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한국여성들 끌려갔던 위안소 2곳 남아 있어

YOROKOBI 2007. 5. 30. 21:07
(베이징=연합뉴스) 이돈관 특파원 = 일본군이 중국 침략시기에 동부 장쑤(江西)성 성도 난징(南京)에서 운영한 위안소는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해도 40여개소에 이른다고 중국 언론이 10년 이상 이 문제를 연구해온 한 역사학자의 말을 인용, 29일 보도했다.

일본군 위안소문제 연구의 제1인자로 알려진 난징사범대 역사학과 징성훙(經盛鴻) 교수는 '위안부'제도가 당시 일본군국주의 정부의 중요한 국책으로서, 1937년 12월13일 일본군의 난징 침략 후 '화중(華中)방면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대장의 지시로 위안소가 설치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마쓰이는 중국 민간인 대학살과 부녀자 강간, 성병 만연 등으로 일본군 군대의 질서가 파괴되고 전투력이 저하되는 것을 우려해 위안소 설치를 지시했으며, 이에 따라 난징은 일본군이 지배한 8년 동안(1945년 9월9일까지) 위안소와 위안부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됐다고 징 교수는 말했다.

징 교수에 따르면, 난징의 일본군 위안소는 대략 3단계에 걸쳐 조직적으로 설립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난징 침략 초기에는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징집한 위안부들을 대량으로 난징까지 데려오기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예하 각 부대에 우선 자체적으로 임시 위안소를 설립하도록 밀령을 내렸고 이들 부대는 중국 여성들을 납치하거나 강제 연행한 후 한 장소를 선택해 위안소를 만들었다.

일본군은 이 단계가 지난 후 일본군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일부 현지 주민이나 건달패 등을 활용해 중국 여성들을 협박, 유인한 후 위안소를 차리고 상업적인 운영을 하기 시작했다.

1938년 4월에는 난징의 유명한 건달이었던 자오훙녠(喬鴻年)이 여러 곳에 위안소를 두고 운영하면서 일본군 특무기관의 비호 아래 '상군(上軍)위안소 주임'을 자처하며 '난징시자치위원회' 회장이라는 쑨수룽(孫叔榮) 등과 함께 '인민위안소'를 차렸다.

중국인 위안부만으로 운영된 이 인민위안소의 건물은 현재 헐리고 없지만 자오훙녠이 낸 '인민위안소 개설신청서'는 현재 난징시문서보관소에 소장돼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징 교수는 난징 위안소 연구 과정에서 1938년 난징시의 일본군 괴뢰정부였던 '유신정부'가 펴낸 '난징지남(旨南)'이라는 자료에 9곳의 육군위안소 및 위치가 기재돼 있는 것을 발견, 이를 근거로 중국, 일본, 한국의 관련 자료를 뒤져 난징에 설립됐던 위안소 가운데 40여곳을 확인했다.

신화통신은 난징시 당국이 현재 난징시에 남아 있는 10곳 미만의 옛 위안소를 작년부터 시행중인 근.현대건축 보호조례에 따라 "난징지역의 정치, 역사, 문화의 특성을 반영하는 건축물'로 지정해 보존할 가능성이 있음을 밝혔다고 전했다.

아직 남아 있는 위안소 가운데 '안락(安樂)주점 위안소'는 주로 한국 여성들과 중국 여성들이, '동운(東雲)위안소'는 주로 한국 여성들이 끌려가 있던 곳으로 확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