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여자, 대기자만 200여명"
한겨레21 보도 "女연예인도 100명"…"근혜씨도 문란한 여자관계 알아"
만주군관학교는 독립군을 토벌하는 일본에 충성하는 장교를 양성하는 학교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 후손들에게 수치스러운 역사를 물려주지 않으려고 청춘을 받친 안중근님과 유관순님!
일신의 영달을 위해 우리민족을 수탈하고 학살까지한 일본군 장교를 자원한 자발적 친일파 다카키마사오!
그러나 후손들은 민족을 배신한 다카마사오의 딸을 또 이나라의 통치자로 택했다.
독일의 슈피겔지는 “군부독재자의 딸이 인권변호사를 이겼다”고 선거결과를 논평했다.
세계 유수 언론들과 세계인이 한국 대선을 바라보는 시각.
[BBC] 독재자의 딸 박근혜 vs 그 독재자 때문에 감옥 갔던 인권변호사 문재인
[르몽드] “독재자의 딸, 한국에서 대선 후보 출마”
[뉴욕타임즈] "어설픈 민주주의 국가의 여전히 인기있는 독재자의 딸"
[로이터통신] "한국 독재자의 딸 대선 출마"
[보스턴 글로브] "남한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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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중정)는 여자들을 조달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진 '마담' 2명을 활용해 200여명의 여성 중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수발을 드는 여성을 선택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궁정동 말고도 한남동과 구기동, 청운동, 삼청동 등 5∼6곳에도 안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 중앙정보부 안가 관리직원은 최근 한겨레21과 가진 인터뷰에서 "연회 접대 여성은 어떻게 준비하나"라는 질문에 대해 이 같이 밝히고 "접대 여성은 한 차례 이상 넣지 않는다. 대통령 눈에 들어 혹시 임신을 하거나 대통령이 여성에 빠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다"라며 "대통령이 찾으면 만류해보다가 잘 안 되면 추가로 딱 1번만 더 접대하도록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이 해외순방 중이 아니면 모든 안가는 24시간 대기 상태에 들어간다"면서 "하루 중 언제라도 불시에 대통령이 방문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직원들이 대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청와대 경호실이 아니라 중정에서 직접 안가를 관리한 이유에 대해 "경호실은 군처럼 경직된 조직이어서 안가 관리에 적합하지 않았다"면서 "대통령도 딱딱한 분위기에서 술자리를 하는 걸 원하지 않아 중정에 맡긴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한겨레21은 김재규 부장의 명령에 따라 10·26에 가담한 박선호(사형집행, 당시 46살) 중정 의전과장의 법정 진술을 소개하기도 했다.
1980년 1월 23일 열린 고등군법회의 2차 공판에서 박 과장은 '대통령의 여인들'과 관련해 "지금도 수십명이 일류 연예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명단을 밝히면 사회적으로 혼란을 일으킨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한겨레21은 "당시 박 과장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가 접견(1980년 1월15일) 내용을 기록한 노트에는 '여자 연예인 100명'과 함께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에는 신인급에 속한 유명 여자 탤런트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보도했다.
강 변호사는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김 부장에게 여러 차례 물었지만, 겨우 '한 100명쯤 된다'는 얘기만 한 것으로 기억한다"며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아이닷컴 뉴스부 reporter@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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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홍사’박선호 군법회의 증언 녹취록
박정희의 ‘大行事’‘小行事’
◇10·26사건 19주년이 지났지만 사건동기는 아직 석연치 않다. 인간 박정희의 내면적 모습이 의문을 푸는 최후의 열쇠가 될지 모른다.「신동아」는 대통령 박정희의 술과 여자, 정보통치, 언론통제, 북한과의 대결주의를 다룬 「박정희의 유산」(김재홍著·도서출판 푸른숲 근간)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원으로 10·26사건에 가담했던 박선호의 군법회의, 증언을 토대로 한 「박정희의 술과 여자」를 소개한다. 송문홍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현직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감행한 박정희대통령 살해사건은 실로 누천년의 우리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어처구니없는 돌발상황이었다. 당시 대통령 긴급조치로 통치되던 서슬 퍼런 유신체제 아래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권총으로 쏘리라고 그 누가 상상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온 국민에게 경악과 함께 인식의 혼란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오랜 철권통치자의 죽음에서 느낄 수 있을 법한 해방감도 워낙 컸던 놀람 속에 묻혀버렸다.
그러나 그렇게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역사의 뒤편에는 그만큼 상상하기 어려운 업보가 감추어져 있었다. 박정희 시대사의 막후에서는 설마하던 일들이 실제 벌어지고 있었다. 국정 최고책임자이며 국민의 정신적 지주여야 할 대통령이 국민의 눈이 닿지 않는 중앙정보부 부속 비밀연회장에서 사흘에 한 번 꼴로 술자리 행사를 갖고 있었다. 충격적인 것은 그 자리 「술시중 여인」으로 일류 탤런트와 가수를 비롯해서 연예인을 지망하는 나이 어린 여대생까지 불러들였다는 사실이다. 그 대통령전용 비밀요정의 호스티스를 시중에서 조달하는 책임자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였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대통령의 채홍사로 그는 최고의 비밀관리자였다.
그날 사건도 대통령 박정희와 그가 가장 신임하는 측근권력자들인 중앙정보부장, 청와대비서실장, 경호실장, 이렇게 4명이 저녁에 벌인 술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979년의 일이다. 그 자리에는 여자 둘이 동석했다. 한 여자는 유명가수였고 다른 한 여자는 여대생으로 아르바이트 패션모델이었다.
이런 식의 대통령 술자리에 한번씩 왔다 간 여자들은 당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입을 벌릴만한 TV탤런트와 가수 등 연예계의 일류 스타들이었다고 대통령 박정희의 채홍사는 증언했다. 대통령의 술판은 소행사와 대행사로 구분됐다. 소행사는 대통령 혼자서 즐기는 것이고, 대행사는 측근 권력자 3~4명이 함께 하는 것을 뜻했다. 최후의 그날 술자리는 대행사였다.
다음은 1979년 12월11일 군법회의 제1심 4회 공판에서 박선호 피고인에게 처음으로 대통령 박정희의 술시중 여인들에 대한 증언을 유도한 강신옥 변호사의 신문과 그에 대한 답변이다.
변호사: 피고인은 차지철 경호실장이 여자문제를 더욱 힘들게 하고 피고인 자신이 어린애들을 갖고 있는 아버지로서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데 대해 인간적으로 괴로워서 김 정보부장에게 수차 『도저히 이 일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고 하소연하면서 그만두게 해 달라고 했으나 김 부장이 『궁정동 일은 자네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서 사의를 만류시켰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박선호: 제가 근무하기를 몇 번 꺼렸습니다. 그래서 부장님에게 계속하기 어렵다는 여러 가지 사유를 몇 번 올린 바가 있습니다.
변호사: 결국 정보부장님이 『자네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또 그렇게 해서 할 수 없이….
박선호: 네, 저를 신임하시어 자꾸 계속적인 근무를 원하셨습니다.
변호사: 청와대 차지철 경호실장은 『돈은 얼마든지 주더라도 좋은 여자를 구해 달라』고 하면서 실제로 돈은 한 푼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도 말만 많아서, 피고인이 경호처장인 정인형한테 『당신이 고르라』고 말했더니 『청와대에서 고르는 걸 국민들이 알면 큰일 난다』며 안된다고 하기에 피고인은 『그러면 골라 놓은 사람들에게 좋든 싫든 말이나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항의까지 했더니 그 이후에는 차실장도 잔소리가 적어졌다는데, 그렇습니까.
정인형은 당시 청와대 경호실 경호처장으로 박선호와 해병대 간부후보생 동기였다. 박선호가 소개받아 데려오는 여자에 대해 미인이 아니라거나 품위가 너무 떨어진다는 차지철의 지적을 정인형이 전달하곤 했다. 이에 박선호는 크게 반발했다. 그러잖아도 관립요정 관리자로 전락해가는 처지에 수치를 느끼는 판이었다.
그는 정인형에게 처음 경호실이 했던 것처럼 각하의 술시중여인 조달을 맡으라고 했다. 그러나 경호실측은 펄쩍 뛰었다. 골치아프고 불명예스러운 일을 떠안게 될까봐 큰 거부반응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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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여사, 박종규 뒷조사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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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박정희에게 여자를 조달하는 일은 본래 경호실이 시작했다. 5·16쿠데타를 거사할 때부터 충직한 경호대장이던 박종규가 모든 것을 관장했다. 박은 각하의 심기관리에서부터 술자리까지 챙겼다. 군대에서 부관이나 전령병이 지휘관을 잘못 모시면 전체 분위기가 썰렁해진다는 말은 금언에 속한다. 그런 군사문화에 젖은 경호실장 박종규는 각하의 심기관리를 최우선 업무로 삼았다.
박정희의 술과 여자는 많은 비화를 남겼다. 70년대 초 어느날 대통령부인 육영수 여사를 면담한 어느 여성은 육여사의 얼굴에 멍이 든 것을 본다. 소문은 퍼지고 청와대출입기자들이 그 배경을 취재했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박정희가 재떨이를 던졌다느니 손찌검을 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한 기자가 직접 박정희에게 물었다.
『영부인 얼굴에 멍이 들었던데, 부부싸움을 하신 겁니까?』
이 말에 대통령은 몹시 어색한 얼굴로 헛기침만 했다.
『어허, 음, 흠…』
부부싸움은 대통령의 주색 때문이었다.
육여사는 대통령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온갖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게 해주는 경호실장 박종규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육여사는 박종규 거세계획에 착수한다. 이 계획에 동원된 사람이 당시 청와대 사정담당 수석비서관 홍종철이었다. 육여사는 홍종철을 은밀히 불러 박종규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눈물을 글썽이며 규탄했다.
『내가 이 사람을 더 이상은 각하 곁에 놓아둘 수 없습니다. 방법이 없을까요』
이래서 홍종철은 극비리에 박종규 비리조사에 착수한다. 본인과 형제 친척들의 이권개입과 인사청탁 여부에서부터 사생활 비리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막강한 경호실 안테나에 안 걸릴 리가 없었다. 박종규의 귀에 사정수석실이 자신의 비리에 대해 내사하고 있으며 홍종철이 직접 지휘한다는 정보가 들어갔다. 박종규는 흥분했다. 그는 경호실에 있던 엽총을 집어들고 홍종철의 방에 뛰어 들어갔다.
『야, 이 새끼야, 네가 내 뒷조사를 하고 다니냐』
박종규는 분에 못이겨 엽총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그러나 총구는 천장을 향해 있었다. 그가 냅다 갈긴 엽총 탄알은 홍종철의 머리 위 천장에 맞고 튀었다. 홍종철은 박종규 앞에서 기를 펴지 못했다. 경호실장은 박정희의 분신으로 누가 무슨 보고를 해도 경호사고가 나지 않는 한 문책인사 대상이 아니었다.
이 사건 후 대통령의 채홍사 일이 경호실에서 중앙정보부로 옮겨졌다. 술자리 마련과 여자 조달하는 일을 청와대에서 한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는 날이면 큰 낭패라는 생각에서 그 일을 비밀 공작수행기관인 중정으로 떠넘긴 것이다. 청와대는 출입기자들이 있는데다 공식적인 방문객도 많아 비밀스러운 일이 노출될 위험이 컸다. 어느 모로 보나 그 일을 맡기엔 중정이 안성맞춤이었다. 국가기밀이라는 허울좋은 베일 뒤에서 각하의 술과 여자가 난무하게 된 것이다.
박종규가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일어난 육영수여사 피격사건으로 물러난 것은 묘한 아이러니였다. 육여사는 그렇게 싫어했던 경호실장을 생전에 밀어내지 못하고 죽어서야 뜻을 이룬 셈이다.
따지고 보면 10·26사건의 먼 원인은 8·15저격사건이 된다. 이때 박종규가 문책으로 물러났기 때문에 차지철이 후임 경호실장으로 들어갔으며, 차지철의 횡포에 김재규가 자극받은 것이다. 사건 당일도 만약 임무수행에 철저한 박종규가 경호실장이었다면 그렇게 호락호락 김재규에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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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을 거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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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규의 엽총난사 사건을 보아도 박정희의 주색탐닉이 육여사가 죽은 후 홀아비 고독 때문에 생긴 일만은 아니었다. 육여사가 살아있을 때도 주색으로 충돌이 잦았다. 다만 홀아비가 된 후 그의 사생활이 더욱 절제없이 무너진 것은 사실이며 이것이 그의 운명을 재촉하는 결과가 됐다. 10·26사건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박정희의 사생활 문란과 판단력 마비가 직접 동기를 제공했다는 것이 박선호의 증언 내용이다.
변호사의 술자리 여자문제에 대한 신문에 박선호는 고개를 떨구었다. 목소리도 기어 들어가듯 작아졌다.
박선호: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변호사: (한참 묵묵히 있다가) 피고인은 1978년 8월11일에 의전과장이 되어서 1979년 10월27일 면직될 때까지 하루도
출근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데, 그렇습니까?
박선호: 네.
변호사: 출근하지 않은 날이 없다는 말에 추석이나 정초 휴일까지 포함되지요?
박선호: 그렇습니다.
변호사: 휴일을 포함해서 하루도 결근을 하지 않고 계속 출근했다는 말이지요?
박선호: 네. 부장님의 언제 어떤 지시가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제가 매일 나갔습니다.
변호사: 피고인은 어제 말한 소행사나 대행사, 이게 하도 빈도가 심해서 남효주 사무관과 같이 앉아서,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다』라고….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은 일년 중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고위층이 사생활을 즐기는 데 그의 모든 시간을 바쳐야 했고 그것이 공무였다. 의전비서나 의전과장이란 본래 그 조직과 외부간 접촉에서 절차와 일정을 관리하는 직책이다. 그런데 고위층일수록 만나고 싶어하는 외부인사는 많고 시간이 부족한 법이다. 여기서 의전비서에게 세도를 부릴 권한이 생기게 된다. 즉 고위층과 만나는 시간을 잡아주는 역할이 상당한 영향력을 파생하는 것이다. 또 의전비서는 대부분 고위층의 심복이다. 자신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훤히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비서가 나중에 수틀려서 자신의 행적을 폭로한다면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평생동지를 의전비서로 삼는 것이 통례다. 특히 독재자의 경우 개인적으로 가장 가까운 부하는 역시 경호실장과 의전수석비서관이었다. 개인생활과 관련된 역할을 수행하는 부하인 것이다.
중앙정보부에서 의전과장은 부장이 가장 신임하는 오른팔이 맡게 돼 있었다. 대통령과 중정부장의 내밀한 사생활을 관리하는 직책이 되면서부터였다. 국가기밀과 정보관리를 내세워 일반 국민의 눈에 완전히 가려져 있는 중앙정보부에 대통령을 위시한 최고권력자들의 환락생활을 뒷바라지하도록 한 것이다. 그 실무 책임자가 의전과장이었다.
박선호가 이따금 함께 신세타령을 했다는 남효주 사무관은 궁정동 안가 비밀요정의 관리자였다. 대통령 전용 관립요정을 두고 그 관리자에게 중앙정보부 소속 공무원직급인 사무관을 부여한 것이다. 남효주 얘기가 나오자 군검찰관은 당황했다. 대통령 사생활의 가장 깊숙한 비밀얘기가 노출될 위기였다. 검찰관은 급히 제동을 걸었다.
검찰관: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지금 본건 변호인은 본건 공소 사실과는 아무런 관계 없는 사실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신문을 제한해 주시기 바랍니다.
법무사: 사건과 관련 있는 건만 신문해 주십시오.
변호사: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만약 관련이 없다면 재판부에서 대답하지 않게 해도 좋습니다만….
법무사: 피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무상 비밀 등에 대해서 진술 거부권이 있다는 것은 고지한 바와 같습니다.
변호사: 어떻습니까.
박선호: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변호사: 소행사, 대행사의 빈도가 하도 심해서 남효주 사무관하고 같이 앉아서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다』는 불평을 주고 받았다는데….
박선호: 답변을 거부하겠습니다.
변호사: 있죠.
박선호: 답변을 거부하겠습니다.
보통군법회의 재판 때만 해도 박선호는 박정희의 주색문제에 대해 공개진술을 꺼렸다. 그것은 고인의 명예를 손상하는 일이지만 자신도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 문제를 토로하기 시작하는 것은 사형선고를 받고 난 후 항소심인 고등군법회의 재판에 들어가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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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이 들어도 좋은 여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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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홍사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의 술자리 여인으로는 이미 유명해진 기성 배우보다는 20대 초반의 연예계 지망생이 더 선호됐다. 그중엔 유수한 대학의 연예 관련학과 재학생도 있었다. 채홍사가 구해 온 여자들은 먼저 경호실장 차지철이 심사했다. 차지철은 채홍사에게 『돈은 얼마든지 주더라도 좋은 여자를 구해 오라』고 투정을 부리곤 했다. 그래서 대통령의 채홍사란 중정 의전과장보다도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붙여져야 할 이름이었다.
차지철의 심사에 이어 여인들은 술자리에 들어가기 전 경호실의 규칙에 따라 보안서약과 함께 그날의 접대법을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우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된다, 술자리에 들어가면 대통령을 비롯해서 고위 인사들의 대화 내용에 관심을 표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대통령이 말을 걸어오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응석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등등이다.
항소심에 들어가 강신옥 변호사는 박선호 피고인으로 하여금 채홍사 일을 진술하게끔 강력한 신문전략으로 나간다. 그것은 바로 대통령 박정희의 술판과 여자를 폭로하는 증언이었다. 대통령의 주색중독과 그로 인한 판단력 마비, 그리고 국가안보 위기, 이것이야말로 「10·26거사」의 정당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변론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10·26거사」의 정당성이 인정되면 김재규와 박선호 등 피고인들의 죄는 내란 목적 살인에서 단순 살인으로 정상 참작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피고인들에게 극형을 면하게 해주는 길이었다.
항소심으로 가기 전 보통군법회의 4회 공판인 이날 강변호사는 여자문제 신문이 군검찰관의 제지로 벽에 부딪힌데다 박선호도 답변을 거부하자 김재규의 생활태도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변호사: 피고인은 김부장님이 대통령 앞에서도 아첨하는 법이 없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거나 대통령과 전화를 할 때
도, 피고인이 연결을 시켜주는 관계로, 들은 일도 있다는데 그런 경우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박선호: 그것은 급한 연락사항이 있을 때 부장님께서 각하실로 전화 대라고 하면 연결해 주고 한 일은 있습니다.
변호사: 글쎄, 그때 전화를 듣고 역시 김부장님은 대통령 앞에서도 솔직하게 무슨 말을 하는구나 하는 걸 느낀 것이
있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좀 몇 가지 말할 수 있습니까.
박선호: 모든 사항을 서슴지않고 사실대로 말씀하시는 여러 가지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변호사: 다른 분 같으면 대통령 앞에서 그런 투로 말하지 않을 텐데 아주 의사를 분명하게 솔직하게 말한다 하는 것을
느꼈다는 말이지요.
박선호: 예, 그래서 항상 제가 존경을 많이 했던 것입니다.
변호사: 또 한번 검찰신문 때도 그렇게 몇 가지 충고와 훈계를 해주었다고 했는데, 특히 피고인에게는 운동도 테니스
나 하라고, 피고인에게는 그게 좋다고 훈계했다면서요.
박선호: 수시로 부장님께서 모든 것을 검소하게 하고, 운동 같은 것도 화려함보다는 정구 같은 것을 하라고 말씀하시
고, 사람들을 대할 때 항상 겸손하라는 말씀을 수시로 하시고 저희들에게 지도의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보통군법회의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박선호는 상당한 심경변화를 일으켰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역사적 증언이나 하자는 생각이었다. 마치 주색에 빠져 나라를 빼앗긴 군주국의 마지막 왕들을 연상케 하는 얘기가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흘러 나왔다. 그러나 그는 각하의 술자리에 왔다 간 연예계 여인들의 명단을 두고 고민했다. 다음은 10·26사건이 일어난 해를 넘긴 80년 1월23일, 서울 용산 국방부에 설치된 계엄사 고등군법회의 2회공판의 녹음이다.
변호사: 피고인은 1심에서 변호인이 그날 당일 여자 두 사람을 인솔해 온 것을 물었을 때 대답을 않겠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런 심정입니까.
박선호: 그 문제는 제가 답변하게 되면 지금 현재 시내에서 일류배우들로 활동하고 있고 이것이 역효과가 나고 사회
적으로 혼란문제가 되고 돌아가신 분에게 욕되고 했기 때문에 제가 그 문제를 피했습니다.
변호사: 지금도 그런 심경입니까.
박선호: 예, 그 문제를 가지고 제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변호사: 이번에 한 행동의 숨은 동기 중 혹시 그런 사정 때문에 내 자신의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잖나 하는 생각은
없습니까. 이번에 부장님의 명령에 따르기는 했지만 그 행위에 가담하게 된 사정 속에는, 사람의 행동 속에는
무의식중에 그것을 결정하게 하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런 사정들도 이번 행동에 가담하게 된 어떤 숨
은 동기가 되느냐 이겁니다.
박선호: 제가 무슨 동기가 있었다기보다, 저는 하여간에 1년 내내 하루도 근무를 쉬지 못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불시에 오시기 때문에 그랬는데, 저는 그때 동기라든가 이런 것보다는 존경하는 부장님의 지시면
무조건 한다는 것 외에는 없고, 만약 그때 다른 지시를 했어도 응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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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조달 증언 『상상에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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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당일 대통령의 최후를 술 취하지 않은 맨 정신으로 가장 확실하게 보았던 증인도 그렇게 불려온 두 여인이었다. 술자리에 두 여인이 동석했다는 사실도 박선호가 처음 공개했다. 여기서 각하 전용 비밀요정의 구조와 소행사·대행사, 각하의 연회주선이 주임무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직책도 밝혀졌다. 1979년 12월11일 보통군법회의 4회 공판 전반부의 변호사신문에서였다.
변호사: 정보부 비서실 의전과장의 임무는 정보부 궁정동 사무실에 있으면서 궁정동에 있는 다섯 개 연회장을 관리하
고 정보부장을 보필하는 비서까지 겸하고 있다는데요 ?
박선호: 네.
변호사: 궁정동 다섯 개 연회장은 피고인이 의전과장이 되기 전부터 있던 구관과 현재는 가동이라 부르는 신관,
세검동 및 피고인이 와서 새로 건축한 나동 다동을 말하는데 그렇습니까?
박선호: 네.
변호사: 이번에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식당은 위에 말한 나동입니까, 그게 ?
박선호: 네.
변호사: 피고인이 관리하는 다섯 개 연회장은 대통령이 혼자 사용하시거나 이번에 사건이 생겼을 때와 같이 대통령
경호실장, 비서실장, 김 정보부장, 이 네 사람이 연회를 가질 때 사용하는 장소라는데 사실입니까?
박선호: 네, 그렇습니다.
변호사: 궁정동 연회가 있게 되면 청와대 경호실 경호처장인 정인형이 피고인에게 전화로 연락을 주는데,
대통령 혼자 오실 때는 「소행사」라는 표현을 한다는데 그렇습니까?
박선호: 그렇습니다만, 그 행사관계는 참고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박선호의 진술은 목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가 됐다. 소행사라는 말이 경호실과 궁정동 안가에서만 쓰는 비밀용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변호사는 여기서 더 바짝 다그쳤다.
변호사: 아까 검찰관 신문할 때, 얘기하다 말았는데 그날 몇 시 몇 분에 플라자 호텔에 간 일이 있죠?
박선호: … 네.
변호사: 그때 플라자 호텔에 간 것은 바로 그날 연회장에서 도와줄 여자를 데리러 간 거죠?
변호사의 이 물음이 나온 후 박선호는 머뭇거렸고 군사법정에 긴장이 흘렀다. 그때 박선호의 등 뒤에서 작은 외침이 터졌다.
『야, 얘기하지 마』
피고인석 맨 앞줄에 앉아 있던 김재규가 박선호의 답변을 제지하는 목소리였다. 김재규는 법정진술에서 박정희의 사생활 부분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했다. 그는 유신체제와 박정희의 영구집권 욕심에 대해서만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 이외의 사생활은 거론하지 않았으며 박정희를 호칭할 때마다 깍듯이 존칭을 썼다. 그런 그가 이날 공판에서 박정희의 치부를 은폐하기 위해 부하의 진술을 막기까지 한 것이다. 오랜 기간 모신 각하에 대해 애증이 엇갈리는 모습이었다. 이에 박선호도 잠시 「양심선언」을 유보하는 태도를 보였다.
법정에는 잠시 미묘한 긴장이 감돌았다. 무언가 최고권력자의 내밀한 문제가 숨겨져 있는 것인가. 법정에서도 공개적으로 말 못하는 사연이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10·26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데 대통령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대한 정치적 비판만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인간 박정희의 내면을 보여주는 사생활에 대한 증언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유신권력의 수혜자이기도 했던 중앙정보부장이 그를 쏘아버린 사건의 동기가 설득력있게 규명되기 어려웠다.
김재규의 제지에 박선호는 더욱 증언을 자제했다.
박선호: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박선호는 답변 말미에 살짝 웃음기를 띄웠으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강변호사는 이날 준비해온 대로 밀고 나가기로 맘먹었다.
변호사: 플라자 호텔에서 내자 호텔로 간 것도 여자를 데리러 간 거죠?
박선호: …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플라자나 내자 호텔은 박선호가 소개받은 연예계 여인을 만나 데려오는 장소였다. 그러나 그는 거듭 증언을 거부하며 『상상에 맡기겠다』고 했다. 그것은 사실상 시인으로 박정희의 술자리와 여자조달 행각이 처음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박선호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변호사: 그래서 도착한 것은 몇시였죠?
박선호: 제가 오니까 이미 행사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6시 30분쯤,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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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 술판의 두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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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변호사 신문에 앞서 진행된 검찰관 사실신문에서는 연회장의 여자 얘기가 나올 때마다 끊어지곤 했다. 박선호 피고인이 대통령의 주연담당이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처음부터 군 검찰관은 사실신문에서 피고의 진술을 통제하고 나섰다. 박선호가 10·26 당일의 행적에 대해 진술하면서 「대행사」 얘기를 꺼내자 검찰관은 재빨리 『네 알겠어요』라며 말을 더 이상 못하도록 끊었다.
또 행사준비차 플라자 호텔에 갔었다면서 다음 말을 이으려 하자 검찰관은 급히 『네 알겠습니다』고 말을 막았다. 이는 군검찰관이 피고인을 신문하는데 있어 사건발생의 전후관계를 따져 밝히는 것보다 각하의 사생활 보호에 더 비중을 두었다는 얘기가 된다. 또 그런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검찰관이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이 군사재판은 법정의 옆방에 보안사령부 파견관이 대기하면서 수시로 지시메모를 전달한 이른바 「쪽지 재판」이었다.
이 재판에서 김재규는 주로 고도의 정치문제를 진술한데 비해 박선호와 박흥주 피고 등 그의 부하들은 핵심권력자들의 사생활과 권력투쟁상을 묘사했다. 당시까지 그런 비화는 국가기밀의 너울을 쓰고 바깥에 일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국민이 알건 모르건 그날의 궁정동 행사는 결국 「절대권력은 절대로 타락한다」는 금언을 실증하는 최후의 자리였다.
검찰관: 지난 10월 26일 대통령 각하 주재 만찬이 있다는 연락을 언제 누구로부터 받았습니까?
박선호: 26일 오후 4시 25분경에 청와대 경호처장으로부터 『오늘은 대행사가 있다. 장소는 나동이다』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연락을 받고 바로 나동을 관리하는 남효주 사무관에게 나동에서 대행사가
있다, … 대행사가 있다고 그러면….
검찰관: 네, 알겠어요. 김재규 피고인이 남산분청에서 본관 집무실에 몇 시에 도착했습니까?
박선호: 4시 30분경으로 생각됩니다.
검찰관: 피고인이 식당관리인이 남효주에게 만찬준비를 시킨 후에 시내에 손님을 만나러 간 사실이 있죠?
박선호: 네.
검찰관: 몇 시에 나갔다가 몇 시에 돌아 왔나요?
박선호: 부장님이 4시 30분경에 도착하셨기 때문에, 행사관계를 보고드리고 제가 차를 가지고 바로 플라자 호텔을….
검찰관: 네, 알겠습니다. 그래서 18시 25분경 위 식당으로 되돌아 왔습니까?
박선호: 네.
검찰관: 피고가 만찬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만찬은 시작됐죠?
박선호: 네, 제가 오니까 이미 만찬이 시작돼 있었습니다.
박선호의 이 증언으로 10·26사건 당일 밤 박정희의 양옆에 앉았던 두 여인은 법정 증언대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두 여인이 법정에 출두하는 날 보안사가 주도하는 합동수사본부는 이들의 신원이 알려지지 않도록 크게 신경을 썼다. 이들이 역사의 현장을 목격했을 뿐 아니라 「사건 뒤의 여자」로 비쳐 세간의 눈길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계엄이었기 때문에 언론은 이 여인들에 관해 제대로 보도할 수 없었으나 시중엔 여러 소문들이 나돌았다. 두 여인의 프라이버시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에 휘말렸기 때문에 그들의 사생활 보호가 국민의 알 권리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었다. 더구나 한 여인은 유명가수로 대중문화의 스타여서 일반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박정희의 부도덕성에 대한 비난여론이 부상할 수도 있어서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그래서 합수부는 언론보도에서 두 여인의 사진을 뒷모습만 게재하도록 제한했으며 이름도 가명을 쓰게 했다. 시중에는 이미 손금자라는 가명으로 발표된 가수가 누군지 알리는 정확한 「유비통신」이 퍼져 있었다. 유수대학의 연극영화과 재학생이며 모델노릇도 한다는 정혜선양의 신원도 언론보도만 막는다 해서 감추어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이미 알려진 대로 가수 손금자는 심수봉씨, 정혜선은 신재순양이었다 <편집자>).
12월 17일 오후 4시 15분경, 두 여인은 감색 제미니 승용차를 타고 보통군법회의 8회공판이 열린 군사법정 앞에 도착했다. 이들은 별관에 별도로 마련한 소법정에서 수시간에 걸쳐 따로 증인신문에 답변했다. 두 여인을 신문하기 위한 별도법정에는 재판부와 검찰관, 변호인 그리고 보도진은 4명, 방청인은 기관원으로 제한됐다.
정혜선(H대 연극영화과3년. 패션모델): 처음 총소리가 난 후 화장실로 피신했는데 조금 있다가 또 총소리가 났습니다.
검찰관: 그 때 대통령 각하는 어떻게 하고 계셨습니까?
정: 쓰러져 있었는데 식탁 옆으로 몸이 기울어 있었습니다.
검찰관: 총소리가 난 후 불이 나갔나요?
정: 불이 꺼진 뒤 손양과 둘이서 각하를 부축했습니다. 그 때 차지철 경호실장은 『경호원, 경호원』 하고 소리치며
화장실에서 나와 문갑을 잡고 있었습니다.
검찰관: 당시 상황을 기억나는 대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정: 식탁에 엎드린 각하를 일으켜 부축했는데 그 때 김재규 부장이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각하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 나도 이제 죽었구나 하고 겁이 나서 실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조금 조용해지는 것
같아 나와 보니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각하를 업고 나갔습니다.
검찰관: 차실장을 본 일이 있습니까?
정: 방에서 빠져나가려는데 차 실장이 문가에 쓰러진 채 살아 있어서 누군지 모르는 사람과 함께 부축하면서 일어나
라고 했더니 『나는 못 일어날 것 같애』라고 하기에 그냥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때 옆 사람이 안내해 줘 어느 방
으로 들어가 기다리고 있는데 신음소리도 났고 조금 후 총소리가 계속해서 일곱 발 정도 났습니다.
그 방에 전화가 몇 번 왔는데 무조건 모른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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팁도 다 계산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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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변호인신문이 시작됐다. 김재규 피고인의 국선변호인으로 선임된 안동일 변호사가 먼저 물었다.
안동일 변호사: 검찰관이 신문할 때처럼 그냥 『네, 네』 하지 말고 아는 대로 대답해주세요.
궁정동에 도착해서 바로 방에 들어갔습니까?
정: 6시 30분에서 40분 사이에 도착해서 잠깐 대기했었습니다.
안 변호사: 방에 들어갔을 때 대화가 계속되고 있었나요?
정: 대화가 계속되고 있는 상태에서 들어가 인사하고 앉았습니다.
안 변호사: 대화 중 언성이 높아진 적이 있습니까?
정: 없습니다.
신호양 변호사: 대화 중 차실장과 김재규 부장 사이에 언성이 높았습니까?
정: 그런 느낌은 못 받았습니다.
이병용 변호사: 합동수사본부에 몇 번이나 갔지요?
정: 한 번 갔습니다.
이때 검찰관이 『본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질문을 삼가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이변호사는 『검찰신문의 신빙성에 관한 질문이다』고 응수했다.
이 변호사: 그날 김계원 청와대비서실장이 머리를 떨구고 있었다는 것은 높은 어른 앞이라 그런 것인가요,
아니면 무슨 꾸지람이나 죄책감이 있어선가요?
정: 무언가 초조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변호사: 그 날 저녁 손양이 자리에 들어가니 대통령 각하가 본관이 어디냐고 묻고선 얼마 전 작고한 총무처장관과
본이 같다고 했다는데….
정: 맞습니다.
이 변호사: 각하가 총에 맞았을 때 비명소리가 있었나요?
정: 숨소리가 좀 거칠었습니다.
이 변호사: 증인은 관상학을 공부한 일이 없지요. 그날 김계원 실장을 처음 보았고 조명도 흐렸지요?
정: 조명은 말하기 곤란합니다.
안동일 변호사: 조명이 어두웠나요 밝았나요.
정: 조명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대생 패션모델 정혜선은 어린 나이에 비해 의외로 침착하게 진술했다. 엄청난 사건에 휘말렸는데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담담한 증언이었다. 현장에서 넋이 빠져서 허둥대거나 겁 먹었다면 제대로 보지 못했을텐데 상당히 자세히 돌발상황을 설명했다. 오히려 나이가 위이고 유명가수여서 사회경험도 많은 손금자는 진술이 엉성했다. 그런 정혜선이 당시 술자리를 가진 방의 조명 얘기가 나오자 거부반응을 보였다. 실내가 밝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는 진술이었다. 권력자들이 여자와 술을 희롱하는 관립비밀요정도 시중의 룸살롱처럼 어두컴컴했다는 얘기다. 이어서 가수 손금자가 증인석에 앉았다.
검찰관: 그 날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대통령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던가요?
손금자: 조금 높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검찰관: 만찬석에 들어간 뒤 대통령 각하께서 총에 맞을 때까지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 보세요.
손: 처음 들어가니 각하께서 차실장에게 『TV에서 삽교천 행사를 방영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차실장은 『시간이 되
면 제가 켜 드리겠습니다』 하면서 시계를 봤습니다. 이때 저도 시계를 보았는데 7시10분전쯤이었어요. 삽교천에
대한 말씀이 계속됐고 심부름하는 사람이 들어와 김부장의 귀에 대고 『과장님이 뵙자는데요』 하자 바로 나갔습
니다. 그후에 나갔던 김부장이 언제 들어왔는지 곧 총소리가 났어요.
검찰관: 그때 상호간에 주고받은 얘기는 없었습니까?
손: 『이 버러지 같은 놈』이라는 고함소리만 들었습니다.
검찰관: 김재규 피고인이 두 번째 들어올 때 눈이 마주쳤다고 했는데….
손: 총을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굉장히 당황했어요. 설마 했으나 각하 머리에 총을 갖다대는 걸 보고 밖으로 튀어
나갔는데 남효주 사무관이 부속실로 들어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두 여인의 진술은 사건 당일의 현장목격담이었다. 거기에 관립 비밀요정의 풍속도를 전해준 증언이었다. 두 여인은 사건 당일 밤 11시경 귀가할 수 있었다.
그런 큰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박선호는 이들에게 팁을 주어 내보냈다. 다음날 김재규가 국방부에서 헌병과 보안사요원들에게 체포되기 전까지 중앙정보부는 평소대로 움직였다는 증거다.
다음은 1980년 1월23일 열린 고등군법회의 2회 공판의 녹음이다.
변호사: 만찬에 참석한 여자 둘을 몇 시에 보냈습니까?
박선호: 제가 11시경에 보냈을 겁니다.
변호사: 11시경에, 그러니까 거사가 있고 난 뒤에 그날 보냈죠? 그날 돈도 주어 보냈죠?
박선호: 네, 완전히 다 계산해서 보냈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대통령의 술자리여인들에게 주는 화대는 지금 돈으로 쳐서 보통 50만~100만원 선이었고 이름 있는 스타인 경우는 그 두 배를 주었다. 「당대 최고」의 술자리였음을 감안하면 일반의 상상보다 꽤 짠 편이었다.
그 이유는 권력의 힘도 작용했겠지만 시중엔 대통령의 술자리에 가고 싶어하는 지원자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공급이 많으니 가격이 비쌀 필요가 없었다. 거기에도 수요와 공급의 시장법칙이 적용됐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그런 지원자들을 골라 보내주는 중간책이 장충동에 있던 모 요정의 김 마담이었다. 김 마담은 오랫동안 그 분야에서 잔뼈가 굵어 거물정치인과 접하려는 「화류계 매미(賣美)」들의 대모였다. 특히 연예계에서 스타가 되기 전 20대초의 나이 어린 신참들이 김 마담으로부터 은밀히 제의를 받으면 대부분 응락했다. 이들은 그런 자리에 갔다온 경력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그것으로 연예계의 정상에 다가가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박선호는 급할 때면 종종 김 마담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다고 변호사 접견시 털어놓았다.
그런가 하면 반 강제 차출도 있었다. 박대통령이 영화나 TV 연예프로를 보다가 맘에 든 배우나 가수의 이름을 대며 『한번 보고 싶다』고 하면 큰 물의가 일어나지 않는 한 대개 불려왔다. 다만 유부녀로서 본인이 거절하면 강요하지는 않았다.
갑작스러운 궁정동 연회 차출지시로 영화나 TV 프로 촬영 스케줄이 펑크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납득할 만한 설명 없이 연예계에서 힘쓰는 「협회」에서 무조건 출두하라는 연락이 가는 것이다. 이런 일로 한두 차례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는 연예계의 제작진 사이에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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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놀랄 일류 연예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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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정에서 하는 것으로 마지막인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박선호 피고인은 김재규 부장의 명령에 따랐던 배경과 함께 박정희의 술자리 여인들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사형선고를 받을 것이 확실한 피고인의 최후진술마저도 남기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제지하고 나섰다. 대통령의 채홍사였기에 할 말을 다 할 수가 없는 운명이었다.
다음은 1980년 1월24일 고등군법회의 결심인 3회 공판에서 박선호가 남긴 최후진술이다.
법무사: 감사합니다. 들어가십시오. 박선호 피고인 앞으로.
박선호: 제가 지금 여기에서 최후진술을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정보부에서 근무하면서 존경하는
김부장님을 모셨다는 것을 첫째 영광으로 생각하고, 제가 아직까지 원망이나 비관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지금 저희가 거기서 근무하면서 부장님께서 구국을 위해 민주를 위해 수시로 청와대에 들락날락하시면서 간혹 저희에게 주시는 그 정보를 들어보면, 숨통이 막히는 절박한 상황을 저에게 수시로 전달해 주시고, 저로 하여금 일깨워 주시고, 국가의 앞날을 버러지의 눈이 아니고 새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똑바른 눈이 되도록 길러주신 데 대해서 제가 항상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당일에 있었던 상황은 1심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긴박한 상황에서 아마 어느 누구도 100명 중 90명은 반드시 그 행동을 그대로 취하리라 믿습니다. 지금 또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도 저는 그 길밖에 취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지금 제가 그 진행과정에서도, 어제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궁정동 일대 모든 건물을 관리하고 있으며, 제 밑에 많은 부하들이 있습니다. 완전히 사살을 목적으로 했다면 여러가지 방법이 있고, 저는 구두로 지시만 했으면 됐습니다. 그러나 부장님의 뜻이 그것이 아니고 이것이 과연 누구를 사살하고 누구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제가 생각하기에도 흔히 각하 정도는 납치하면 될 일이 되지 않을까 항상 속으로 염려했습니다만 웃분이 하는 일을 제가 알 바도 아니고 하달하신 명령만 충실하기 위해서 했고, 전우를 살리려고 들어갔다가 오히려 희생시킨 데 대해서 이 자리를 빌려서 다시 한번 애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박선호가 말하는 전우란 청와대 경호처장이던 정인형이다. 사건 당일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에게 권총을 쏘는 소리가 들리자 정인형과 경호처 부처장 안재송은 박선호와 눈길을 마주치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재송은 속사권총 국가대표선수 출신으로 경계되는 인물이었다. 두 경호간부는 권총을 빼려고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순간 박선호가 재빨리 권총을 뽑아들고 『꼼짝 말라』고 외쳤다. 이어 그는 『움직이면 쏜다』고 위협했다. 두 사람에게 총을 겨눈 채 박선호는 『같이 살자』고 설득했다. 정인형은 너무 당황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기색이었다. 몇 초가 지나는 사이 정인형과 안재송은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더니 이럴 수가 있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역시 안재송이 속사권총의 행동을 취하려 했다. 순간 박선호의 총이 안재송과 정인형을 향해 차례로 불을 뿜었다. 박선호는 재판정에서 제손으로 동기생을 쏘아 죽인 데 대해 여러번 자책했다. 박선호는 계속되는 최후진술에서 중앙정보부 부하인 경비원들에 대해서도 선처해 줄 것을 부탁했다.
박선호: 이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제가 그 장소를 피했어도 될 것을 살려보겠다는 마음으로 그랬다는 것을 말씀드리
고, 여기에 지금 제 부하였던 이기주 유성옥 유석술 김태원, 이들은 아무 뜻도 모르고 나왔고, 제가 지시한 대
로 한쪽으로 몰아라, 왜냐하면 제가 총소리가 났을 때 일단 저희가 먼저 행동하지 않으면 부장님이 희생당하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염려해서 한 군데로 몰라고 지시했고, 이 사람들은 내용도 모르고 따라 했다가 이 법정에 서게 됐다는 데 대해서 가슴 아픕니다. 아무튼 이 부하들에 대해서만은 관대하게 처리해주실 것을 말씀드립니다.
어제 여기에서 검찰관께서 그 집은 사람 죽이는 집이냐 하는 질문 같지 않은 질문도 받았습니다만, 그 집은 사람 죽이는 집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건물은 대여섯 개가 있는데, 이것은 각하만이 전용으로 사용하시는 건물로서….
그가 대통령의 술자리 행사에 대해 진술하기 시작하자 법정에 파란이 일었다. 방청석은 숨마저 죽인 채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으나 재판부에는 비상이 걸렸다. 그러잖아도 시중에는 별별 얘기들이 다 나돌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통령 박정희의 술자리여인 명단을 적은 괴문서가 풍선에 실려 북악산 근처에 뿌려졌다는 소문도 퍼졌다. 괴문서는 북한측에서 만든 것이라는 미확인 풍문까지 나돌았다. 신문 도중이라면 검찰측이 이의 제기를 하거나 피고의 답변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최후진술이란 재판부가 피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검찰이 나서서 제지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자 재판부의 실무책임자 역할을 하는 법무사가 나섰다.
법무사: 피고인, 범죄에 관계되는 사항만….
순간 박선호는 멈칫했다. 최후진술조차도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다. 그는 그러나 할 말을 이었다. 박정희의 술자리 여인에 대해 최소한의 증언을 남겼다.
박선호: 예, 그래서 이것을 제가 발표하면 서울시민이 깜짝 놀랄 것이고, 여기에는 여러 수십 명의 일류 연예인들이
다 관련되어 있습니다. 명단을 밝히면 시끄럽고 그와 같은 진행과정을 알게 되면, 이것은 세상이 깜짝 놀랄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평균 한 달에 각하가 열 번씩 나오는데, 이것을….
법무사: 범죄사실에 관해서만….
박선호: 예 ?
법무사: 피고인의 범죄사실에 관해서만 진술하시오.
박선호: 예. 그래서 제가 1년 연중 하루도 쉬지않고 열심히 근무했고 상관의 명령은 충실히 이행했다는 것을 이 자리
에서 말씀드립니다.
박정희의 채홍사는 의외로 간단히 할 말을 줄여버렸다. 마치 무슨 최면술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재판부가 한 마디만 하면 맘먹었던 증언을 얼버무리곤 했다. 이는 박선호 뿐아니라 김재규 피고인의 경우 더 눈에 띄었다. 변호사들은 그것이 「고문」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박선호는 80년 5월24일 오전 서울 서대문의 서울구치소에서 자신이 상관으로 존경했던 김재규 등 4명과 함께 교수형으로 눈을 감았다. 5·18 광주시민항쟁이 터져 27일 새벽 살상진압되기 전 극도의 정국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신군부는 또다른 불씨가 될 수도 있는 이들을 서둘러 처형해버렸다. 유신체제의 반민주성에 대한 부산·마산 시민항쟁과 미국측의 압력과 함께 박정희의 사생활 문란도 10·26사건의 원인(遠因)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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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홍 前의원 "박정희 前대통령의 문란한 사생활, 10.26 원인"
박정희 신화, 유신 때 교육받은 사람들이 지금 50~60대이기 때문
여인이 동반된 대통령의 술자리, 한달이면 10번씩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산업화의 아버지? 산업화도 절차가 중요
2012-01-17 06:29 시사자키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00~20:00)■ 방송일 : 2012년 1월 16일 (월) 오후 7시 30분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출 연 : 경기대 김재홍 교수
▶정관용> 시사자키 3부 시작하겠습니다. 작년 2011년이 5.16 군사쿠데타 50주년 된 해였었고요. 올해는 유신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또 대선이 있는 해이고, 또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확고부동한 대선 주자로 앞장서 있는 그런 상태인데, 그래서 그런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최근에 <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라는 책을 내신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김재홍 교수, 지난 17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하셨던 분이지요. 박정희 대통령 연구 전문가이시기도 합니다. 잠깐 광고 듣고 함께 만나보겠습니다.
▶정관용>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김재홍 교수, 오늘 스튜디오에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김재홍> 예,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관용> 오래간만입니다. 언론사 기자 하시다가 박사학위 하시고, 또 한국 현대정치사 쪽 주로 그쪽을 하셨고.
그렇지요?
▷김재홍> 그렇습니다. 한국 정치론입니다.
▶정관용>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책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요.
▷김재홍> 처음 아니지요. 예.
▶정관용> 몇 번째 내신 겁니까?
▷김재홍> <박정희의 유산>이라는 책이 98년도에 나왔고요. 또 그 전에도 3, 4, 5공 권력 비화에 대해서 4권의 책을
펴낸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 그걸 총정리해서 조금 더 다듬어서 낸 책입니다.
▶정관용> 기자시절부터 이쪽에 관한 자료들을 모으시고.
▷김재홍> 예, 그렇습니다.
▶정관용> 그걸 또 학문적으로 정리하고.
▷김재홍> 예, 그렇습니다.
▶정관용> 국내 그럼 박정희 연구의 전문가, 최고 전문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데요.
제목이 <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왜 이렇게 붙이셨어요?
▷김재홍> 그러니까 박정희 권력, 박정희 시대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연구할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아까 말씀하신 대로 2011년 작년은 5.16쿠데타...
▶정관용> 50주년.
▷김재홍> 50년이 되는 해이고, 올해는 또 유신 쿠데타 40년이 되는 거기 때문에...
▶정관용> 그렇지요.
▷김재홍>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해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흔히 10년, 20년, 50년 단위로 끊어서 역사적인 의미,
평가를 하는 게 관행인데, 작년에는 별로 객관적인 5.16군사반란이라고도 하는데요, 역사가들은....
학술회의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정관용> 생각해보니까 그러네요.
▷김재홍> 예, 제대로 안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민주평화복지포럼이라고 주로 야권 인사들이, 원로들이 결성한 단체인데, 거기에서 본격적인 학술대회를 한 3차례 했습니다. 여러 정치학, 또 사회학, 경제학 교수들이 참여했고요. 올해 유신 권력, 유신 쿠데타 40년을 즈음해서는 그 영향 때문도 있겠지만, 역사학자들이 큰 학술세미나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정치학자, 정치학회보다는...
▶정관용> 역사학계에서?
▷김재홍> 역사학자들이 더 나서는 것 같습니다.
▶정관용> 그나마 그건 다행이네요. 뭐 역사학자가 되었건, 사회과학자가 되었건 좀 객관적 평가,
이제는 할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김재홍> 예.
▶정관용> 그런데 제목은, 제목을 왜 이렇게 붙이셨어요? <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김재홍> 아, 제목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선 박정희 전 대통령을 용서하는 주체는 그 정권 하에서 피해 받은 당사자 국민들 아니겠습니까?
▶정관용> 그렇겠지요.
▷김재홍>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인데, 그 국민들, 피해자들 중에서 누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박정희를 진정으로 용서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작년 연말쯤에 그 추운 영하 10도 안팎의 날씨에 일본 대사관 앞에 정신대 할머니들이 모였어요. 그 울부짖는 광경이 지금도 선합니다만, 그중에 한분, 한분, 두 분이 외치는 목소리가 그거였습니다. 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박정희가 그분들을 끌고나간 것은 아니지만 일본과 협정을 맺을 때에 그분들에 대한 보상 문제를...
▶정관용> 못했지요.
▷김재홍> 해결하지 않고, 사실은 막은 책임이 있어요.
▶정관용> 그러니까 제목을 이렇게 붙인 것은 아무도 용서 안 했다?
▷김재홍> 예, 말하자면 피해자들 중에서는 아무도 용서하지 않았다는 그런 상징적인 의미가 있고요.
▶정관용> 그런데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역대 대통령에 대한 국민 평가, 여론조사 같은 걸 해보면 항상
인기도 1등이 박정희 전 대통령 나와요.
▷김재홍> 예, 항상 1위지요.
▶정관용> 그거 어떻게 보세요?
▷김재홍> 그게 항상 논란의 초점입니다. 저는 그것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정치문화가 바뀌려면, 역사연구의 대상이 객관화되려면 보통 30년을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정치문화는 조금 더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정치권력의 교육, 정치교육, 주입교육의 흔적이 사라지려면 30년 가지고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우리나라 박정희 신화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정관용> 더 지나봐야 된다?
▷김재홍> 그렇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박정희 체제 아래에서 주입식 정치교육을 받았던 세대가 지금 50대, 60대,
70대입니다.
▶정관용> 그렇지요.
▷김재홍> 우리사회 중축입니다. 그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면서 어떻게 배웠지요? 대표적으로 국민교육헌장을 낭송...
▶정관용> 외웠지요. 암송했지요.
▷김재홍> 예, 외우면서 다녔지요. 끝에 꼭 국민교육헌장, 뭐뭐뭐 하고 끝에 꼭 뭐가 있습니까? 몇 년 몇 월 며칠 대통령 박정희, 까지 외운 것입니다. 대통령 박정희가 교육자는 아니잖아요. 교육 철학자 아니잖아요. 그런데 국민교육헌장을 대통령 이름으로 선포하고 그걸 외우게 한 것입니다. 그런 국민들이 지금 50대, 60대로 남아있는 한 박정희 신화는...
▶정관용> 여론조사하면 그렇게 나온다?
▷김재홍> 그럼요. 정치문화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정관용> 자, 그래서 2011년, 2012년 이 시기 박정희에 대한 책을 내셨는데, 이번 책에서는 박정희 연구도 여러 측면
을 다룰 수가 있잖아요. 주로 어떤 점을 주목하셨는지. 특히 사생활을 좀 많이 다뤘다, 이런 평이 있던데요.
▷김재홍> 우선 박정희 권력의 문제점을 짚었는데요. 왜 박정희 권력이 문제가 있었고, 국민들을 탄압했고, 결과적으로 비극으로 종말을 맺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사생활 처음에 다룬 것은, 말하자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비운에 간 10.26사건, 그 원인을 저는 세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바닥으로부터, 밑으로부터 올라온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압력이었지요.
▶정관용> 그렇지요.
▷김재홍> 또 얼마나 많은 민주화운동인사들, 학생운동 간부들, 종교인들이 몸을 던져 투쟁했습니까. 그 압력입니다. 그걸 보고 김재규 중정부장이 아, 이거 큰일 났구나, 하고 느낀 것입니다. 두 번째는 미국과의 갈등이지요. 그거는 뭐 자주노선도 아닙니다. 나중에는 기본적인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라는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요. 세 번째가 아까 말씀하신 사생활 문란 문제인데요. 사생활 문란과 방탕이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했다, 하는 것이 당시 김재규, 10.26거사의 주역인데, 김재규 부장의 판단이었어요. 그런데 사실 그 사생활 문제는 우리나라 정서상 이렇게 공개적으로 하기가 참 어려운 부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기자로서 제한적으로나마 써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10.26 사건의 매우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관용> 그래요?
▷김재홍> 왜 그러냐 하면, 김재규 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얼마나 가까운 사이입니까.
▶정관용> 심복 중의 심복이지요.
▷김재홍> 그럼요. 동향이고 선후배 관계이고, 또 이렇게 계속 중용해왔고 한 것인데, 마지막에 권총을 쐈는데, 그냥 쏴서 죽인 게 아니고요, 확인사살을 하거든요. 조준사살. 그것은 인간적인 경멸감, 환멸감 아니면 저는 불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정관용> 아, 그런 것까지 겹쳤다?
▷김재홍> 겨눠서 쏘아서 죽인 것인데, 그것은 바로 그 사생활 문란에 대한 환멸이 작용했다고 저는 분석하고요.
▶정관용> 그런 부분에 대한 증언 같은 게 요즘은 좀 나옵니까?
▷김재홍> 법정 증언이, 녹음 테이프로 있습니다.
▶정관용> 그런데 그 법정은 비공개 재판이었잖아요.
▷김재홍> 비공개 재판이었는데, 그 당시 계엄사 법무관실에서 전부 다, 풀 텍스트를 녹음을 해놓았지요.
그것을 복사해서 가지고 있던 분이 계셨어요.
▶정관용> 누가요?
▷김재홍> 법무관실 문관하던 분인데, 신분은 밝힐 수가 없고요. 지금 오래된 이야기고요. 제가 그런 기사와 글을 많이 쓰니까 저한테 연락을 해와서...
▶정관용> 그래요?
▷김재홍> 이미 90년대 초의 일입니다만, 그 녹음 테이프 전체를 제가 입수했고요.
▶정관용> 본인이 그렇게 복사해서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 안 되는 거지요? 그 분이?
▷김재홍> 사실은 직무상 취득한 어떤 지식, 정보에 대해서 유출하는 것은 불법일 수 있지요. 그런데 또 그것이 역사적 진실을 알기 위한 국민의 알 권리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또 판단은 다를 수 있겠습니다.
▶정관용> 그래서 아무튼 그것을 김 교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다, 지금?
▷김재홍> 그렇지요. 그것을 자기가 영리적으로 써먹은 게 아니고 언론에 제공해서 역사적 진실을 알리겠다, 하는 것이었다면 저는 판단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 전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관용> 그 전체를 공개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김재홍> 그거를 상당 부분 지금 써 왔고요.
▶정관용> 이 책에도 담으셨고?
▷김재홍> 예, 이 책에도 많이 썼고요. 처음에 1990년대 초만 해도 상당히 제한적이었어요. 왜냐하면 반발하는 쪽이 있었기 때문에... 갈수록 그런, 역사적 자료로서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공개의 폭은 넓힐 수 있다고 생각이 되네요.
▶정관용> 그 공판 과정에 법정 증언 내용들을 보면 적나라한 사생활, 이런 것들이 다 드러납니까?
▷김재홍> 거기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증언들이 나오는 것인데요.
▶정관용> 예컨대 어떤 것이 새로운 것입니까? 밝혀지지 않았던 것 가운데?
▷김재홍> 아,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아는 사람들은 많이 알지만, 일반 국민들에게 널리 전파되지 않은 게 저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정관용> 어떤 거요, 예를 들어서?
▷김재홍> 예를 들어서 술과 여자의 문제인데요. 10.26 당일날 사건 현장에 여인 둘이 동석했다는 것은 다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요, 그런 술자리, 여인이 동석한 장면이 한달이면 사흘에 한번 꼴로, 10번씩 했다는 게 그 당시에 비밀 대통령 요정을 관리한,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관리를 한 것입니다.
▶정관용> 그것도 사실 이미 알려져 있었지요.
▷김재홍> 이미 알려져 있지요.
▶정관용> 대연회, 소연회 이런 방식으로 쭉 있었다는 것들.
▷김재홍> 그렇지요. 대행사, 소행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 여인 둘은 밖에서 조달을 해왔고, 그 역할을 하는 중정 의전과장이...
▶정관용> 있었고.
▷김재홍> 대통령 채홍사라고 불렸고. 그런 사실들이 사실 아는 층이 그렇게 많지 않고요. 또 구석구석에 들여다보면 매우 의미 있는 것들이, 아직도 천착될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관용> 자, 그런 것들을 포함해서 국민적 저항, 미국과의 갈등, 사생활 문란 같은 것들이 겹쳐서 비극적인
죽음으로까지 간 그 과정을 또 특히 이번에 많이 담으신 그런 책인데.
▷김재홍> 예.
▶정관용> 오랫동안 박정희 전 대통령을 연구하고 이렇게 해왔던 입장에서, 한 마디로 인간으로서 박정희 전 대통령,
우리 김재홍 교수는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규정하십니까?
▷김재홍> 인간으로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뭐 객관화시켜서 말씀을 드리자면, 굉장히 출세주의자였고 권력주의자였고, 기회주의자였다고 생각이 듭니다. 변신의 달인이었지요. 일제 때에 사범학교면 우수한 사람들이 갔어요. 또 일제 때 교사면 상당한 대우를 받는 직업이었습니다. 군인 다음으로는. 군국주의기 때문에 군 장교들이 더 행세를 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 그걸 버리고 일본 육사, 만주군관학교를 거쳐서 갔고, 해방이 되니까 바로 또 광복군에 합류하지요. 광복군을 통해서 국군 경비대 장교가 됐는데, 그때 남로당 군사 프락치가 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해방 정국에서는 좌익 정당들이 상당히 주도권을 행사했던 시기였어요. 영향력이 컸습니다.
▶정관용> 그러니까 또 그쪽에 줄을 댔다?
▷김재홍> 그랬습니다. 또 자기 집안에, 자기 형이 또 남로당 조직책이었고요, 그러다가 나중에 이제 숙청 대상이 되어서 체포되어서 군사 프락치들을 다 진술을 하고 자신은 나중에 또 다시 군에 복귀하지요. 그리고 이제 군 장교가 다시 되어서 좌익 척결주의자로...
▶정관용> 바꾸고.
▷김재홍> 강경한 대결주의자로 나서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상황에 따라서 계속 변신하면서 자신의...
▶정관용> 출세를 위해?
▷김재홍> 자신이 선택한 어떤 인생관이나 철학이나 이념도 일관성을 가지지 않고 상황에 따라서 자꾸 바꾸면서 권력을 추구하는 출세주의로 나가는 그런 인간형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관용> 인간형은 그렇게 규정하셨고, 대통령으로서 18년을 집권했는데, 공과를 이야기한다면요?
▷김재홍> 먼저 말씀드리면 역시 산업화의 아버지다, 근대화의 아버지다, 라고들 지지자들이 많이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산업화, 근대화를 이루는 방법과 과정, 절차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절차와 과정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관용> 물론이지요.
▷김재홍> 얼마나 많은 미성년 노동자들, 여성 노동자들, 취약 계층들이 피땀 흘려서... 출퇴근 시간도 없었지 않습니까? 초과근무시간... 그렇게 쌓아올린 경제건설이었는데, 그것을 박정희 대통령의 공로로만 치는 것은 이건 너무 억울하다, 이건 맞지 않다, 하는 것이고요. 그 산업화, 공업화, 근대화가 그 자체를 위해서, 산업화를 위해서, 또 국민의, 국민 행복을 위해서만 했다고 그러면, 그것은 평가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자기 권력 강화와 자기 독재 강화로 이용했기 때문에 그 산업화와 근대화를 추진한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1960년대에 경제성장을 이루어놓고 그 다음에는 조금 민주화를 해주고 그 다음에 또 개발독재를 해가고 했어야 맞지 않습니까? 그게 정치학 일반 이론입니다. 말하자면 박정희 자신이 선경제 건설, 후민주주의를 외쳤던 것입니다.
▶정관용> 그렇지요.
▷김재홍> 60년대 초에 그랬어요. 5.16후에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60년대 개발독재 해서 어느 정도 경제개발 만들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는 커녕 어떻게 했습니까.
▶정관용> 유신.
▷김재홍> 거꾸로 더 반민주적인 유신 독재, 유신 쿠데타로 간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봐도 참 드문 일인데요, 경제적인 기반을 만들어놓고 더 후퇴하는, 반민주적인 체제로 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산업화나 경제성장을 만든 것은, 이것이 다 자기 자신의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서, 자기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서 이용한 것이지, 산업화 자체를 위해서, 뭐 국가 발전 자체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했다고 보기 어렵지요.
▶정관용> 산업화도 박정희 대통령의 공이라고 말하기는 무리다?
▷김재홍> 저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정관용> 그 대신에 과를, 제가 공과를 여쭤봤는데, 과로 치자면 뭐 셀 수 없겠군요, 김 교수 보시기에는.
▷김재홍> 예, 과로 치자면, 제가 보기에는 참 부끄러운 야만시대였지요.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세계 시사영어 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더러운 전쟁이라는 용어가 있어요. 1977년부터 시작된 남미 아르헨티나 군사정권, 비델라 정권의 고문, 테러, 악행입니다. 의문사. 그런 것을 지칭해서 더러운 전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더러운 전쟁이 우리나라에서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1960년대 중반부터 이미...
▶정관용> 진행이 되었다?
▷김재홍> 자행되기 시작한 것이고요. 부끄러운 세계 제1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그 더러운 전쟁의 주도자, 말하자면 남미 군사정권의 선배이지요. 더러운 전쟁의 원조 아니겠습니까. 그 피해자들이 용서를 해야 제대로 용서가 되는 것인데요. 얼마 전에 돌아가신 김근태 선배님을 생각하면... 이 책의 내용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참 우연찮게 맞아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고 더 슬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만, 그런 분들이 지금도 곳곳에 많이 계시는데요, 공적으로는 용서하고 화해하고 통합으로 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요. 정치인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정관용> 그러나 속마음으로는?
▷김재홍> 예, 김대중 대통령도 그랬습니다. 그렇게 탄압받았고,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전두환, 5공 세력에게까지도, 5공 세력과의 화해를 추구하지 않았습니까? 정치인이기 때문에 저는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진정한 용서였겠습니까? 그런 점을 봤을 때에...
▶정관용> 마음속으로는 용서할 수 없다?
▷김재홍> 저는 인간으로서, 모르겠습니다. 종교인으로서 승화시킬 수도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노벨 평화상을 또 받을 수도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통상 보통 상식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에 용서하려면 아직 멀었고,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정관용> 아까 경제성장을 이끌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그래도 산업화에 대해서는 공이 있다, 이런 정도로 그냥 쓱 지나가는데 김재홍 교수께서는 그것도 꼼꼼히 뜯어봐야 한다, 이제 분석을 해주셨잖아요.
▷김재홍> 그렇습니다.
▶정관용> 그런데 그 가운데 특히 뭐 미성년 노동, 여성 노동, 야간 노동, 이런 등등의 표현을 쓰셨는데, 그럼 그런 걸
다 지키면서 언제 그렇게 빠른 산업화를 할 수 있었겠느냐, 이런 식으로 이제 되돌이키는, 반박하는 분들은
어떻게 말씀하시겠어요?
▷김재홍> 그게 바로 개발독재론자들의 주장이지요. 그러면 일정한 기간 단계적으로 그렇게 해서 성장을 시켜놓고, 압축성장을 이른바 시켜놓고, 그 다음에는 풀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말하자면 성장과 분배가 있으면 성장을 이렇게 해놓았으면 나중에 분배를 좀 해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민주화도 하고. 그런데 그런 일이 박정희 정권 때는 없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관용> 그러니까 70년대에도 여전히 더 성장했어야 한다, 라는 이 시각을 가졌던 거지요.
▷김재홍> 예, 계속 그렇게 개발독재로만 갔지 그거를 분배 또 복지, 또는 이렇게 민주화 쪽으로 가는 건 없었다고 생각하고요. 또 하나 경제성장을 이야기할 때에 흔히 놓치는 부분이 국민들의 실생활 부분인데요. 경제에서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저는 물가 앙등지수하고 인플레율하고 실업률일 것입니다. 또 무역수지 적자입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 기간에 인플레율, 물가지수와 실업률을 보면 이것은 완전히 경제성장이 허구입니다. 수치를 대보면, 유신체제 아래에서 인플레율이 7년 동안 연평균이 15.6%가 인플레율입니다. 물가지수도 말하자면 인플레율과 비례하는 것입니다.
▶정관용> 그렇겠지요.
▷김재홍> 전두환 정권 때 10%였습니다. 노태우 정권 때 인플레율 7.4%입니다. 김영삼 정부 때 4.8%입니다. 김대중 정부 때 3.6%이고요, 노무현 정부 때 3.3%입니다. 말하자면 독재가 완화될수록...
▶정관용> 물가는 안정된다?
▷김재홍> 인플레율과 물가는 낮아진다는 이상한 패러독스, 역설적인 사실이 나타나는 것이고요. 실업률을 보더라도 국민 생활과 직접 관련된 것, 특히 서민들과 관련된 부분은 실업률 아니겠습니까?
▶정관용> 그렇지요.
▷김재홍> 아니, 총체적인 경제성장 지수가 높으면 뭐하겠습니까. 일반 국민들 사이에 실업률이 높으면 그것은 어려운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연평균 실업률을 보면은요, 이거는 아까 말씀드린 것도 마찬가지인데, 월드 데이터 뱅크, 세계 자료은행, 매우 권위 있는 경제기구이지요. 거기에서 발표한 이 실업률은 전두환 정부 이후부터예요. 전두환 정권 때 연평균 실업률이 한국이 4.11%에요. 그런데 노무현 정부 때 3.6%입니다. 그러니까...
▶정관용> 민주화를 해야 민생도 좋다?
▷김재홍> 예, 민주화를 해야 실질적인 경제성장입니다.
▶정관용> 알겠습니다. 경제성장의 내용을 좀 뜯어보자, 말씀하셨고.
▷김재홍> 그렇습니다. 질적인 경제발전이 중요한 것이지요.
▶정관용> 많은 분들의 지적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마지막 질문인데요, 이제는 좀 그래도 좀 화해하고 통합으로 가자
는 목소리들도 있는데, 대통령 선거도 있는 해에, 특히 박근혜 위원장이 지금 앞장 서 있는 이런 상황에
이런 책을 낸 것은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 이런 질문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은데.
▷김재홍> 예, 많이 받았습니다.
▶정관용> 짧게 한 말씀만.
▷김재홍>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시점이기 때문에 한 것인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박근혜 후보에게 영향을 줄 것입니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 박정희와 관련이 없이도 부일장학금, 부일재단 문제에 있어서 저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학재단의 이사장으로서, 봉사 자리인데, 연간 1억 3,500만원, 그 이후에 2억 5천만원의 연봉을 받은 것은 문제가 있어요.
▶정관용> 예, 그건 또 별도로 따져야 될 것이고. 그러니까 어쨌든 유신 40주년 때문에 펴냈습니다만, 공교롭게 지금
상황이 그렇다?
▷김재홍> 그렇습니다.
▶정관용>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그 답변으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김재홍> 예, 뭐 앞뒤가 이제 좀 바뀐 것이지요.
▶정관용> 알겠습니다. <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라는 책 펴내신 경기대학 김재홍 교수,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김재홍> 감사합니다.
▶정관용> 오늘 여기까지이고요. 저는 내일 저녁 6시에 다시 옵니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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