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사] (서철원. 총신대 출판부) 교리와 교리사 1. 교리와 교리사 1.1. 교리와 교리사 “교리란?” 교리는 “기독교의 기본진리”다. 기독교는 특별계시에 근거한 구원종교이기 때문에 근본진리를 갖게 되는데, 이 근본진리를 인정하면 기독교가 되고 부정하면 기독교가 되지 못한다. 기독교의 교리는 계시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권위를 갖는다. 교리는 교회의 근본 신앙 조목(articuli fidei)이며 하나님의 구원진리를 신적 권위에 근거하여 신앙고백 형식으로 표현한 명제가 교리가 된다. 교리 중에서 교회 존립에 필수적인 것을 교회가 신앙고백 형식으로 채택한 신앙 조항들이 교리로 공식화되었다. 교리는 성경 계시에서 유래하므로 교리는 반드시 믿고 순종해야 할 문장들이다. (sententiae quibus credi aut obtemperari necesse est propter mandatum Dei) 교리는 교회가 구원 진리를 이해한 것을 신앙 조항으로 표현하고 고백하며 그 진리를 지키고 그 가르침대로 사는 진리가 된다. 교리는 성경에 계시된 구원진리를 교회가 신앙고백으로 표현, 즉 공교회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공교회의 승인은 교회가 근본진리를 공적으로 신앙고백 했음을 말해 준다. 교리는 교회의 신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성경의 진리를 믿는 교회의 신앙이 교리를 결정했으므로, 모든 교리는 구원과 구속과 관계가 있다. 따라서 교리들은 이론적 성격이 아니고 구원 진리의 표현이다. 교리가 형성될 때 교회의 자의적 이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교리는 성경이 교회로 하여금 구원 진리를 이해하도록 인도했기 때문에 만들어진다. 교리에 대해서 하르낙 (Adolf Harnack)은 교리가 성경에서 나온 진리를 공식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희랍화”로 보았으나 성령께서 교회의 구원 진리의 이해를 도우므로 지금의 교리들이 공식화되었다. 교리의 공식화는 성경에 계시된 구원 진리를 성령의 인도에 의해 이해된 대로 이루어진다. 신학자의 작업 보다 성경 진리와의 합치가 더 중요하다. 성경 진리와 합치하지 않으면 그 교리는 교회에 의해서 배척되고 수납이 거부되었다. 그러므로 교리 형성에 성령의 인도가 결정적이라고 해야 한다. “교리 발생: 이단의 위협으로 정통신앙 확정의 필요성” 교리는 교회 존립이 위협받고 있을 때 발생했다. 교회의 첫 신앙고백(Credo, credimus)은 주 예수(Kurioj Ihsouj, Kyrios Iesous)였다. 그들은 모든 사도의 가르침(tota doctrina)를 믿었다. 그러다 교회의 진행과 함께 이단의 발생으로 우리의 믿음(fides)을 분명히 하고 그 한계를 설정할 필요를 느끼고 바른 믿음의 조항들(articuli fidei orthoxae)을 정했다. 바른 믿음 곧 정통신앙(fides orthodoxa)을 분명히 하기 위해 사도들의 가르침을 명제화한 것이 2세기 중엽에 나타난 “사도신경”(Symbolum Apostolicum)이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라 사도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다. 사도신경과 거의 동시에 “신앙의 규범”(Regula fidei)이 나타났다. “신앙규범”은 사도신경보다 더 자세하여 동방교회가 사용했다. 동방교회는 신앙규범을, 서방교회는 사도신경을 사용하고 있다. 교리 작성을 위해서는 신학자들이 주로 교리를 공식화하였고 공교회가 승인하여 교리가 탄생되었다. 둘째로, 교회의 자체 필요성 곧 교회가 가진 믿음 내용을 분명히 하고 신자들을 올바로 교육하기 위해 교리를 확실하게 했다. “교리의 시대적 전개” 삼위일체 교리: 교리는 기독교의 근본진리들이지만 단번에 이해되고 공식화되지 않았다. 교회의 진리 이해와 함께 개진되었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사 구원을 이루었으면 기독교만이 참 종교요 유일한 구원종교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으로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이 신앙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인 삼위일체 교리가 공식화되었다. 기독교는 유일신론에 근거해서 발전하였으므로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처럼 하나님으로 이해되고 신앙 고백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레안(Areios)주의가 일어나 325AD 니카야 공회의부터 4-5세기경까지 오랜 논쟁을 통하여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 교리도 동서 교회 간에 완전한 일치를 보지는 못했다. 기독론 논쟁: 삼위일체 논쟁이 끝날 무렵 기독론 논쟁이 대두되었다. 기독교의 근본 진리인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되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이면 어떻게 하나의 인격이면서 하나님이며 사람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필연적으로 대두되었다. 기독론의 논쟁은 오랜 논쟁을 거쳐 5세기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어 431AD 에베소 공회의에서 시작되어 451AD 칼케돈 공회의에서 공식화되었지만 논쟁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칼케돈 공회의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vere Deus)과 “참 사람”(vere homo)으로서 한 인격에 두 본성을 가지신 것을 정통 교리로 확정했다. “은혜와 죄의 관계가 서방교회에서 대두”: 기독론 교리가 확정되므로 은혜와 죄의 관계가 서방 교회에서 크게 대두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와 펠라기우스(Pelagius) 간에 전개된 논쟁에 동방교회는 참여하지 않았다. 동방교회는 “타락”을 다루는 펠라기우스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동방교회는 “신화”(deificatio)를 신앙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동방교회는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로 만족했다. “이신칭의 교리 확정”: 종교개혁은 구원방식 때문에 발생했기 때문에 믿음과 선생이 아니라 단지 믿음만으로(sola fide), 오직 은혜만으로(sola gratia)를 취했다.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종교개혁의 근본 교리가 되었다. “교리의 필요성” ① 교리는 교회이 서고 넘어짐의 조항(articulus constitutivus ecclesiae)이다. 교리를 아는 것은 바른 신앙이 무엇인 줄을 아는 것이므로 바른 신앙에 서게 되고 이단적인 사상에 빠지는 것을 막아준다. ② 교리가 교회 존립의 기초이므로 교리의 이해는 성경의 진리들을 바로 이해하게 해주는 길잡이가 된다. 성경의 해석이 교회의 교리와 일치하면 바른 주석이고 그렇지 않으면 바른 해석이 아니다. 주석 자체만으로는 바른 주석 여부를 판가름할 수 없다. ③ 교리는 교회의 근본 진리이므로 모든 신학의 기초가 된다. 교리는 신학적 작업에 의해서 발생했지만 모든 신학함에 있어서 그 출발점이 되고 그 표준이 된다. 그래서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지키고 보호하여 기독교가 기독교로 남게 하는 일을 한다. ④ 신학은 교리를 설명하고 표현하여 기독교의 불변의 진리로 남도록 하는 일을 해야 한다. 교리는 신학의 표준과 규범으로 역사한다. “교리사의 직임” 교리사 (Historia dogmatum, Dogmengeschichte)는 교회의 교리들을 그 탐구의 대상으로 갖는다. 교리사는 교리의 성경적 확장을 재생산한다. 교리사는 교리들의 공식화 과정을 기술한다. 교리사는 원본들을 직접 탐구하므로 교리 발생의 원천들과 그 귀결에 이르도록 하는 세력들을 제시한다. 교리사는 교리의 공식화에 이르도록 하는 필연적인 과정과 기원을 밝혀, 그 교리를 교회가 필연적으로 수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을 그 직임으로 삼는다. 교리사는 교리들이 서로 떨어진 별개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것임임을 밝힌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교리에서 도출되었다. 그리스도의 신성교리와 삼위일체 교리는 별개가 아니다. “교리사의 전개방식” 교리사는 교리의 발생과정과 그 결정을 다루는 학문이므로 교리가 처음 어떤 상황에서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살피며 교리 공식화에 이르도록 한 신학자들의 저술들을 직접 살펴서 교리가 그렇게 형성될 수밖에 없었음을 밝힌다. 교리 공식화에 철학적 용어들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희랍화의 결과가 아니라 성경적인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개진하기 위함인 것을 밝힌다. 교리사는 “신학사가 아니므로” 교리 공식화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교부들의 사상만을 다룬다. 그리하여 삼위일체 교리의 공식화 과정에서는 삼위일체 논의들만 다루고 기독론 교리의 공식화 과정에서는 기독론 논의만 다룬다. “교리사의 구분” 1) 교리사는 처음 교리(dogma)인 니카야 신경(symbolum Nicaenum, Nicene creed)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Nicaenum 뿐 아니라 후기 교리 구성이 모두 고대 카톨릭 교회의 신앙과 진리 이해에 의거하므로 교리사는 속사도 교부 시대부터 시작한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종교개혁으로 발생한 개신교회의 신앙 고백서들은 고대교회의 교리와 같은 보편적 타당성 을 갖지 못하나 교리의 성격을 가진다. 2) 교리사는 세 시대로 구분되는데, 본 교리사는 고대의 두 기본 교리인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만 다룬다. ① 고대교회에서 교리가 형성되었다: 속사도 교부들의 견해와 고대교회 시대의 신학적 교리 발전을 제시하므로 교리 성립의 근거를 제시한다. 여기서는 신앙의 규범 (regula fidei, 120-150AD)과 사도신경도 제시한다. 그 다음 희랍 교회 지반에서 이루어진 교리들 곧 삼위일체, 기독론 교리, 성화숭배를 주로 제시하면서 서방 교회 지반에서 이루어진 교리 전개도 제시한다. ② 중세 교회에서 교리가 유지되었지만 고대교회의 교리들이 변형되었기 때문에 중세 교리사는 고대 교리들이 희랍철학과 기독교 신앙의 조화 시도에서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그 과정을 제시해야 한다. ③ 종교 개혁에 의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신학이 어떻게 루터교회의 교리가 되었는지를 살핀다. ④ 칼빈(Johannes Calvin, 1509-1564)에 의한 바른 기독교 이해가 개혁교회의 교리로 확정된 과정을 살펴야 한다. 돌트레히트 총회에서 칼빈주의 교리들의 확정도 다루어야 한다. ⑤ 반동종교개혁 (counter-Reformation)에 의해 고대교회의 교리들에 반대해서 이루어진 로마교회의 교리 확정인 “트렌트” (Tridentum, Trent, 1545) 공회의의 교리 결정을 다루어야 한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을 거부한 것과 위계질서의 확립 (Vaticanum, 1870)을 다루게 된다. 종교다원주의를 교리로 정한 바티칸 제2공회의 (Vaticanum Ⅱ, 1962-65)도 다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로마교회는 근세의 결정들도 고대교회의 교리와 같은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⑥ 본 교리사에서는 삼위일체와 기독론 교리를 취급하기 때문에, 속사도 교부들의 사상에 서 출발하여 787년 제7차 에큐메닉 공회의에서 성상숭배 결정까지를 다루는 것에 국한한다. 제1편 교리발생의 전제들 2. 구약성경의 교리적 근거 2.1. 유일신 교리 (dogma of monotheism) 구약 백성들은 자기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하나님이 여호와로서 창조주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천지 창조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의 구주로 일하신다는 확신에서 살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언약을 맺어 자기의 백성 삼은 여호와임을 확신하고 섬겼다. 유대교는 유일신 교리를 유일한 교리로 삼았기 때문에 유일신을 강조하는 신명기 6:4을 암송했다. 모세의 글과 모든 선지자들의 글의 가장 기본이 되고 핵심이 되는 것이 “쉐마”이다. 쉐마는 기도가 아니라 신앙고백으로서 유일신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쉐마를 암송하여 자기들의 거룩한 사명 곧 유일신 신앙을 고수할 것을 다짐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접근할 수 없는 존재로 이해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단지 일년에 두 번만 대제사장이 이 여호와 이름을 부르게 하였다. 화해절과 지성절에만 이 이름을 부르고 그 외는 “아도나이”(ינדא, Adonai), 주님으로 대치하여 불렀다. 여호와 하나님은 “숨겨진 하나님”(Deus absconditus)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견해는 예루살렘 성전 구조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은 지성소에 계시는데 그곳은 성전 내면에 축조되었으므로 모든 빛이 차단되었고 창이 전혀 없었으며 또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만 들어갈 수 있게 허락되었다. 그러므로 지성소에 계시는 하나님은 접근불가하고 숨어 계시는 하나님으로 표상되었다. “숨겨진 하나님 사상”: 하나님은 처음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부터서 어두운데서 창조를 시작하시고 밝은 빛을 내셨음이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숨겨지신 하나님을 가장 많이 말하고 강조한 선지자는 이사야였다(사 45:15). 어두운 곳에 계신 하나님의 표상은 하나님의 주권성을 포함하고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을 임의로 어찌 할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유일신 신앙을 신약교회가 그대로 받았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창조주와 구속주로 믿는 유일신 사상이 신약 교회의 기본 신앙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도 유일신 사상을 그대로 받았다(막 12:29-30). 여호와를 후기 구약 교회는 아도나이, 주님으로 호칭하였다. 그런데 칠십인경(LXX)의 번역을 따라 주님(kurioj)의 호칭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적용되므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여호와와 동등하고 동일자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렇게 유일신 사상에서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가 형성되는 기반을 이루었다. 2.2. 언약 관계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출애굽한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소유가 되었다(출 19:5-6; 19:1-24:11). 언약은 하나님이 한 백성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하여 자기의 백성으로 삼고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김과 경배를 받으시려고 하셨다(출 19:16-23:19). 인류가 하나님의 백성 되는 길은 언제든지 언약 체결을 통해서 된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성막을 짓게 하시고 성막에 거처를 정하시므로 백성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다. 백성들 각자 안에 거하셔야 하지만 아직 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완전히 속량되지 못하였으므로 전체 위에 거처하셨다. 따라서 성전이 하나님의 거소요 임재의 표가 되었다.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면 그들은 거룩해야 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존재이므로 죄 가운데는 거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했다(출 19:6; 레 19:2; 신 23:14). 하나님은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고 또 거룩한 백성을 가지기 위해서 그들에게 율법을 베푸셨다. 율법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로 주어졌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남고 존속된 것은 바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 때문이었다. 가나안에서 이방신들을 섬길 때도 다시 여호와에게로 돌아갈 명분은 바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 때문이었다.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출 20-24장)이 항상 이스라엘을 여호와 하나님에게 매이게 하였고 여호와 종교를 버렸다가도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명분을 갖게 하였다. 왜냐하면 이 언약 체결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그들은 깊은 선민의식을 가졌다. 하나님의 선택되고 소유된 백성이라는 의식이 늘 그들을 지배하였다. 하나님은 창조 후에도 첫 인류와 언약을 체결하셨고 이스라엘을 백성 삼고자 하실 때에도 언약을 체결하셨다.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세워질 새언약을 위해 존재하였다. 그 새언약은 모든 인류를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 일을 위해서 준비되었다. 이스라엘과의 언약은 교회를 목표하고 이루어졌다. 2.3. 율법 제도 율법은 “언약백성의 생활규범”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체결하사 자기의 백성을 삼으셨다. 그리고 언약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계명을 베푸셨다. 언약백성이 지켜야 할 계명으로 주신 것이 율법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므로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했다. 율법은 언약 백성이 의존해서 살 거룩한 하나님의 계명이므로 율법을 지킴으로만 언약 백성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율법은 언약 백성들의 생의 질서를 표현하였다. 언약은 약속된 거룩이고 율법은 이 거룩을 지키는 울타리로 그 훼손을 막는 일을 한다. 율법을 지키면 언약의 거룩이 지켜지기 때문이다. 언약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소로 지목되었기 때문에 거룩해야 했다. 이 거룩에의 길은 언약의 법을 지킴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거룩의 요구가 계속적으로 반복되었다. 유일신 교리가 구약 종교의 유일한 근거이고 “토라”(율법, 가르침, 교훈)는 언약 백성의 생의 법칙이었다.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백성 되었으니 그 백성으로 남 는 길은 율법에 매이고 그 율법을 신실하게 지킴으로 되었다. 이스라엘은 언약 체결을 통해 여호와만 하나님으로 섬기도록 작정되었고 이 하나님 섬김의 법으로 율법이 수여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여호와를 섬김은 그의 법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들어야 했다. 과거 하나님의 큰 구원 사역을 선포 받을 뿐 아니라 구원의 성취를 약속으로 받았다. 이방인들이 신앙 대상을 보고 섬기는 것과 달리,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볼 수 없고 단지 말씀의 선포만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상을 표현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사람이나 짐승의 상도 그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계시의 말씀으로만 삶으로 신 6:4은 그 중에서 최고 계명으로 평가되었다 이스라엘이 율법에 불순종하자, 율법은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했다. 율법은 그 임무를 다하였다. 율법은 지킬 수 없고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지킬 수 없어서 멸망밖에 다른 길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율법의 완성자가 와야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이루어지고 구원이 가능하여 율법이 목표한 것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므로 그 기능을 다하였다. 구원은 구속 주를 믿음으로 되고 율법을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므로 율법은 그 사명을 다하였다. 2.3. 제사제도 제사제도는 율법을 어긴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길이요, 백성들이 살 길이다. 백성의 임무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제사를 하여 이루어졌다. 율법은 제사제도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한 법도를 제시하였다. 계시 종교이므로 경배 받으실 분이 예배의식을 정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도 하나님이 정한 예배의식에 합당하게 드려질 때만 하나님이 받으시고 죄를 용서하셨다. 이 성전제사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기능을 하였다. 제사는 범죄한 자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켜서 그들의 죄를 사해주기 때문이다. 제사를 통해서 백성들은 자기들의 범죄와 계명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용서되어 하나님 의 백성으로 남을 수 있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 하나님을 섬기며 생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 죄가 용서되는 길은 피 흘림으로만이 가능하게 정해졌다(레 17:11). 따라서 속죄를 위해 짐승으로 제사하므로 범한 계명과 범죄를 용서받고 다시 백성으로 살 수 있었다. 제사가 하나님의 호의를 입고 삶을 계속하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제사제도는 속죄를 위해서 세워졌지만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업는 길이었다. 제사제도는 인간의 공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호의에 의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수행되었다. 예루살렘을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시는 곳으로 택정 하셨기 때문이다(신 12:5,11,14; 대하 7:12). 그러므로 성전이 이스라엘의 생활의 중심점이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모든 생활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고 거기에로 귀결되었다. 성전이 이스라엘의 생활의 중심이 된 것은 단지 성전이 제사의 곳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전은 하나님의 암재의 자리였다(신 12:5,11; 왕상 9:3; 대하 6:2). 따라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에 이르러서 하나님이 자기들 가운데 엄재하심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자연히 이스라엘의 삶과 모든 활동은 예루살렘 성전에로 집중되고 그곳을 목표하고 이루어졌다. 성전제사는 반복되고 계속 수행되었지만 나라는 멸망하고 백성들은 범죄를 쉴 수가 없었다.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가 완전한 제사가 되지 못하여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음이 이스라엘의 의식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스 9:6; 렘 5:25; 30:14). 포로기간을 빼고 성전제사가 중단된 적이 없었다. 제사는 계속되어도 속죄는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하여 범죄로 인한 멸망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예루살렘 성전제사는 속죄와 하나님과의 완전한 화해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인식된 것이다(사 66:3). 이것은 바로 성전제사는 완전한 속죄제사를 가리키기 위해 세워졌음을 밝히는 것이다. 레위 제사제도는 완전한 제사로 구원을 완전히 성취하는 참 제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바라보게 하는 임무를 했다. 그래서 레위 제사제도는 그 본래의 사명을 다하였다. 2.5. 유월절 경축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큰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출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며 한 민족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근거들을 마련하셨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이 출애굽을 축하하고 기념하였다. 출애굽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유윌절 행사는 속죄를 위해서 이루어지는 제사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큰 구원을 감사하고 기념하는 것이었다.성전제사는 유월절 경축이 그 절정을 이룬다. 출애굽은 하나님의 근본적인 구원 사역으로 축하되었다. 출애굽이 민족적 단위로 존재하기 시작한 시점인데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출애굽으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 그리하여 언약의 회복과 새 은혜 시대의 시작은 그 유월절 제사의 반복에서 이스라엘에게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므로 나타날 평화의 때를 바라보는 소망이 계속되게 되었다. 출애굽의 큰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이 더 크고 완 전한 구원을 이루실 것으로 기대하므로 완전한 구속은 하나님의 미래 약속으로 남았다. 이 구원은 미래의 구속주가 이루신다. 유월절 식사에서 문이 열려져 있어서 구속주가 언제든지 들어오실 수 있다는 기대가 유월절 경축의 말씀에서 자라났다. 즉 처음 구속에 근거해서 미래의 완전한 구속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월절을 경축할 때마다 구원을 완성할 구원자 곧 메시아를 하나님이 보내실 것을 믿었고 메시아의 도래를 대망하게 되었다. 과거에 큰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이 장래에 완전한 구원을 이루실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재의 불완전한 삶의 체계가 해소되고 완전한 평화의 세상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살게 되었다. 미래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바라며 살게 되어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의 구원에 소망을 두게 되었다. 이 일이 메시아 약속의 실현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스라엘은 메시아 시대를 앞당기는 길은 율법을 잘 지키는데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율법을 잘 지키면 메시아의 도래를 앞당길 수 있다고 믿고 바른 율법의 준수를 위해 전력하는 무리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메시아 대망이 팽배해 있는 이스라엘에게 그리스도는 자기를 메시아로 제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백성들도 예수의 행적에서 메시아 약속의 성취가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유월절 경축의 절정은 유월절의 속죄 제사에 있었다(출 12:1-36). 이 제사가 모든 이스라엘의 제사 중에 가장 중요한 제사였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애굽에서 구출할 때 애굽의 장자를 대속물로 하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장자로 구출하셨다. 그러므로 이 구출을 기념하여 감사 제사를 하였고 또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사유하시기를 위해 속죄 제사를 드렸다. 이 구속을 위한 제사 개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백성들의 모든 죄를 담당한 제물로 제시될 수 있었다. 2.6. 선지자 제도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부단히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에서 이탈하는 것을 경고하고 다시 하나님 섬김에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셨다. 하나님의 법에 서 이탈할 때 첫 번째 계명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라는 계명이었다. 백성들이 언약 파기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징계를 보내셔서 압제를 받고 또 국가적 존립이 위협되는 경우들을 만나게 하셨다. 이 국가적인 존립의 위험도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벌하시기 위해 섭리적인 조치로 해석하게 하셨다. 돌이켜서 여호와만 섬기면 모든 국가적인 재앙을 돌이켜 없이하겠다고 약속하셨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면 선한 해결을 주시겠다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주셨다. 선지자들은 이처럼 역사의 진행을 해석하여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드러내었다 멸망의 위기에 선지자들은 민족의 회복과 회복 후의 큰 구원섭리를 선포하였다. 이스라엘이 멸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로에서 돌아와서 다시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 될 것임을 강조하여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하게 하였다. 선지자들은 위기의 경우에 책망과 위로와 깨우침을 베풀고 이적들을 행하여 하나님이 아직도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지키시는 것을 알게 하였다. 그러나 선지자들의 근본 사명은 백성들을 다시 돌이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그 하나님 여호와를 바로 섬기게 하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어떻게 섬기는 것이 바른 섬김인지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였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을 설명하고 제시하였다. 한 민족이 바로 서는 것도 중요 하지만 이스라엘은 전 세계의 구원의 전령으로 일함을 선포하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모든 땅위의 종족들이 구원에 이를 것이다. 선지자들로 훈련받은 백성들이 예수의 출현을 그 선지자로 이해하였고 기대하였다(요 1:21-25). 예수도 이 선지자의 반열에 섰고 그 선지자로 이해되었다(마 21:11). 2.7. 메시아 대망 이스라엘은 노예로 출발하였고 포로와 노예생활로 끝났다. 주전 15세기 출애굽 후 8세기 말엽까지 이스라엘은 민족적, 독립적인 왕국을 이루며 살았으나 주전 722 북방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여 포로 생활이 시작되었다. 586에 남방 유다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하였다. 소수의 무리들이 바벨론 제국에서 게토를 이루어 살며 해방과 귀환의 날을 기다렸다. 그후 파사의 고레스에 의해 귀환령이 내려 4만 여명이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건축하고 살았지만 파사의 속국이었고 독립된 나라가 되지 못한 것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스라엘이 독립국가가 되어 살지 못하고 속국이 되어 사는 것은 파사 제국의 시대를 지나 헬라제국에 매여 살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스라엘의 독립은 이미 지나간 일이 되어버렸다. 헬라제국에 매여 살다가 마카비 가문에 의해 나라가 처음으로 BC 165년경에 독립하여 백 여 년간 평화로운 나라가 되었으나 왕실의 내분과 사두개파의 반발로 BC 63에 다시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이런 여러 세대에 걸친 노예와 속국으로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만 가능하다고 믿게 되었다. 바벨론에서의 귀환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통해 하나님이 약속한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파사와 헬라제국에서의 독립은 사람의 방식으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는 길 외에는 인간의 방식으로는 전혀 불가능하게 되었다. 옛날 애굽에서의 구출은 모세를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파사와 헬라제국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람의 손으로는 안 되고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는 길뿐임을 절감하였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는 길은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시는 길뿐이라고 모든 백성이 확신하였다. 그러다가 헬라제국 곧 시리아의 헬라제국에서의 해방과 독립은 마카비 가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고대 역대 제국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인 로마에 속박된 후에는 자유와 독립은 사람의 손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야 이스라엘이 이방의 압제에서 해방되고 영화로운 다윗 왕국을 세워 세계를 지배하게 하는 길도 하나님이 직접 구원하시는 길뿐이라고 믿고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를 열망하게 되었다. 더 이상 사람에 의한 구원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하게 여겨졌다. 모든 백성이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므로 나타날 메시아 곧 하나님 자신의 구원을 기다렸다. 이런 정치적 종교적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고 구원을 말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메시아 대망이 온 백성들의 신앙이 된 영적 지반이 아니고서는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등장과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는 자기를 구약 백성들의 지도자들 곧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보기 바란 그런 메시아로 자신을 제시하였다. 이런 메시아 대망의 상황에서만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드릴 수 있었다. 바로 구약 백성들이 메시아의 출현을 열망하고 있을 때 예수가 메시아로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고 구속을 위한 그의 죽음을 말할 수 있었다. 메시아 대망의 열렬한 신앙에서만 이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이해하고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 인정하고 믿을 수 있는 지반이 조성되었다. 2.8. 고난의 종의 사상 이스라엘은 다윗 같은 영웅적인 메시아를 기대하였다. 이스라엘을 외부의 압제에서 구출하고 모든 민족들 위에 지배하게 해 줄 그런 메시아를 기대했다. 하나님의 통치는 메시아를 통해서만이 이루어질 것이다. 메시아의 오심 없이 이스라엘이 강대국들의 압제를 벗어날 길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와야만 강대국들의 압제에서 벗어나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하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유다도 망하게 되었을 때에 선지자들이 민족적인 수난에 동참 하며 민족의 구원을 간구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허물과 죄과가 아닌데도 고난을 받았다. 민족이 크게 범죄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대신 고난을 받는 과정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의로운 선지자여서 고난과 고통을 당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민족을 대신하여 고난받는 고난의 종들이 되었다. 이사야는 육체적인 고통과 고문은 당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과 유대의 멸망을 예견하며 영적으로 큰 고통을 경험하였다. 그러면서 의로운 사람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대신 고통을 당하며 민족의 죄 뿐만 아니라 모든 종족들의 죄를 해결하는 고난의 종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고난의 종은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자들을 위해 공의를 행할 뿐만 아니라 이방에게까지 공의를 베푸는 자로 제시되었다(사 42:1-4). 고난의 종은 고난의 종이므로 메시아로 왔어도 풍채와 외모가 별로 흠모하고 사랑할만한 것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자기가 위하여 일하려는 백성들에게 버림과 모욕을 받고 간고를 겪었으며 질고를 체휼하는 종이었다.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고난당하였고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인해서 찔림을 당하고 몸을 상하여 속죄 제사를 하므로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출할 자이다. 고난의 종은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할 뿐, 여호와의 신으로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이다. 이 메시아가 고난받음으로 백성들을 회복하고 그들을 구원한다(사 61:1-3). 이사야의 이 예언과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지 않고 고난의 종으로 와서 고난을 받게 되었다(막 10:45). 그 고난은 구약 선지자들이 당했던 고난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는 처참한 고통이었다.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한 이스라엘에게 고난의 종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해될 수 없었고 수납될 수가 없었다(요 3:14; 8:28; 12:32-34). 그러나 고난의 종이 예언되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의 종으로 이스라엘과 세상을 구원하는 대속적인 죽음을 감당할 수 있었다 (요 11:51-52). 메시아가 절대적 권세를 가지고 와서 다윗 왕국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고 고난의 종으로 와서 죄과를 인해 죽음으로 백성을 구원해낸다는 사상이 준비되었다(사 53:2-12; 61:1-3).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고난의 종으로 와서 인류의 죄악을 위해 어린 양으로 죽으므로 세상을 구원하는 새로운 메시아 사상이 준비되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신약 성경의 교리적 근거 3.1. 예수의 메시아 주장과 수행 3.1.1. 예수의 자기 증거 예수는 “자기를 메시아로 선포하고 증거”했다. 예수는 자기가 이스라엘이 바란 메시아임을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사 61:1-2)을 읽어 그것이 자기에게 성취되었다고 하므로 자기의 메시아 직임을 선포하였다(눅 4:16-21; 사 61:1-2).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보는 눈과 가르치는 것을 듣는 귀가 복이 있다고 하므로 구약 백성들과 선지자들이 그렇게도 보고 듣기 바랐던 메시아임을 확실하게 하였다(마 13:16-17). 예수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했다. 하나님을 계시하고 알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육신인 아들만이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예수는 자기가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이스라엘의 메시아임을 알고 의식하였기 때문에 구약 여호와에게 적용되었던 주님(Adonai, kurioj) 호칭을 자기에게 그대로 적용하여 자기를 “주님”이라고 하였다: “주가 쓰시겠다”(마 21:3, o` ku,rioj auvtw/n crei,an e;cei\); “나를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마 7:21, Ouv pa/j o` le,gwn moi\ ku,rie ku,rie( eivseleu,setai eivj th.n basilei,an tw/n ouvranw/n) 예수는 자신이 구약의 여호와라고 egw eimi로 했다. 요 8:28에 의하면 예수는 자기를 지칭할 때 구약의 야웨 הוהי의 희랍어형인 egw eimi를 사용하므로 자신 이 구약의 여호와임을 간접적으로 지시하였다. 따라서 이 구약의 여호와 하 나님의 성육신이 자신임을 지시하기 위하여 인자란 호칭을 자기에게 전유적으로 적용하였다(막 2:10,28; 10:33,45; 13;26,29; 14:21,62과 공관복음의 평행절들). 예수는 자기가 성육신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성전보다 더 큰이”라고 자신을 지목하였다 (마 12:6). 성전보다 자신이 더 크다고 하므로 바로 자신이 그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간접 화법으로 증거하였다. 예수는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라고 말하므로 죽음에 이르렀다(막 14:61ff). 예수는 자기의 지상 생의 마지막 시간에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시하였다. 이 자기의 호칭이 그의 십자가 처형과 정죄의 근거이다. 이 말씀은 예수 자신의 말(verba ipsissima)이다. 3.1.2. 예수의 전권 주장 예수는 자기를 메시아로서 의식하고 일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자기의 메시아 주장을 산상 수훈의 전권주장을 통하여 숨김없이 나타냈다. 그는 자신을 새 율법의 선포자가 아니고 옛 하나님의 말씀의 참 뜻을 밝히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 나타내었다. 옛 율법이 아니라 예수의 새 말씀들을 지켜야 하나님 나라에 속하고 그의 백성으로 사는 것임을 분명히 하여 자기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따라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예수는 자기가 하나님의 성육신이기 때문에 병자에게 사죄를 선언하였다(마 9:2-6)· 유대교에는 메시아가 사죄의 권세를 갖지 않는다.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면 충분하여 나라를 회복하여 그 직임을 다 수행한다.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편히 쉬게 한다고 하여 죄와 율법의 멍에에서 해방을 가져다주는 메시아임을 강조하였다(마 11:28-30). 이스라엘이 바란 메시아는 정치적인 해방은 가져올 수 있었어도 죄와 율법의 질곡에서 해방은 할 수가 없었다. 안식일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며 예수는 자기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였다(마 12:8). 자기가 창조주이고 안식일을 제정한 자임을 제시하고 주장하였다 예수는 공생애 시작을 새 백성들이 지키고 따라야 할 가르침으로 시작하였다. 산상수훈에서 새 백성들이 지켜야할 법도들을 선포하였다. 예수는 메시아로서 새 백성을 세워야 했다. 제자들을 세워 기존 이스라엘을 대치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통해서 제자들을 부르셨다(마 10:2-7). 예수는 메시아로서 죽어 백성들을 구원해야 할 자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성전 경내에서 성전을 헐라 그리하면 삼일에 새로운 성전을 세우겠다고 하였다. 예수는 인자 칭호를 사용했다. “인자”란 자기 칭호를 하나님으로서 사람됨의 신비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인자 곧 사람으로서는 그는 전적으로 인간 세대에 속하고 따라서 고난과 죽음에로(요 12:34) 들어간다. 예수는 자기가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다. 하나님과 독생하신 아들 간에 독특하고 또 기술하기 어려운 일치가 성립한다. 즉 유일신에 자기를 포함시켰다. “유일하신 아들”(o monogenhj)이 하나님으로 하나님 편에 속함을 강조하였다. 예수는 유일신 신앙에 자기를 포함시켜 유일신 신앙 고백에 새 내용을 담았다. 3.1.3. 메시야직 수행 예수는 자기가 온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함이라고 명시하여 메시아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는 고난의 종으로 왔음을 밝혔다(막 10:45; 요 10:11-15). 예수는 부활로 자기가 하나님의 성육신과 그의 죽음, 속죄제사임을 밝혔다. 메시아로서 백성들을 고치고 먹이는 사역을 맡았음을 밝혔다. 3.2. 초대교회의 신앙고백 3.2.1. 주 예수: 교회의 최초의 신앙고백 베드로의 설교의 중심은 하나님의 구원으로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었다. 이 방식으로 교리 형성의 시초가 되는 신학적 작업을 이루었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행적과 구원 사역을 직접 목도하였으므로 그의 사역 이 하나님의 구원이었다는 것을 확신하며 살았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그냥 랍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육신인 줄 알았으므로 그에게 구약 여호와에게 적용되었던 주님(Kurioj) 칭호를 적용하였다. 예수가 주로서 천지의 대권은 부활로 받았으므로 부활 후부터 “주 예수”라는 고백과 호칭이 주저 없이 이루어졌다. 3.2.2. 예수 부활자를 신앙함 사도들의 선포의 핵심은 주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고 부활하였다는 데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선포하였다.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의 사역으로서 그의 죽음에 구속을 결합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로 주님이요 생명의 주로 고백되고 신앙되었다(행 23:6). 3.2.3.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 예수는 구주로서 자원적인 죽음을 당하므로 세상을 구원하였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우주 만물의 화해자가 되었다. 교회는 예수에 대한 신앙을 찬송시로 공식화하였다(빌 2:5-11; 골 1:15-20; 딤전 3:16). 이 찬송은 구속의 영역에서 주님의 권능과 주권을 표현한다. 이 공식들은 후에 삼위일체 교리의 공식들의 근거가 되었다. 3.2.4.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인류를 위해 이루어졌으므로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간에 누구든지 주 예수의 희생 제사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의에 이르러 구원에 이른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율법 행함이 아니라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된다. 믿음으로 의에 이르고 구원에 이른다(롬 8:8-10). 3.2.5. 예수 하나님의 아들 “구속을 이루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삼위일체 교리”의 기초가 된다. 복음서와 초대교회의 전통에서 예수의 인격이 더욱 강조된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다윗의 자손 등과 관련된 모든 것이 더욱 상세히 설명된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사상의 중심에 깊이 서게 되어 교리 형성의 제일 단계가 이루어졌다. 3.3. 바울의 신학 바울은 유대교도로서 가졌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다 버리고 즉 하나님은 성육신하실 수 없다는 생각을 고쳤다. 천상의 창조주이시고 창조 중보자이신 하나님이 성육신 하여 사람이 되시되 종의 형상으로 나타나시어 십자가에 죽음으로 구원을 이루었음을 확실하게 알았다. 바울은 초대교회의 증거들을 더욱 발전시켜 신앙이 논리적인 귀결에 이르도록 했다. 주요 신앙의 요점들 즉 그리스도의 사건을 하나님의 구속 사역으로서 구약에 의해 이해하고 정리하여 교리(dogma) 형성의 길을 제시하였다. 3.3.1. 그리스도의 인격 바울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는 신적 대권자요 창조주로서 성육신하신 분이시다. 하늘에서 하강한 구속주이지 하늘로 높이 올리워져서 경배받는 이방 종교들의 설립자들이나 이방 종교인들이 섬기는 신적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다. 바울은 만물 위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 구주가 되셨음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 고백한다(딛 2:13).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창조주요 창조 중보자임을 명백히 한다. 그리하여 창조주의 공식을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적용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선재자로서 창조를 직접 이루신 분임을 분명히 한다. 율법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성육신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지만 바울은 부활자를 직접 만나므로 선재하신 하나님의 성육신을 이해하는 것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고 공식화한 것을 바울이 취택하였다. 바울은 희랍 세계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혼을 입은 신적 존재자의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로 말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할 때 그 호칭은 하나님 아버지와 질적으로 열등한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적인 일치를 전제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에게 사용되었던 어법이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적용되었다. 하나님이 권세를 가진 것을 그가 가진 것으로 말하였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간의 본질적인 일치 때문에 바울은 전권 공식을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에게 교차 사용하였다.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만의 아버지인 것을 지시하는 호칭인 아빠 아버지라고 불러 예수 자신이 본래 신적인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명백하게 하였다. 바울이 예수를 주라고 부름에 있어서 예루살렘 교회의 전통을 따른 것은 바로 그가 아람어로 된 호칭 “마라나다”(maranatha, 주여 오시옵소서)에서 잘 드러난다. 바울은 이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기원하고 예루살렘 교회가 공식화한 주(Kurioj) 칭호를 그리스도에게 아무 주저 없이 사용하였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할 때 그의 하늘의 영광을 지시하기 위해서 사용하였다. 바울은 빌 3:29; 4:5에서 주께서 심판주로 하늘로부터 오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 주는 예배 의식에 임재해 있는 영적 주가 아니라 심판주로 오실 주님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호칭인 인자를 받아드려 둘째 아담으로 제시하였다. 바울은 참 아담은 그리스도이며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명시하였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말하여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의 근거를 놓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삼위일체 교리를 희랍철학을 받지 않고 성경에 근거하여 세웠다. 3.3.2. 그리스도의 사역 바울은 그리스도가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사역에 동참하시고 창조를 이루신 중보자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과 세상의 화해로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의롭다함으로 말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전우주적이어서 모든 영적 세계를 정복하고 그것들을 무력화하였다고 선언한다. 이 모든 일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신 것이다. 바울의 기독론은 무엇인가?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사 구속을 이루시고 창조를 완성하셨다고 밝힌다. 3.3.3. 이신 칭의와 복음과 율법의 관계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선언한다. 아브라함이 할 수 없는 중에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이 되어 믿음으로 사는 자들의 조상이 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의에 이름은 율법을 지킴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과 상관없이 믿음으로 되게 작정되었다. 율법은 구원사적 섭리에서 도입되었다. 그리스도 믿음을 재촉하고 예비하기 위해서 율법이 도입되었을 뿐이므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율법으로는 전혀 불가능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바울은 아브라함에서 출발하고 하박국에서 의인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를 확립함으로 신약의 기독교의 교리를 확립하였다. 각 개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예수를 믿는 것은 이미 구약 선언의 성취가 된다. 바울은 구원의 구원사적 섭리를 강조하였다. 3.3.4. 세례와 성령 받음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이다(롬 6:3-11).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에게 연합함은 구속주 자신의 길과 연합함이어서 죽음과 영광의 길에 동참한다. 그리스도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aparch)가 되고 성령의 내주가 그 보증(arrabwn)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에 부활과 영생은 확실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죄의 용서에 근거한 칭의를 받았다. 죄에서 해방되었다. 이는 성령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성령으로 사는 것은 율법과 죄의 매임에서 해방이다(롬 6:10-11). 그것은 바로 새창조에 접붙임이어서 새창조물이 된 것이다. 신형상 회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가능하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인데 그와 연합하여 그의 형상을 닮으므로 신형상으로 회복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새창조이고 그리스도는 몸이며 그 지체들은 개별 그리스도인들이다. 3.4. 요한의 신학 3.4.1.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의 동일성 요한은 영원한 아들의 성육신을 말할 때,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적 일치를 강조한다(=호모우시오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성육신을 말할 때에 하나님 내에 위격적인 구분이 있음을 알았다. 성육신하신 이는 로고스 하나님이고(요 1:1-14)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말한다(요 1:18). 이 하나님이 성육신하사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요한은 이에서 나아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사야가 환상 중에 본 그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강조하므로 성육신하신 이가 바로 구약의 하나님으로 일치시킨다. 이사야가 여호와의 영광을 본 것을 (사 6:1-10)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 것으로 설명하므로(요 12:38-41) 삼위일체 신학에로의 길을 열었다. 요한복음은 도마의 신앙고백으로 마친다: “나의 주 나 의 하나님”(O kurioj mou kai o qeoj mou). 이것은 삼위일체 교리의 근거가 된다. 성육신자와 로고스 곧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 간에 등치가 이루어진다. 여기서 아들과 아버지의 "동일실체"(omoousion)가 귀결된다. 그러므로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선재하였음이 증거된다. 영원하신 아들이 바로 지금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심을 확증한 것이다. 요한은 성육신자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여 가현설을 배척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인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요한은 자기들과 함께 살 때의 경험을 그 증거로 들었다(요일 1:1-2). 그는 하나님이 성육신하사 육이 되셨음을 강조하여 영지주의의 가현설을 강력하게 배척하였다. 3.3.2. 성육신하여 인자가 됨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가현이 아니고 완전한 성육신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이므로 그 안에 인성과 신성의 두 본성의 연합이 통일성과 변증법으로 묘사되어 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이라고 할 때 육이라고 하므로 참으로 사람이 되셨음을 강조한다(요 13:4). 예수는 성육신하사 강림하였으므로 이전의 하늘에로 돌아감을 반복적으로 강조하였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자로 제시되었고 하나님의 아들로 반복적으로 고백되었다(요 14:9).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였으므로 본래의 영광을 갖지만(요 1:14) 성육신자는 본래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에는 미치지 못하는 영광을 가지므로 자기를 비우셨음을 강조한다(요 12:41; 17:5,1). 예수 자신이 한 말들은 자기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하신 것이다(요 12:49-50; 14:30). 아버지와 아들이 일치하므로 아들이 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가 그 안에서 하는 것이다. 케노시스의 논리는 무엇인가? 지상 예수는 케노시스(kenosis)론의 전제들로부터 묘사되어 있다. 예수는 그의 인간적 형태에서도 세상을 능가하면서도 선재자의 영광보다는 못하나 비밀한 영광을 소유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니면 하나님 자신의 계시가 불가능함을 말한다. 요한이 대항해서 싸운 대상은 그노시스주의이다. 이 주의는 하나님의 사람에게의 계시 현현은 단지 가상적으로만 인간의 형체를 입었고 실제로는 순수 영적 존재일 뿐이라는 가현설이었다. 이에 대해 요한은 말씀이 실재로 육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다(요 1:14; 요일 1:1-2). 3.3.3.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성육신의 목적은 세상 구속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세상에 온 목적을 세상을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고(요 3:16)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함이라고 선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원하는 구주로 왔으므로 십자가에 달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을 그가 영광을 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죽는 것이 세상을 구원하는 구주로서의 직임을 다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은 자기 스스로 하는 일이다.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이시므로 이런 십자가에 죽는 일을 하여 사람을 구원하였다(요일 3:16).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가 세상에 온 목적은 세상을 구원하여 믿는 자로 다 영생에 이르게 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요 3:15-16). 그러므로 선한 목자로서 자기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룩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믿음이 구원의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제거되므로 영생에 이른다. 죄가 용서되고 제거되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평안을 주셨다. 예수의 살이 영생에 이르게 하는 참된 양식이고 참된 음료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그의 살과 피를 받으면 영생에 이른다. 3.3.4. 그리스도와 성령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세례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세례 주는 자로 제시되었다(요 1:33). 그는 성령으로 세례받아 메시아로 임직되었고 성령을 한량없이 받았기 때문이다(요 3:34).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주기 위해서는 그가 먼저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 죄를 제거해야 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받는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받게 되었다. 요한복음에서 성령은 보혜사로 제시되고 약속되었다. 성령을 다른 보혜사라고 하므로 자기 자신이 원보혜사임을 전제한다. 성령의 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영이 예수의 메시지를 완성한다는 진술은 신앙의 교리사적 전개의 주초가 되었다(요 16:12-15).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구주로 죽으시고 세상을 구원하셨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성령의 본질은 아버지와 아들의 오심이다. 성령의 오심은 성령만의 오심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오심이다. 성령의 내주는 하나님의 내주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처음부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구분되는 인격으로 제시되므로 성령을 하나님으로 공식화하는 삼위일체 교리가 요한복음에 굳게 뿌리박고 있다. 성령은 예수의 신인 위격을 통해서 오므로 예수의 얼굴을 나타낸다(요 16:14). 요한은 그노시스주의에 대항하여 영을 소유하면 현세에서도 죄가 없다는 영지주의의 사상에 반대한다. 신약에 있는 믿음의 내용이 교리화 되었지만 교회의 독자적 작성이 아니다. 요한의 신학으로 형성된 교회가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확립할 수 있게 준비하였다. 제2편 삼위일체 교리 4. 제2세기 삼위일체론 논의 시작 4.1. 교회의 신앙: “한 하나님 창조주와 주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기본신앙은 “한 하나님 창조주”였다. “유일신 신앙”은 구약에 근거하고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와 사도들에게서 가장 근본적인 신앙이었다. 유일신 신앙은 교회의 근본 신앙이 되었으므로 모든 신경들도 이 “유일신 신앙”으로 출발한다. 이 유일신 교리에서, “삼위일체”로 넘어가는 데 교회의 깊은 반성과 많은 신학적 노력이 있어야 했다. 삼위일체의 신학적 논의와 반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때문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성육신이고 자신의 주장 대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교회는 주 예수가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된 대로 고백하고 믿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 예수로 구원을 이루었고 그를 통하여 성령을 교회에 부어주셨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래서 제1조 “한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를 믿었다. 제2조 “한 주 예 수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을 믿었다. 제3조 선지자들을 통하여 구원을 예언한 “성령”을 믿었다 . “신적 위격들의 복수성”에 대해서 니카야 공회의 (concilium Nicaenum, 325) 이전에 “신적 위격들의 복수성”을 교회가 강하게 인식했다. 사도 시대의 교회의 신앙의 주제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 메시아 예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성령의 활동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니카야 공회의까지 성령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이 신앙과 이해가 2세기 중엽에 사도신경(symbolum Apostolicum)과 신앙의 규범(regula fidei)으로 공식화되어 후기 교회의 삼위일체 교리 공식화의 기본과 시작점이 되었다. 2세기의 변증가들은 유일신 신앙을 유지하면서도 하나님 내의 구분을 시도한 사람들이다: 유스티노즈, 유스티노스, 타치아노스, 떼오필로스, 아떼나고라스, 교회의 최초의 신학자인 에레나이오스 등이 당시 변증가들이다. 4.2. 사도적 교부들 4.2.1. 로마의 클레멘트 (Clement of Rome, 30-100) 클레멘트는 이방인으로서 바울의 동역자였다(빌 4:3). 그는 바울에게서 복음을 받아서 그리스도인이 된 후 바울을 도와 빌립보 교회를 목회하였고 복음을 바울에게서 배웠기 때문에 그의 편지에(97AD) 복음의 정신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클레멘트는 “하나님 창조주”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주 나란히 반복한다(Epistula Clementis ad Corinthios Ⅰ, 1; 14; 19; 20; 21; 42; 5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엄위의 홀이시다(Ep. Ⅰ, 16). 그는 죽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부활시키셨다고 한다(Ep. Ⅰ, 24).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다(Ep. Ⅰ, 36). 창조주 하나님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자비와 선을 베푸신다고 강조한다(Ep. Ⅰ, 2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확증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세워지고 성령의 확신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셨다(Ep. Ⅰ, 42). 클레멘트에게 있어서 “주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하시다. 클레멘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을찌어다 라고 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등됨을 암시하고 있다. 4.2.2. 제2클레멘트 (2 Clement) 제2클레멘트는 로마의 주교인 클레멘트가 쓴 편지가 아니라 무명의 인사가 쓴 설교라고 본다. 이 글에는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주제가 담겨 있다. 제2 클레멘트는 독자들을 권고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요 산자와 죽은자의 심판 주로 생각하라고 하였다(2 Qement 1:1).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이고 그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를 알았다. 클레멘트는 그리스도를 영으로 보는 견해를 반복하여 영이 그리스도라고 한다. 클레멘트에게서 영 기독론이 나오게 된다. 4.2.3. 바나바스(Bananbas, 100AD): 바나바스 서신의 저자 바나바스 서신의 저자는 트라얀과 하드리안 황제 통치시에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으로서 평신도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인 바나바스의 저작으로 여기지만 클레멘트 때까지 고대교회에서 아무도 바울의 동역자에게 저작권을 부여 하지 않았다. 바나바스는 그의 서신에서 주 예수의 구속에 주의를 집중한다. 구약을 거의 그리스도의 구속의 예표로 취급한다. 이삭의 제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의 예표로, 구약의 제물로 쓰인 염소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예표라고 제시한다. 그는 십자가의 고난으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냥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육체로 와서 우리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바나바스는 영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영을 삼위의 한 위격으로 보고 있다. 영과 그리스도를 분명히 구분하고 혼동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부르러 오신 이를 하나님이라고 하므로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일치시킨다. 바나바스는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영”을 구분해서 말하므로 하나님 내의 삼중 구분을 알고 제시하고 있었다. 4.2.4. 이그나치오스 (Ignatios, 30-107 AD) 사도 요한의 제자인 이그나치오스는 주님이 사도들 가운데 세우고 축복해주신 그 어린아이로 알려져 있다. 사도 요한의 사상을 따라 그의 사상 중심은 “그리스도”이며, 최초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교부이다. 이그나치오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 안에 오신 하나님”으로 보고, 하나님과 일치시킨다. 주 예수 하나님의 독생자가 우리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에 넘겨졌음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로고스 하나님”이시며 교회의 설립자가 되신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 안에 살았다는 것을 믿지 않고 그의 고난과 피 흘림을 고백하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그나치오스는 하나님의 삼중을 말하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 주 예수 그리스도 그의 아들, 성령 곧 보혜사를 한 문장에 자주 넣는다. 그는 위격적 구분을 분명히 하여 어떤 사람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동일한 인격이라고 말한 것을 강력하게 반박한다. 그는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지만 각각 다른 위격을 갖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비출생과 출생과 보혜사로서의 직분을 말하므로 후기 삼위 일체 교리 공식화의 기초가 놓이게 되었다. 이그나치오스는 하나님의 성육신을 말할 때에 “성령에 의해서”라고 말하고 “보혜사의 인도 아래서”라고 말한다. 이는 그가 성령을 하나님의 성육신의 원리로 삼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4.2.5. 헤르마스 (Hermas, 160 AD) <헤르마스의 목자>는 편지가 아니라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에레나이오스, 알랙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영감된 책으로 보았다. 반면 텔툴리아누스는 이 작품을 위경으로 배척하였다. <헤르마스의 목자>는 환상과 계명들과 유비들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른 사도적 교부들의 글과는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 헤르마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성령을 하나님의 아들 로 말한다. 헤르마스는 한 창조주 하나님만을 강조한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완성하시며 만물을 무에서 창조하신 한 하나님이 계신다. 그는 교회가 가장 먼저 창조되었다고 제시한다. 헤르마스는 포도원의 주인과 그의 아들과 종의 예를 들어 삼위 관계를 전개한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아들은 성령이고 종은 예수로 지목한다. 종이 아들과 함께 상속자가 되었다. 여기 밭의 주인은 만물을 창조하고 완전하게 한 분이고 성령은 아들이다. 이처럼 헤르마스는 셋으로 구분된 위격들을 보았다. “아버지 하나님”, 그의 “사랑하는 아들 성령”, “그의 종 신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헤르마스의 신학은 2위 일체론과 양자론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4.3. 변증가들 변증가들은 희랍철학으로 기독교의 합리성을 변증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하나님 내의 구분을 인식하고 “로고스”(Logos)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하나님 내의 구분을 확실하게 해서 다음 세대의 삼위일체 교리의 확정의 길을 열었다. 이러한 인식은 에레나이오스에게 전승되어 발전되어 교회는 삼위일체의 이해를 바로 하는 길을 얻었다. 변증가들은 “하나님의 유일성” 곧 “유일신 교리”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 내의 구분을 지성으로 설명했다. 변증가들은 “유일신론자들”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만족스럽게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선재자로서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사상이나 마음이라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와 구속에서 나타났고 하나님의 사상을 표현한 존재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신적 로고스 (logos) 또는 말씀이란 상(imagery)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 있는 말씀은 “내재 말씀”으로, 나타난 말씀은 “현현 말씀”으로 구분하기 위해 스토익(stoic)의 구분을 사용했다. 그들은 사도 요한의 “로고스 개념”을 따르지 못했다. 4.3.1. 유스티노스 (Ioutinoj, Ioustinos, Justinus, Justine, 110-165) 유스티노스는 이방인으로 희랍철학에 깊이 심취하므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철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희랍철학으로 기독교를 변증하는 최초의 변증가가 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통치 기간에 순교자까지 되었다. 유스티노스는 “변증서”들과 “트리포와의 대화”를 저술하여 희랍철학에 대하여 기독교를 변호하고 유대교가 기독교에 대하여 갖는 그릇된 견해들을 교정하여 그리스도가 구약의 메시아임을 해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희랍철학과 기독교의 근본 차이와 대립을 알지 못하고 희랍철학과 기독교를 같은 선상에 놓았다. 유스티노스는 유일하신 만물의 창조주를 모든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는 플라톤의 사상을 따라 비형성된 물질에서 만물을 창조하였다고 제시한다. 이 하나님은 우주의 아버지요 주님이시다. 이 하나님이 그의 로고스(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유스티노스는 창조의 목적은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인간을 창조하셔서 하나님 본받도록 하셨고 하나님을 따르도록 재능을 부여하셨다. 이 목적에 맞지 않으면 재앙을 받게 된다. 이 로고스를 통해서 하나님이 만물을 통치하시기 때문에 로고스는 “그리스도”로 불린다. 유스티노스의 신학 핵심은 “로고스”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 그는 이성 자체 혹은 말씀인 로고스가 형체를 취하여 사람이 되셨고 예수 그리스도로 불리웠다고 주장한다. 즉, 그는 로고스의 출생은 “지성으로서 방출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성으로 살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의 구원과 가르침을 이성적인 산물로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그리스도는 전체 이성, 로고스이기 때문에 희랍철학과 기독교와 차이가 없고 지식이 바로 구원이 되게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면서도 유스티노스는 로고스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하시고 몸과 영혼을 가져 우리의 고난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확신했고 순교에 이를 수 있었다. 4.3.2. 타치아노스 (Tatianos, Tatian, 110-172) 타치아노스는 앗시리아 지역에서 출생하여 철학을 공부하고 많은 여행을 한 후에 로마에 와서 유스티노스의 제자가 되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희랍인들에게 말함”과 “디아텟사론”(Diatessaron)을 작성했다. 타치아노스도 유스티노스와 마찬가지로 로고스에 의해 신학을 한다. 타치아노스는 하나님이 아무 사물도 없었을 때 태초에 계셨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태초는 로고스의 힘이라고 특이한 표현을 한다. 로고스는 하나님 안에 있었는데 주님의 단순한 의지에 의해서 로고스가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로고스는 자기를 낳은 아버지를 모방하여 로고스 능력으로부터 한 로고스가 나왔다고 본다. 타치아노스는 사람의 창조도 로고스의 일로 본다. 자기를 낳은 아버지를 본받아 로고스가 사람을 만들되 불사의 형상으로 만들었다. 타치아노스는 사람과 천사들을 창조하되 자유의지를 갖게 창조하므로 그 자유선택에 의해서 사람은 완전에 이르도록 하셨다고 진술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대리자이시다. 그러므로 성령과 연합해야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에 성령으로 거주하신다고 제시한다. 그는 “성령과의 연합”을 강조했다. 4.3.3. 안디옥의 떼오필로스 (Theophios of Antioch, 115-181/186) 떼오필로스는 유프라테스 지역에서 출생한 이방인으로 성경을 연구하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안디옥의 4대 감독 이그나치오스에 이어 6대 감독이 되었다. 그는 희랍철학으로 기독교를 변증했다. 떼오필로스는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요구에 대하여 영혼의 눈들이 열려진 자들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응답한다. 이 하나님은 영광에 있어서 파악이 불가하고 그 위대함을 측량할 수 없다고 본다. 하나님은 시작이 없다고 비출생자라고 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속성을 “편재”라고 강조한다. “천지 창조”는 하나님이 그 자신의 말씀과 지혜로 만드신 것으로 본다. 떼오필로스는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삼위일체”를 말한다. “하나님”, “그의 말씀”, “그의 지혜”라는 표현으로 삼위일체를 말한다. 로고스가 하나님 자신의 지성이고 사상이다. 떼오필로스는 성령을 분명히 언급한다. 성령의 사역에 있어서는 로고스의 사역과 중복시킨다. 4.3.4. 아떼나고라스 (Athenagoras, fluorit 177-180) 아떼나고라스는 아데네 출신으로 철학자였는데 그리스도인이 되어 2세기 가장 탁월한 변증가가 되었다. 그는 177-180경에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와 아우렐리우스 꼬모두스(Aurelius Commodus)에게 편지를 보내어 기독교를 변증하였다. 그는 신존재 증명에서 “삼위일체와 기독론”을 명료하게 제시한다. 기독교의 도덕적인 탁월성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은 합리적이시기 때문에 처음부터 “영원한 지성”인 로고스를 자신 안에 두었다고 말한다. 로고스가 하나님에게서 나오시지만 그에게서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고 둘이 하나라는 것이다. 그는 성령은 하나님의 유출로서 하나님에게서 흘러 나와서 태양의 빛처럼 다시 되돌아간다고 단언하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들”, “성령”을 말한다. 이 셋은 권능이 하나이고 순서에 있어서 구분된다고 주장하여 삼위일체 개념을 갖고 있었다. 4.4. 에레나이오스 (이레네이우스, Eirenaios, Irenaeus of Jyons, 120-202) 에레나이오스는 소아시아 서머나 출생으로 폴리카르포스의 제자였다. 그는 폴리카르포스를 통하여 사도들의 전통과 사도 요한을 배웠다. 리용의 주교로서 그노시스주의에 대항하여 “이단들에 대항하여”(Adversus haereses)를 저술하여 바울 이후 기독교의 최초의 신학자가 되었다. 그는 정통 기독교를 주도한 신학자로 바른 삼위일체론의 교리를 제시하여 텔툴리아누스를 거쳐 정통 삼위일체의 교리가 확정되는 데 기초를 놓았다.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신학의 근거와 출발점 에레나이오스는 신학을 전개하고 이단을 논박함에 있어서 신앙의 규범을 출발점과 근본으로 삼고 이단들 특히 영지주의의 그릇된 견해를 논박한다. 그에 의하면, 창조주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만물들을 만드셨다. 이 하나님 위에 플레로마가 있으면 그 신은 부족한 신이 되고 그런 플레로마는 무한히 계속될 것이어서 완전한 신이 있을 수 없다며 이단들을 논박한다. 구약의 하나님은 물질을 창조한 신이므로 최고신이 못된다는 그노시스주의에 대해 반박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면 곧 배교가 된다고 주장했다. 에레나이오스는 이단들이 플라톤의 가르침인 데미우르고스가 기존의 물질을 가지고 현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을 논박한다. “독생자”: 그는 사도 요한의 진술을 따라 로고스가 생명이요 빛이며 구주이시며, 이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신 것을 주장했다. 로고스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여 인자가 되셨다. 에레나이오스는 하나님의 로고스를 그의 계시자로 제시한다. 왜냐하면 로고스가 하나님의 지성이며 아버지와 영원히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들의 현시가 바로 아버지의 지식이며, 아들로 현시된 하나님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신지식의 원리” 곧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는 종교개혁의 원리를 확립하였다. “하나님의 지혜이신 성령”: 에레나이오스는 로고스만큼 성령을 언급하지 않지만 로고스와 함께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아버지의 손들로 말한다. 성령은 아버지의 손들의 하나로서 세계를 장식하는 일을 하였다고 본다. 성령의 사역은 주로 신자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에 집중한다. 하나님과 함께 항상 말씀과 지혜 곧 아들과 영이 있었고 하나님이 만물을 만들고 정비하였다고 하여 하나님의 존재방식과 사역의 방식은 삼위일체임을 분명히 제시한다. “삼위일체의 관계”: “한 하나님 아버지”, “한 아들 로고스”, “하나님의 지혜 성령”을 거의 함께 말하기 때문에 그는 삼위일체를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아들이 하나님의 지성으로서 아버지와 영원부터 함께 있었고 옛날부터 함께 계셨다고 말하므로 섭리적 삼위일체론이 아니라 “존재론적 삼위일체”임을 분명히 한다. 아들 로고스는 창조주이시고 만물의 조성자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하나님이시라고 하므로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성과 동일성을 밝혔다. 5. 제3세기 삼위일체론 논의 2세기의 교부들과 변증가들은 유일신 신앙을 지키면서 하나님 내의 구분을 말했다. 그러나 3세기에 와서는 삼위일체가 본래적이고 영원한 것임을 밝히게 되었다. 분리불가한 한 신격 내에 있는 삼중의 개념으로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섭리적 삼위일체론의 논의를 펴 하나님의 하나 되심에 강조를 두어 유일신 사상을 흔들지 않았다. 동방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복수성의 개념을 발전시켜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 내에 있는 구분들을 그들의 “존재방식”(subsistentia) 혹은 “위격”(persona)으로 표시하였다 이 새로운 접근 방식에 의해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이 기독교의 기본 신앙이 되었다 5.2. 텔툴리아누스 (Tertullianus, 145-220) 라틴 기독교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 텔툴리아누스는 “삼위일체”(trinitas)란 용어를 처음으로 썼을 뿐 아니라 “실체”(substentia)와 “인격 혹은 위격”(substantia)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삼위일체” 텔툴리아누스는 당시 로마교회에 성했던 “전제군주론”(monarcia)에 대항하여 교회의 전통 신앙인 유일신 교리를 삼위일체로 확정하였다. “전제군주론”은 유일한 창조주만을 믿는다. 하나님 아버지가 동정녀에게로 들어가시고 그녀에게서 출생하시고 수난받으셨는데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us)가 된다. 이런 이단을 프락세아스가 아시아에서 로부 로마로 유입했다. 이 대해서 텔툴리아누스는 아들과 성령이 하나님 내에 둘째, 셋째의 자리를 갖는다고 군주제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확립된다고 주장하였다. 삼위일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삼위일체가 오히려 군주제를 확립한다고 보았다. 텔툴리아누스는 에레나이오스로부터 섭리를 받아들여, 섭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방식으로 즉 하나 안에 셋으로 이해하고 사용했다. “오이코노미아”는 한 하나님이 아들 혹은 그의 말씀을 출생시킨 예수 그리스도가 수난받고 죽고 장사되었다가 성경대로 아버지에 의해 다시 살림을 받고 하늘로 올리우셔서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다.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이다. 그가 하늘로부터 아버지로부터 성령 곧 보혜사를 보내셨다. 이것이 신앙의 규범이고 정통 신앙이라고 텔툴리아누스는 확인하면서 한 하나님이 삼위일체 되심을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복수” 개념에 대해서 인격으로 복수이지 “실체”가 복수라는 말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텔툴리아누스는 “세 인격”이 “한 하나님”이 되는 것을 “한 본질”에 “세 위격들”이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연결되고 아들은 보혜사 안에 연결되므로 세 응집된 위격들을 이룬다. 이 세 위격들은 한 본질이고 한 위격이 아니다. “로고스” 텔툴리아누스는 말씀과 지혜를 일치시키고 말씀이 지성 안에 있고 지성으로 생각하고 고 안한 것을 발설할 때 말씀이 나왔다고 설명한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왔으므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Deus ex Deo)이시다. 그가 하나님인 한에서는 하나님과 동일실체에 속한다. 텔툴리아누스는 세 독립적인 위격들을 나누므로 삼위일체 중에서 성육신하신 이가 말씀인 것을 분명히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데 육으로 변환된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육신으로 옷 입음으로 성육신하셨다. 하나님은 불변하고 형태가 될 수 없으며 영원하시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이 되시므로 그는 두 실체를 각각의 특성에 따라 가지셨다. 한 인격 예수 안에 하나님과 사람이 결합하였다. 한 인격 안에 하나님과 사람이 공재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것을 설명하여 성육신 교리의 기초를 놓았다. “칼케돈 공회의”에서 두 본성이 변화없이/ 혼합없이 라고 정한 것이 처음으로 텔툴리아누스에게 나타났다. 그리스도안에 두 실체인 신성과 인성이 존재하는데 신성은 불멸이고 육신은 가사적이다. 그리스도는 인성을 따라서 죽으셨고 육신을 따라 기름부음 받았으므로 신성으로는 수난받을 수 없었다. “성령” 텔툴리아누스는 성령의 출래를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통해서로” 확정하여 동방교회 의 기본 신학이 되게 하였다.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오되 아들을 통해서 나와서 아들 다음으로 세 번째를 이룬다. 그는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통해서 나오는 것을 확정하였다. “텔툴리아누스의 삼위일체론의 진보” 텔툴리아누스는 하나님을 실체라고 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실체이고 그 실체는 분할 불가하므로 한 하나님이라고 제시하였다. 에레나이오스에게서 “섭리” 개념을 받아서 하나님 내의 존재방식에 활용하였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전 실재요 전 우주였는데 그가 신성의 원천이시고 신성의 원리이시다. 이 위격들은 서로 분리불가하고 상호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수적으로 구분된다고 하여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확정하는 기초를 완벽하게 놓았다. 세 위격은 실체의 동일성 때문에 분할불가하고 위격은 상호 결합되어 있다. 그리하여 한 하나님이 삼위로 계심이 기독교의 바른 신앙이 되었다. 5.3. 힙폴리토스 (Hippolytos of Rome, 170-236 AD) 합폴리토스는 텔툴리아누스만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했으나 하나님은 한분이시지만 복수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텔툴리아누스처럼 군주론에 대항하여 신학을 전개하였다. 특히 노에토스 등 군주론을 주장하는 로마교회의 신학에 대항하여 그의 신학을 전개하였다. 군주론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시므로 아버지이시다. 아버지가 출생하고 수난받고 죽으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므로 아버지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수난받으셨다. 이는 “성부수난설”이 되기 때문에 이런 노에토스의 주장에 대항하여 협폴리토스도 아버지는 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홀로 계시지만 복수로 존재하셨다고 주장한다. 그의 능력에 관하여 그는 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섭리에 있어서 삼중 현시가 있다고 제시한다. 그는 로고스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성육신하셨음을 강조한다. 로고스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 오사 동정녀 마리아에게로 들어가셨다. 그녀에게서 육신을 취하시고 한 인간 을 주 합리적인 영혼을 취하사 사람이 되셨다. 그가 세상에 와서 “몸 안에 있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으나 완전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 5.4. 양자론 (養子論, adoptionism, 동력적 군주론 dynamic monarchianism) 2세기말부터서 교회에 유일신 교리를 지키기 위해 신앙의 규범과는 다른 이론을 제시하였다. 삼위일체 교리로 교회가 가고 있을 때 전통적인 유일신 교리를 지키기 위해 예수를 한낱 사람으로 보는 견해와 세 위격 대신 한 위격이신 아버지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그 존재 양식을 변화하여 나타나셨다는 양태론이 나타났다. 양태론은 교회에 추종자가 많았다. 그러나 예수를 한낱 사람으로 보는 양자론은 이단으로 즉각적인 정죄를 가져왔지만 그 이단은 계속되었다. 떼오도토스 때에서 시작하여 사모사타의 파울로스에게까지 오랜 논란이 계속되었다. 5.4.1. 떼오도토스 (Theodotos of Byzantium) 힙폴리토스에 의하면 떼오도토스는 만물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정하였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과 케린토스와 에비온파로부터 그리스도에 관한 자기의 견해들을 충용하여 예수는 그냥 사람이었는데 아버지의 경륜에 따라 동정녀에게서 낳았다고 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과 섞여 살았고 종교적으로 탁월했는데 후에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에 그는 그리스도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성령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수세 시에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입장이다. 5.4.2. 사모사타의 파울로스 (Paulos of Samosata) 사모사타의 파울로스는 떼오도토스가 시작한 이단 프실안드로피즘(psilanthropism)의 가장 큰 대변자이었다. 파울로스는 그리스도는 사람에서 하나님으로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니카야의 교부들은 사모사타파의 계획을 깨기 위해 “아들은 만물 전에 있었고 사람에서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데 종의 형상을 입었고 말씀 (Verbum)이 육신이 되셨다”고 확정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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