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동일방직, 그 후 30년…기륭전자의 슬픈 닮은꼴

YOROKOBI 2007. 9. 24. 19:47

 







“어쩜 이리도 닮았을까….”

30여 년 전 똥물을 뒤집어쓰고 알몸투쟁도 마다하지 않던 동일방직 여성노동자와 3년이 넘도록 파업을 하며 천막농성 중인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만나 나눈 첫마디였다.

아름다운재단과 영화인회의 등이 지난 17일 저녁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을 그린 영화 ‘우리들은 정의파다’의 상영회를 열었다. 이날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초대된 것이다.

◇ 닮은꼴 1. 약자 희생은 예나 지금이나

영화 ‘우리들은 정의파다’는 1970년대 가정에 보탬이 되기 위해 16~17살에 ‘공순이’가 된 동일방직 언니들의 이야기다. 영화에서 처럼 동일방직 근로자들은 당시 하루 14~15시간을 솜먼지를 뒤집어쓰고 일하며 화장실 갈 틈도 없이 일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1분에 140보’라는 구호를 붙여놓고 빨리 걷는 연습까지 했다. 주위에서는 이들을 ‘수출역군’이라고 추켜세웠지만 이들이 받은 월급은 불과 70원. 자장면 한 그릇을 사먹을 수도 없고 남자 직원들의 절반에 불과한 액수였다.

기륭전자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생산직 노동자 300여 명 중 정규직은 15명뿐. 40여명이 계약직이고 나머지는 모두 파견직이었다. 파견직 노동자의 기본급은 2005년 법정 최저임금 64만1840원보다 10원 많았다. 하루 10시간, 휴일 없이 잔업 100시간을 채워야 월급 100만원을 손에 쥘 수 있었다. 해고도 쉬웠다. 잡담을 했다고, 말대꾸를 했다고, 혹은 못생겼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해고 통보도 간단했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세요’라는 휴대폰 문자메시지가 전부였다.

◇ 닮은꼴 2. 공권력은 꼭 회사편

이들이 가졌던 꿈은 노예가 아닌 인간이기를 바랐던 것이 전부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게 이들 투쟁의 궁극적인 이유다.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고 회사와 회사의 사주를 받은 남자 직원들의 억압을 알몸으로 버텨내고 똥물세례도 참아냈다. ‘노동3권 보장’을 외치는 목소리는 단식농성으로 이어졌지만 결국 124명은 해고됐다. 이들의 이름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빨갱이’ ‘불순분자’로 몰려 다른 곳에도 취업 할 수 없었다. “힘으로 싸울 때 공권력은 꼭 회사 편이었다.”

기륭전자의 파업 노동자에 대한 핍박도 마찬가지다. 생산직 노동자 205명 중 180여명이 노조에 가입했다. 사업장에서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한 겨울에 에어컨을 틀고, 새벽에 사이렌을 울려댔다. 공장 정문은 빈틈없는 철문으로 바뀌었고 곳곳에 CCTV가 설치됐다. 일상적으로 용역경비의 욕설과 폭력에 시달린다는 증언도 잇달아 나왔다. 회사는 불법파업이라며 노조에 수십억 원에 이르는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하기도 했다.

◇ 닮은꼴 3. 복직 권고는 소귀에 경읽기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명동성당에서 13일간 단식농성을 할 때, 유신정권이 막을 내릴 때 이들은 모두 원직복직에 대한 기대로 부풀었지만 허사로 돌아갔다.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는 동일방직 노조활동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 2004년 동일방직에 이들에 대한 복직을 권고했다. 그러나 회사 측은 이를 거부하고 있다.

기륭전자는 노동부와 검찰에서 모두 불법파견으로 인정받았다. 노조는 불법파견으로 인정만 받으면 복직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회사는 벌금 500만원을 내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복직의 꿈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들은 여전히 거리에 서 있다.



이날 영화가 끝나자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눈물을 훔쳤다. “사람을 사람처럼 다루지 않고, 조선시대에나 있을 법한 노예처럼 부리는 상황이 몇 십 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며 “올해로 거리에서 세 번째 추석을 맞이하게 됐다”고 울먹였다. 그러자 동일방직 김용자씨(51)는 “우리도 명절만 다가오면 옥상에 올라가 밤마다 울었다”며 “미안하다”고 말끝을 흐렸다.

‘딸들은 이런 세상에서 일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건만 1970년대나 2007년이 다를 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