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재벌 방씨일가의 중시조로 일컬어지는 계초 방응모에 대해 알아보자. 본래 방응모는 머리가 좋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거의 맨손으로 광산사업을 시작했다. 운 좋게 금맥을 발견, 떼돈을 벌었다. 1932년에 방응모가 거머쥔 돈이 135만원. 지금 돈으로 치면 1350억원이다. △ 계초 방응모 ⓒ 엠파스 검색
1350억원을 거머쥔 방응모는 광산사업을 그만두고, 20만원, 지금 돈 200억원을 투자하여 조선일보를 인수한다. 또 12만원, 지금 돈 120억원을 투자하여 태평로 일대에 1400평의 땅을 사서 당시 초고층 빌딩인 4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방응모는 사업가다운 면모가 있었나보다. 그 후 50만원, 지금 돈 500억원을 투입하여 새로운 윤전기를 도입하는 등 시설투자를 했다. 또 50만원을 투입하여 경기도 수원에 97만평 규모의 간척사업을 전개하였다.
놀라운 것은 함경남도 일대에서 무려 3천 2백만평 규모의 조림사업을 진행하였다는 거다. 장차 신문용지를 확보하려는 계산이었다고 한다. 헐...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마케팅기법을 도입하고, 중량급의 인사들을 주필로 영입하고, 조선일보 이외에 월간지, 여성지, 소년지를 또 창간하였다.
물론 친일행각도 보통 수준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조선일보라는 신문 자체가 친일실업인 단체인 대정친목회 명의로 발행허가가 나고, 친일악덕지주 예종석을 발행인으로 하고, 친일상공인 조진태를 초대사장으로 창간되었으며(1920년), 이후 대표적인 친일 매국노 송병준이 조선일보를 경영했던 수치스런 과거를 가지고 있는 신문이다. 이것을 방응모가 사들여 운영한 것이다.
예종석과 조진태는 일본에 빌붙어 이권을 챙기고, 가난한 농민들에게 고율의 소작료를 적용하여 고혈을 짜낸 악질적인 인간들이다. 또한 송병준이 누구냐? 이완용과 더불어 이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일진회의 중심멤버요 최고의 매국노다.
이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방응모 또한 부끄러운 친일행각에 나서게 된다. 1934년 당시 잡지 "삼천리"에 게재된 "신문사 사장의 하루 - 방응모씨"라는 글에는 "저녁이면 사교관계로 명월관, 식도원으로 돌아다니면서 재벌과 대관 집을 찾기도 하고... 가와시마 군사령관의 저녁초대를 받고 갔다가 돌아와서는 고사포도 기부하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자신이 운영하는 월간지에 발행인 방응모의 이름으로 스스로 기고한 글을 봐도 친일파 방응모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대일본제국 2천 6백년의 빛나는 역사에 청렴강직한 대화정신과 팔굉일우의 이상으로써 닦아놓은 성업은 일계직통의 천황어능위를 봉하여 우리 국민은 이 성은 속에 만폭적 희열을 느끼고 있다.... 천황, 황후 양 폐하의 성수무강 하옵심을 삼가 비옵고...."
방응모가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일종의 장사꾼이다. 언론사를 경영하면서도 장사꾼적인 기질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시기적인 변화에 편승하였던 것이다.
반도 최고 갑부에 해당되는 방응모가 먹고 살기 위한 친일을 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적극적인 친일행위자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인간적으로 좀 가엾기는 하다. 방응모가 해방이 된 이후 조선일보를 속간하면서 쓴 속간사를 보면 "우리는 입을 가졌으나 생벙어리 행세를 하여야 하였으며 할 말은 많았으나 호소할 곳이 없었다. 우리는 죽으라면 말없이 죽는 시늉을 하지 않으면 안될 환경에 놓여 있었다."고 써 있다. 물론 변명과는 달리 방응모의 친일은 자기방어의 한계를 넘는 행위였다.
부패와 타락이 그 본질인 사회에서 깨끗한 사람은 좀 거만하게 굴어도 된다는 김남주 시인의 시도 있지만 어쨌든 방응모가 겪었던 시대적 상황에 내가 처해보지 않았으니 그보다 도덕적 우위에 서서 왈가왈부할 입장은 못된다. 그러나 설령 그런 실수를 했더라도 방응모 자신과 그 일가 그리고 조선일보가 보다 통렬한 자기반성과 성찰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 암울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정도를 걸어야 할 사회적 양식의 표상인 언론의 이름으로 행했던 자신들의 비겁함과 한계를 보다 확실하게 드러내고 그 잘못된 과거를 부끄러워하면서 철저하게 반성적 고민을 하는 모습을 조선일보가 보여주었더라면 지금처럼 시민들에게 조롱과 불신을 당하는 조선일보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조선일보가 그 잘못된 역사를 어떻게든 변명하고, 미화하고, 굴절시키고, 은폐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방응모의 친일행각보다도 더한 퇴영적인 결과를 유발하기에 더욱 그렇다.
방응모의 친일행각은 6.25가 발발하여 북한 인민군들에게 납북되는 불행한 결과로 끝을 맺었다.
<압록강변의 겨울-납북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이라는 책에 의하면 방응모는 납북 도중 이회창의 고향으로 유명한 황해도 서흥군 부근에서 미군의 공습을 받고 사망하였다. 미군 전투기 4대가 날아들어 닥치는대로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총사격을 하는 바람에 노근리의 유족처럼 민간인인 방응모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이 조선일보에서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은 1991년에 북한 정무원 부부장까지 지낸 신경완이라는 사람의 구술을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자 한겨레신문 편집위원을 지낸 이태호씨가 쓴 매우 신뢰성이 높고, 자료가치가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책인데, 조선일보는 사주가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
역사는 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다. 한홍구 교수에 의하면 조선일보가 펴낸 방응모의 전기도 납북장면에서 그냥 끝나고 만다고 한다. 한홍구 교수는 그 이유를 궁금해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납북해 간 인민군만 죽일 놈이고 정작 할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간 미군의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폭격은 전쟁상황에서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일까?"
하여튼 방응모의 납북 이후 방일영의 시대가 도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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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초 방일영 ⓒ 엠파스 검색 | ||
방일영은 방응모의 손자다. 그 사이에는 방재윤이 있다. 방재윤은 방응모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사실은 방응모의 친형 방응곤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본래 방일영의 아버지 방재윤은 방응모의 조카다. 그러나 방응모가 아들이 없어서 조카를 양아들로 삼은 것이다.
방응모가 양자로 들인 방재윤이 방일영, 방우영 형제를 낳고 1940년에 사망하였다. 그런데 1943년, 골 때리게 방응모가 환갑의 나이에 아들을 낳았다. 생물학적 순리를 거역하면 불가피하게 심각한 투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방응모가 환갑에 아들을 낳았을 때 이미 손자 방일영은 스무살이 되어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중앙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또 그 이후에는 조선일보에 근무하게 되었다. 방응모가 낳은 아들 방재선이 일곱 살이 되던 시점에서 방응모가 납북되었다. 당시 방재선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방일영, 방우영 형제가 할아버지의 조선일보를 이어받아 운영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배경이 조선일보의 경영권 분쟁을 촉발한 것이다. 글쎄, 과연 누가 옳은 것인지.. 쉽게 판단이 안 선다. 그냥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조선일보를 방씨 일가 모두가 포기하고 시민들에게 돌려주었으면 싶다.^^
방응모에 이어 조선일보를 승계한 방일영은 호방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술도 꽤 잘 마시는 모양이다. 방일영의 회고록을 보면 3748평의 흑석동 대저택에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한 후 자주 놀러 왔다고 한다. 거기서 기생들을 불러놓고 질펀하게 놀았나보다. 그래서 육영수여사가 방일영을 무지 싫어했다고 한다. 자기 남편을 망치는 인간으로 본 것이다.
왜 박정희는 대통령 체면을 벗어던지고 방일영의 집에 가서 신나게 놀았을까?
당시 박정희를 따라다니던 전 MBC 사장 황용주의 증언에 의하면 오직 "천하의 주도 방일영" 때문이었다고 한다. 방일영이 세상에서 알아주는 주당이었다는 소리다.
카지노 황제 전낙원은 <태평로 1가>에 쓴 ‘지극하고 따스하고 멋진 방 형님’이란 제목의 헌사에서 방일영 사장을 가리켜 “권번출신 기생들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분”이라고 칭송을 했다. "머리를 얹어준다"는 의미는 다들 아실 것이다.
방일영의 동생 방우영 또한 술자리에서 박정희와 대면하게 된다.
어쨌든 간에 방일영은 박정희를 비롯해 서정귀, 이후락 등과도 상당히 어울리면서 신나게 놀았던 모양이다. 방우영의 회고록을 보면 이렇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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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왼쪽) 부부와 그의 아들 방성훈 조선일보 기자의 97년 모습. ⓒ 2005 <조선일보와 45년> | ||
얼마나 재미있는 광란의 도가니가 펼쳐졌는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술로써 맺어진 의리가 가장 끈끈하다.
명문가문 이후락 편에서 언급했듯이 신진자동차의 김창원, 극동건설의 김용산, 대농의 박용학, 한국화약의 김종희, 호남정유의 서정귀 등은 이런 배경으로 이후락 5인방으로 불려졌고, 물론 그 주변에는 방일영이 있었다.
여기에 방일영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던 SK 창업자 최종건이 빠지면 안된다. 수원지방의 별 볼 일 없는 직물회사였던 선경이 급성장한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종건은 죽는 순간까지 조선일보 사외이사였다.
방일영은 박정희대통령을 "대통령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의 삼촌인 방재선의 증언이다.
“대통령 형님, 한잔 쭈∼욱 드십시오.”
“내가 좀 과한 것 같은데….”
“아니, 제가 대통령 형님 술 실력을 모르는 사람입니까?”
이런 대화가 바깥에까지 들려서 당시 권세가 하늘을 찔렀던 대통령 경호실 요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
밤의 대통령이라는 말도 사실 박정희가 방일영에게 붙인 별명이다. 그 속뜻은 요정정치에 데뷔해보니 항상 엄청난 화술과 주량으로 밤 문화를 주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방일영이라는 말이다. 박정희는 "이 세상에서 팔자 제일 좋은 사람이 방일영이다."라면서 부러워했다고 한다.
하여간 술과 여자를 매개로 한 이런 요정정치를 통해서 거대한 이권과 권력이 거래되고, 정치와 언론이 비정상적으로 유착하는 정점에 조선일보 회장 방일영이 있었다.
사주가 대통령과 술자리에서 형님, 아우하는 조선일보는 언론사에 대한 사전검열 조치가 포함된 유신쿠데타가 일어나자 서슴없이“구국의 영단”( 1 2 월 2 8 일자 사설)이라고 보도하며 언론사이기를 스스로 포기했다.
이런 방일영이 얼마 전에 죽었는데 조선일보 사이트에 가봤더니 웃음도 안 나왔다. 무슨 임금님이라도 승하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우초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대나 뭐래나...
우초의 정신을 이어받아 질펀한 광란의 술자리를 열라는 건가? 껄껄
민족언론의 명맥을 유지시키며 조선일보를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 언론으로 키워낸 거성이었다고 한다.
조선일보에 전문으로 올라온 문교부장관을 지낸 권이혁이 쓴 방일영 조사를 보면 소름이 끼친다.
"우초 형의 일생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고 따를 수 없는 위대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형의 일생은 민족 언론의 전통을 이어받은 선두주자로서 이름 있는 언론인과 문화인을 길러낸 일생이고, 사회 각 분야에서 값진 활약을 하고 있는 인재들을 양성한 일생입니다. 그렇기에 이 사람은 이 자리를 슬픔을 뛰어넘어 인간 방일영을 재평가하는 장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비록 형의 몸은 갑니다만 방일영 정신·방일영 인간성은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 그리고 이 땅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니 계속해서 우리들을 이끌어 주시고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을 밝혀 줘야 하는 의무와 소임을 다하셔야 한다는 부탁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무심코 읽다가 까딱 잘못하면 울지도 모르겠다.
박정희는 방일영이 맡았고, 그 후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자 전두환의 비위를 맞추는 역할은 방일영의 동생 방우영이 맡았다. 나치정권 선전상이던 괴벨스와 같이 국민 우민화에 나서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던 전두환의 심복 허문도를 도와 국보위 입법위원으로 참여하여 희대의 언론통제 악법인 '언론기본법'을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살인마 전두환은 조선일보에 의해 민족의 영웅이며, 구국의 지도자로 둔갑하였다.
광주학살이 끝난 후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떠들었다.
"국군이 절대다수 광주시민, 곧 국민의 일부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이번 행동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리영희선생님의 정리를 끝으로 방씨들의 끝도 없는 비리를 대충 끝내겠다. 손가락만 아프다.
“(역대정권은) 권력의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고, 그들의 범죄를 ‘반공’으로 정당화하며, 그들의 사리사욕을 ‘애국충정’으로 칭송하는 ‘언론인’들이 필요했다. 광주에서의 양민 대학살을 ‘국가 안보적 합법행위’로 감싸주고,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인사들의 목을 조르는 온갖 야만적 탄압행위를 ‘빨갱이 잡기’로 정당화해주는 ‘언론사’와 ‘언론인’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소위 ‘언론사’와 ‘언론인’은 그 요구를 충실히 수행해 왔다. 범죄적 권력의 공범자가 된 것이다. 그 대가로 소위 ‘언론사(주)’는 비대화하고 ‘언론인’을 자처하는 기능인들은 그 직장의 안과 밖에서 화려한 승진과 영달의 사다리를 달려 올라갔다. 그렇게 해서 부정한 정치권력과 타락한 언론권력은 일체화되어갔다.”(리영희, <말> 1996.3)
http://www-nozzang.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8&uid=637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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