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스크랩] 연해주에서의 한국선교사의 역사中

YOROKOBI 2014. 3. 17. 07:28
연해주 선교역사는 우리나라의 선교사들이 구소련 붕괴이후 CIS 다른 지역처럼 1991년부터 연해주 나호드카시와 아르쫌시에 들어와 선교한 햇수로 따지면 10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그 보다 공산당 혁명 이전인 1860년대부터 구 한말에 어지러운 나라사정과 기근을 피해 이 땅에 들어와 땅을 일구면서, 또는 대한민국 독립의 꿈을 불태우면서 살았던 우리민족을 대상으로 선교하던 선배들의 역사를 기록으로나마 더듬어 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연해주 선교를 개방이전과 이후의 역사로 나누어본다.



1. 개방 이전의 연해주에서의 한국선교사의 역사



연해주에로의 한국선교사들이 들어오게 된 역사는 연해주 지역에 한국사람들이 들어와 살게된 때와 맥을 같이 한다. 왜냐하면 당시에 선교의 시작은 연해주에 살고 있는 한국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였기 때문이다. 기록을 보면 1862년도에 13가정이 가뭄과 흉년으로 살기 어려워 고향을 떠나 연해주로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하여서 1868년에는 우수리스크지역에 한국인 거주자가 18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1884년 한러수호조약 체결 이후에는 더욱 증가되었고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농토를 일본인에게 빼앗긴 농민들의 이주가 급속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8년에 45,397명, 1920년대에는 시베리아 거주 전체 한인수가 30만을 헤아리게 되었다(기독교 백과사전 1983년판). 한국에서 온 기독교 선교사는 주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침례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로 자연히 장로교회, 감리교회, 동아기독교회(침례교)를 이 땅에 세우게 되었고 그렇게 각 교파별로 당국의 교회 등록 허가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럼 각 한국 선교사들의 교파별로 선교역사를 간략히 살펴본다.



가. 장로교회 선교 역사

1909년에 최관홀 목사가 선교사로 와서 당국으로부터 한국민을 위한 예배를 허가해 달라는 청원을 1909년 11월 6일 연해주 군지휘관으로 보냄으로 결국 1910년 2월 9일부로 모스크바의 당시 마지막 총리인 스딸핀의 허락편지를 받음으로 선교가 시작되었다.

1914년 1월 4일 러시아 극동지역 정교회 성직자회의 교리국 총무과에서 국회에 보낸 공문서에 의하면, 1911년 지역별 장로교인의 수가 블라디보스톡에 300명, 니골스크 우수리스크에 100명, 하얼빈에 200명, 여러 시골에 200명, 총 800명으로 보고 되었다. 그런데 최관홀 선교사가 교회를 돌보기 위한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감리교회에 속하여 활동하기를 원하기도 하였으나 총회선교부의 반대로 뜻대로 되지 않았고 1913년에는 정교회로 개종하여 거기서 봉급을 받으면서 몇 년간 정교회 신부로 활동하기도 했다(기독교 대백과사전 1983년판).

1918년 김현찬 목사 파송, 1921년에 32개 교회, 교인수 1,763명으로 보고되었고, 1922년 시베리아 노회 조직되었으나, 1924년 우수리 지방의 권승경 전도사가 공산당에 체포, 사형선고를 받기도 하는 등 박해가 계속되어 1925년 노회 폐지를 결의하였고, 1926년 최일형, 권승경, 한가자 등을 전도인으로 파송하였으나 투옥, 추방되었고, 1929년 조사 박분영과 전도부인 한가자가 8개 교회 900여 신자를 돌본다는 보고가 마지막이었다(한국기독교교회 역사 2 1990년)



나. 감리교회의 선교 역사

본격적으로 감리교 선교사가 블라디보스톡에 와서 선교를 하게 된 시기는 1919년 민족독립운동 이후 블라디보스톡으로 피난온 많은 감리교 교인들이 독자적으로 모이는 것을 계기로 시작이 되었다. 1920년 5월 남감리회 조선 연회는 시베리아 선교를 정식으로 결의하고 3명의 순회 선교사를 파송하여 1920년 10월 개성을 출발 길림, 하얼빈, 블라디보스톡, 니꼴스크(우수리스크) 등 순회 전도하며 1년만에 30교회 설립함. 1921년 7월 30일에는 니꼴스크에서 시베리아 선교회를 조직하였다. 니꼴스크 교회에서 제1회 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선교사로서는 김영학(블라디보스톡) 정재덕, 김덕수(니꼴스크)다. 1923년에 보고에 의하면 블라디보스톡 지방에 36교회 1,418명의 교인, 니꼴스크지방에 21개 교회에 754명의 교인으로 보고가 되었으나, 그 후 공산당의 핍박으로 인해서 목사가 감금당하기도 하고, 스스로 건축한 블라디보스톡 교회가 공산당에 압수당하기도 하였다(1924년 보고). 그리하여 25년도의 통계는 블라디보스톡 24교회 639명의 교인, 니꼴스크지역에 18교회 378명으로 감소한 것을 볼수 있다. 전체 시베리아지역으로 볼 때 22년 당시에는 129개 교회 6,873명인 것이 29년에는 81개 교회 3,497명으로 감소하였다. 당시 박해로 인해서 선교사들이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옮겼으나 끝까지 남았던 김영학 목사는 1930년에 공산당에 체포되어 시베리아에 유배되어 중노동에 처해졌고 1933년 11월에 병사하였다. 선교회는 1930년에 시베리아 선교사업 중단을 결의하였다.



다. 동아기독교(침례교회) 선교 역사

동아기독교회의 시베리아 선교에 가장 중심된 인물은 최성업 목사인데 그는 시베리아 이주민의 아들로 1908년 복음을 접하여 바로 전도자가 되었다. 1906년 조직된 동아기독교(한국 침례회 전신)는 1909년 연추(끄라스끼노) 지역의 달미 교회를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수청(빠르찌잔스크)의 청재동교회를 비롯하여 30여개 교회를 설립하였다.

1918년 10월 20일 박노기 목사와 김영태, 최응선, 김희서 등 4인의 선교사가 풍랑을 만나 순교하여 시베리아 선교의 최초 순교자들이 되었으나 이들의 죽음은 오히려 전도사업에 열기를 더 하였고 이들의 장례에 참석했던 불신자들도 감동하여 믿기어 큰 부흥하였다.

1920년 4개 구역에서 100여개 교회가 설립됨. 연추 구역 16개 교회 1500명, 블라디보스톡 구역에는 5개 교회 520명, 수청 구역 18개 교회 1600명, 도빙어 구역 4개의 교회 4개의 개척교회가 있었지만 1928년 공산당의 기독교 탄압이 가중되면서 교세의 약화를 초래되었다.





2. 개방이후 현재까지의 연해주 선교 10년의 역사



소연방이 붕괴되고 개방이 된 후에 연해주에 한국선교사가 다시 들어오게 되었는데 1991년까지만해도 블라디보스톡이 개방되지 않아 선교사들이 인근 도시인 나호드까(박광배, 김영곤), 아르쫌(정득수)으로 자리를 잡았고 1992년 초부터 정식으로 블라디보스톡(송상천)에 한국선교사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연해주에서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거의가 한인선교사협의회에 속하여 활동을 하고 있는데 200만의 연해주 인구를 헤아릴 때에 80만으로 보고있는 블라디보스톡에 전랍의 선교사들이 거주하고 있고 우수리스크, 아르쫌, 나호드까, 빠르찌잔스크 가장 북쪽지역으로는 스빠스크(권영세)에서 수고를 하고 있다. 연해주는 비즈니스 등으로 와있는 한국교민을 비롯해서 러시아에서 사는 우리민족(고려인), 중국 연길 흑룡강 등지에서 장사하러 온 분들(조선족), 수만의 북한 건설노동자들이 함께 살고 있는 선교지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의 필요성도 있는데 북한인을 대상으로는 선교초기에 탈출 벌목공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일하시다가 러시아 정부로부터 어려움을 당하신 분도 있는데 남북한 정상의 만남을 계기로 자유로운 선교가 이전보다는 좀 더 가까이 왔음을 느낄 수가 있다.

최근에는 중국과 북한으로의 철도의 요충지인 우수리스크에 자리를 잡고 주로 중앙아시아로부터 피난온 고려인들의 정착촌을 돌보면서 복음과 의술로서 섬기는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서울은혜교회(홍정길)에서 의사와 함께 파송되어서 그들의 자립을 키우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연해주 선교의 처음 시작이 그랬듯이 개방 10년의 역사속에서 순수한 러시아인 뿐만 아니라 이제는 우리민족(북한인, 고려인, 조선족)에 대해서도 복음으로 섬겨야 하는 연해주의 선교상황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연해주 10년의 선교 역사속에서 점차 예배당을 건축하거나 장소를 구입한 교회가 늘어나고 있다. 현재 예배당을 건축한 몇 교회를 열거하면 나호드까에서는 두 장로교회가 각각 93년도에, 97년도에 건축이 되었는데 93년도에 건축한 교회(김영곤)는 연해주 선교 역사상 가장 먼저 지은 건물로 역사에 남을 것이고, 97년도 시 중심가에 건축된 장로교회(박광배)는 시경관을 좋게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98년 주정부로부터 건축상을 받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톡은 94년 12월 조립식으로 세운 우골라야 감리교회(조학철)가 첫 번째로 세워진 건물이고 다음에 블라디보스톡 중심가 쪽에 있는 블라디보스톡 감리교회가 단층의 작은 규모이지만 높이 십자가가 세워진 아담한 모습이었는데 십자가 탑이 떨어지고 병원을 상징하는 녹십자가 붙는 수난을 겪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회복된 상태이고 현재 연해주 신학교에서 졸업한 현지인이 담딤으로 되었다.

블라디보스톡의 동부장로교회(정호상)는 블라디보스톡 시로부터 불하받은 넓은 땅에 98년 2월에 3층 설계에 1, 2층을 완공하였다. 그 외 아르쫌, 우수리스크와 빠르찌잔스크, 스빠스크에도 현재 건물을 건축중이거나 헌건물을 구입하여 수리 보수하여 예배당으로 꾸민 교히가 있는데 현재는 초기와는 반대로 자기 공간이 없어 임대하여 쓰는 교회가 손에 꼽을 정도가 되었다.

문을 닫은 헌 유치원을 구입하여서 수리를 하고 있는 선교사(박용호)가 있는데 이를 잘 수리하면 예배당만이 아닌 연합행사를 치룰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온지 얼마 안되는 분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자기 집을 구입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것은 6-8년의 월세를 모으면 살수 있는 정도로 월세가 비싸기 때문이다.

연해주 한인선교사들이 함께 연합하여 하는 신학교는 2개가 있다.



가. 연해주 신학교

주간 2년과정인데 1996년 9월에 나호드까 장로교회(김영곤)에서 연해주내의 선교사들이 모여서 시작이 되었고(교장 정균오), 현재 98년 9월부터 새문안교회에서 구입한 건물(블라디보스톡 소재)로 옮겨 계속하고 있는데 현재 5회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수업은 월요일 오후에 학교에 들어가 기숙사 생활을 하며 금요일 오후에 집으로 온다. 오전 오후 3시간씩 수업을 하는 외에 매일 아침 6시에는 새벽기도를, 저녁 9시에는 자체기도회를 하며 10시에는 소등한다.



나. 블라디보스톡 신학교

야간 3년 과정으로 1997년 9월에 시작하였고 유재호 목사가 주관하며 수업시간은 월화목금 저녁 6시반부터 9시까지로 주로 직장인 대상으로 수업을 하고 있는데 중국에서 장사하러 온 사람(조선족)도 일을 마치고 공부하고 있는 분도 있다.


출처 : 예수님과 떠나는 지성이의 세계여행
글쓴이 : 김명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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