들에 의해 자행되어지고, 또한 지역 감정의 골을 싹 튀운 전두환 일당의 만행을 하나 하나 적나라하게 파해치고자 합니다. 제 블로그를 방문하신 분들은 경상도고 전라도고 없습니다. 그냥 사실을 사실적으로 받아 주시기를 바랄뿐입니다. 그냥 여러분의 친구, 선배, 후배로서 당시 상황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에 전라도와 경상도의 얘기도 나올 것입니다. 이해주기 바랍니다.

1980년 5월 18일 당시에 내 고향은 광주에서 약 10여 킬로 떨어진 “비아”라는 곳 이었습니다.(호남고속도로 대전에서 광주 방향으로 가다보면 장성지나서 광주 톨게이트가 나타나고 광산 나들목을 나가면 거기가 바로 “비아” 라는 동네입니다.)

제가 광주에서 5.18을 맞을 수 있었던 계기는 누님께서 1975년 운수업을 하시던 매형과  결혼을 하시어 광주 중흥동에서 사셨고... 저는 누님과 매형의 배려로 거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제가 다니는 인성고등학교는 비아에서 다니기에는 가장 먼 거리에 있는 학교였기에 부득이하게 누님 댁에서 다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러한 연유로 광주 민주화 운동의 산 증인이 된 것입니다.

1980년 5월 17일 토요일부터 5월 29일 까지 약 10 여일 간의 광주가 민주화의 물결로 치 닫을 수 밖에 없었 던 당시 상황을 제가 본대로 글로 표현하고자 하는데... 짧은 내 글 솜씨로 과연 얼마나 표현 할 수 있을 지... 저는 지금 5.18의 숭고한 영녕들에 대한 경건한 마음으로 글로써 남기고자 합니다. 그 분들의 명복을 빌면서...

 

[5.17일 광주]

나는 큰 누님 댁이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 이었기 때문에 서방이라고 하는 곳에서 8번 시내버스를 타고  목포 방면으로 가다 보면 효천을 조금 못가서 광주 인성고라고 하는 학교를 다녔습니다. 지금은 인성고 자리에 같은 재단의 광주대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지요...(설립자: 고 김인곤씨)

아침에 등교 할 때는 시내버스가 정기 코스를 운행했기 때문에 게엄령이 내려진 상태였지만 평온 그 자체였습니다. 그 날 오후 우리는 토요일 학교 수업을 마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내버스로 이동하는데... 그 날 따라 많은 곳이 통제 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충장로 먹자 골목 입구에서는 군인들이 학생들을 골목에 가둬놓고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으며...

대학생들은 거기에서 돌을 던지며 결렬하게 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시내 버스가 정상적으로 이동하였고... 금남로에서도 학생들과 군인들의 투석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등하교 하던 8번 시내버스는 금남로에서 광주일고 방향으로 직진하여 아세아 극장--> 성요한 병원--> 광주 무등경기장 --> 동양 현상소 사거리(전남대 입구 방향) --> 광주 신역  --> 광주시청 --> 서방 --> 광주 동신고 방향으로 이동하는 경로 였으나... 금남로 광주일고 앞에서 투석전인 관계로 우리는 광주공용터미널 근처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용 터미널 근처에서는 도로에 폐타이어가 타고 온통 돌들이 널 부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도는 블록들을 깨뜨려 투석에 사용하여 흉물스럽게 변했구요. 정말 투석전이 아주 심하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버스 안에서 바라본 광경은 그야말로 또 한 차례의 투석전의 전운이 감도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친구들과 저는 버스안에서 군인들을 향해... “야 *할 놈들아~! 야 강아지들아~! ” 외치며, 데모하는 학생들 편에서서 거들었습니다.

공용터미널에서 신역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다시 군인들이 안내하는 방향 즉, 아시아 극장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는 학생들(아니 그냥 젊은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이 머리를 땅에 박고 엎드려 있었으며(일명 원산폭격), 우리는 그럴적마다 군인들을 향해 소리치며 욕을 했습니다. 그러면 군인들은 방독면을 허리춤에 찬 상태에서 곤봉을 들고 버스를 다가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버스를 따라 오면서 돌맹이를 버스에 집어 던지는 군인도 있었습니다. 하여간 이날은 군인들 맘대로 버스 노선이 바뀌었고... 고등학교 3학년의 귀중한 시간을 버스안에서 허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뭐 이정도로 조용히 하루가 지났습니다. 내일의 비극을 예감하지 못한체....

 

[5.18일 광주]

이 날은 나는 솔직히 아무것도 모릅니다. 본 것이 없으니까요.

당시에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라... 아니 공부 벌레라(?) 방안에 틀어박혀서 공부만 열심히 했습니다. 아니 다시 말하면 독서실에 가서 공부했습니다. 일요일 이었으니까요.

광주 금남로 도청앞에서 광주시민들이 공수부대 군인들에게 군화발로 무참히 짓밟히고, 공수 부대원들이 가지고 있는 곤봉(길이 1미터 정도 되는 것으로 절대 경찰 곤봉이 아님)으로 머리를 맞아 피가 터지고, 어른, 아이, 형님, 누나, 할아버지, 할머니 구분없이 눈 두덩이가 밤탱이가 되고, 금남로 근처에 있는 상가는 초토화 되고...

상가 셧터는 망가지고... 그야말로 곤봉을 고추세운 공수부대원 세상... 어떠한 법과 치안도 없는... 그냥 공수부대원들의 행동이 법인 그런 세상... 광주 시민의 인권은 철저하게 유린된 상황을 저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시내버스 운전을 하셨던 매형께서 자정 무렵 일을 마치고 돌아오셨는데... 버스 운전하시면서 오늘 하루에 겪었던 악몽을... 아니... 하루 종일 공수 부대 및 군인들에게 당했던 수모를 하나 하나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용인 즉슨...

버스 승객을 태우고 노선을 따라 운행 하시던 중 도청 앞에서 공수 부대원들이 강제로 버스를 세웠고... 대학생 연령 쯤 되는 학생들은 다짜고짜 곤봉으로 내리치고... 반항하면 아니 대학생이 아니라고 하면 곤봉으로 배를 찔러 실신 시킨 다음 옷가지를 끌고 버스에서 내려오게 한 다음 트럭에 실었답니다. 즉 시내에서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상태로 어딘가로 끌려 간 것입니다.(후에 광주 실종자가 몇 명인지 모른다는 말 즉, 청문회에서 말한 실종자 부분이 여기에서 저는 비롯되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매형께서는 공수부대원들의 눈동자가 무서워, 감히 아무말도 못하시고 그런 상황을 목격한 후라... 집에서도 그야말로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 거리셨습니다. 정말 우리 나라 군인들이 시민들을 잡는 것을 보고, 화를 안낸다면 그 건 사람이 아니겠죠~! 매형께서는 아직까지도 화가 덜 풀리신 겁니다.

이 날 부터 광주에서는 첫 희생자가 났구요. 이틀 후에 저는 그 분들의 시신이 싸늘한 주검으로 검게 그을려 리어카에 실려있는 모습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진실인지 유언비어인지는 몰라도 임산부 뱃속에서 공수 부대원들이 아이를 꺼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물론 산모는 현장에서 죽었다는 얘기이구요.

 

[5.19일 광주]

나는 어제의 광주시민의 악몽을 모른 체... 매형께서 알려주신 조그마한 사항만 알고 학교에 갔습니다. 우리 학교는 다행이 광주시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 피해는 없었으며... 그래도 조용한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 등교가 마무리 되고, 1교시 수업 시간이 시작될 즈음... 이반 저반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선생님들께서는 우리들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특히 어제 도청의 현장에서 살생의 장면을 목격하시고 직접 피해를 입으신 선생님들께서 더욱 적극적으로 막아섰습니다.

우리 3학년때 국어선생님~! 성함이 길보 였습니다. 국어 선생님 답게 이름이 특이하여 우리는 “*보”라고 별명을 붙여 드렸었습니다. 이 말은 학생들에게만 통했던 얘기지 만약에 길보 선생님 귀에 들어갔다면 우리는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이 선생님은 지독한 근시였으므로 책을 눈에서 약 10센치 정도로 띄고 읽고 설명을 해주셨고, 눈은 아주 많이 깜빡 거렸으며, 학생들에게 어느 정도 인기가 있으신 분이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어제 금남로에 나가셨다가 공수 부대원들에게 맞아서 얼굴에 붕대와 반창고로 얼굴을 도배하고 나타나셨습니다. 그 선생님께서 하시 던 말씀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합니다.

길보선생님 : (책을 보시다 한참을 말문을 열지 못하시더니..)

느이들이 어제 도청 앞에서 보고도 모르냐.. 그것들이 군인이냐? 그것들 눈을 봤냐? 느그들은 우리학교 정문을 나가서 효천에 나가기 전에 총 맞어 죽는다.(이 말을 하시면서 정말 부르르 떠셨습니다. 그리고 잘 보이지 않는 책속에 얼굴을 또 묻으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분의 피해자... (이 분은 5.18 보상 때 보상금이나 받으셨는지 모르겠네...) 우리 정치 경제 선생님 이셨습니다. (흐미 이분 성함은 내가 잊어부렀네... 정영근 선생님이시던가?) 이 분은 금남로에서 사모님이 장사를 하셨기 때문에 일요일에도 거기에 계셨답니다. 공수 부대원들이 데모대들을 잡아들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그 날 오후... 대학생들이 공수부대원들을 피해서 선생님 가게로 숨어 들어 온 것입니다.

학생들이 숨어 들어오자마자 선생님께서는 셧터를 내리셨고... 이어 공수 부대원들이 선생님 가게 앞에 몰려 온 겁니다.  공수부대원들은 선생님에게 문을 열라고 셔터를 두드리며 고함을 쳤고... 선생님께서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은 셔터를 부서버리고 가게 안으로 침입하여 우리의 존경하는 정치 경제 선생님을 무자비하게 곤봉으로 패셨습니다.

정말 수업 시간에 들어오신 선생님 모습은 그야말로 이무기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원래 선생님 연세는 쉰 정도 였는데.. 가수 박상규씨와 비슷하게 흰머리셨습니다. 그런 즉 백발이 선명한 선생님을 개 패듯이 패신 겁니다.

저희들도 너무 안타까워 했고... 학생들의 수업은 더 이상 진행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3학년 대입 수업 반임에도 불구하고 오전 수업으로 학교 수업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나긴 휴업에 돌입하게 됩니다... 대입의 중차대한 일이 남아있는데... 약 27일간 휴업을 하게 되었다.(이것만 없었어도 조금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을 건디...) 학교에서 하교하여 오늘 시내 버스 안에서 나는 광주 충장로와 금남로에서 토요일과 같이 군인(이때는 공수 부대원 보다는 현역 국방색 군복을 입은 군인)과 대학생들이 여기 저기서 대처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토요일과 똑 같이 광주 공용터미널 근처를 지날 때는 사람들이 거의 눈에 띄질 않았습니다. 일요일의 악몽을 아마 광주 시민들께서는 느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버스 안에서 이 날도 군인들을 향해 욕설을 퍼 붓으며, 엿 먹으라는 모션을 취하며 무언의 시위도 벌였습니다.

광주 신역 광장을 돌아오던 길... 당시에 KBS 광주 방송국이 신역 옆에 있는 종근당 건물에 있었고... 거기에서도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주 mbc 문화 방송국은 공용터미널에서 학동 방향으로 약 1키로 지점에 있었습니다. 당시에 kbs와 mbc 문화 방송은 이건 공용 방송이 아니라 정부의 시녀 노릇을 햇었고... 우리가 TV를 보아도 때려 부서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방송을 하였습니다.

즉 광주 시민들이 매 맞아 죽고 총알 받이가 되었던 사실은 하나도 방송이 되지 않는... 그야말로 빈껍데기 방송이었습니다. 나는 신역 근처를 지나오면서 저 KBS 방송국이 불타야 하는데 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잠시 후 아마 오후 7시즘 될 겁니다. 나는 신역 뒤 중흥동이라는 곳 즉 누님 댁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신역의 뒷 부분을 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역 전면 즉 KBS 방송국 근처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습니다.

누님과 나, 그리고 매형(시내 버스 운전은 2일 일 하시고 1일 쉬시는 그날)은 KBS 방송국이 불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얼른 방에 들어가 KBS 방송으로 체널을 맞추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있으니까... KBS 방송이 먹통이 되었습니다. 정말 우리 주변의 이집 저집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고, 암 조금있으면 MBC 문화 방송도 불탈 것이라는 예감을 했는데...

 사실이 되었다. 즉 8~9시 넘어서... MBC 문화방송도 불에 탔다는 얘기가 들렸다. 즉 이것으로 광주는 시민들에 의해 전두환이의 꼭두각시 놀음을 하던 방송국을 불태워 버린 것이다. (당시의 전두환은 광주 시민의 적이었응께... 지금도 아마 피해자들은 ....)

 

[5.20일 광주]

이 날은 처음으로 광주 시내에서 광주 시민들에게 무자비하게 폭력과 살상을 일삼던 공수 부대원들은 시민의 힘으로 몰아낸 뜻 깊은 날입니다. 말에 의하면 19일 자정 쯤 공수부대원들을 일단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로 철수시킨 것이다. 워낙 공수 부대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적이었기 때문에 전두환이도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그리고 얼룩무늬 옷도 모두 국방색 옷으로 갈아입혔다. (여담이지만 한 동안 아니 몇 년동안 광주시내에서는 해병대나 공수부대원들이 군복을 입고 나들이를 하지 못했다. 이것은 곧 죽음 이었으니까... 그래서 사복으로 입혀 휴가를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81년도 대학 시절 광주 시내에서는 공수부대나 해병대 출신 병사들이 거의 눈에 띄질 않았다)

광주에 있는 모든 학교는 휴교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초,중,고, 대학까지... 아침 일찍부터 공수 부대가 광주에서 철수했다는 소문이 나 돌았다. 그리고 시민들은 트럭, 버스, 승용차 등등의 온갖 탈 것들을 타고, 머리에는 흰 수건을 두르고, 노래하며, 구호하며 시민들의 박수소리를 들으며... 어린 중학생부터 나이 많으신 어른까지 하나가 되어 전두환 일당으로부터 광주를 빼앗은 날을 자축하고 다녔다. 나도 손벽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으며...

이 날 아침 일찍 신역 앞 로타리와 방송국이 사정이 궁금하여 나는 신역 후문을 지나 정문 쪽으로 갔다. 기차역에는 광주 시민을 무참히 짓밟은 공수부대원과 군인들을 실어나른 기차가 움직이질 않았고... 기차 사무원들은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질 않고 텅비어 있어서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기찻길을 지날 수 있었고... 대합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먼저 광주 신역 분수대 로터리에서 대합실 쪽을 바라 본 당시 상황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먼저 대합실 유리창은 하나도 성한 곳이 없이 다 깨뜨려져 있었고...

신역 대합실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줄을 서도록하는 바리게이트 같은 것(극장에서도 줄서도록 하는 것 있잔어)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주먹만한 피 덩어리들이 여기 저기 뭉쳐있었고... 온통 핏자국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분명히 맞은 사람은 사망 했을 것이다. 정말 시장에 선지 사로 갔을때 선지 덩어리... 그 자체... 정말 금방이라도 오버잇이 될 정도로...

그리고 맞은편에 보이는 종근당 건물... 즉 KBS 방송국은 불에 타서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그 건물을 바라보는 내 심정은 통쾌하고 또 통쾌했다. 당시에 kbs 나 mbc는 방송도 아니었다. 이것들은 전두환의 하수인에 불과했다. 뻔하니 전날 수 많은 광주 시민이 공수 부대의 총칼에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주 시민을 폭도로 매도하고... 심지어는 고정간첩이나 빨갱이로 묘사했었다. 즉 광주 시민들이 뻔하니 눈뜨고 귀로 듣고 있는데... 열불이 나고 또 났었다.

광주신역 분수대 로터리에서는 광주고속버스(당시에 1억 정도 간다는 벤츠 버스)와 군용 트럭이 엉덩이를 맞대고 불타고 있었다.(이 때 첨으로 차량과 차량 엉덩이만 대면 한쪽에만 불을 붙여도 양쪽이 다 탄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말 아깝고 또 아까웠다. 트럭에도 시민들이 가득타고, 고속버스, 시내버스는 유리 창을 열거나 깨뜨리고 다들 창밖에 머리를 내어 목청껏 차체를 두드리며 차를 타고 다니면서 광주시 전체가 시민들에 의해 점령되었음을 차축하고 있었다. 버스나 트럭에 타는 사람은 남녀 노소가 없이 누구나 타고 다니며 목청껏 소리도 지르고...

“전두환이 물러나라 좋다! 좋다!”를 연발하며, 광주시내를 내 달렸다.

그리고 이 날은 경상도 번호판이 새겨진 차량은 광주 시내를 통행하지 못했다. 시민들의 분노는 공수 부대원들의 만행에 대해 최고조가 되어 있었고... 경남이나 경북 번호판의 모든 차량은 불탔다. 즉 5월 18일 공수 부대원들이 광주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만행을 저지를 때, “전라도 놈들은 씨를 말려야 한다” 는 등의 어귀를 사용하며 진압을 한 것에 대한 분풀이였다.

당시에 내가 목격한 것 중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포항 어느 학교 스쿨버스인데... 그 버스 기사 분께서 차에 먹을 것을 많이 실어 놓고 시민들에게 제발 차를 태우지 말 것을 만류하였으나 결국 태우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어떤 차주는 경남 소속 트럭에 운전수와 그 옆에 몽둥이를 든 시위대 처럼 위장하여 전남대 후문 방향으로 여러대의 트럭을 이동시키는 것도 목격하였다.

그러나 한가지...  내가 본 바에 의하면 경상도 사람이라고 해서 해꼬지를 한 경우는 결코 없었다. 광주 시내에는 버스 통행 두절, 시장도 서지 않고, 소위 쌀 같은 먹을 것도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는... 그리고 수돗물 마져도 끊긴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모든 것이 무방비 상태였고... 소위 무법 천지였다. 아니 무법 천지라는 말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 법과 치안이 있는 것보다 질서 정연하고 범죄 없는 세상... 모두가 하나되는 세상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다.

나는 매형이 평소 출퇴근 하시던 자전거를 타고 시내 상황을 보기 위해 금남로로 향했다. 금남로에는 어느 덧 시민들로 인산인해가 되어 있었고... 하늘에서는 경찰 헬기가 시민들의 자제를 부탁하는 홍보 방송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헬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갖가지 말을 들을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없었고... 시민 세상이 된 것을 자축하기에 바빴다. 나는 성요한 병원 쪽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어제 공수부대원들에게 죽음을 당하여 불에 그슬린 시체를 싫은 리어카를 보았다. 그 리어카에는 남자 시신 2구가 실려 있었고... 성 요한 병원 쪽에서 금남로 방향으로 리어카를 따라 많은 인파가 행렬을 하였다.

많은 사람이 눈시울을 적셨고... 철없던 나도 눈물을 닦아야 했다. 도청 앞 분수대는 그야말로 대학생들이 빙 둘러 앉아 뭔가를 하고 있었고... 조그마한 미니 버스 지붕에서는 어떤 여자가 카랑카랑 한 목소리로 열심히 시민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광주 사태가 진압되고 전두환은 이 여자가 고정 간첩이니 어쩌니 했다) 그리고 도청 앞 금남로에는 전국체전인가를 알리는 큰 대형 아치가 도로를 가로질러 있었는데...

거기에서 희생자가 많이 발생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도 그 아치에서 시민들에게 발포한 현장을 확인 할 수 있었는데... 당시 아치는 두께 1미리 이상의 철판으로 되어 있었는데... 탄환 자국이 도청앞에 있는 전일 도서관 옥상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는 흔적이 있었다. 즉 눈으로 탄착점의 구멍을 통해 보니까 전일 도서관 옥상이었다. 지금도 그때 구멍으로 쳐다보던 일이 눈에 선하다.

정말 광주 시민들은 하나가 되었다. 광주 시내를 여기 저기 자전거를 타고 흩고 다녔는데.. 여기 저기서 믿기지 않을 광경이 자주 목격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조그마한 구멍가게에서는 먹을 음료수와 빵 과자들 한 가득 가지고 나와서 지나가는 시민 시위대 차량을 세운 다음에 거기에 실어주기도 하였고... 금남로 주변 수건 도매점에서는 사장으로 보이는 분이 자기 머리보다도 높이 쌓인 수건을 가지고 나와서 시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차량에도 실어 주셨다.

나는 그때 당시의 광주 시민으로 돌아가서 그때처럼 가끔 뿌듯하고 시민으로서 긍지를 느낀적이 없었다. 경찰과 군인들이 하나도 없었지만... 강도사건, 강간사건, 남의 물건을 도적질하는 것 등등 범죄가 한 건이 없었다. 이것은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얘기가 될 것이다. 사실 전라도 하면은 깡패들의 온상처럼 느껴지잖아요. 서방파니 뭐니 하면서... (광주광역시 중흥동의 한 지역으로 서방 이라고 내가 8번 버스 탈 때 항상 들르는 곳... 서방 사거리가 유명합니다. 약 50미터 근처에 광주상고가 있었죠!! 야구 명문!)

당시에 살인 사건이 한 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가정 불화에 의한 원한 살인이었다. 즉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 탓에 생긴 일이었다. 광주 5.18 민주화 운동 전에 있었 던... 흔히들 말하는 부마 사태에서도 당시 전두환이의 만행이 속속들이 들어 났지만... 당시 시위에 참가 했던 모든 이들은 열사이고, 의거자들 입니다. 

 

[5.21일 광주]

내가 이글을 옮겨 적는 날도 석가 탄신일(음력 사월초팔일) 이지만... 당시에 5월 21일 이 날은 석가 탄신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직접 군인들과 맞서서 돌을 던지면서 시위를 하던 날이기도 하다. 나는 아침 일찍 밥을 먹고 또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앞에서 말한 서방을 지나 산수동이라는 곳을 지나 조선대 병원 영안실로 향했다. 당시에 사람들이 많이 숨진 동명 파출소가 이 조선대 정문 근처에서 가깝다. 그러나 조선대 병원은 가지 못하고 전남대 병원 영안실을 갈 수 있었다. 지금도 그 영안실 전경이 눈에 들어오고... 거기에서 한 아주머니께서 통곡하시면서 우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그 아주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집이 동명 파출소 근처랍니다. 그런데 밖에서 시위하고 떠들썩하니까 아저씨께서 쪼금만 구경하고 오시겠다고 하고 나가셨답니다. 그러나 날이 새도 돌아오시질 않으니까... 조선대와 전남대 영안실과 도청앞 상무관을 찾아 헤매시다... 전남대학교 병원 영안실에서 아저씨를 발견하신 것이다. 당시에 영안실에는 관에 넣은 사람도 있고, 그냥 바닥에 흰 천에 눕혀져 있는 시신들 말로 형언 할 수없을 정도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나도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의 시신을 본 이후로 아마 이렇게 많은 시신은 첨이었다. 나는 거기에서 자전거를 타고 조금 떨어진 도청 앞 상무관엘 들렀다. 거기에 있는 시신은 내가 갔을 때에는 거의 목관에 넣어져 태극기로 둘러 쌓여 있었고... 거기에서는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시신이 들어있는 관 앞에서 목 놓아 우시는 분들도 많았다. 정말 눈물을 안 흘린다면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그 광경을 보고 돌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에 이러한 광경을 국내 언론사 및 tv 기자들은 취재를 해 보았자 거짓으로 방송하니까 아예 취재를 할 수 없었고...

시민들은 외신 기자들 만 취재를 허락하였다. 그래서 몇 몇 외신 기자들이 눈에 많이 띄었고... 광주 민주화 운동의 생생한 비극이 이 외신 기자들 때문에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얼마 전 우리 소띠방 하나비 친구도 일본에서는 그 사실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 된다. 그 날 오후 나는 자전거를 집에 두고 나도 투사로서 데모대에 합류했다. 장소는 우리 큰 누님 댁에서 가까운 전남대 정문에서 군인과의 투석전에서 였다. 나는 고 2학년 때 유도하다가 오른쪽 어깨 쇄골이 부러져 별로 힘을 쓰지 못할 상황인데도 돌맹이를 나르고 던지고 했다.

당시에 군인들은 공포탄과 고무탄으로 우리 시위대를 향해 발사를 하였고... 고무탄은 어느 정도의 거리 이내에서는 탁하고 터지는데...  그 전에 사람에게 맞을 경우에는 살에 박히기도 하고 부상을 입는 경우가 있었다.  내 주변에서도 발 종아리에 맞은 것도 보았고... 머리에 맞아 의식을 잃은 것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 군인들과 처절한 투석전으로 맞섰다. 전남대학교 정문 쪽에서 500여 미터 전방에는 신역으로 진입하는 기차길이 횡단하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고무탄을 쏘던 군인들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는 군생활 10년 동안 고무탄에 대해 알아보았으나 결국 알지 못했다. 관심이 조금 부족 했었다.)

무력 시위가 어느 정도 지나고 주유소에서는 특이한 장갑차를 볼 수 있었는데... 큰 바퀴가 달린... 그리고 빠르고 날엽하게 생긴 것이 정말 특이한 차였다. 그것을 운전하시는 분은 40대 정도 되는 분이었고... 나중에 광주 민주화 운동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돌아가셨다는 후문도 있었다.

이 날 오후...

광주 시내에서는 드디어 시민들에 의해 무기고를 탈취하여 총과 기관총을 시민군들에게 나누어 주고... 내 고향 비아 파출소의 무기고도 털어서 광주 시민군에게 총들이 나누어 졌다. 당시에는 광주 외곽을 지키는 군인들이 적었기 때문에 시민군들은  비아 장성쪽과 나주 목포 방향 그리고 화순 방향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래서 지근 거리에 잇는 무기고는 모두 털게 된 것이다. 특히 화순 탄광에서는  다이너마이트를 타이탄 트럭 같은 것에 실어 왔고... 나도 거름 포대에 둘러 쌓인 그리고 물렁 물렁한 다이너 마이트를 첨으로 만나 봤다. 광주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서는 신형 군용차량 즉 전차 등이 시민들 손에 의해 운전되고 있었다.

정말 신삥 차량들...

그러나 이것들도 기름이 떨어지고 쓸모가 없으면 불태우기도 하고... 길 거리에 버리기도 하였다. 이전 까지만 해도 시민들 호응이 대단했으나 총이 아무 사람에게나 다 주어지면서... 호응도도 떨어졌다. 즉 사람들이 집밖으로 나오질 않은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 말하지만 대학생을 주축으로한 시민군들이 총을 서서히 회수하기 시작한다.

 

[5.22일부터 종료시까지]

어제까지만 해도 차도 많고 인도에는 박수치는 시민들로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 쌩쌩 달리는 트럭이나 버스 �차 등에서는 정말 아찔할 정도로 차에 메달리고 얼굴을 차창 밖으로 내놓고... 등등. 그야말로 위험 천만인 상황이 많이 목격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결코 제지한다든지 또는 가로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초기에 총이 반입되어 시민들에게 주어졌을때 전혀 통제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급되다 보니까... 중학생 정도의 어린 학생들에게도 총이 지급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시민들이 박수 칠 때 마다 하늘에 대고 총을 쏴 대니 당연히 시민들은 움찔하게 되고, 무서워서 밖으로 나오는 횟수가 적어지고 호응도도 많이 떨어졌다. 한마디로 광주 민주화 운동이 시민들로부터 약간의 외면을 받게 되어 위기 아닌 위기 상태로 접어 들었다. 그래서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시민군들이 총을 회수하게 되고, 질서를 바로 잡고 어느 정도 광주 시내는 평온을 찾게 되었다.

최초에 총이 반입되어 왔을 때 광주 서방에서 동신고 방향으로 조금 지나서 바리케이트가 쳐지고, 이제 시민들은 광주라고 하는 테두리 안에서 자급자족하며 얼마 간 일지는 모르지만 기약없는 고난의 일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특히 광주로 들어오는 입구 쪽의 도로는 시민군들도 전두환이 이끄는 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바리케이트 및 온갖 도구들로 차단막을 설치하였다.

(광주로 들어오는 입구라 하면은 크게 6개 방향을 말 할 수 잇다. 광주에서 나주 목포 방향으로 가는 1번 국도와 광주에서 내 고향 비아를 지나 장성으로 지나 서울로 가는 1번 국도, 그리고 광주에서 화순으로 가는 방향과 광주에서 담양 순천으로 가는 방향... 또한 당시 전라남도 향토 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사령부 방향... 마지막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던 광주에서 계엄 사령부 지휘본부가 있던 상무대를 지나에서 송정리로 가는 방향 등이다.)

총과 각종 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시민군들을 피해 고공에서는 좁쌀만한 헬기가 시민들에게 선무 방송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워낙 높은 고공에서 하는 방송이라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개미소리와 같이 웅웅거려 알아 들을 수가 없었고, 하늘에서 시민들과 시민군에게 투항을 독려하는 전단은 마치 흰 눈처럼 많이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전단은 시민들에게는 한 낱 종이 조각에 불과 할 정도로 하찮은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인 나는 대학 입시는 문제는 저 멀리 있었고... 날마다 금남로로 출근하는 것이 예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버스 위에서 열심히 시민들과 시민군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주시는 카랑카랑한 여자분의 얘기를 경청하기도 하고... 차량을 따라 여기 저기 이동하면서 구호를 외치기도 하였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시내에서 외부로 탈출하는 얘기도 간간이 들리기도 하였습니다.

범죄없는 세상...

시민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가 되어 서로 격려하며, 문명의 혜택을 전혀 보지 못하고 그야말로 암흑과 같은 하루하루가 지나고 있었습니다. TV는 물론 우리나라 방송도 듣기 힘들었고... 당시에 라디오를 켜며는 군산 서해 방송과 이북방송이 전부였고... 특히 북괴가 하는 이북 방송은 우리나라 방송보다도 더욱 생생하게 광주 시내의 상황을 전했다. 그래서 나도 가끔 정말 간첩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도 하였다. 즉 입소문과 북괴의 이북 방송이 거의 일치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러한 상황들은 외신 기자들에 의해 광주 상황이 여과 없이 전파를 타다 보니 북괴 뿐만 아니라 세계인들 모두가 광주 상황을 알게 된거라 생각한다.

광주 민주화 운동 기간 동안 다행이었던 것은 전기와 물이 끈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밤이 되면 현재처럼 불야성을 이루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중흥동에서 도청과 충장로와 금남로 방향을 보았을 때는 밝은 불빛이 있었다. 그리고 가끔 시내 방향에서 들리는 총성과 함께 포물선을 그리는 총알의 탄두가 눈에 들어왔다. 헬기의 선무 방송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되고 있었고... 하루 이틀 고요속에 긴장은 계속 되고 있었다. 특히 내가 있던 곳과 가까운 서방 사거리와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두암동 방향의 진입로에서는 시민군의 차량과 군용 트럭 및 장갑차의 이동이 활발하였다.

그리고 총이 반입된 이후로는 전남대 방향으로 가질 않았다. 혹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몰려 왔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고... 전남대학교 울타리 근처에는 개울이 있었는데... 어느 여인네가 그 근처에서 군인들의 정지 명령을 받고 움직이다가 사살을 당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전남대 정문 근처에 이종 사촌 누님이 살고 계셨다. 매형께서는 충남 당진 축협에 근무하셨기 때문에 주말 부부로 사시는 분이었다. 그러나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부터 광주시내로의 민간인 진입을 통제했기 때문에 매형께서는 누님 댁에 오시지 못하게 되었고... 누님께서는 나를 찾아 오셨다. 당시에 7살짜리 조카가 있었는데.. 저녁마다 총소리와 앞에도 잠간 언급 했지만 갖가지 유언비어 혹은 사실적이 말이 전해지면서 무서움을 견디시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틀 정도 누님 댁에 머무르게 되었고... 거기에서 이른 새벽에 광주 민주화 운동이 진압군에 의해 진압 당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른 새벽에 지붕위에서는 일명 코브라라고 하는 헬기가 지붕위에서 불과 몇 미터 높이에서 빠른 속도로 비행하고 가끔씩 따르륵하는 기총소리도 들렸습니다. 감히 밖을 나갈 수가 없는 공포 분위기였습니다. 날이 밝아 내가 이종 사촌 누님 댁 문을 나섰을 때... 군인들이 중무장한 상태에서 골목 곳곳에 여러 명 단위로 배치되어 시민들의 이동을 차단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시에 군인들과 첫 대면을 했을 때, 진즉 도청이 진압 당했다는 사실을 그 군인들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군인들과 대화하는 순간에도 코브라 헬기는 머리위에서 하늘을 휘 젖고 있었고... 약간 높은 건물에서는 군인들이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경계를 서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 근처에 광주 사레지오 고등학교가 있었는데... 그 건물 옥상에서도 군인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진압되었다는 소식과 더불어 이종 사촌 누님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으셨고... 나는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 걱정이 되어 진압되던 날 당일 고향 비아를 가기로 결정했다.

시내버스 통행이라든지.. 학교 개학은 아직 어떠한 정보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매형 자전거를 빌려 타고 약 10여 킬로미터 거리의 고향 비아를 향해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였다. 처음에 운암동이라는 곳을 지날 때쯤 군인들은 나를 보자 욕을 하면서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고생했다고 하면서 철모를 벗어서 머리를 내리쳤다. 하긴 당시에 광주 시민은 초등학교 학생부터 연세 많으신 할아버지까지 모두 한마음 한 뜻이었으니까... 나는 머리를 맞으면서도 아픈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 곳을 지나 우리 마을 쪽으로 이동하는 길 곳곳에는 군인들이 검문을 펼치고 있었고...

지금으로 말하면 비아동 선사 유적지 근처 굴다리를 건널 즈음에 또 현역 군인들에게 구타와 기압을 받았다. 이유인 즉슨 시민군에 합류하여 자기들을 힘들게 하였다는 내용 즉, 운암동에서 군인들에게 겪은 것과  같았다.

자전거를 타고 오는 길목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흔적이 여기저기 에서도 볼 수 있었다. 광주고속버스가 도로 옆 논에 뒤집혀 있기도 하고, 가로수가 차량에 받쳐 쓰러져 있기도 하고.. 등등... 당시에 시내에서 쌩쌩 달리는 시민군 차량을 보면서, 내가 생각하기에 아마 운전 못한 사람도 차를 몰기만 하면 운전 연습은 제대로 하겠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사고 차량도 많이 눈에 띄고 그리고 기름이 떨어지면 그냥 차를 버리고 다른 차로 바꾸어 탄다든지 또는 시동이 꺼지면 다른 차량이 뒤에서 밀어 시동을 걸기도 하였다.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께서는 죽은 줄 알았던 자식이 돌아왔으니 얼마나 기뻣을까... 엄마라고 부르자 정말 어머니께서 맨발로 대문까지 뛰어 나오셨다. 그리고 나를 껴안고 울음을 토해 내셨다. 동네 친구들은 모두 비아에 있었는데... 나만 유일하게 아무런 소식도 없이 10여일 동안 소식을 전혀 알 길이 없었으니... 누나 가족의 안부도 묻고 다른 분들의 신상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신 어머니께서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담담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 얼마 후 광주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광주 사람들은 지난 날의 아픔을 가슴에 묻은 체 일상으로 돌아와 각자의 앞에 놓인 일을 하며 열심히 열심히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까지 도청 사수를 하다 산화한 518 영령들의 고귀한 넋들도 전두환 노태우 시절에는 하늘에서 떠도는 영혼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광주 민주화 운동이 민주화 운동 기념일로 승격되고 피해자들에게 보상이 이루어지면서 어느 정도는 자리 맺음을 하였다고 보겠으나 아직까지도 실종된 수많은 영혼들은 후손들이 풀어야 할 미제로 남아있습니다.

당시에 회수되지 않은 수많은 총과 폭약 때문에 전두환은 전남 도청에 업무 보고차 방문 시에 살며시 왔다가 살며시 도망가는 형태를 취했고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아직까지도 광주 시민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 않음은 실로 유감이라 하겠습니다.

지금도 정치인들은 광주에 오면 5.18 공원 묘역 참배를 빠뜨리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광주민주화 운동의 사망자가 약 200 여명으로 최종 발표가 되었지만, 당시에 시위에 참가하고 경험한 광주 시민은 그 수치는 한 낟 수치에 불과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종자 포함 최소한 15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치인들 내면은 과연 5.18 열사들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리고, 그 잠든 영혼들과 얼마 만큼 교감하고, 한마음이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생각나는데로 글을 보충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