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자료는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에서 제목에 관한 연구보고서로서
총회의 자료요청에 관하여 교수회에서 올린 자료의 원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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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류광수씨의 다락방전도운동에 대한 연구보고서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 총회장 귀하
일시: 1998년 3월 30일
제출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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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류광수씨(이하 류씨라 칭함)는 195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고신대 신학과와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여 합동측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87년에 부산 영도의 동삼제일교회에 부임하여 오늘날까지 그 교회를 시무하고 있다. 그가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다락방전도훈련원'을 설립하여 전도를 강조하면서 전국에 '지회'를 설립하고, 여러 집회와 프로그램을 통해 자기 자신의 '전도방법'을 소개하고 홍보하면서부터이다.처음에는 건전한 기성 교회의 목사들과 성도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그가 주장하는 효과적인 전도방법을 배우거나 응용하여 도입하려고 하였다. 전도에 대한 강조와 새로운 전도방법에 대한 소개는 자연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류씨가 주장하는 가르침과 실제 행하는 방법에 적지 않은 문제가 드러나면서 교회에 혼란과 분쟁이 생기고, 심지어는 분열의 아픔까지 맛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본 교단에서는 1995년 광주은광교회에서 개최된 제 45회 총회에서 '류광수 씨와 다락방 전도학교'에 대한 '유사종교연구위원회'의 보고와 제언을 받고 "지금까지 관련된 교단 내의 인사에 대하여는 불문에 부치되 다락방과 계속 관련하는 인사에 대하여는 적절한 권징을 하도록 가결"하였다. 1996년 9월의 합동측 총회는 류씨의 다락방 운동을 이단집단으로 규정하였으며, 이어서 개혁측, 통합측, 성결교, 감리교, 침례교 교단 등에서도 류씨의 다락방전도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경계하거나 교단차원에서의 대책을 세우게 되었다.본 교단에서는 지난 97년 제 47회 총회에서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한 결과 류씨 의 다락방 운동에 대해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에 맡겨 연구 보고토록 하였다. 이에 본 교수회는 그 동안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이 연구보고서를 제출하게 되었다.류씨와 그의 다락방전도운동에 대해서 현재까지 여러 공식적, 비공식적인 비판들이 나왔고, 이에 대해 류씨와 그의 다락방전도운동측은 반박성명서와 해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래서 본 연구서는 여태까지 진행된 비평과 반박을 독자들이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양측의 주장을 비교하여 <부록>에 소개하였다.우리는 이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기존의 비평에만 의존할 경우 자칫 잘못하면 부정적인 선입관과 편견에 치우치기 쉬우며, 다수의 견해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공신력을 얻으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아무리 이단성이 있는 견해라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판단은 최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 자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씨의 가르침에는 비판의 소지가 될 수 있는 표현상의 오류와 조화와 균형을 상실한 극단적 성경 해석과 표현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류씨를 옹호하는 이들은 설교자의 말이나 실수를 가지고 이단으로 비판하는 것은 이적 행위와 같은 것이며, "대한민국 어느 목사이든지 사람을 잡으려고 이렇게 단어 문맥 하나하나 따지면 이단 안 될 목사가 누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류씨는 또한 자신이 정통 교회에서 성장하였고 정통 신학의 노선을 배우고 가르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자신의 표현상의 오류로 비판을 받을 만한 소지가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면 얼마든지 고쳐서 전도만 열심히 하겠다고 자신의 소신을 밝히기도 하였다.그러나 우리가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류씨의 다락방전도운동에는 분명히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며, 류씨의 입장 표명에는 진실성이 결여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류씨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문제가 공적으로 제기될 때마다 자신의 잘못을 시정하겠다고 말은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어떻게 시정하겠다고 밝힌 적이 없다. 그는 구체적으로 비판받고 지적받은 부분에 대해 솔직하고 확실한 시인을 하기보다는 "그런 표현을 한 적이 없으며 혹 그런 부분이 저도 모르게 있었다고 하면 고치겠다."는 모호한 태도를 취하곤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류씨가 진정한 개혁이나 수정의지는 없이 불리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표면적으로는 수정의사를 표명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문제가 되는 자신의 주장들을 계속 확산시켜 나가고 있다고 본다.나아가서 우리는 이단인지 아닌지 분별하기 힘든 불건전한 운동이 오히려 교회에 더 치명적인 피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류씨는 정통신학을 배운 사람으로서 정통신학으로 분명하게 정죄될 수 있는 이단의 입장을 공공연히 표방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정통 신학을 알기에 정통 신학이 이단을 규정하는 교리적인 망을 교묘하게 피해 가며, 아주 지능적이고 교묘하게 사이비적인 가르침을 퍼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와 다락방전도운동은 큰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태까지 진행된 기존의 비판들을 참고하면서, 우리는 문제를 새로이 파악하고 비판하려고 한다.1. 다락방전도운동의 정통성 주장의 문제점류씨는 다락방전도운동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초대교회의 복음전파운동이 바로 다락방의 시작이며, 루터와 칼빈의 말씀운동이 또한 다락방운동"이라 하였다. 류씨의 이런 주장은 그의 다락방전도운동의 합법성을 탄탄한 기초 위에 세우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바로 이 점에서부터 심각한 혼란을 야기하는 문제가 발단한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의 복음전파운동과 칼빈, 루터의 개혁운동은 전통적인 개신교가 주장하는 정통성의 성경적 근거요 역사적 배경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류씨가 정통 교회와 똑같은 성경적 근거와 역사적 맥락에서 자신의 다락방전도운동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전도를 소홀히 하는 기존 교회와 참된 복음전도에 힘쓰는 다락방전도운동이라는 두 세력을 대립시킨다. 여기에 이미 분열의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정통 교회와 똑같은 근거 위에서 다락방전도운동의 정통성을 찾으려는 류씨의 오만한 구상은 그 운동이 전개되면서 점점 심각한 양상으로 표면화되었다. 그는 다락방전도운동을 전개하면서 기성 교회를 전도를 잘 안 하는 교회요 참된 복음전파의 사명을 저버린 교회로 평가절하하며, 다락방전도운동이야말로 참된 복음운동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양자간에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였다. 이처럼 다락방전도운동이 정통 교회의 대안으로 제시되면서 양자가 서로 대립하며 충돌하는 현상들이 여러 방면으로 나타나고 있다.류씨는 기존 교회와 대립되는 교회나 교단을 결코 만들지 않을 것이라 단언하였다. 그러나 그의 다락방전도운동이 진행되면서 점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교단, 기성 교회와 구별되는 소위 '참된 복음전도운동'을 한다고 하는 또 하나의 교회를 형성해 가더니, 결국 1997년 9월 10일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전도총회'라는 교단을 만들고 말았다. 그는 기성 교회의 조직이나 프로그램을 거부하면서 자기 나름의 새로운 조직과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전도핵심요원을 만들어내는 조직, 새신자를 훈련하는 프로그램, 전도학교, 전도신학교를 비롯하여 다락방전도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조직에 이르기까지 기성 교단이 가지고 있는 조직과 버금가는 대조직을 정비하였다. 이 모든 것은 교회를 돕는 측면 운동을 하겠다던 자신의 거듭된 공언과는 다른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다락방전도운동은 기존 교회와 대립되는 새로운 교회, 전도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형태의 조직과 프로그램을 갖춘 또 하나의 교회를 형성함으로써 한국 교회 전체에 큰 혼란과 문제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런 문제의 불씨가 이미 그의 다락방전도운동의 정통성에 대한 잘못된 주장 안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2. 류씨의 '전도운동'의 문제점류씨는 젊어서부터 오직 '오직 전도 하나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생일, 결혼, 회갑, 여행 등, 심지어 초상집에도 가지 않고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에만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 왔고 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부산 영도에 '다락방전도훈련원'을 설립하고 전국 곳곳에 '지회'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소위 세계복음화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물론 이처럼 전도를 위해 헌신하고 전도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 바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막 16:15)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도 역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었다(마 28:19). 따라서 류씨가 '전도'를 강조하고 이를 위해 애쓰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전도 운동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다.1) 류씨는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류씨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은 너무 협소하다. 그는 종종 "예수는 그리스도이다." 또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것만 알면 다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전도는 쉬운 것이다."라고 하며 "전도는 되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저는 설교 준비를 안 합니다. 할 것도 없고 또 해지지도 않고 항상 누구 얘기만 하느냐? 예수님 얘기, 전도만 얘기합니다. 전도 외에 다른 것 할 필요가 없습니다."물론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또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고 요체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사도들도 그렇게 전하였고, 우리도 또한 그렇게 전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전해야 하는 복음의 내용을 항상 그런 것으로만 제한하고 있지는 않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19)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분부는 그저 예수님을 영접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는가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빛과 소금'으로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이 다 포함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 곧 복음서에 있는 모든 말씀이 다 우리가 전해 주고 가르쳐야 할 말씀인 것이다.그러나 류씨는 '전도의 내용'을 너무나 협의로 이해해서 불신자에게 처음 예수를 영접하게 하는 것이 전도의 거의 전부인 양 가르친다. 뿐만 아니라 기성 교회는 전도를 하지 않는다고 비방하면서 자기들만 전도하는 참 교회인 양 주장한다. 물론 류씨 자신도 전도를 좁은 의미로만 보면 안 되고 넓은 의미에서 보아야 한다고 말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넓은 의미의 전도란 '복음을 전파할 뿐 아니라 새신자를 양육하여 일꾼으로 성장시키고 다시 그들을 삶의 현장으로 보내어 그 곳에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그의 '일꾼 양육'을 위한 교재의 내용을 보면, 실제로는 예수님을 처음 영접하게 하는 '일차적인 전도'를 위한 훈련 및 사단 결박, 기도의 능력, 병 치료 등에 거의 치우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류씨가 전하는 복음은 매우 치우치고 편협한 것이 되고 말았으며,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생활에 대한 강조가 매우 약화되고 말았다.그리하여 류씨는 성경에 나타난 포괄적이고 광의적인 복음을 축소하고 왜곡하여, 지극히 협소하고 치우친 '축소복음주의' 또는 '전도획일주의'로 빠지고 말았다. 그 결과 성도의 올바른 윤리와 이 세상에서의 건전한 삶이 등한시되고, 사회와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소홀히 함으로써 실제로는 그들이 주장하던 전도도 별로 이루어지지 않고, 많은 경우 그 동안 기성 교회에 불만을 느끼고 잘 적응하지 못하던 일부 교역자와 성도들을 빼앗아 가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여기에 류씨 운동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2) 류씨는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류씨는 다락방전도운동의 성경적 근거를 사도행전 1장 13-14절에서 찾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다락방 전도는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을 중심으로 마가 요한의 다락방(the Mark's Room)에서 시작하신 순수 복음 운동이었고 기도모임이었습니다(행 1:13-14).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정성을 투여한 운동이었으며, 유대교의 율법과 바리새인들의 사상과 회당을 중심으로 한 모든 교육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그러나 그가 근거로 제시하는 사도행전 1장 13-14절은 류씨가 주장하듯이 '다락방 전도'를 위한 구절이 아니라, 그도 부분적으로 인정하듯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분부하신 바 성령강림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기도회' 모임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때 120명쯤 되는 성도들이 모여 기도했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서 오늘날 우리가 꼭 그대로 모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기도회 모임'은 예수님의 승천 후에 오순절 성령 강림을 기다리는 역사적 특수 상황 가운데 있었으며, 그들만의 독특성이 있는 것이다.뿐만 아니라 류씨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 교회의 복음전파운동이 곧 참된 복음전도운동이요, 그것이 곧 다락방전도운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류씨가 주장하는 복음과는 차이가 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류씨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좁은 의미의 복음이 아니라 성도의 모든 삶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복음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도들도 '예수는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전했지만(행 9:20,22, 17:18, 고전 1:23, 2:2 등), 그 전파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은 류씨가 주장하는 것처럼 치우치고 축소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그런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며 우리의 모든 삶과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우리에게 날마다 하나님을 본받아 경건하게 살 것을 요구하시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공회와 벨릭스 총독 앞에서 '하나님께 대한 소망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인하여 심문을 받는다고 하였으며(행 23:6, 24:15), 또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에게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전할 때에는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했다(행 24:25). 이처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포괄적이요 전체적인 복음이었다.물론 사도들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고, 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촉구하였다(행 2:38, 4:12, 16:31 등).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전 1:21) 따라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표적'이나 '헬라인의 지혜'를 전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으며(고전 1:23),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말한다(고전 2:2). 이처럼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할 때에는 '일차적인 전도'에 치중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그러나 사도들은 류씨가 하듯이 소위 '중요한 핵심부분을 반복교육'하는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더 나아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가르쳤다. 오순절 날에 회심한 3천명의 무리들에게 사도들은 날마다 그들을 '가르쳤으며', 거기에는 또한 '교제'와 '기도'와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사랑'이 있었다(행 2:42-47).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2년 반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고 목회하였는데, 그 교회를 떠나면서 장로들에게 자신의 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쳤다."(행 20:20)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 1:4-5)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전한 '복음 진리의 말씀'은 곧 '믿음'과 '사랑'과 '소망'임을 알 수 있다.이처럼 바울은 일차적인 전도만 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그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인격, 성화와 생활, 나아가서 유익한 모든 것을 가르쳤다. 이것이 바로 넓은 의미에서의 복음이며 성경이 말하는 바 총체적인 복음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말하고 있으며(빌 1:27), 또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말하였다(골 2:6-7). 이처럼 바울이 전한 복음에는 '교리 부분'과 그에 따른 '윤리 부분'이 있지만, 류씨가 전하는 다락방복음에는 이 '윤리 부분'이 거의 없거나 무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전하는 '교리 부분'도 아주 초보적이고 기초적인 내용에만 머무르고 있으며, 상당 부분이 사단과의 대결구도로 편향되고 왜곡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류씨가 주장하는 다락방전도운동은 사도들의 전도운동과는 다른 것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3) 류씨는 종교개혁자들의 말씀운동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사도들의 복음전파와 가르침의 바탕 위에 세워진 역사적인 정통 교회들은 성경에 나타난 포괄적인 복음전파사역을 지향해 왔다. 류씨는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을 다락방전도운동과 동일한 것으로 주장하나, 칼빈의 개혁운동은 류씨와 같이 전도만 강조한 운동이 아니라 중세 카톨릭 교회에 의해 변질된 복음을 다시 회복하고 말씀으로 교회를 개혁함으로 세상 속에 하나님의 주권을 확장해 가는 총체적 복음운동이었다. 곧 칼빈의 개혁운동은 성경 말씀의 권위를 바로 세워 그 말씀을 온전히 지키고 따르는 데 역점을 기울인 운동이었으며, 칭의와 성화의 교리를 재정립하며, 교회를 성경적인 모습으로 갱신하여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려는 운동이었다. 따라서 칼빈의 개혁운동은 류씨의 다락방전도운동과는 그 의미나 강조점, 목적과 성격이 아주 다른 것이다.기성 교회의 대부분의 목사들은 주님의 명령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고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라 신자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며 교회를 주 안에서 바로 성장시키기 위해 직분자를 세우고 조직과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며 목회에 힘쓰고 있다. 이 모든 목회사역이 궁극적으로 우리 교회와 교인들이 복음의 빛을 밝히 비추는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잘 수행하기 위한 복음전파의 목적을 가지고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성 교회가 하는 모든 목회사역은 복음전파의 필수적인 요소요, 그 자체가 복음전파운동인 것이다.그러나 류씨는 복음전파운동의 포괄적인 의미를 성경적 관점에서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 동안 복음전파 사역에 힘쓰고 있는 기성 교회를 전도 안 하는 교회로 비난하고 있다. 그는 교회의 복음전파운동에서 중요한 요소인 성화와 양육, 나아가 이를 위해 필요한 조직과 프로그램 및 목회사역을 간과한 채, 일차적인 전도만 하는 것이 참된 복음운동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교회에게 주어진 총체적인 복음전파사역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비성경적인 주장이다.4) 다락방전도 방법만이 유일한 전도방법은 아니다.류씨는 다락방전도만이 유일한 전도방법인 듯이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도하되 다락방 전도여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전도방법은 기본 원리를 빠뜨린 채 해 왔기 때문에 전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류씨가 주장하듯이 꼭 자기들 방식대로 전도해야만 올바른 전도라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우리가 전도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불변의 진리이지만, 그 전도하는 방법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수천 명의 무리들에게 전도하셨을 뿐 아니라 열 두 명의 제자들에게 조용히 가르치기도 하셨다. 또한 회당에서나 집에서나 산이나 들에서 가르치기도 하셨고, 길 가면서도 가르치시고 식사하면서도 가르치셨다. 또 열 두 제자를 내어 보내면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70명을 둘씩 둘씩 보내면서 복음을 전케 하기도 하셨다. 사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도들은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수천 명의 무리들에게 설교함으로 복음을 전하였으며, 회개하고 믿은 자들에게는 사도들이 날마다 가르쳤다.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고 길거리서나 시장에서나 어디서든지 기회 닿는 대로 복음을 전하였다.이처럼 복음 전파의 방법은 다양하게 나타나며, 꼭 어느 한 방법만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류씨가 다른 전도방법을 비판하고 자신의 전도방법만이 전도되는 방법인 것처럼 선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5) 류씨는 복음전파의 궁극적 목적을 바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류씨는 복음전파 사역의 한 단면만을 거의 전부인 양 부각시킨 나머지 다른 중요한 면들을 백안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전도를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전도의 궁극적 목적을 바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류씨에 의하면 전도의 목적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고 사탄의 억압에서 해방시키고 영육의 모든 문제를 해결받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라 한다. 그는 전도의 목적을 인간이 누리는 혜택의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전도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는 것을 바로 강조하지 못하고 있다. 류씨는 전도의 목적을 주로 죄와 사탄과 비참으로부터 구원(liberated from)이라는 것을 강조하나, 그와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 의의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구원(liberated for)이라는 점을 바로 부각시키지 못하고 있다.류씨는 사람을 구원하는 열매가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전도만이 능력 있는 참된 전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노아처럼 120년 동안 전도했으나 아무 열매가 없어도 복음의 빛을 바로 밝힌 전도라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되는 전도이다. 전도는 영혼을 구원하는 목적만 갖는 것이 아니고 끝내 복음을 거부하는 세상에 분명한 증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그들로 핑계할 것이 없게 만드는 또 다른 목적도 있다. 신자들의 성결한 삶을 통해 교회를 비방하는 이들의 입을 막고 그들이 부인할 수 없는 복음의 빛을 비치는 것도 전도의 일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전도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된 삶을 사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마 5:16).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은 예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다(롬 8:29). 우리가 주의 형상으로 변해갈 때, 곧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 인격의 소유자로 새로워질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세상에서 이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셨다(요 15:8). 우리를 이 땅 위에 예수의 증인으로 남겨두신 이유는 첫 사람 아담의 성품을 벗어버리고 두 번째 사람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 새사람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 이런 새 사람이 모인 참된 인간의 공동체의 모습과 삶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과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이것이 곧 예수의 증인되는 삶이요, 세상에 빛을 비춘다는 의미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하는 전도이다. 모든 교회와 신자들은 계속 주님을 입으로 증거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입술의 전도는 전인적인 전도가 뒷받침되고 병행될 때 참된 복음 증거가 되는 것이다. 류씨의 가르침에는 이 전도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제시되지 못함으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성화와 회개,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6) 현재 한국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다락방전도운동이 아니다.류씨는 침체하는 한국 교회를 살리는 길이 다락방전도운동이라고 역설한다. 이러한 류씨의 말은 교회성장의 돌파구를 찾아 보려고 고심하는 목회자들에게는 상당한 유혹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소하는 방법일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한국 교회에는 류씨가 강조하는 일차적 전도도 중요하지만, 그와 함께 개인 신자의 바른 양육과 성화, 교회 차원의 개혁도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기성 교회가 이런 점에서 실패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신뢰와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본다. 현재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열심있는 복음전파와 함께, 잃어버린 거룩과 신앙의 순결을 회복하는 철저한 회개운동과, 한국 교회에 만연하고 있는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의 요소들을 척결하는 개혁운동이다. 교회가 교회의 참 모습을 회복하고 은혜와 성령이 충만한 공동체가 될 때 가장 효과적인 복음전파가 진행될 것이다.한국 교회는 여태까지 전도에 힘쓴 교회로 알려져 왔다. 개신교 역사 백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세계 교회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성장을 이룬 것은 한국 교회가 그 동안 전도에 열심히 매진한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류씨가 기존 교회는 전도를 안 하는 교회처럼 말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지금도 대다수 교회들이 전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고 많은 교인들이 삶의 현장에서 증인의 사명을 열심히 수행하며 살고 있다. 이런 기성 교회의 복음전파운동은 다락방전도운동처럼 거창하고 떠들썩하게 진행되지는 않기에 류씨의 눈에 잘 감지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류씨는 기성 교회의 전도는 '안 되는 전도'이고 다락방전도는 '되는 전도'라고 말하며 다락방전도의 성과를 크게 과시하고 있으나, 백 년 전만 해도 복음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지금은 천만에 이르는 교인이 생긴 것은 바로 기성 교회의 복음전파운동의 열매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혹자는 다락방전도운동으로 인해 교인이 늘고 목회에 도움이 되었다는 사례들을 들면서 이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긍정적인 듯이 보이는 사례가 꼭 그 운동이 성경적이고 건전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휘어진 막대기도 사용하신다. 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가르침 안에 잔재되어 있는 산발적인 복음적 요소를 통해서 선을 이루시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이런 열매들은 다락방운동의 오류와 불건전성에도 '불구하고'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우리는 기성 교회가 많은 문제점과 개혁해야 할 것들을 안고 있으며, 이에 대한 건설적인 비판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주님의 몸된 교회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요, 그것을 들추어 내는 것이 곧 나의 치부를 들추어 내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교회에 대한 깊은 사랑과 눈물의 기도를 배경으로 한 건설적인 비판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교회에 대한 사랑과 눈물의 기도가 결핍된 채 교회의 약점을 비판하는 데 열을 올리는 것 같은 자세는 과거에 있어 온 이단의 전형적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류씨가 그와 같은 잘못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교회의 문제점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자신의 다락방전도운동만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참된 복음운동이라는 것을 부각시키는 그의 오만한 태도 속에는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성령의 사역자는 화평케 하는 자이며, 성령의 운동은 항상 화평의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고 하셨다(약 3:18). 그러나 류씨의 다락방전도운동에는 이 성령 운동의 가장 중요한 특색이 결여되었고, 오히려 교회의 하나됨을 파괴하여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전도의 중요성을 부르짖는 류씨의 메시지는 아주 복음적인 것 같으나 아주 교묘하게 비성경적이다. 복음을 열심히 전해 죽어 가는 영혼들을 구하고 온갖 우상과 죄악과 어두움의 영에 사로잡힌 이 민족을 구원하자는 류씨의 외침과 호소에 공감하며 '아멘'을 보내지 않을 목사와 교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기성 교회가 전도하지 않는다는 류씨의 비판에 도전을 받으며 자신의 전도의 열심이 부족함에 대해 죄책을 느끼지 않을 그리스도인이 어디 있겠는가? 전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대의명분 앞에 누가 감히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사이비운동이 전도라는 미명 아래 비판과 반론의 화살을 최대한 피하면서,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3. 교리적인 문제1) '천사 동원권'과 '기도 응답'에 대한 주장류씨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이에게 일곱 가지 권세를 주셨는데 그 중에 '천사 동원권'이 있다고 한다. 류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사 동원,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주의 사자들이 가(서) 기도하는 곳마다 하나님은 주의 천사를 보내가(보내서) 불말, 불병거를 동원시키는데, 성경에 중요할 때마다 나오는데 왜 성경을 부인합니까? 성경에 있어요. 그리고 이 응답을 우리는 지금도 받을 수가 있어요. … 하나님이 순복음 OO교회 주위에 우리 K 목사님과 주의 종의 배후에 하나님은 불말과 불병거를 착 동원시키십니다. 이걸 보는 눈이 없거든. 이런 눈이. 성경 안 믿으니까 뭐! 그러니까 뭐! 왜 류 목사님은 천사 이야기를. 왜 못합니까? 성경에 있는 거를. 하나님께 함(한번) 물어 보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요."'천사 동원권'에 대한 류씨의 이같은 언급이 논란의 대상이 되면서 그는 신자가 직접 천사를 직접 동원할 수 있다는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에는 성경적 가르침의 한계를 벗어난 요소가 많다. 류씨는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동원하시고, 또 전도하러 가면 천사를 동원하신다면서,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주의 천사가 그를 구출한 예를 제시한다. 그러나 그는 사도들이 전도 사역에서 천사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한 듯한 경우도 많이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는 바울 사도가 천사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버림을 받은 것 같은 상황에 처하였던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하였다(고후 11:23-27). 또한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도다 …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며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 4:9, 11-13)고 하였다. 류씨는 성경에 나타나는 특별한 사례를 보편적인 것처럼 강조하므로 신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또한 류씨는 참된 신자는 기도를 하면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고 하면서 기도 응답을 다락방전도운동의 중요한 요소로 강조한다. 그는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 기도 응답 받지 못한 사람들 추적해 보면 예수님을 진짜 영접 안 해서 그래 요."라고 하였고, 자신의 기도 응답이 3일을 넘긴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의 이런 극단적인 표현을 논외에 부친다 하더라도, 그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어야 한다는 긍정적인 측면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신자의 삶 속에 있는 부정적인 고난의 측면을 백안시하고 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등 개혁교회의 신조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신자의 불완전성을 강조한다. 신자는 아무리 높은 거룩의 경지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불완전하여 육신의 뜻을 따라 구하는 성향이 남아 있다. 신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지 아니하고 자기 욕심에 이끌려 구한 기도는 응답받을 수 없다(약 4:3). 또한 비록 바르게 구했다 할지라도 그 응답이 오래 지체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구한 그대로 응답받지 못하는 것이 참된 기도응답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선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세 번 간절히 기도 드렸으나, 그 기도가 구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경우 그의 기도는 응답받은 기도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고후 12:7-9).2) 십자가가 결여된 영광의 신학류씨는 다락방전도운동이 개인과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도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 물론 죄의 근본문제는 해결된다. 그러나 죄의 구습을 처리하는 문제나 죄의 세력에서 완전히 자유하는 문제는 아직 남아 있으며, 성격적 결함이나 질병, 또는 가정의 문제는 그대로 계속되기도 한다. 또 그런 문제들이 점진적이고 부분적으로만 해결되는 경우도 많다.류씨는 또한 전도가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반복해서 말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무리한 주장이다. 주님께서 가라지와 알곡을 추수 때까지 같이 자라게 그대로 두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전도를 통해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부분적으로 해결될 수는 있으나 그 모든 것들이 근본적으로 완전히 해결될 수는 없다. 이상적 사회나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우리의 소망이요 기도 제목이기는 하나, 현세에서 실현가능한 것은 아니다.신자는 이 땅 위에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많은 문제들을 안고 신음하고 고통하면서, 종말의 완전한 해결과 구원을 소망하며 인내로써 살아 간다. 성령의 능력과 풍성한 은혜는 신자를 이 종말론적인 고난과 약함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하며 십자가의 길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따라갈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이다.그래서 신자의 삶에는 구원의 기쁨과 감격도 있지만 동시에 신음과 슬픔과 고난도 공존하는 것이다(롬 8:18-25). 정통 교회는 신자의 삶의 이러한 측면을 직시하고 믿음으로 대처하게 하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 왔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복음을 무시한 '번영신학' 또는 '영광의 신학'을 비성경적이며 때로는 이단적 가르침으로 정죄해 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류씨의 가르침에는 이런 위험성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 그의 가르침에는 십자가의 신학의 자취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에는 현재 '실현된 측면'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측면'이 있는데, 류씨는 이를 균형있게 강조치 못하고 실현된 부분에 치우침으로 신자의 삶이 지닌 종말론적인 요소를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류씨의 이런 치우친 주장은 광야의 여정에서 지루함을 느끼는 신자들에게는 시원한 안식처처럼 느껴질 수 있으며, 기존 복음이 제공하지 못하는 문제 해결의 열쇠를 제시하는 참된 복음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킴으로 많은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한 때 한국 교계에서 하나님의 축복만을 강조하는 번영신학이 많은 사람들을 끌어 당긴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류씨의 이런 균형을 잃은 복음이 또 다른 형태의 번영신학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류씨의 전도운동은 참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반쪽 진리만을 전하는 것이요, 성경이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과장된 약속과 희망을 제시함으로써 순진한 영혼들을 교묘히 속이는, 진실하지 못한 전도 메시지이다.3) '귀신론'과 '사탄 배상설'의 문제류씨는 귀신론과 사탄 배상설(賠償說)과 관련하여서도 교계에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명을 하기도 했다. 곧, 자신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아는 바도 없다거나, 정통 교회와 신학에 속한 자신이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거나, 또는 잘못이 있으면 이를 시정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는 "더 이상 사탄에게 굴복할 이유가 없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지불하셨다."는 발언으로 야기된 사탄 배상설에 대해서는 단 한번 언급하였다고 변명하고 있다.그러나 그의 이런 변명은 그의 신실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사탄 배상설에 관하여는 수영로교회 집회시에 설교하던 중 단 한번 언급하였다고 하지만, 그는 이와 유사한 언급을 '평신도 기초 전도이론 강의 테이프 6'에서도 말하고 있다. "마가복음 10장 45절, 대속물로 오셨던 … 대속물이라는 말은 뭔가 갚아 주는 것 아닙니까? 사단에게 모든 우리의 실패(죄)의 댓가를 전부 다 갚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주님이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뭔 말인가 아시겠지요? 어마어마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다락방측은 신학자가 아닌 한 설교자로서 한 말에 대하여 너무 가혹한 평가를 한다고 반박하지만, 이런 여러 정황을 보건대 류씨의 신실성은 의심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뿐만 아니라 그는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을 여러 차례 하였다. "그 사람 죽어버리면 영혼이 갇혀 있다가 악령은 가만히 그 영혼이 후손을 괴롭히잖아요." 류씨는 또한 마귀(귀신)가 가져다 주는 병의 특징으로 '병명 불분명, 이유 없는 두통, 머리에서 소리가 남, 치유되지 않으면서 순간적 변동'등을 언급한다. 또 미혹의 영은 평생 따라다닌다거나 계속 증가되며 결국 육체를 멸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류씨 자신은 김기동과의 어떠한 관련도 부인하고 있지만 위와 같은 그의 발언은 김기동의 귀신론과 매우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4. 교회윤리적 문제류씨의 다락방전도운동은 기존의 교회를 비방, 매도하고 분열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심각한 폐해를 야기시키고 있다. 그 운동의 성격을 관찰해 보면 이미 그 속에 교회의 연합을 깨뜨릴 수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들이 내재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1) 잘못된 영적 우월주의류씨의 가르침은 구조적으로 교회 분열을 야기할 수밖에 없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는 신자를 예수를 '믿는 사람'과 '영접한 사람'으로 양분한다. 예수를 영접한 사람만이 성령이 내주하고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되었다고 한다. 그런 가르침에 회유된 사람들은 수십 년간 예수를 믿었으나 영접하지는 못했다는 착각에 빠져 교회를 불신하고 다락방에 더욱 심취하게 된다. 또한 류씨는 기성 교회의 98%는 시험에 들어 있고 마귀에 사로잡혀 있다고 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부당한 반감과 비판의식을 조장한다. 그렇게 훈련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기성 교회 안에서 하나되어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류씨는 부인할지 몰라도 그의 주장 자체가 교회의 연합을 파괴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요소들을 배태하고 있다. 결국 다락방전도운동은 자신들만이 참된 전도운동을 하고 있다는 영적 우월주의 내지는 영적 엘리트 의식으로 나타난다.이런 잘못된 우월주의는 그들의 폐쇄적인 교육이나 그것에 준하는 삶의 태도로 인해 더욱 고착된다. 류씨가 운영하는 핵심요원훈련, 팀사역훈련, 미션홈, 전도신학원, 선교사훈련원, 70인요원훈련 등과 같은 많은 훈련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단순히 전도 훈련만을 위한다면 무슨 프로그램이 그렇게 많이 필요한가? 그것은 교회 일반적 전통의 토대 위에다 자신들만의 상층구조를 세우고자 하는 잘못된 엘리트주의가 게재되어 있다. 그들이 현장을 강조하고 '미션 홈'(Mission Home)을 주창하는 것은 단순히 방법론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그들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겠지만, 이것은 교회사에 나타나는 '비밀회집소'(Conventicle)의 전철을 밟는 것이다.2) 맹신적 추종자를 양산함류씨의 많은 프로그램 중 특히 주일 밤마다 가지는 핵심요원훈련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목회자들을 저 멀리 경기, 충청, 강원도에서 영도 한 모퉁이까지 달려오게 만드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이다. 하루 종일 예배를 인도하여 피곤한 목회자들이 어떻게 달려올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무슨 목회가 제대로 되겠는가?류씨가 정말 사심이 없다면 달려오는 목사들을 오히려 막아야 한다고 본다. 자신의 전도 방법론을 다 가르쳤으면 그것으로 본 교회 목회를 잘 하도록 격려하고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전에 류씨에게 배우기는 했으나 그의 집단에는 가담하지 않은 분들의 얘기가 그것이다. 방법론만 배웠으면 됐지 계속해서 그를 따라다녀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류씨는 핵심요원훈련 등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을 영적으로 예속시키고 있다. 그 훈련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가야만 은혜가 되고 힘이 생기고 다른 메시지는 생명이 없다고 한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점점 다락방을 떠나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영적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류씨는 자신의 운동이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라고 해놓고 실제로는 다락방에 예속된 영적 어린아이만을 양산하고 있다. 강하게 되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다락방전도운동일 따름이다.이렇게 다락방전도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상당수가 류씨의 맹신적인 추종자로 전락하고 있다. 교회 내에서 이런 특정인의 추종자들이 생겨난다는 것은 교회의 연합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다. 또한 다락방전도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정서적으로 굉장한 동지의식을 가지고 있다. 기성 교회들이 다락방전도운동을 비판함으로 그들의 동지의식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소위 진리를 위해 핍박받는다는 식이다. 따라서 그들은 어떤 계기에 부딪치면 일시에 결집하고, 편당을 지어 교회에 어려움을 야기시키도 한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한 교회들은 갈등과 분쟁, 그리고 마침내 교회 분열이라는 아픈 상처를 입게 되었으니, 이에 대한 책임은 어떤 변명으로도 해소되기 어려울 것이다.다락방전도운동이 이렇게 교회를 분열시키는 운동으로 귀결된다면 이는 결코 성령의 사역은 아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인내하신다. 거룩하신 성령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참으시며 우리 안에서 성화를 이루어 가신다. 성도간의 상호권면도 성화의 한 방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인내를 힘입어서 교회의 부족한 모습을 개혁해 나가는 데 적극적으로 헌신하기보다는, 전도의 열심을 빙자하여 교회를 정죄하고 분열시키는 행위는 결코 성령의 사역으로 볼 수 없다.전술한 대로 다락방전도운동은 그 가르침이나 조직의 극단성 때문에 사실은 자신들이 표방하는 전도운동에도 별다른 성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초기에 다락방전도운동에 열심히 가담했던 우리 교단의 어떤 목사에 의하면 자신의 교회에서 다락방훈련을 받은 12명의 성도들을 인도자로 세워 보았지만 아무런 성장이 없었다고 한다. 전도란 말과 행실에 모범이 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통할 때 효과가 있는 것이지, 교회 안에서의 영향력 증대나 꾀하는 왜곡된 인격으로는 아무리 훈련을 받는다고 해도 별무성과일 것은 자명하다.이런 결과는 목회자에게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한계에 도달한 목회의 돌파구로 다락방을 찾는 목사들은 아무리 다락방에서 배운 것을 사용해도 별로 결실이 없음이 나타나고 있다. 전도란 참으로 영혼을 구원코자 하는 열정에서 이루어져야지, 단지 교회의 수적 성장만을 목표로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목회 사역에 별다른 열매가 나타나지 않을 때가 있을 수 있다. 그럴 때는 그 원인을 찾아 해소해야지, 그렇지 않고 다락방전도운동을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비법인 것 같이 사용해 보아야 별 성과가 없을 것은 당연하다.대구의 K 목사와 같이 간혹 다락방에 참여한 후로 교회가 성장한 사례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석한 바로는 그런 목회자는 다락방이 아니더라도 교회를 일으킬 수 있는 목회적 자질과 능력을 갖춘 분들이다. 그런 경우 다락방이 방법론적으로 조금의 도움이 되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 하나만으로 다락방전도운동이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점들을 상쇄할 수는 없다.결론류씨의 가르침에는 표현상의 오류와 극단성으로 야기되는 문제를 제외하고도,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많은 면에서 비성경적이고 불건전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위화감과 대립, 분쟁과 분열을 조장할 수 있는 위험성을 심각하게 배태하고 있다. 전도에 대한 그의 이해는 다분히 편향적이다. 그는 오로지 전도라는 하나의 각도에서만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치우친 '축소복음주의' 또는 '전도획일주의'로 빠지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복음이 성도들에게 주는 더 많은 은혜와 유익들을 바로 부각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들이 제시하고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복음운동은 단지 '일차적 전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총체적인 복음운동'이다. 이에는 일차적인 전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성화, 이 세상에서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삶이 포함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씨는 그의 다락방운도이 마치 전통 교회가 계속해 온 총체적인 복음운동을 대체하는 운동인 양 주장함으로써 큰 혼란과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지난 100년 이상 한국 교회를 인도하신 삼위 하나님의 역사를 간과하는 처사이다. 또한 그의 '천사 동원권'이나 '사탄 결박권', 그리고 '귀신론' 등은 상당히 치우치고 편중된 가르침으로서, 매우 위험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문제로 인해 류씨의 다락방운동은 가는 곳마다 성령의 열매인 화평을 이루기보다는 오히려 반목과 질시를 초래하며, 교회에 덕을 세우기보다는 혼란과 분열을 야기하고 있다.이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류씨의 다락방전도운동은 이단적 성격을 띤 불건전한 운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본 교단에 소속된 목사와 교인들이 류씨의 다락방전도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일절 금하고, 성경이 제시하고 기존 교회가 전통적으로 강조해 온 총체적인 복음전파운동에 더 한층 매진하도록 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 성경적 복음전파에 대한 바른 교육을 교단 차원에서 강화함이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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