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2. 사모사타의 파울로스 (Paulos of Samosata)
사모사타의 파울로스는 떼오도토스가 시작한 이단 프실안드로피즘(psilanthropism)의 가장 큰 대변자이었다. 파울로스는 그리스도는 사람에서 하나님으로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니카야의 교부들은 사모사타파의 계획을 깨기 위해 “아들은 만물 전에 있었고 사람에서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데 종의 형상을 입었고 말씀 (Verbum)이 육신이 되셨다”고 확정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실체” (omoousioj, coessentialis)를 바른 교리로 확정했다.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실체가 아니고 자기의 존재방식 곧 위격이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는 한낱 사람인데 부활 후에 하나님으로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양자론”이 된다.
5.5. 양태론
삼위일체론이 전개되자 전통적인 유일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양태론이 나타났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을 가졌으므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주장이 바로 양태론이다. 양태론 대로 한다면, 그리스도가 수난받을 때 실제로 수난받으신 이는 아버지가 되어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이 된다. 그가 또 자신을 성령으로 교회에 부어지셨다고 주장하므로 한 위격이 세 양태로 나타나셨다고 하는 주장인데 이로써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게 되었다. 이 주장은 노에토스(Noetos)와 프락세아스(Praxeas)와 사벨리오스(Sabellios)가 주장했다. 사벨리오스가 체계화했기 때문에 “사벨리오스주의”로 불리우기도 하였었다
5.5.1. 노에토스 (Noetos of Smyrna)
노에토스파는 출애굽기 3:6, 20:3에 나오는 “나는 네 조상들의 하나님이니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지니라”와 이사야 44:6 “나는 처음이고 나중이니 나 외 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 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면 또 그가 참으로 하나님이시면 그는 아버지 자신이 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이시므로 그 귀결로 아버지가 수난받으셨다. 왜냐하면 그가 아버지 자신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자신이 그리스도이고 그 자신이 아들이면 그 자신이 출생하고 그 자신이 수난받고 자신이 자신을 부활시켰다.”
5.5.1. 프락세아스 (Praxeas)
프락세아스는 노에토스처럼 한 창조주 하나님만 계심을 인정했다. 프락세아스는 아버지 자신이 동정녀에게로 들어가시고 그 자신이 동정녀에게서 나시고 그 자신이 수난받으셨다고 주장했다.
이 대해서 텔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반박한다: “한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 그러나 섭리를 인정해야 한다. 섭리에 의하면 이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들을 곧 그의 말씀(Verbum)을 가지신다. 그는 하나님 자신에서 나오시고(procedit) 그에 의해 만물들이 만들어졌다. 그가 아버지에 의해서 동정녀에게로 보내지시고 그녀에게서 나셔서 사람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며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란 이름으로 불리워지셨다. 그가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다시 아버지에 의해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리우셨다.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산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가 아버지의 약속을 따라 하늘로부터 성령을 보내셨다.”
5.5.3. 사벨리오스 (SabeIIios)
사벨리오스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이고 “한 위격인데 세 이름으로 불리워진다”고 주장한다. 사벨리오스주의자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를 태양의 유비로 표현한다. 태양에는 한 실체가 있지만 삼중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사벨리오스도 한 하나님을 강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한낱 사람으로 만들어 양자론을 만들게 되었다.
5.6. 노바치안의 삼위일체론 (210-280)
“노바치안의 로고스론”: 노바치안의 삼위일체론은 섭리적 삼위일체론에 머물러 있고 성령에 대해서는 아직 위격적인 존재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와 한 위격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은 다른 두 위격으로 아버지 다음의 위격임을 증명하고 받아들여 로마교회가 양태론을 버리고 삼위일체론을 채택하도록 공헌했다.
“성령론”: 성경에 제시된 대로 성령을 파라클레토스 혹은 진리의 영으로 말하여도 성령의 위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5.7.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동방교회의 삼위일체 교리의 공식화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신학적 작업이 전개되었다. 이는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는 희랍철학을 대거 교회로 유입하여 신학 작업을 하므로 문제점들을 많이 일으켰다. 그 결과로 후에 오리게네스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하나님의 위격적인 존재를 확립하는 일을 하여 정통교리를 확정하는 일에 기초를 놓았다
5.7.1. “클레멘트” (Klement, Clement of Alexandria, 153-217/220)
클레멘트는 동방교회에서 처음으로 희랍철학 특히 플라톤주의로 삼위일체론을 사고하여 한 하나님의 세 위격을 확정하였다. 오리게네스가 이 사상을 더 발전시켰다. 클레벤트는 하나님의 존재를 정의하여 파괴불가능하고 비출생이다 라고 한다. 클레멘트는 희랍철학의 일자와 단자 개념을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적용한다. 클레멘트는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출생하여 아버지의 형상이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동등함을 제시한다. 그러나 성령의 나오심과는 어떻게 다른지는 전혀 말하지 못하였다.
“성령관”: 클레멘트는 아들 로고스를 하나님으로 강조하고 아버지와 동등으로 말하여도 성령은 하나님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신약이 말하고 있는 진술들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삼위일체”: 클레멘트는 로마교회에 성한 양태론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나 양해 없이 세 위격을 말한다. 보편적인 아버지가 하나이고 한 보편적인 말씀과 성령이 모든 곳에서 하나이고 동일하다고 제시한다. 클레멘트의 신학 작업으로, 이후에는 양태론적인 시비없이 세 위격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어 오리레네스 이후 삼위일체가 기독교의 기본 교리가 되는 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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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
6.1.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
오리게네스는 철학을 열심히 공부하여 플라톤 철학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많이 설명하였다. 하나님은 처음부터서 아들을 가지신다는 것이 오리게네스의 반복된 주장이다. 그러나 유일한 하나님이 왜 아들을 필요로 했는지를 오리게네스는 피조물들과 하나님간의 중보자를 필요로 한 것으로 설명한다. 아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완전한 본질이라고 정의한다. 로고스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으면 아버지의 모든 뜻을 순종한다. 그러나 오리게네스에 의하면, 로고스는 선 자체는 아니다. “선의 형상”이다. 영광 자체가 아니라 영광의 광채가 된다. 그는 선에 동참을 게을리하면 타락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성령에 대해서, 오리게네스는 성령에 관해서는 적은 양을 언급한다. 성령은 출생되었는지 내재인지가 분명하지 않다고 주장하여 성령의 삼위일체내의 위치와 위격에 관하여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은 분할불가한 한 실체에 세 위격을 뜻하지 않는다. 삼위 한 하나님이 아니라 완전히 등급 지워진 세 존재가 삼위일체이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첫 형상이므로 로고스 앞에 정관사를 붙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은 신의 영광의 광채이고 그의 인격의 형상이므로 아버지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한다.
6.2. 오리게네스의 영향
오리게네스는 과도한 종속주의를 도입하여, 아레오스가 오리게네스의 입장을 따르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의 신학적 작업에 의해서 삼위일체에서 종속주의를 제거하였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종속주의가 떠나지 않게 되었다. 이 종속주의가 근세에 이르러 삼위일체를 부인하게 되어 유대교적인 유일신 곧 한 인격적인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서 기독교를 자연주의화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드로스와 니카야 공회의를 주도하여 정통 기독교를 창출한 아다나시오스는 성경적인 이해를 하였기 때문에 오리게네스의 종속주의에도 불구하고 정통 기독교를 이룰 수 있었다. 한편, 호모우시온(omoousion)을 취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실체임을 주장하는 정통주의가 오리게네스에게서 비롯되었다.
6.3. 메또디오스의 삼위 일체론
메또디오스는 오리게네스의 대적자로 그의 신령 화 주의를 반대하여 육적 부활을 성경대로 믿고 주장하였다. 또 삼위일체론에 있어서는 정통 신앙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실체뿐 아니라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실체임도 잘 알고 주창하였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절한 삶에 더 집중하였다. 메또디오스는 성육신하신 이는 삼 위격 중 아들 로고스, 독생하신 하나님이심을 성경의 가르침 대로 알고 있었다. 메또디오스는 하나님이 성육신하사 사람이 되심은 죄와 멸망의 장본인인 사탄 곧 유혹 자를 멸하여 사람으로 본래 불멸에로 돌이키시기 위함이었음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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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레오스 논쟁과 니카야 공회의
Concilium (oecum Ⅰ) Nicaenum Ⅰ 325
초대교회부터 3세기에 걸쳐서 삼위일체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다. 이러한 논의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교리를 결정할 수 있는 신학적인 기반을 마련하였다. 특히 에레나이오스와 텔툴리아누스와 그 후계자들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의 신비에 대해 여러 주장을 하여 “삼위일체의 기독교”가 되게 하는 기틀을 놓았다.
7.1. 아레오스(Areios, Arius)의 과격한 종속주의
아레오스는 오리게네스의 종속주의를 과격화한 형태로 배웠다. 하나님 아버지 외에 모든 존재는 창조로만 존재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만일 아들이 아버지의 실체에서 출생하였으면 아버지의 동일실체의 일부이거나 아버지에게서 발출이어서 결국 아버지는 복합되었고 분열가능하고 변이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아레오스는 아들이 아버지의 실체에서 출생하였다는 주장을 결코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아레오스는 아들의 피조됨을 출생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이 영원 시간 전에 한 독생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들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인가? 은혜에 동참으로 된 것이어서 이름으로만 아들이고 참 하나님이 아니다고 본다. 삼중이 있지만 셋은 전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 존재들의 집합으로 말할 뿐이다.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과 창조된 아들과 성령 이 세 실체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지 않다.
비판: 아들이 무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창조되어 존재하기 시작한 때가 있으면 아들은 영원한 아들이 아니고 참 하나님도 아니고 피조물일 뿐이다. 그리스도 아들이 이룩한 구원은 어떤 피조물이 이룬 것이므로 구원은 하늘에서 오는 게 아니게 된다.
7.2. 가이사랴의 유세비오스
(Eusebios of Kaiareia, Eusebius of Caesareia, 265-340)
유세비오스는 오리게네스의 제자로서 그의 종속주의를 그대로 대변하였다. 아레오스의 과격한 종속주의,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보는 견해를 표현하였다. 유세비오스가 니카야 신경에 서명을 했지만 아레안파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아들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유세비오스는 오리게네스의 방식으로 설명한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니카야 공회의 때에 니카야 신경에 서명하였다가 후에는 다시 아레안파로 돌아선다.
7.3.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드로스 (Alexandros, Alexander of Alexandria)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드로스는 아레오스 신학이 퍼지기 시작하자 주교로 AD 320경에 알렉산드리아에 공회의를 소집하여 아레오스의 신학이 기독교 신학이 아니라고 정죄하고 그를 추방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교회의 정치가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오리게네스의 종속주의적 경향을 완전히 벗지는 못하였지만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영원한 존재이고 동일실체를 가졌음을 확실하게 제시하였다. 이렇게 하여 알렉산드로스는 니카야 정통주의가 결정되도록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고 아다나시오스와 함께 니카야 정통 교리를 확정할 수 있었다.
7.4. 아다나시오스 (Athanasions, Athanasius, 296/298-373)
아다나시오스의 확고한 신앙과 바른 신학은 니카야 공회의가 정통 교리를 결정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 아다나시오스는 우리가 경배하는 하나님이 하나의 유일한 참 하나님이라고 제시하고 이 하나님이 창조의 주님이고 모든 존재의 조물주인데 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제시한다.
아들에 대해서, 그는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으며 만물을 소생케 하였다고 한다. 즉 예수는 조물주로서 우주와 모든 만 물을 다스리고 옴에 있으므로 제약받음 없이 하나님으로서 자기의 우주 통치를 계속하였다고 주장한다.
7.5. 니카야 공회의의 소집
7.5.1.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화해 노력”
콘스탄티누스는 313년에 막센치우스를 이기고 기독교를 공인했다. 그런데 알렉산드 리아에서 일어난 아레오스 논쟁이 애굽과 리비아 유역으로 퍼져나가 교회가 평화롭지 못하고 제국이 어렵게 되자 중재에 나섰다. 자신의 교회 담당 조언자 코르도바(Cordova)의 주교인 “호시우스”를 알렉산드리아에 보내 화해를 추구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사소한 문제니까 해결이 잘 될 줄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기독교 운명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였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에큐메닉 공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하였고, 318명의 주교들이 참석했다.
아다나이수우스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통해서 일하시고, 이 말씀 역시참 신이며 아버지와 동일 실체라고 확정했다. 결국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실체”(omoousion)로 출생하였고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정통 신앙이 승리하게 되었다. 황제는 “호모우시온”(omoousion)을 넣도록 권고하여 호모우시온이 니카야 신경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니카야 공회의는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에큐메닉 공회의로 소집되었고, “정통 기독교를 확립”하였다.
7.5.2. “니카야 신경” (Symbolum Nicaenum)
우리는 한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를 믿는데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조 물주를 믿는다. 또 한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데 그는 아버지에게서 출생하신 독생자이다. 이는 아버지의 실체에서 나셨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이시다. 빛에서 나온 빛이요 참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출생하셨고 만들어지지 않으셨으며 아버지와 동일실체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만들어졌다.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그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해 내려 오셨고 육신이 되사 사람이 되셨다. 고난받으시고 제 삼일에 살아나시고 하늘들에 오르셨다.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그가 오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그러나 그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고 말하고 그가 나시기 전에는 있지 않았다거나 존재하지 않은 것에서 만들어졌다거나 혹은 다른 실체나 다른 본질로부터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가변적이거나 변이될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을 카돌릭 교회는 정죄한다.
7.6. 삼위일체 교리의 확정과 니카야 신경의 의의
7.6.1. “삼위 일체 교리의 확정”
기독교 최초의 에큐메닉 공회의인 니카야 공회의는 기독교를 “삼위일체의 종교”로 규정했다. 유일신을 강조한 기독교가 삼위일체 가 바른 하나님의 존재 방식임을 확정하였다. 삼위일체론의 논쟁은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데 성육신 하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은 아닌데 성육신 하신 것인가 라는 문제가 중요했다. 니카야 정통파와 아다나시오스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동일신성, 동일실체”라고 하므로 하나님이 하나임을 확정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신성, 동일실체이므로, 다시 말해 신격은 본래 분할불가하므로 둘 간에 아무런 분열이나 분할이 있을 수 없다고 확정하였다. 이로써 오리게네스에게서 완전히 정착된 종속주의를 배격하였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등한 하나님이심이 확립되었다. 이후로는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로만 기독교요 구원종교로 인정받게 되었다.
7.6.2. 니카야 신경의 의의
니카야 공회의 이후 기독교 신앙은 삼위일체 신앙으로만 성립하게 되었다. 공회의 이후 이 정통신앙을 번복하기 위해 수세기간의 투쟁이 진행되었지만 결국 니카야 신경이 정통주의로 승리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를 인정하면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단으로 정죄하는 기준이 바로 “니카야 신경”이 되었다. 이 신경에 맞으면 기독교요 그렇지 않으면 이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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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아다나시오스의 신학
(Aqanasioj, Athanasios, Athanasius, 296/98-373)
아다나시오스는 “니카야 신경”을 세우는 데 최대 대변자요 변호자였다.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서 결정한 제2조의 내용과 제3조 성령조도 그의 신학에 의해 확정되었다. 아레안파는 “아들과 성령이 모두 피조물이다”라고 주장했으니, 아다나시우스는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동일실체다”라고 선언했다.
그의 신학의 핵심은 구원에 있었다. 그리스도론이 그의 신학의 핵심인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하나님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다 그리스도의 사역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철학적 사변을 다 제거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랐다. 아들이 동일실체이므로 그가 만군의 여호와이고 전능하고 참된 하나님이시라고 보았다.
“로고스 하나님: 창조주, 로고서의 성육신”
아다나시오스는 창조주인 로고스가 섭리주라고 제시한다. 그는 만물을 조성했기 때문에 세상을 통치한다. 아다나시오스의 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이 이룩한 구원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어야 확실한 구원이 되어 실제로 인류가 구원된다. 그러므로 구원자는 피조물일 수 없고 창조주 하나님이어야 한다. 인간이 신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성육신해야 한다. 처음에 창조를 만드신 이는 로고스이므로 그가 성육신하여 다시 창조를 회복하고 갱신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므로 창조주이고 만물의 조성자이신 로고스 하나님이 성육신 하신 것이다. 아다나시오스는 로고스 하나님이 마리아에게서 한 몸을 취하여 그것을 자기의 성전으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그의 신격이 육체로 변화된 것이 결코 아니어서 성육신했지만 하나님이고 주님으로 계심을 강조하여 인격의 동일성을 주장하였다.
“성령과 삼위일체”
아다나시오스의 모든 신학은 하나님의 아들 로고스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로고스와 성령을 함께 결합하여 성령이 한 신성이고 삼위일체임을 증명하였다. 아다나시오스의 신학의 특징은 아들과 성령을 함께 결합하는 점이다.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결합하여 한 신성이고 동일실체임을 밝혔다. 로고스와 성령을 함께 결합하여 성령이 한 신성이고 삼위일체임을 증명하였다. 아다나시오스는 삼위일체는 분할불가할 뿐만 아니라 한 신성이므로 위격 간에 등급이 없음을 강조하였다. 거룩송을 세 번 부른 것도 세 위격들이 완전함을 증명해주는 것이며 삼위는 한 신성으로 항상 완전하므로 추가나 감소가 안 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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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호모우시온의 확립을 위한 투쟁
9.1. 아레안파의 반격과 호모우시온 제거를 위한 시도들
“아다나시오스 제거 음모들”
니카야 공회의가 아들은 아버지의 실체에서 나오셨고 아버지와 “동일실체(omoousion)라는 ”신앙 공식“(fidei regula)을 작성하여 만장일치로 채택하였을 때 다섯 명의 주교들이 이에 반대했다: 니코메디아의 주교 유세비오스, 니카야의 떼오그니스, 칼케돈의 마리스, 마르마리케의 떼오나스, 프톨레마이스의 세문도스였다. 유세비오스 와 떼오그니스는 유배지에서 회개의 고백문을 주요 주교들에 보내어 자기의 신앙고백을 취소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거짓말을 해서, 황제의 칙령으로 유배지에서 소환되어 자기들의 교회에 회복되었다. 이 호의를 이용하여 유세비오스는 아레오스를 데려오기로 계획하고 음모를 진행하였다. 니카야 공회의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얼마 되지 않아서 죽고 아다나시오스가 326년에 알렉산드레아의 주교로 선출되어 알렉산드레아와 애굽의 교회들을 지도했다. 유세비오스는 황제의 호의를 이용하여 아다나시오스를 제거하여 니카야 신경을 완전히 무효화하려고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황제를 설득하여 아레오스와 그의 일파들을 교회에로 다시 받도록 요구하였다. 아레오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단을 다시 퍼뜨리고 소요를 일으켰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아레오스와 그의 일파를 교회에 받도록 부탁하였으나 아다나시오스는 반대했다. 유세비오스는 여러번 아다나시오스를 음해하는 시도를 했다.
유세비오스파들은 니카야 신경에 반대하는 새로운 신앙공식을 작성하였다. 그들은 “동일실체”를 공식에서 의도적으로 삭제하였다. 포테노스는 실미온의 주교로서 그리스도는 한낱 사람으로서 “마리아에게서 출생할 때부터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모사타의 파울로스의 견해를 취하였다. 이 일로 소요가 심해지자 황제는 실미온에 공회의를 소집하여 포테노스를 퇴위시켰으나 이 회의에서도 실체를 삭제하여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실체 또는 유사실체라는 것을 넣지 않았다. 아들은 아버지와 등치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아버지에게 종속시켰다.
이 해석에서 공회의 참석자들은 주장하기를 라틴어 실체 substantia와 희랍어 ousia는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일으켰고 정확하게는 “호모우시온”(omoousion)과 “호모이우시온”(omoiousion)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판정하여 교회에서 설교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아들은 만물을 그에게 종속하게 한 아버지에게 만물과 함께 종속한다고 확정하여 아들이 피조물임을 명시하였다.
이런 회의를 통해서 신앙의 수호자들이 다 제거되자, 아레안파들은 “실체”(ousia)와 “동일실체”(omoousion)를 신경에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 동서방 주교들로 아리미눔에 모이도록 황제 콘스탄치우스를 설득하였다. 그러나 서방 주교들은 처음부터 받은 것은 불가침으로 지켜야한다고 주장하여 이에 반대했다. 이들은 황제에게 펀지를 써서 “니카야 공회의”의 교부들의 아들들이므로 이미 확정된 것에서 더하거나 제거할 수 없다고 천명하였다.
이렇게 아레안파들이 니카야 신경을 폐지하여 “호모우시온”을 없이하려고 여러 차례 공회의를 열어 신앙해설들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한번도 공회의의 전적인 지지를 얻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콘스탄티누스가 죽자 아레안주의는 무너지게 되었다. 아레안파가 “호모우시온”의 제거를 위해 가한 박해, 퇴위, 유배 등은 무산되었다. 정통 진리를 지키기 위해 교회는 너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였던 것이다.
9.2. “호모우시온” 확립을 위한 조치들
안디옥 공회의(341)에서 “호모우시온”이 확립되었다. 이 공회의는 힐라리우스의 설명대로 동방의 어떤 주교들의 정통성이 의심되어 열린 공회의이다. “알렉산드리아 공회의”(362)는 “니카야 교리”를 확증하고 “동일실체”를 확인했다.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 공회의는 제2차 에큐메닉 공회으로서 주교들은 니카야 신경에 기초한 신앙만이 정통 기독교가 되게 했고, “호모우시온”을 확정하였다.
9.3. 마르켈로스 (Markelloj, Markellos, Marcellus of Ancyra)의 신학
마르켈로스는 니카야 공회의에서 아레안파들에 대항해서 싸워 그들을 논박하였다. 그는 “그의 나라는 끝이 없다”는 사상을 강조했다. 그는 로고스는 보편 왕이며 그의 나라는 끝이 없고, 만물을 창조하고 육을 입어 인간을 구원하는 구원주라고 했다. 그는 로고스는 하나님이시고 분열이 없고 아버지 안에서 영광을 가지며, 삼위일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9.4. 예루살렘의 퀴릴로스 (Kurilloj,Kyrillos,Cyril of Jerusalem, 315-386)
예루살렘의 대주교인 퀴릴로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서 아레안주의를 정죄할 때 동참하였다. 예루살렘의 주교로 일하는 동안 그는 아레안주의와 대항하여 강력하게 싸웠으나 다소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다시 주교 자리에 회복되어 그라치아누스 치세 기간 동방교회 전체가 아레안주의가 되었을 때 예루살렘 교구만이 정통 신앙에 남은 교회가 되었다. 퀴릴로스는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동일실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본질이 하나”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처음부터서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 로서 참 하나님이시라고 강조했다.
9.5. 새 아레안파들
아스테리오스는 아레안파로서 “비유래자”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아버지만이 비유래자이고 아들은 유래자라고 하여 피조물에다 넣었다. 유래된 자는 무에서 만들어졌다고 하여 아들을 피 조물에 넣었다.
에치오스는 아들은 아버지와 같지 않다고 하였다. 에치오스는 호모우시온과 호모이우시온을 완전히 버리고 아노모이온을 주창하여 아노모이안파의 두목이 되었다.
유노미오스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피조된 것으로 주장하였다. 유노미오스는 에치오스를 선생으로 두었고 아들이 피조되었다는 아레안 이단을 그대로 수용했다.
유조이오스도 모든 면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다르다고 주장하여 아노모이온 사상을 대변하였다.
9.6. 호모이우시온파의 호모우시온 접근
니카야 신경에서 “우시아”와 “호모우시온”을 완전히 제거하고 아노모아온, 즉 아레안파의 입장이 승리할 것 같았다. 이때, “호모우시온”을 반대하지만 ①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보는 것을 반대하고 ② 아버지와 유사하다고 주장한 호모이우시온파가 호모우시온파에 접근하게 되었다.
세미 아레안파는 358년 “앙퀴라 공회”의 후에 아레안파에서 분리하여 세미 아레안파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아레안파의 “아노모이온”을 버리고 아들은 “유사본질”(omoiousion)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세례 명령에 근거하여 아들은 아버지의 실체와 유사하여 아들은 아버지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아들이 아버지와 다르다고 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하여 정통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호모이우시온”이 세워지자 이 공식이 신앙의 통일을 이룰 좋은 수단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도 우리 구주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아버지와 “유사실체”라는 것을 고백하였다. 아레안파들은 호모우시온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고 아들은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 유사하다고 공식화하였다. 그러나 주교들은 결코 니카야 신경에서 떠나지 않을 것임을 황제에게 명백하게 하였다. 이때 정통 교리에 반대한 주교들은 한 단어 실체 때문에 교회에 분열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하고서 아들은 아버지와 유사하다는 말로 논쟁을 종식하기를 원하였다.
“호모이우시온파”는 아레안파와는 달리 아들이 로고스이지만 실체를 갖고, 아버지와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아버지에 유사하고, 자기 위격을 가짐을 강조하였다. 특히 이들은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 유사하다면서 의지와 활동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실체에 있어서도 그러하다고 하여 “호모우시온파”의 견해에 거의 접근하였다.
9.8. 힐라리우스 (Hilarius, Hilary of Poitiers, c. 315-367)의 삼위일체론
힐라리우스는 호모우시온과 호모이우시온이 같은 것으로 해석하고 이해한다. 호모이우시온을 승인하면 호모우시온을 거부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동일실체”나 “유사실체”의 존재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확정하자고 제안하여 “호모이우시온파”를 적극 끌어들였다. 그러나 힐라리우스의 삼위일체론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국한하고 성령은 언급하는 수준이었다. 성령의 위격적 존재에 대해서는 규명하지 못했다.
힐라리우스는 “호모우시온”과 “호모이우시온”을 구분할 필요가 없고 같은 뜻으로 이해하여 호모이우시온파를 정통 니카야 신앙에 끌여들여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서 호모우시온을 정통으로 확립할 길을 열었다.
9.9. 아다나시오스와 362 알렉산드리아 공회의
콘스탄티누스의 조카이자 배도자인 율리아누스가 황제에 등극하자 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니카야 신경을 확정하는 길은 “호모이우시온파”를 영입하는 길뿐인 것으로 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동일 신격과 로고스의 성육신을 고백하는 신자들이 “어구의 차이” 때문에 서로 정죄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아다나시오스는 유세비오스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공회의를 소집하여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실체임을 확립하였다. 성령의 신성을 주장하여 동일실체적 삼위일체에 성령을 포함시켰다. 삼위일체의 각 위격은 그 자신들의 인격에 있어서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였다. 이 알렉산드리아 공회의의 결정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서 다시 확정될 것이지만 호모우시온에 대한 오랜 투쟁을 끝내고 호모우시온을 교회의 바른 신앙으로 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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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성령의 인격성과 381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희외
conc. Constantinopolitanum Ⅰ 381 Oecuminicum Ⅱ
“니카야 공회”의 이후 반세기에 걸쳐 진행된 “호모우시온”에 대한 투쟁은 362년 “알렉산드리아 공회의”에서 호모우시온을 교회의 신앙으로 확정하였다. 그러나 “지방 공회의”의 결정이 되어, 에큐메닉 공회의의 결정이 있어야 했다. 이 호모우시온에 대한 최종 결정을 위해 제2차 에큐메닉 공회의가 소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령에 대한 논의였다. 성령이 피조물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므로 아들에게 적용된 호모우시온이 성령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성령이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확증이 요청되었다. 3조의 확립에 있어서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이 크게 기여했다.
10.1. 바실레오스
바실레오스는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 한 하나님이신 것을 강조한다. 수에 있어서 한 하나님이 아니라 본성에 있어서 한 하나님이시므로 삼 위격이 다 참 하나 님이심을 밝힌다. 바실레오스는 처음부터 성령의 신성을 전제하고 출발하였다. 바실레오스는 아레안파가 아들과 성령의 존엄을 낮추어서 세 위격들이 전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항하여 성령의 위격이 동일실체로서 삼위의 한 위격임을 증명 한다.
실체와 위격에 대해서, 바실레오스는 “하나님은 실체에 적용되는 이름”이고 “위격은 실체의 개별 존재방식에 적용되는 개념”이라고 보았다.
성령은 바실레오스 신학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적용된 호모우시온을 성령에도 그대로 적용하였다. 삼위의 활동이 동일하므로 성령도 동일실체이며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며 하나님이심을 증명한다.
10.2.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는 바실레오스의 작업을 이어서 성령의 신성을 강조하여 동일 실체임을 강조한다. 세 위격이 한 하나님이심은 한 실체, 동일본성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삼위일체와 세 위격들이 한 하나님이심은 동일실체, 동일본성이라는 데 두었다. 그레고리오스가 하나님의 본성의 특성을 강조한 이유는 아레안파가 성령을 피조물로 보는 것에 대항하여 성령이 하나님이고 피조물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삼위일체는 “실체는 하나”이고 통일하기 때문에 “본성에 의해” 위격들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특성에 의해서 구분”된다고 보았다. 그는 380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신학적 연설을 하여 381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를 준비하였다. 그레고리오스는 성령이 다른 위격들과 동등하고 동일실체이며 한 실체가 세 위격에 공동이고 동등이라고 확정하였다. 바실레오스도 성령을 하나님으로 표기하는 일에 그렇게 정열적이지 못였지만 그레고리오스는 성령을 당당하게 하나님으로 표기하였다. 381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서 성령이 주시요 살리는 자시요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동등한 영광과 경배를 받으신다는 공식을 확정할 기초를 마련하였다.
10.3. 닛사의 그레고리오스
닛사의 그레고리오스는 바실레오스의 동생으로서 세 위격이 한 하나님인 것은 본질이 하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레고리오스의 기본 신학이었다. 그는 창조 전 만세 전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서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로 계신다고 보았다. 세 위격들이 삼위일체인 것은 각각 개별 존재이지만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레고리오스는 성령신학자라고 불린다. 그는 성령이 피조물이 아니라 동일한 신적 본성을 가져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서 성령조의 공식화에 직접 참여하고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는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악의 기원”을 설명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서 선하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의지를 활용하여 자기에게 좋게 여겨진 악을 선택하므로 악이 나왔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악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악의 기원은 덕의 부재인 것이다.
10.4. 381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 제 2 차 에큐메닉 공회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는 성령의 동일실체 혹은 성령의 신성을 확립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였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동일신성”이라는 교리를 확정하였다.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동일실체”임이 확증되었다. 이 공회의에서는 이단들을 정죄하고 니카야 정통 신앙을 가진 자들의 손에 교회가 맡겨지는 일을 황제의 뜻을 따라 결정하였다
그러나 동방 주교들만 모였기 때문에 “성령의 출래를 아버지로부터로만” 확정하여동서 교회간에 오랜 논쟁이 되었다. 이로써 두 교회가 분열하는 씨를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에 의해서 세 위격들의 특성이 아버지는 비출생성, 비유래성, 아들은 출생과 로고스, 또 성령은 출래와 성화로 확정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Symbolum Constantinopolitanum)
우리는 한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만 드신 이를 믿사오며,
한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한 아들을 믿는데,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하 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이요, 빛에서 나온 빛이요, 참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 하나님이요, 출생하셨고 만들어지지 않으셨으며, 아버지와 통일실체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만들어졌다. 그는 우리 사람들을 위하여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 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육신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수난 받으시고 장사되셨다. 성경대로 부활하사 하늘들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으니, 영광으로 다시 오사 산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라; 그의 나라는 끝이 없느니라.
그리고 성령을 믿사오니, 주시요 살리는 자시요 아버지에게서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 받으시고 함께 영광을 받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느니라.
그리고 한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 교회를 믿습니다. 죄들의 용서에 이르는 한 세례를 믿사오며,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오는 세대의 생을 믿사옵니다. 아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의 결정”
① 제2조에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다”가 추가되었다: 이 추가 조항은 아레안파의 주장을 부정하고 아들 하나님의 영원 존재를 확정한 것이다.
② “성령은 주시요 살리시는 자”로 공식화되었다: 성령이 주시라고 공식화한 것은 성령이 피조물이 아니고 천지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이시오 창조를 완성했다고 하므로 창조주이심을 밝힌 것이다. 이 조항은 특히 바실레오스의 신학적 성찰의 결과이다. 두 그레고리오스의 신학적 작업의 결실이기도 하다. 3조를 확정하여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동일실체임을 확정하여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교리로 공식화하였다.
③ “아버지에게서 출래”: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공통된 가르침은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출래하심이다. 서방교회와 달리 성령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에게서 출래한다고 굳게 믿었다. 처음으로 텔툴리아누스가 제시한 것인데 동방교회는 이 가르침을 따랐다.
④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함께 경배 받고 함께 영광을 받으심”: 성령은 하나님이시고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한 신성에 동참하므로 열등한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확정하였다. 아들에게 적용된 “동일실체”(omoousion)가 성령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⑤ “성령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심”: 구약이 신약교회의 성경으로서 자리를 확고하게 잡게 되었다.
⑥ “제3조에 교회를 신앙의 대상으로 확정”: 하나의 거룩한 보편 사도적 교회(Eij mian agian kaqolikhn kai apostolikhn ekklhsian; unam sanctam catholicam et apostolicam ecclesiam)를 믿는다고 추가하여 교회를 성령의 영역 안에 속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넣었다. 교회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는데도 eij를 넣어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의의: “모든 신학 활동의 규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는 삼위격 간의 종속주의 시비를 없게 했다. 아버지만 아니라 아들과 성령도 아버지와 동일실체에 동참하기 때문에 세 위격들이 동등하다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아들과 성령이 피조물이라는 시비가 완전히 가시고 아버지와 동등하여 아버지와 함께 아들과 성령이 동등한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으로 확정되었다.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종교로 확립되었다. 삼위일체 교리를 받지 않으면 바로 이단이 되고 기독교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정통교리가 확정되었으므로 이제 이후로는 이 “니케노-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따라 신학 하게 되었다. 이 울타리 안에서만 신학 작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다 동일 신적 본성을 가졌다고 확정하였으므로 더 이상 삼위일체에 대한 시비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신학함의 표준이 정해진 것이다. 공회의 이후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이었을 뿐 아니라 만대 교회의 신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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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삼위일체 교리의 결말
개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를 통해서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이 고백되었고 신학의 정통 표준이 정해졌지만 서방교회는 몇 사람들의 대표를 보낸 것 외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서방교회는 성령의 출래를 “아버지에게서로만” 국한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지만 실패했다. 따라서 382년 로마에서 공회의를 열어 에큐메닉 공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이단들을 정죄하는 일을 하였다. 예배 모범으로 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근본적인 결말 작업은 “다메섹의 요한네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 작업으로 요한네스는 희랍 정통 교회의 신학자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 이후 삼위일체론의 논의와 바른 이해를 위해 아우구스티누스가 작업을 하였다. 그는 “삼위일체에 관하여”(de Trinitate)라는 저술에서 이제까지의 논의를 총괄하면서도 성경 주석의 방식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바르게 결말지었다. 그는 세 위격들의 완전 동등성과 “성령의 출래를 아버지와 아들로 확정하여” 서방 교회의 교리와 신학활동의 표준이 되게 하였다. 성령의 출래를 동방교회와 달리 “아버지와 아들로부터로 확정”하여 동방교회와의 논쟁에서 Filioque를 양보할 수 없게 만들었다.
11.1. 서방교회의 결말
서방교회는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 공식화 작업에 독창적인 사고로 적극적인 기여는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큰 저작을 통하여 성령의 출래를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ex Patre Filioque)로 확정하여 삼위일체를 교회의 근본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이 작업에 있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의 결정을 승인하고 수납한 것이다.
“로마공회의”(concilium Romanum, 382)의 결정: 서방교회는 381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 공식 대표가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성령의 출래를 바로 교정하기 위하여 보편 공회의를 소집해 줄 것을 로마 황제 떼오도시오스에게 청원하였지만 다시 동방교회들만을 소집하여 381 공회의의 결정을 재확인 하는데 그쳤다. 그래서 서방교회는 382 로마 교황 다마수스의 주재 아래 로마에서 공회의를 소집하여 성령이 아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자는 신성모독이라고 정죄하였고 다른 이단들을 정죄하고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의 교리 결정을 수납하였다
“암브로시우스”: “암브로시우스”는 삼위일체론을 세움에 있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과 같은 신학적 견지에서 전개한다. 암브로시우스는 성령의 위격적 존재를 출래로 말하나 갑바도기아 교부들과는 달리 영이 아버지에게서만 출래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서 출래를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성령의 출래를 아버지와 아들에게로 확정하는 길을 예비하였다.
11.2. 다메섹의 요한네스
다메섹의 요한네스는 전통의 신실하고 경성한 수호자로 일하였다. 교리를 순수하게 보존하고 변호하려고 하였다. 성령의 출래에 관하여 로마교회와 결코 타협하지 않으려고 하므로 동서방 교회간의 성령의 출래의 논쟁과 시비를 계속하게 하였다.
11.3.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354-430)의 삼위일체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에서 일어난 최대의 신학자였다. 그는 그의 여러 저작을 통하여 기독교 신학을 바르게 정립하였다. 그는 “삼위일체에 관하여”에서 기독교의 기본 교리인 삼위일체 교리를 바르게 정립하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고 제3차 에큐메닉 공회의인 에베소 공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삼위일체 교리를 최종적인 결말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론 교리 형성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신학에서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가 결합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을 논리적인 전개가 아니라 성경에 의한 증명을 하고 성경의 주석에 의해 전개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한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시고 삼위일체가 한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가 한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전제한 후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아들과 성령의 관계를 다룬다. 그 다음 창조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므로 삼위일체의 상을 인간의 구조에서 찾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를 전개할 때 하나님의 “실체”(substantia)를 “본질”(essentia)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변하고 비가시적이시기 때문이다. “실체”를 사용하면 하나님의 성품이 하나님 자신과 구분되고 실체에 종속된 어떤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교회사에서 실체보다는 본질이 사용되어 삼 위격에 강조가 놓이는 사고가 본격화하게 되었다. 위격과 실체와의 관계를 추상적으로 사고하게 되었다.
“성령의 출래”에 대해서, 그는 동방신학과 달리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라고 주장하여 서방신학의 기초가 되게 하였다. 이 신학이 아다나시우스 신경에 그대로 표현되었다.
“위격”(persona)의 사용 이유에 대해서: 세 위격이란 용어를 하나님 에 대해 사용하면 세 개별자로 이해된다. 이것은 삼위일체에서 의도한 바가 아니다. 이것을 안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래도 위격이란 용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위격은 사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용하며 세 위격이라고 대답한다. 세 위격들이란 완전하게 언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언급하지 않고 남겨둘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삼위일체가 위격과 일치: 각 위격은 다른 위격보다 크심 아니고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세 위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연합이기 때문에 셋은 함께 한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을 개진하여 그의 신학이 공회의의 결정에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아다나시우스 신경에 표현되어 서방교회의 신학의 기본이 되었다.
11.4. 아다나시우스 신경
아다나시우스 신경은 정통 신앙의 수호자이고 대변인인 아다나시오스의 이름으로 작성되었지만 그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재생산한 것이다. 개신교회는 이 신경을 정당한 신경으로 받고 루터교회는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서에 이 신경을 표준신경으로 지목하였다. 이 신경으로 삼위일체 교리는 마지막 결정에 이르게 되었다. 성령의 출래에 대해서,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시는 것으로 확정하였다. 삼위일체 교리가 결말 되었으므로 이 삼위일체 교리를 믿어야 구원에 이름과 이 신앙을 거부하면 멸망에 이름을 명기하였다. 이로써 삼위일체 교리가 구원 얻음과 교회에 필수적임을 명기하여 이 교리가 영구한 교리임을 천명하였다.
제3편 기독론 교리
12. 기독론 논의의 시작
개요
기독론 교리의 공식화는 삼위일체 교리의 공식화에 이어서 일어났다. 기독론 교리의 공식화 이전에 삼위일체론의 논의에 기독론 교리가 이미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서 성육신하셨다는 것이 니카야 신경의 기본이 되었다. 이 신경이 기독론 논의의 시작점을 이루었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이라는 성경과 사도들의 증거에 근거하고 공식화되었으므로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는 서로 별개가 아니고 하나로 연결되어있다. 동방교회는 자기 교회 지반에서 이루진 두 교리 곧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로 만족하였다. 시리아 교회와 콥틱어를 사용하는 애굽 교회는 기독론의 문제에 개입하기를 거부하여 공교회에서의 분리되었다.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또 우리 구원을 위해서 그는 강림하사 성육신 하시어 사람이 되시고 수난받으셨다”는 니카야 공회의 신앙 공식에서 시작해서 “에베소”와 “칼케돈 공회의”를 거지며 마침내 “칼케돈 신경”으로 정통교리가 확정되었다.
12.1. 오리게네스 (Origenes, C. 185-254)의 기독론 논의
오리게네스는 신앙의 규범을 따라서 성육신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과 육체의 결합이 중간 매체인 영혼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식으로 성육신의 방식을 말하였다. 이 견해는 희랍 사상으로 혼이 영과 육체의 중간 존재이므로 물을 결합하도록 하는데 혼이 매개했다고 하는 것을 로고스와 육의 결합을 위해 영혼이 매개 역할을 하였다는 것으로 제시하였다. 오리게네스는 희랍 사상을 따라 인간 구성을 삼분설로 보았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르쳤다. 그의 기독론은 “두 본성론”이었다. 그는 신적 로고스와 인간의 육체가 합치는 “로고스-육”(Logos-sarx)의 기독론을 제시하여 인간 영혼을 부인하게 되었다.
12.2. 아레안파들과 유스타띠오스
오리게네스의 추종자들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오스 등은 성육신자에게 로고스가 합리적 영혼없이 인간 육체만을 취하여 영혼의 기능을 로고스가 행했다는 견해를 가졌다. 아레안파는 그리스도의 피조물을 증명하기 위해 육이 됨만 강조했다.
아레안파의 로고스-육 기독론에 대항하여 로고스-사람 기독론이 제시되었다. 유스타띠오스는 로고스의 성육신에 있어서 취해진 인성은 인간적인 합리적인 영혼으로서 주도적 원리와 생명과 운동의 중심이며 또 육체를 포함하지 배제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네스토리오스주의를 예시하였다.
12.3. 아다나시오스의 기독론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아다나시오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바로 변호하기 위해서 니카야 신경을 산출하였다. 그의 출발점은 요 1:14이었다. 로고스가 인간이 되시되 한 인간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고 보았다. 아다나시오스는 기독론을 제시하기 전에 성육신의 동기를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타락하여 멸망에 이르게 되어 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것이다. 로고스가 육체 안에 나타나심은 부패된 것을 죽지 않은 것에로 돌이키려고 함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돌리는 것은 다른 어떤 이의 권세 안에 있지 않고 태초에 만물을 무에서 만든 구주밖에는 없다. 성육신의 방식은 로고스가 한 몸을 지어 자기의 성전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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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아폴리나라스주의와 두 그레고리오스의 기독론
개요
기독론의 논의와 교리 공식화에 있어서 핵심은 로고스 하나님이 성육신 하였으면 “성육신자의 인격/주체가 하나님이냐 사람이냐”이다. 그리고 “한 인격이려면 인성과 신성이 어떻게 결합했느냐”하는 것이다.
13.1. 아폴리나리스주의
앞에서 제기한 그리스도의 인성에 있어서 활동의 주체에 있어서, 조화 문제는 아다나시오스의 친구인 아폴리나리스에 의해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제기되었다. 여기서 생긴 기독론 논쟁이 칼케돈 공회의에서 종결되었다. 아폴리나리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해 성육신에서 지성을 배제하였다. 그는 로고스가 육체와 영혼을 취하되 지성 곧 누스의 자리를 대신하므로 한 인격을 이룬 것으로 생각했다. 아폴리나리스에게는 신적 로고스가 인간의 이성을 대치하였다. 그의 기독론에 의하면 로고스는 의지와 지성의 기능을 행사한다.
그는 381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교부들은 삼위일체론에 집중하였지만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에 대한 반박에 있어서는 일치하였으므로 그를 정죄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니카야 공회의는 그리스도의 부분적인 인성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그리스도는 성육신에 있어서 몸과 영혼 뿐만 아니라 영 혹은 지성을 취하여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13.2.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의 기독론
그레고리오스는 아폴라리우스에 대해서, 반쪽 아담이 타락하였으면 그리스도가 취한 것과 구원한 것도 반쪽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본성 전체가 타락하였으면 그 본성은 출생하신 이의 전 본성에 연합되어야만 하고 그로써 전체로 구원되어져야만 한다고 했다. 아폴리나리스는 신성이 인간 지성을 차지했다고 말하지만 그레고리우스는 지성은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므로 영혼은 있어도 지성이 없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가 인간이겠는가 라고 했다. 물론 그는 성령론에 관심을 가졌으므로 기독론에 대해서 자기의 견해를 체계화시키지는 못했다.
13.3. 닛사의 그레고리오스(Gregorios of Nyssa)의 기독론
닛사의 그레고리오스는 하나님이 성육신하므로 하나님으로서의 인격에 두 본성을 가지셨음을 표현하였다. 로고스 하나님 곧 창조주가 사람의 낮은 본성에로 들어오심은 그가 창조한 인간본성을 고쳐 불멸에로 돌이키기 위함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성육신으로 육체로 수난받으나 그 행동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희랍교회의 이해와 성육신의 진리를 바로 제시하였다.
13.4. 4세기 교부들의 기독론에 있어서 일치점
그들 대부분은 그리스도가 두 본성을 가졌고 그의 인성은 완전하여 절단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성을 소유했으므로 그의 신체적인 제약과 연약성들과 수난들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인간의 지성을 소유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두 본성이 성육신으로 다른 본성으로 변화되지 않았다는데 일치하였다. 성육신자는 한 인격이었음을 공히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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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4. 안디옥의 네스토리오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퀴릴로스의 기독론
동방교회에서 안디옥파는 두 본성에 두 인격이 은혜로 연합한 것으로 주장하였다. 알렉산드리아파는 한 인격이려면 한 본성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기독론 교리 결정에 있어서 서방교회의 개입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한 인격에 두 본성”이 그 특성을 다 유지하는 것으로 확정하였다.
14.1. 안디옥파의 기독론
디오도로스는 378년 다소의 주교가 되었는데, 사후 백년이 지난 499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서 네스토리오스주의의 창시자로서 정죄되었다. 그는 신인 안에서 로고스와 육을 정규적으로 대조하였다. 로고스와 육이 인간의 경우에서처럼 영혼과 육체가 이룬 실체적 통일을 이룬다면 신성이 축소되는 것으로 보고 둘을 분리하려고 하여 하나님의 아들과 다윗의 아들을 구분하게 되었다. “성경은 두 아들들의 활동들 간에 예리한 분계선을 긋는다”고 주장했다.
떼오도로스는 디오도로스의 제자로서 완전하고 독립적인 하나의 인간 본성을 전제하였다. 인간 본성은 신체적인 발전뿐만 아니라 선악의 식별과 지식의 발전을 경험하였고 유혹과 투쟁해야만 했다고 하였다. 때로는 로고스가 이미 실재한 한 인간 존재를 취했다고 기술하였다. 그는 “그 사람”과 “로고스”의 “완전성”과 “독립성”에 과도히 집중하여 인격의 통일성을 잃게 되었다.
14.2. 네스토리오스 (Nestorios of Antiocheia, 381-451)의 기독론
네스토리오스는 안디옥 출생으로 떼오도로스의 제자로서 안디옥 학파를 대변하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교구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떼오토코스가 아니라 크리스토토코스이여야 한다는 주장했다. 마리아는 단지 그리스도의 인성만 낳았으므로 그리스도를 낳은자(cristotokoj)가 적합한 표기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란 표기가 두 본성들의 결합에 합당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어머니(qeotokoj)를 가질 수 없으며 인간은 신성을 낳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떼오토코스란 칭호는 아다나시오스 때부터 교회의 공용 호칭이 되었고 또 마리아가 교회 신앙에서 존경을 받게 되었는데 이 칭호를 거부한 것은 사모사타의 파울로스의 견해가 살아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것은 두 아들이 도덕적인 연합에 의해 연합되었다는 4세기의 학설을 따른 것과 같다.
네스토리오스는 안디옥의 기독론 전통을 따라 성육신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각자는 그 고유한 특성을 유지한다고 보았다. 본성들의 병존은 결코 혼합에 이르지 않아서 혼합 없는 결합을 주장했다. 두 본성의 표현은 통일적인 인격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나는 두 본성은 나누나 경배는 연합한다고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인간 인격과 하나님의 인격이 공존하는 것으로 보아 인격의 통일성을 알지 못하였다. 동정녀에게서 출생한 이는 인간 예수 혹은 엄마누엘이므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14.3. 알렉산드리아의 퀴릴로스
퀴릴로스는 로고스가 성육신 하였으면 그 본성이 취해진 인성 내로 들어와야 한 인격이 될 수 있고 성육신이 될 수 있다고 믿어 두 본성을 분리한 네스토리오스를 정죄하였다. 떼오토코스를 거부하고 크리스토토코스라고 주장한 네스토리우스를 공격하여 에베소 공회의를 자기 신학의 승리로 이끌도록 하였다. 그는 니카야 신경대로 하나님의 독생자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강림하사 성육신 하셨다는 것을 그대로 받았다. 신성과 인성이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성한다고 믿었다. 그의 몸으로 수난 받아 로고스가 몸으로 죽음에 이르렀고 몸의 부활로 부활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퀴릴로스는 교회의 신앙을 보전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퀴릴로스는 로고스가 성육신함에 있어서 한 인간 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됨으로 그의 인격은 하나님으로서 인격이고, 취해진 육은 로고스의 육이므로 육의 일도 로고스의 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4.4. 431 에베소 공회의: 제3차 에큐메닉 공회의
떼오도시오스 황제에 의해 소집된 에베소 공회의는 퀴릴로스와 네스토리오스가 서로 정죄하고 둘 사이에 주교들의 의견이 분리되었다. 그래서 교리적 결정을 이루지는 못했다.
퀴릴로스의 견해는 아폴리나리스의 색채를 띤 것으로 여겨졌고 네스토리오스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둘로 나눈 것으로 제시되었으므로 공회의가 합의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로마교황 첼레스티누스가 퀴릴로스의 편에 서고 또 그에게 공회의의 집행을 위임했으므로 퀴릴로스가 우세하였다. 이 공회의에서 합의된 사항은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인격으로 마리아의 태에서 한 인성을 취하사 사람이 되시되 그 인격은 하나님으로서 하나이고 본성은 변화 없이 둘이지만 한 인격에 결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정녀는 하나님의 어머니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성육신자는 한 인격이고 두 본성을 가졌다는 데 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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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5. 칼케돈 공회의의 기독론 교리 확정
conc. (oecum. Ⅳ) Chalcedonense 451
개요
에베소 공회의는 기독론 교리에 있어서 동서방 혹은 알렉산드리와 안디옥 대교구 간에 완전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므로 기독론의 논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퀴릴로스의 신학의 영향아래 있는 알렉산드리아와 애굽의 수도승들은 계속해서 인성과 신성이 성육신으로 한 본성이 되었다는 한 본성론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자기들이 수도를 통하여 목표한 “신인합일”이 가능함을 발견하고 한 본성론 주장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유티케스가 이 퀴릴로스의 가르침을 과격화하여 그리스도는 성육신 전에는 두 본성이었으나, 성육신 후에는 한 본성이 되었다고 주장하므로 기독론 교리의 결정을 이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칼케돈 공회의에서 기독교의 근본진리인 기독론 교리가 확정되었고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15.1. 유티케스의 “단일본성론”(monophysitismus)
유티케스의 근본주장은 그리스도의 몸은 성육신 후에 우리와 동일실체가 아니고 오히려 성육신 후에는 그의 본성은 신적인 한 본성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아폴리나리스주 의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던 이단이었다.
15.2. 레오 감독의 가르침
서방교회는 교리를 공식화하는 일에 큰 공헌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레오 감독은 탁월한 정치적인 능력으로 칼케돈 신경의 공식화를 이루도록 도왔고 칼케돈 공회의를 주도하였다. 레오는 그리스도의 한 인격과 두 본성이 한 인격에 결합하였음을 강조하여 칼케돈의 공식화가 바로 이루어지게 일하였다. 이 성육신의 신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루어졌음을 잘 밝혔다. 참 하나님이신 이가 참 사람이 되셨음을 바로 밝혔다. 하나님으로서의 영광과 엄위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종의 형상을 취하셨다고 하여 각 본성이 그 특성을 그대로 유지함을 강조하였다.
15.3. 칼케돈 공회의
떼오도시오스의 승인아래 에베소 강도 총회가 진행되었으나 떼오도시오스가 죽자 그의 누이 풀케리아가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여 공회의의 소집에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레오가 원하는 대로 이탈리아가 아니고 칼케돈을 공회의의 소집지로 정하고 451년 공회의를 소집하였다. 6백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고 공회의의 전체적인 목표는 제국의 안목에서는 전제국 내에 단일 신앙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니카야 신경을 정통신앙의 표준으로 재확인하고 또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이단 반박용으로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퀴릴로스의 교리 서신들을 인정하고 또 레오의 교리 서신을 유 티케스 주의의 반박으로 합당한 것으로 수납하였다.
“칼케돈 신경”
(신성에서 아버지와 동일실체; 인성에서 우리와 동일실체) 그러므로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 우리 모두는 이구동성으로 한 동일한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할 것으로 가르친다. 신성에 있어서 동일한 완전한 자이시며 인성에 있어서 동일한 완전한 자이시며,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시며, 합리적인 영혼과 육체로 된 동일자이시며,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실체이시며, 인성을 따라서 우리와 동일실제이시고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하시다. 신성을 따라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마지막 날에 우리를 위해서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인성을 따라서는 그 동일자가 동정녀 마리아, 하나님의 출생자로부터 나셨다. 하나의 동일한 그리스도, 아들, 주님, 독생하신 자이시다.
(두 본성: 혼합, 변화, 분열, 분리 없이; 한 아들: 독생하신 하나님, 주 예수)
두 본성에 있어서 혼합 없이 변화 없이 분열 없이 분리 없이 인식되어야 하며, 결코 연합 때문에 본성들의 차이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고 더욱이 양 본성들의 특성들이 손상되지 않는 다. 그리고 한 인격에로 또 한 존재 방식에로 함께 들어갔고 두 인격에로 나뉘거나 분열되지 않으며 한 동일한 아들, 독생하신 하나님,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선지자들 이전에 그에 대해 또 그 자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가르치신 것처럼 교부들의 신경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셨다.
“칼케돈 신경의 핵심”
1) 칼케돈 신경의 핵심은 성육신자의 인격은 영원한 로고스의 인격으로 “한 인격이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 본성은 각기 그 특성을 유지한다”는 고백이다.
2) 칼세돈 신경은 “성육신한 로고스는 한 인격이지만 두 본성으로 성립한다.”고 확증한다. 두 본성의 연합이 서로 혼합 없이, 변화 없이, 분열 없이, 분리 없이, 한 인격에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네스토리오스주의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안에 한 인격만이 있음을 확정했다. 유티케스와 디오스코로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 안에 두 본성이 있어서 각기 자기의 특성을 유지한다고 하였다. 두 본성이 하나의 제삼의 본성으로 바뀌므로 한 인격을 이루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 이로써 성육신의 신비로 인하여 두 본성이 한 인격 안에 있음을 확정하였다.
칼케돈 신경은 성육신의 신비를 해명한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선포하고 믿게 하는 것이었다. 칼케돈 신경은 논리적인 사고의 형식이 아니다. 신앙 고백의 방식이다. 양극단을 절단하고 그 중도를 택하여 신비의 한계를 분명히 했다. 칼케돈 신경은 기독론의 모든 문제를 단번에 다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신앙에서 사변을 제거하고 신앙의 신비가 지속되게 하였다. 칼케돈 신경 이후, 하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면 이단이 되고 기독교가 되지 않음을 확립하였다. 성육신으로 한 인격이 해소되지 않음 을 강조하고 두 본성을 보존하였다.
16. 단일본성론 논쟁과 제5차 에큐메닉 공회의:
553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
단일본성론 주장
칼케돈 공회의(451)의 기독론 교리 결정 후 칼케돈 신경에 대한 반대가 격렬하게 일어났다. 레오 감독의 편지와 칼케돈 공회의의 교리 결정은 “두 얼굴을 가진 우상”으로 여겨졌다.
“알렉산드리아 기독론의 추종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들의 통일성을 더욱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백여 년에 걸친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이슬람이 와서 자기들의 존립을 휩쓸어버림으로 그 논쟁이 끝나게 되었다. 애굽과 시리아 일부와 아르메니아 지방에서는 단일 본성론자들이 우세하여 독립적인 민족교회를 형성하였다.
553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칼케돈파와 단일 본성론파로 나뉘어진 제국교회의 통일을 위해 553년 5월에 제5차 에큐메닉 공회의를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집하였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새칼케돈 주의라는 해석을 받아들여 칼케돈 신경을 네스토리오스 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퀴릴로스의 신학을 기본으로 해서 451 칼케돈 신경의 새로운 해석을 하도록 하였다. 칼케돈 신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전통적인 해석을 금하고 단일 본성론적인 해석을 정통으로 확립하였다. 두 본성으로 구성되었지만 한 본성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며 네스토리오스적인 해석은 완전히 배제하도록 했다.
553 제5차 에큐메닉 공회의는 150명의 주교들로 소집되어 서방주교들은 별로 참석하지 않았다. 서방은 이에 반대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의 결정을 오히려 교회 존립의 위협으로 본 시리아의 단일본성론주의자인 야코보스 부르데아나는 유스티니아노스의 조치들이 자기 교회의 존립과 독립에 위협적인 것으로 보고 반대했다. 야코보스 이후에 이 서방 시리아의 교회는 야코보스교회라고 불리웠다. 이 교회도 새 칼케돈 주의를 반대하였다. 아르메니아 교회, 롭틱 교회, 에디오피아 교회도 칼케돈 신경을 반대했고 지금까지 반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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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7. 단일의지론 논쟁과 제6차 에큐메닉 공회의
: 680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
17.1. 단일의지론자들
칼케돈 신경은 단일본성론자들의 집요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정되지 않았다. 553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의 결정은 칼케돈 신경을 변경하고 수정한 것이 아니라 그 이해를 퀴릴로스의 신학으로 해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이제 그리스도의 의지는 하나이냐 둘이냐 하는 것이 논쟁이 시작되었다. 칼케돈 신경대로 두 본성이면 의지도 두 의지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단일 의지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인간본성을 비인격적으로, 비활동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의지나 인간적인 활동을 소유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단일 본성론자들은 두 본성을 인정하였으므로 능력까지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능력은 자체 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은 형식적인 것이고 내용적으로는 로고스의 원함이고 활동이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정통파는 이 두 가지를 본성의 관점에서 고찰하여 이중 실체를 강조했다.
막시모스는 “단일의지론”을 반대했는데, 그는 두 본성들은 필연적으로 의지와 에너지의 두 본성적인 능력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적인 의지없이 그리스도는 사람일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이 되신 로고스에는 두 본성적인 의지가 현존한다. 두 의지는 각각 자기의 본성적인 특성을 갖는다.
680 제 3 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가 두 본성 곧 두 실체를 가졌으므로 두 본성적인 의지와 두 본성적인 활동을 가진다고 결정하였다. 단일 의지론자들을 바른 교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로 정죄하였다.
“기독론 논의의 종결”
6차 에큐메닉 공회의는 성육신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두 본성을 가졌으므로 두 본 성대로 두 의지를 갖는다고 확정하였다. 이로써 성육신을 완성하고 기독론 논의를 종결하였다. 알랙산드리아 퀴릴로스의 가르침대로 성육신한 한 본성을 강조한 단일 본성론 자들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로마교회가 주도해서 결정한 칼케돈의 결정을 논리적인 귀결에 이르게 했다. 이제, 기독론 교리의 논쟁은 종결되었다.
우리는 “두 의지”는 “두 인격”을 연상하기 쉽게 하지만 두 본성적인 의지와 두 본성적인 역사를 확정 하므로 성육신을 완성하고 칼케돈의 결정을 그 논리적인 귀결에 이르게 하였다. 그리고 에큐메닉 공회의가 로마 교황 호노리우스를 정죄하므로 교황무오설 위에 서 있는 로마교회의 근거가 희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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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성상숭배와 787 제7차 에큐메닉 공회의
: 제2차 니카야 공회의
“성만찬 예식의 변환”
공교회가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들을 확정한 이후 이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교리를 받아들여 신앙을 체험하기 원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려고 신비적인 신인식을 위해 애썼다. 점점 의식(cultus)이 강조되고 의식 이 예배의 중심이 되었다. 이런 의식으로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이 이루어져 “신화”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찬이 이런 신화에 큰 힘을 갖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성례전에서 은혜의 힘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세례를 받을 때 기름을 바르면 악의 세력을 이기는 힘을 얻는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는 일에 성물들도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이그나치오스는 의식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지배한다고 보았다. 메또디오스는 그리스도의 특징과 형상이 정절과 동정성을 위해 덕이 되고 불멸에 이르게 하는 덕이라고 보았다. 유세비오스는 희생의 제사의 관점에서 보면 바쳐진 물질적인 요소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의 상징들이라고 보았다. 바실레오스는 우리가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먹으므로 그의 성육신과 가시적인 생명에 의해서 그의 생명과 그의 지혜의 동참자가 된다고 하였다. 마카리오스는 영적으로 먹음은 어떤 실재적인 것을 즐김을 뜻한다고 보았다. 예루살렘의 퀴릴로스는 화체설을 주장했다. 닛사의 그레고리오스는 성례전에 있어서 세례도 죄의 용서보다는 영의 통보로 보게 되었다. 이 영을 통보받으면 인간을 갱신하여 불사에로 이르게 하는 것으로 여겼다. 크리소스토모스는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인다는 주의 말씀을 그의 죽음과 부활로 보고 독수리들을 신자로 보았다. 반대로, 성찬상에 참여하는 자들이 하늘에로 오른다고 주장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퀴릴로스는 성육신으로부터 성찬식을 보고 교회는 성찬식과 성육신을 결합하게 된다고 보았다. 신앙고백자 막시모스는 안디옥의 신비적인 예배의식과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적인 신비주의를 결합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유티키오스는 그 원인은 효과들과 구별되어 따로 실재하지만 그 효과들에 자신을 배가하고 각자 안에로 전체로써 들어간다고 주장했다. 다메섹의 요한네스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에로 변화된다고 주장하여 그를 통해서 성례전이 완성되었다.
“성상 숭배 논란”
기독교는 이방종교들의 풍습과 영향을 받아들이게 된다. 기독교라는 신령한 신앙은 유물들과 순교자들의 뼈를 숭배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그림들을 숭배하게 된다. 성상숭배에 대해 논란과 반대가 많았고 황제들이 반대했지만 결국 대중의 관습이 이겨 기독교를 우상종교로 만들었다.
에피파니오스는 아나블라타의 교회의 휘장의 그림을 반대하고 하나님은 마음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암필로키오스는 성자들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을 금지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는 교회에 그리스도의 상을 세우는 것을 반대했다. 필록세노스는 그리스도의 상을 반대했고 천사들의 상도 반대했다. 6세기 안디옥과 에데사에서는 성상을 파괴했다. 8세기 니콜리아의 콘스탄티노스는 그림들에 반대했다. 소아시아의 주교들은 그림들, 성상 숭배가 하나님 경배에 배치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예수께서 성육신으로 사람이 되었으니 그림을 존경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았다. 대 바실레오스는 그림들은 색깔로 대상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는 그림을 반대했으나 교훈적 가치는 인정했다. 닛사의 그레고리오스는 교회에 성 떼오도로스의 그림을 그렸다. 앙퀴라의 네일로스는 그림을 보고 하나님을 섬기는 상태를 기억한다고 보았다. 네앞폴리스의 레온치오스는 그림은 경배용이 아니고 회상용이라고 보았다.
“성상 신학”
그림숭배가 만연해지자 그림숭배를 정당화할 신학이 필요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 게르마노스는 황제 레온이 성상 숭배에 반대하자, 오히려 황제에 반대하여 787 니카야 공회의에서 정통 성상론의 기초를 세우게 된다. 그는 그림의 목적은 신자들로 생활 개선하게 하고, 성경의 보고들을 요약할 수 있다고 했다.
754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표현이 불가하므로 피조물로 나타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모독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754 공회의는 787 니카야 공회의에 의해 배척된다. 이처럼 정치권력이 교회의 교리를 타락시켜 교회를 세속 종교, 우상종교의 하나로 만들었다. 신상들을 만들어 섬기던 이방종교의 관습이 그대로 교회에 들어와 그림숭배가 교회의 교리가 된 것이다. 영적인 종교가 물질적 종교가 된 것이다. 제7차 에큐메닉 공회의 이후 기독교는 미신과 우상숭배와 공교리가 혼합된 혼합 기독교가 되었고, 종교개혁의 전조가 되었다.
사모사타의 파울로스는 떼오도토스가 시작한 이단 프실안드로피즘(psilanthropism)의 가장 큰 대변자이었다. 파울로스는 그리스도는 사람에서 하나님으로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니카야의 교부들은 사모사타파의 계획을 깨기 위해 “아들은 만물 전에 있었고 사람에서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데 종의 형상을 입었고 말씀 (Verbum)이 육신이 되셨다”고 확정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실체” (omoousioj, coessentialis)를 바른 교리로 확정했다.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실체가 아니고 자기의 존재방식 곧 위격이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는 한낱 사람인데 부활 후에 하나님으로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양자론”이 된다.
5.5. 양태론
삼위일체론이 전개되자 전통적인 유일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양태론이 나타났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을 가졌으므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주장이 바로 양태론이다. 양태론 대로 한다면, 그리스도가 수난받을 때 실제로 수난받으신 이는 아버지가 되어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이 된다. 그가 또 자신을 성령으로 교회에 부어지셨다고 주장하므로 한 위격이 세 양태로 나타나셨다고 하는 주장인데 이로써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게 되었다. 이 주장은 노에토스(Noetos)와 프락세아스(Praxeas)와 사벨리오스(Sabellios)가 주장했다. 사벨리오스가 체계화했기 때문에 “사벨리오스주의”로 불리우기도 하였었다
5.5.1. 노에토스 (Noetos of Smyrna)
노에토스파는 출애굽기 3:6, 20:3에 나오는 “나는 네 조상들의 하나님이니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지니라”와 이사야 44:6 “나는 처음이고 나중이니 나 외 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 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면 또 그가 참으로 하나님이시면 그는 아버지 자신이 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이시므로 그 귀결로 아버지가 수난받으셨다. 왜냐하면 그가 아버지 자신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자신이 그리스도이고 그 자신이 아들이면 그 자신이 출생하고 그 자신이 수난받고 자신이 자신을 부활시켰다.”
5.5.1. 프락세아스 (Praxeas)
프락세아스는 노에토스처럼 한 창조주 하나님만 계심을 인정했다. 프락세아스는 아버지 자신이 동정녀에게로 들어가시고 그 자신이 동정녀에게서 나시고 그 자신이 수난받으셨다고 주장했다.
이 대해서 텔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반박한다: “한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 그러나 섭리를 인정해야 한다. 섭리에 의하면 이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들을 곧 그의 말씀(Verbum)을 가지신다. 그는 하나님 자신에서 나오시고(procedit) 그에 의해 만물들이 만들어졌다. 그가 아버지에 의해서 동정녀에게로 보내지시고 그녀에게서 나셔서 사람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며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란 이름으로 불리워지셨다. 그가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다시 아버지에 의해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리우셨다.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산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가 아버지의 약속을 따라 하늘로부터 성령을 보내셨다.”
5.5.3. 사벨리오스 (SabeIIios)
사벨리오스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이고 “한 위격인데 세 이름으로 불리워진다”고 주장한다. 사벨리오스주의자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를 태양의 유비로 표현한다. 태양에는 한 실체가 있지만 삼중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사벨리오스도 한 하나님을 강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한낱 사람으로 만들어 양자론을 만들게 되었다.
5.6. 노바치안의 삼위일체론 (210-280)
“노바치안의 로고스론”: 노바치안의 삼위일체론은 섭리적 삼위일체론에 머물러 있고 성령에 대해서는 아직 위격적인 존재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와 한 위격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은 다른 두 위격으로 아버지 다음의 위격임을 증명하고 받아들여 로마교회가 양태론을 버리고 삼위일체론을 채택하도록 공헌했다.
“성령론”: 성경에 제시된 대로 성령을 파라클레토스 혹은 진리의 영으로 말하여도 성령의 위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5.7.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동방교회의 삼위일체 교리의 공식화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신학적 작업이 전개되었다. 이는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는 희랍철학을 대거 교회로 유입하여 신학 작업을 하므로 문제점들을 많이 일으켰다. 그 결과로 후에 오리게네스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하나님의 위격적인 존재를 확립하는 일을 하여 정통교리를 확정하는 일에 기초를 놓았다
5.7.1. “클레멘트” (Klement, Clement of Alexandria, 153-217/220)
클레멘트는 동방교회에서 처음으로 희랍철학 특히 플라톤주의로 삼위일체론을 사고하여 한 하나님의 세 위격을 확정하였다. 오리게네스가 이 사상을 더 발전시켰다. 클레벤트는 하나님의 존재를 정의하여 파괴불가능하고 비출생이다 라고 한다. 클레멘트는 희랍철학의 일자와 단자 개념을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적용한다. 클레멘트는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출생하여 아버지의 형상이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동등함을 제시한다. 그러나 성령의 나오심과는 어떻게 다른지는 전혀 말하지 못하였다.
“성령관”: 클레멘트는 아들 로고스를 하나님으로 강조하고 아버지와 동등으로 말하여도 성령은 하나님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신약이 말하고 있는 진술들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삼위일체”: 클레멘트는 로마교회에 성한 양태론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나 양해 없이 세 위격을 말한다. 보편적인 아버지가 하나이고 한 보편적인 말씀과 성령이 모든 곳에서 하나이고 동일하다고 제시한다. 클레멘트의 신학 작업으로, 이후에는 양태론적인 시비없이 세 위격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어 오리레네스 이후 삼위일체가 기독교의 기본 교리가 되는 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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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
6.1.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
오리게네스는 철학을 열심히 공부하여 플라톤 철학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많이 설명하였다. 하나님은 처음부터서 아들을 가지신다는 것이 오리게네스의 반복된 주장이다. 그러나 유일한 하나님이 왜 아들을 필요로 했는지를 오리게네스는 피조물들과 하나님간의 중보자를 필요로 한 것으로 설명한다. 아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완전한 본질이라고 정의한다. 로고스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으면 아버지의 모든 뜻을 순종한다. 그러나 오리게네스에 의하면, 로고스는 선 자체는 아니다. “선의 형상”이다. 영광 자체가 아니라 영광의 광채가 된다. 그는 선에 동참을 게을리하면 타락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성령에 대해서, 오리게네스는 성령에 관해서는 적은 양을 언급한다. 성령은 출생되었는지 내재인지가 분명하지 않다고 주장하여 성령의 삼위일체내의 위치와 위격에 관하여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은 분할불가한 한 실체에 세 위격을 뜻하지 않는다. 삼위 한 하나님이 아니라 완전히 등급 지워진 세 존재가 삼위일체이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첫 형상이므로 로고스 앞에 정관사를 붙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은 신의 영광의 광채이고 그의 인격의 형상이므로 아버지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한다.
6.2. 오리게네스의 영향
오리게네스는 과도한 종속주의를 도입하여, 아레오스가 오리게네스의 입장을 따르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의 신학적 작업에 의해서 삼위일체에서 종속주의를 제거하였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종속주의가 떠나지 않게 되었다. 이 종속주의가 근세에 이르러 삼위일체를 부인하게 되어 유대교적인 유일신 곧 한 인격적인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서 기독교를 자연주의화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드로스와 니카야 공회의를 주도하여 정통 기독교를 창출한 아다나시오스는 성경적인 이해를 하였기 때문에 오리게네스의 종속주의에도 불구하고 정통 기독교를 이룰 수 있었다. 한편, 호모우시온(omoousion)을 취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실체임을 주장하는 정통주의가 오리게네스에게서 비롯되었다.
6.3. 메또디오스의 삼위 일체론
메또디오스는 오리게네스의 대적자로 그의 신령 화 주의를 반대하여 육적 부활을 성경대로 믿고 주장하였다. 또 삼위일체론에 있어서는 정통 신앙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실체뿐 아니라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실체임도 잘 알고 주창하였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절한 삶에 더 집중하였다. 메또디오스는 성육신하신 이는 삼 위격 중 아들 로고스, 독생하신 하나님이심을 성경의 가르침 대로 알고 있었다. 메또디오스는 하나님이 성육신하사 사람이 되심은 죄와 멸망의 장본인인 사탄 곧 유혹 자를 멸하여 사람으로 본래 불멸에로 돌이키시기 위함이었음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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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레오스 논쟁과 니카야 공회의
Concilium (oecum Ⅰ) Nicaenum Ⅰ 325
초대교회부터 3세기에 걸쳐서 삼위일체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다. 이러한 논의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교리를 결정할 수 있는 신학적인 기반을 마련하였다. 특히 에레나이오스와 텔툴리아누스와 그 후계자들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의 신비에 대해 여러 주장을 하여 “삼위일체의 기독교”가 되게 하는 기틀을 놓았다.
7.1. 아레오스(Areios, Arius)의 과격한 종속주의
아레오스는 오리게네스의 종속주의를 과격화한 형태로 배웠다. 하나님 아버지 외에 모든 존재는 창조로만 존재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만일 아들이 아버지의 실체에서 출생하였으면 아버지의 동일실체의 일부이거나 아버지에게서 발출이어서 결국 아버지는 복합되었고 분열가능하고 변이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아레오스는 아들이 아버지의 실체에서 출생하였다는 주장을 결코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아레오스는 아들의 피조됨을 출생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이 영원 시간 전에 한 독생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들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인가? 은혜에 동참으로 된 것이어서 이름으로만 아들이고 참 하나님이 아니다고 본다. 삼중이 있지만 셋은 전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 존재들의 집합으로 말할 뿐이다.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과 창조된 아들과 성령 이 세 실체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지 않다.
비판: 아들이 무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창조되어 존재하기 시작한 때가 있으면 아들은 영원한 아들이 아니고 참 하나님도 아니고 피조물일 뿐이다. 그리스도 아들이 이룩한 구원은 어떤 피조물이 이룬 것이므로 구원은 하늘에서 오는 게 아니게 된다.
7.2. 가이사랴의 유세비오스
(Eusebios of Kaiareia, Eusebius of Caesareia, 265-340)
유세비오스는 오리게네스의 제자로서 그의 종속주의를 그대로 대변하였다. 아레오스의 과격한 종속주의,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보는 견해를 표현하였다. 유세비오스가 니카야 신경에 서명을 했지만 아레안파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아들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유세비오스는 오리게네스의 방식으로 설명한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니카야 공회의 때에 니카야 신경에 서명하였다가 후에는 다시 아레안파로 돌아선다.
7.3.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드로스 (Alexandros, Alexander of Alexandria)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드로스는 아레오스 신학이 퍼지기 시작하자 주교로 AD 320경에 알렉산드리아에 공회의를 소집하여 아레오스의 신학이 기독교 신학이 아니라고 정죄하고 그를 추방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교회의 정치가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오리게네스의 종속주의적 경향을 완전히 벗지는 못하였지만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영원한 존재이고 동일실체를 가졌음을 확실하게 제시하였다. 이렇게 하여 알렉산드로스는 니카야 정통주의가 결정되도록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고 아다나시오스와 함께 니카야 정통 교리를 확정할 수 있었다.
7.4. 아다나시오스 (Athanasions, Athanasius, 296/298-373)
아다나시오스의 확고한 신앙과 바른 신학은 니카야 공회의가 정통 교리를 결정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 아다나시오스는 우리가 경배하는 하나님이 하나의 유일한 참 하나님이라고 제시하고 이 하나님이 창조의 주님이고 모든 존재의 조물주인데 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제시한다.
아들에 대해서, 그는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으며 만물을 소생케 하였다고 한다. 즉 예수는 조물주로서 우주와 모든 만 물을 다스리고 옴에 있으므로 제약받음 없이 하나님으로서 자기의 우주 통치를 계속하였다고 주장한다.
7.5. 니카야 공회의의 소집
7.5.1.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화해 노력”
콘스탄티누스는 313년에 막센치우스를 이기고 기독교를 공인했다. 그런데 알렉산드 리아에서 일어난 아레오스 논쟁이 애굽과 리비아 유역으로 퍼져나가 교회가 평화롭지 못하고 제국이 어렵게 되자 중재에 나섰다. 자신의 교회 담당 조언자 코르도바(Cordova)의 주교인 “호시우스”를 알렉산드리아에 보내 화해를 추구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사소한 문제니까 해결이 잘 될 줄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기독교 운명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였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에큐메닉 공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하였고, 318명의 주교들이 참석했다.
아다나이수우스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통해서 일하시고, 이 말씀 역시참 신이며 아버지와 동일 실체라고 확정했다. 결국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실체”(omoousion)로 출생하였고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정통 신앙이 승리하게 되었다. 황제는 “호모우시온”(omoousion)을 넣도록 권고하여 호모우시온이 니카야 신경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니카야 공회의는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에큐메닉 공회의로 소집되었고, “정통 기독교를 확립”하였다.
7.5.2. “니카야 신경” (Symbolum Nicaenum)
우리는 한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를 믿는데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조 물주를 믿는다. 또 한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데 그는 아버지에게서 출생하신 독생자이다. 이는 아버지의 실체에서 나셨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이시다. 빛에서 나온 빛이요 참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출생하셨고 만들어지지 않으셨으며 아버지와 동일실체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만들어졌다.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그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해 내려 오셨고 육신이 되사 사람이 되셨다. 고난받으시고 제 삼일에 살아나시고 하늘들에 오르셨다.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그가 오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그러나 그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고 말하고 그가 나시기 전에는 있지 않았다거나 존재하지 않은 것에서 만들어졌다거나 혹은 다른 실체나 다른 본질로부터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가변적이거나 변이될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을 카돌릭 교회는 정죄한다.
7.6. 삼위일체 교리의 확정과 니카야 신경의 의의
7.6.1. “삼위 일체 교리의 확정”
기독교 최초의 에큐메닉 공회의인 니카야 공회의는 기독교를 “삼위일체의 종교”로 규정했다. 유일신을 강조한 기독교가 삼위일체 가 바른 하나님의 존재 방식임을 확정하였다. 삼위일체론의 논쟁은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데 성육신 하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은 아닌데 성육신 하신 것인가 라는 문제가 중요했다. 니카야 정통파와 아다나시오스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동일신성, 동일실체”라고 하므로 하나님이 하나임을 확정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신성, 동일실체이므로, 다시 말해 신격은 본래 분할불가하므로 둘 간에 아무런 분열이나 분할이 있을 수 없다고 확정하였다. 이로써 오리게네스에게서 완전히 정착된 종속주의를 배격하였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등한 하나님이심이 확립되었다. 이후로는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로만 기독교요 구원종교로 인정받게 되었다.
7.6.2. 니카야 신경의 의의
니카야 공회의 이후 기독교 신앙은 삼위일체 신앙으로만 성립하게 되었다. 공회의 이후 이 정통신앙을 번복하기 위해 수세기간의 투쟁이 진행되었지만 결국 니카야 신경이 정통주의로 승리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를 인정하면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단으로 정죄하는 기준이 바로 “니카야 신경”이 되었다. 이 신경에 맞으면 기독교요 그렇지 않으면 이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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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아다나시오스의 신학
(Aqanasioj, Athanasios, Athanasius, 296/98-373)
아다나시오스는 “니카야 신경”을 세우는 데 최대 대변자요 변호자였다.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서 결정한 제2조의 내용과 제3조 성령조도 그의 신학에 의해 확정되었다. 아레안파는 “아들과 성령이 모두 피조물이다”라고 주장했으니, 아다나시우스는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동일실체다”라고 선언했다.
그의 신학의 핵심은 구원에 있었다. 그리스도론이 그의 신학의 핵심인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하나님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다 그리스도의 사역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철학적 사변을 다 제거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랐다. 아들이 동일실체이므로 그가 만군의 여호와이고 전능하고 참된 하나님이시라고 보았다.
“로고스 하나님: 창조주, 로고서의 성육신”
아다나시오스는 창조주인 로고스가 섭리주라고 제시한다. 그는 만물을 조성했기 때문에 세상을 통치한다. 아다나시오스의 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이 이룩한 구원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어야 확실한 구원이 되어 실제로 인류가 구원된다. 그러므로 구원자는 피조물일 수 없고 창조주 하나님이어야 한다. 인간이 신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성육신해야 한다. 처음에 창조를 만드신 이는 로고스이므로 그가 성육신하여 다시 창조를 회복하고 갱신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므로 창조주이고 만물의 조성자이신 로고스 하나님이 성육신 하신 것이다. 아다나시오스는 로고스 하나님이 마리아에게서 한 몸을 취하여 그것을 자기의 성전으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그의 신격이 육체로 변화된 것이 결코 아니어서 성육신했지만 하나님이고 주님으로 계심을 강조하여 인격의 동일성을 주장하였다.
“성령과 삼위일체”
아다나시오스의 모든 신학은 하나님의 아들 로고스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로고스와 성령을 함께 결합하여 성령이 한 신성이고 삼위일체임을 증명하였다. 아다나시오스의 신학의 특징은 아들과 성령을 함께 결합하는 점이다.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결합하여 한 신성이고 동일실체임을 밝혔다. 로고스와 성령을 함께 결합하여 성령이 한 신성이고 삼위일체임을 증명하였다. 아다나시오스는 삼위일체는 분할불가할 뿐만 아니라 한 신성이므로 위격 간에 등급이 없음을 강조하였다. 거룩송을 세 번 부른 것도 세 위격들이 완전함을 증명해주는 것이며 삼위는 한 신성으로 항상 완전하므로 추가나 감소가 안 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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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호모우시온의 확립을 위한 투쟁
9.1. 아레안파의 반격과 호모우시온 제거를 위한 시도들
“아다나시오스 제거 음모들”
니카야 공회의가 아들은 아버지의 실체에서 나오셨고 아버지와 “동일실체(omoousion)라는 ”신앙 공식“(fidei regula)을 작성하여 만장일치로 채택하였을 때 다섯 명의 주교들이 이에 반대했다: 니코메디아의 주교 유세비오스, 니카야의 떼오그니스, 칼케돈의 마리스, 마르마리케의 떼오나스, 프톨레마이스의 세문도스였다. 유세비오스 와 떼오그니스는 유배지에서 회개의 고백문을 주요 주교들에 보내어 자기의 신앙고백을 취소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거짓말을 해서, 황제의 칙령으로 유배지에서 소환되어 자기들의 교회에 회복되었다. 이 호의를 이용하여 유세비오스는 아레오스를 데려오기로 계획하고 음모를 진행하였다. 니카야 공회의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얼마 되지 않아서 죽고 아다나시오스가 326년에 알렉산드레아의 주교로 선출되어 알렉산드레아와 애굽의 교회들을 지도했다. 유세비오스는 황제의 호의를 이용하여 아다나시오스를 제거하여 니카야 신경을 완전히 무효화하려고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황제를 설득하여 아레오스와 그의 일파들을 교회에로 다시 받도록 요구하였다. 아레오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단을 다시 퍼뜨리고 소요를 일으켰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아레오스와 그의 일파를 교회에 받도록 부탁하였으나 아다나시오스는 반대했다. 유세비오스는 여러번 아다나시오스를 음해하는 시도를 했다.
유세비오스파들은 니카야 신경에 반대하는 새로운 신앙공식을 작성하였다. 그들은 “동일실체”를 공식에서 의도적으로 삭제하였다. 포테노스는 실미온의 주교로서 그리스도는 한낱 사람으로서 “마리아에게서 출생할 때부터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모사타의 파울로스의 견해를 취하였다. 이 일로 소요가 심해지자 황제는 실미온에 공회의를 소집하여 포테노스를 퇴위시켰으나 이 회의에서도 실체를 삭제하여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실체 또는 유사실체라는 것을 넣지 않았다. 아들은 아버지와 등치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아버지에게 종속시켰다.
이 해석에서 공회의 참석자들은 주장하기를 라틴어 실체 substantia와 희랍어 ousia는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일으켰고 정확하게는 “호모우시온”(omoousion)과 “호모이우시온”(omoiousion)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판정하여 교회에서 설교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아들은 만물을 그에게 종속하게 한 아버지에게 만물과 함께 종속한다고 확정하여 아들이 피조물임을 명시하였다.
이런 회의를 통해서 신앙의 수호자들이 다 제거되자, 아레안파들은 “실체”(ousia)와 “동일실체”(omoousion)를 신경에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 동서방 주교들로 아리미눔에 모이도록 황제 콘스탄치우스를 설득하였다. 그러나 서방 주교들은 처음부터 받은 것은 불가침으로 지켜야한다고 주장하여 이에 반대했다. 이들은 황제에게 펀지를 써서 “니카야 공회의”의 교부들의 아들들이므로 이미 확정된 것에서 더하거나 제거할 수 없다고 천명하였다.
이렇게 아레안파들이 니카야 신경을 폐지하여 “호모우시온”을 없이하려고 여러 차례 공회의를 열어 신앙해설들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한번도 공회의의 전적인 지지를 얻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콘스탄티누스가 죽자 아레안주의는 무너지게 되었다. 아레안파가 “호모우시온”의 제거를 위해 가한 박해, 퇴위, 유배 등은 무산되었다. 정통 진리를 지키기 위해 교회는 너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였던 것이다.
9.2. “호모우시온” 확립을 위한 조치들
안디옥 공회의(341)에서 “호모우시온”이 확립되었다. 이 공회의는 힐라리우스의 설명대로 동방의 어떤 주교들의 정통성이 의심되어 열린 공회의이다. “알렉산드리아 공회의”(362)는 “니카야 교리”를 확증하고 “동일실체”를 확인했다.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 공회의는 제2차 에큐메닉 공회으로서 주교들은 니카야 신경에 기초한 신앙만이 정통 기독교가 되게 했고, “호모우시온”을 확정하였다.
9.3. 마르켈로스 (Markelloj, Markellos, Marcellus of Ancyra)의 신학
마르켈로스는 니카야 공회의에서 아레안파들에 대항해서 싸워 그들을 논박하였다. 그는 “그의 나라는 끝이 없다”는 사상을 강조했다. 그는 로고스는 보편 왕이며 그의 나라는 끝이 없고, 만물을 창조하고 육을 입어 인간을 구원하는 구원주라고 했다. 그는 로고스는 하나님이시고 분열이 없고 아버지 안에서 영광을 가지며, 삼위일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9.4. 예루살렘의 퀴릴로스 (Kurilloj,Kyrillos,Cyril of Jerusalem, 315-386)
예루살렘의 대주교인 퀴릴로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서 아레안주의를 정죄할 때 동참하였다. 예루살렘의 주교로 일하는 동안 그는 아레안주의와 대항하여 강력하게 싸웠으나 다소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다시 주교 자리에 회복되어 그라치아누스 치세 기간 동방교회 전체가 아레안주의가 되었을 때 예루살렘 교구만이 정통 신앙에 남은 교회가 되었다. 퀴릴로스는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동일실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본질이 하나”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처음부터서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 로서 참 하나님이시라고 강조했다.
9.5. 새 아레안파들
아스테리오스는 아레안파로서 “비유래자”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아버지만이 비유래자이고 아들은 유래자라고 하여 피조물에다 넣었다. 유래된 자는 무에서 만들어졌다고 하여 아들을 피 조물에 넣었다.
에치오스는 아들은 아버지와 같지 않다고 하였다. 에치오스는 호모우시온과 호모이우시온을 완전히 버리고 아노모이온을 주창하여 아노모이안파의 두목이 되었다.
유노미오스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피조된 것으로 주장하였다. 유노미오스는 에치오스를 선생으로 두었고 아들이 피조되었다는 아레안 이단을 그대로 수용했다.
유조이오스도 모든 면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다르다고 주장하여 아노모이온 사상을 대변하였다.
9.6. 호모이우시온파의 호모우시온 접근
니카야 신경에서 “우시아”와 “호모우시온”을 완전히 제거하고 아노모아온, 즉 아레안파의 입장이 승리할 것 같았다. 이때, “호모우시온”을 반대하지만 ①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보는 것을 반대하고 ② 아버지와 유사하다고 주장한 호모이우시온파가 호모우시온파에 접근하게 되었다.
세미 아레안파는 358년 “앙퀴라 공회”의 후에 아레안파에서 분리하여 세미 아레안파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아레안파의 “아노모이온”을 버리고 아들은 “유사본질”(omoiousion)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세례 명령에 근거하여 아들은 아버지의 실체와 유사하여 아들은 아버지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아들이 아버지와 다르다고 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하여 정통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호모이우시온”이 세워지자 이 공식이 신앙의 통일을 이룰 좋은 수단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도 우리 구주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아버지와 “유사실체”라는 것을 고백하였다. 아레안파들은 호모우시온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고 아들은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 유사하다고 공식화하였다. 그러나 주교들은 결코 니카야 신경에서 떠나지 않을 것임을 황제에게 명백하게 하였다. 이때 정통 교리에 반대한 주교들은 한 단어 실체 때문에 교회에 분열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하고서 아들은 아버지와 유사하다는 말로 논쟁을 종식하기를 원하였다.
“호모이우시온파”는 아레안파와는 달리 아들이 로고스이지만 실체를 갖고, 아버지와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아버지에 유사하고, 자기 위격을 가짐을 강조하였다. 특히 이들은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 유사하다면서 의지와 활동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실체에 있어서도 그러하다고 하여 “호모우시온파”의 견해에 거의 접근하였다.
9.8. 힐라리우스 (Hilarius, Hilary of Poitiers, c. 315-367)의 삼위일체론
힐라리우스는 호모우시온과 호모이우시온이 같은 것으로 해석하고 이해한다. 호모이우시온을 승인하면 호모우시온을 거부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동일실체”나 “유사실체”의 존재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확정하자고 제안하여 “호모이우시온파”를 적극 끌어들였다. 그러나 힐라리우스의 삼위일체론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국한하고 성령은 언급하는 수준이었다. 성령의 위격적 존재에 대해서는 규명하지 못했다.
힐라리우스는 “호모우시온”과 “호모이우시온”을 구분할 필요가 없고 같은 뜻으로 이해하여 호모이우시온파를 정통 니카야 신앙에 끌여들여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서 호모우시온을 정통으로 확립할 길을 열었다.
9.9. 아다나시오스와 362 알렉산드리아 공회의
콘스탄티누스의 조카이자 배도자인 율리아누스가 황제에 등극하자 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니카야 신경을 확정하는 길은 “호모이우시온파”를 영입하는 길뿐인 것으로 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동일 신격과 로고스의 성육신을 고백하는 신자들이 “어구의 차이” 때문에 서로 정죄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아다나시오스는 유세비오스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공회의를 소집하여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실체임을 확립하였다. 성령의 신성을 주장하여 동일실체적 삼위일체에 성령을 포함시켰다. 삼위일체의 각 위격은 그 자신들의 인격에 있어서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였다. 이 알렉산드리아 공회의의 결정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서 다시 확정될 것이지만 호모우시온에 대한 오랜 투쟁을 끝내고 호모우시온을 교회의 바른 신앙으로 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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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성령의 인격성과 381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희외
conc. Constantinopolitanum Ⅰ 381 Oecuminicum Ⅱ
“니카야 공회”의 이후 반세기에 걸쳐 진행된 “호모우시온”에 대한 투쟁은 362년 “알렉산드리아 공회의”에서 호모우시온을 교회의 신앙으로 확정하였다. 그러나 “지방 공회의”의 결정이 되어, 에큐메닉 공회의의 결정이 있어야 했다. 이 호모우시온에 대한 최종 결정을 위해 제2차 에큐메닉 공회의가 소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령에 대한 논의였다. 성령이 피조물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므로 아들에게 적용된 호모우시온이 성령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성령이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확증이 요청되었다. 3조의 확립에 있어서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이 크게 기여했다.
10.1. 바실레오스
바실레오스는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 한 하나님이신 것을 강조한다. 수에 있어서 한 하나님이 아니라 본성에 있어서 한 하나님이시므로 삼 위격이 다 참 하나 님이심을 밝힌다. 바실레오스는 처음부터 성령의 신성을 전제하고 출발하였다. 바실레오스는 아레안파가 아들과 성령의 존엄을 낮추어서 세 위격들이 전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항하여 성령의 위격이 동일실체로서 삼위의 한 위격임을 증명 한다.
실체와 위격에 대해서, 바실레오스는 “하나님은 실체에 적용되는 이름”이고 “위격은 실체의 개별 존재방식에 적용되는 개념”이라고 보았다.
성령은 바실레오스 신학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적용된 호모우시온을 성령에도 그대로 적용하였다. 삼위의 활동이 동일하므로 성령도 동일실체이며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며 하나님이심을 증명한다.
10.2.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는 바실레오스의 작업을 이어서 성령의 신성을 강조하여 동일 실체임을 강조한다. 세 위격이 한 하나님이심은 한 실체, 동일본성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삼위일체와 세 위격들이 한 하나님이심은 동일실체, 동일본성이라는 데 두었다. 그레고리오스가 하나님의 본성의 특성을 강조한 이유는 아레안파가 성령을 피조물로 보는 것에 대항하여 성령이 하나님이고 피조물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삼위일체는 “실체는 하나”이고 통일하기 때문에 “본성에 의해” 위격들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특성에 의해서 구분”된다고 보았다. 그는 380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신학적 연설을 하여 381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를 준비하였다. 그레고리오스는 성령이 다른 위격들과 동등하고 동일실체이며 한 실체가 세 위격에 공동이고 동등이라고 확정하였다. 바실레오스도 성령을 하나님으로 표기하는 일에 그렇게 정열적이지 못였지만 그레고리오스는 성령을 당당하게 하나님으로 표기하였다. 381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서 성령이 주시요 살리는 자시요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동등한 영광과 경배를 받으신다는 공식을 확정할 기초를 마련하였다.
10.3. 닛사의 그레고리오스
닛사의 그레고리오스는 바실레오스의 동생으로서 세 위격이 한 하나님인 것은 본질이 하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레고리오스의 기본 신학이었다. 그는 창조 전 만세 전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서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로 계신다고 보았다. 세 위격들이 삼위일체인 것은 각각 개별 존재이지만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레고리오스는 성령신학자라고 불린다. 그는 성령이 피조물이 아니라 동일한 신적 본성을 가져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서 성령조의 공식화에 직접 참여하고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는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악의 기원”을 설명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서 선하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의지를 활용하여 자기에게 좋게 여겨진 악을 선택하므로 악이 나왔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악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악의 기원은 덕의 부재인 것이다.
10.4. 381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 제 2 차 에큐메닉 공회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는 성령의 동일실체 혹은 성령의 신성을 확립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였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동일신성”이라는 교리를 확정하였다.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동일실체”임이 확증되었다. 이 공회의에서는 이단들을 정죄하고 니카야 정통 신앙을 가진 자들의 손에 교회가 맡겨지는 일을 황제의 뜻을 따라 결정하였다
그러나 동방 주교들만 모였기 때문에 “성령의 출래를 아버지로부터로만” 확정하여동서 교회간에 오랜 논쟁이 되었다. 이로써 두 교회가 분열하는 씨를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에 의해서 세 위격들의 특성이 아버지는 비출생성, 비유래성, 아들은 출생과 로고스, 또 성령은 출래와 성화로 확정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Symbolum Constantinopolitanum)
우리는 한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만 드신 이를 믿사오며,
한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한 아들을 믿는데,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하 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이요, 빛에서 나온 빛이요, 참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 하나님이요, 출생하셨고 만들어지지 않으셨으며, 아버지와 통일실체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만들어졌다. 그는 우리 사람들을 위하여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 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육신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수난 받으시고 장사되셨다. 성경대로 부활하사 하늘들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으니, 영광으로 다시 오사 산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라; 그의 나라는 끝이 없느니라.
그리고 성령을 믿사오니, 주시요 살리는 자시요 아버지에게서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 받으시고 함께 영광을 받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느니라.
그리고 한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 교회를 믿습니다. 죄들의 용서에 이르는 한 세례를 믿사오며,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오는 세대의 생을 믿사옵니다. 아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의 결정”
① 제2조에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다”가 추가되었다: 이 추가 조항은 아레안파의 주장을 부정하고 아들 하나님의 영원 존재를 확정한 것이다.
② “성령은 주시요 살리시는 자”로 공식화되었다: 성령이 주시라고 공식화한 것은 성령이 피조물이 아니고 천지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이시오 창조를 완성했다고 하므로 창조주이심을 밝힌 것이다. 이 조항은 특히 바실레오스의 신학적 성찰의 결과이다. 두 그레고리오스의 신학적 작업의 결실이기도 하다. 3조를 확정하여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동일실체임을 확정하여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교리로 공식화하였다.
③ “아버지에게서 출래”: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공통된 가르침은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출래하심이다. 서방교회와 달리 성령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에게서 출래한다고 굳게 믿었다. 처음으로 텔툴리아누스가 제시한 것인데 동방교회는 이 가르침을 따랐다.
④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함께 경배 받고 함께 영광을 받으심”: 성령은 하나님이시고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한 신성에 동참하므로 열등한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확정하였다. 아들에게 적용된 “동일실체”(omoousion)가 성령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⑤ “성령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심”: 구약이 신약교회의 성경으로서 자리를 확고하게 잡게 되었다.
⑥ “제3조에 교회를 신앙의 대상으로 확정”: 하나의 거룩한 보편 사도적 교회(Eij mian agian kaqolikhn kai apostolikhn ekklhsian; unam sanctam catholicam et apostolicam ecclesiam)를 믿는다고 추가하여 교회를 성령의 영역 안에 속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넣었다. 교회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는데도 eij를 넣어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의의: “모든 신학 활동의 규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는 삼위격 간의 종속주의 시비를 없게 했다. 아버지만 아니라 아들과 성령도 아버지와 동일실체에 동참하기 때문에 세 위격들이 동등하다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아들과 성령이 피조물이라는 시비가 완전히 가시고 아버지와 동등하여 아버지와 함께 아들과 성령이 동등한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으로 확정되었다.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종교로 확립되었다. 삼위일체 교리를 받지 않으면 바로 이단이 되고 기독교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정통교리가 확정되었으므로 이제 이후로는 이 “니케노-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따라 신학 하게 되었다. 이 울타리 안에서만 신학 작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다 동일 신적 본성을 가졌다고 확정하였으므로 더 이상 삼위일체에 대한 시비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신학함의 표준이 정해진 것이다. 공회의 이후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이었을 뿐 아니라 만대 교회의 신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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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삼위일체 교리의 결말
개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를 통해서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이 고백되었고 신학의 정통 표준이 정해졌지만 서방교회는 몇 사람들의 대표를 보낸 것 외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서방교회는 성령의 출래를 “아버지에게서로만” 국한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지만 실패했다. 따라서 382년 로마에서 공회의를 열어 에큐메닉 공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이단들을 정죄하는 일을 하였다. 예배 모범으로 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근본적인 결말 작업은 “다메섹의 요한네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 작업으로 요한네스는 희랍 정통 교회의 신학자가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 이후 삼위일체론의 논의와 바른 이해를 위해 아우구스티누스가 작업을 하였다. 그는 “삼위일체에 관하여”(de Trinitate)라는 저술에서 이제까지의 논의를 총괄하면서도 성경 주석의 방식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바르게 결말지었다. 그는 세 위격들의 완전 동등성과 “성령의 출래를 아버지와 아들로 확정하여” 서방 교회의 교리와 신학활동의 표준이 되게 하였다. 성령의 출래를 동방교회와 달리 “아버지와 아들로부터로 확정”하여 동방교회와의 논쟁에서 Filioque를 양보할 수 없게 만들었다.
11.1. 서방교회의 결말
서방교회는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 공식화 작업에 독창적인 사고로 적극적인 기여는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큰 저작을 통하여 성령의 출래를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ex Patre Filioque)로 확정하여 삼위일체를 교회의 근본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이 작업에 있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의 결정을 승인하고 수납한 것이다.
“로마공회의”(concilium Romanum, 382)의 결정: 서방교회는 381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 공식 대표가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성령의 출래를 바로 교정하기 위하여 보편 공회의를 소집해 줄 것을 로마 황제 떼오도시오스에게 청원하였지만 다시 동방교회들만을 소집하여 381 공회의의 결정을 재확인 하는데 그쳤다. 그래서 서방교회는 382 로마 교황 다마수스의 주재 아래 로마에서 공회의를 소집하여 성령이 아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자는 신성모독이라고 정죄하였고 다른 이단들을 정죄하고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의 교리 결정을 수납하였다
“암브로시우스”: “암브로시우스”는 삼위일체론을 세움에 있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과 같은 신학적 견지에서 전개한다. 암브로시우스는 성령의 위격적 존재를 출래로 말하나 갑바도기아 교부들과는 달리 영이 아버지에게서만 출래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서 출래를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성령의 출래를 아버지와 아들에게로 확정하는 길을 예비하였다.
11.2. 다메섹의 요한네스
다메섹의 요한네스는 전통의 신실하고 경성한 수호자로 일하였다. 교리를 순수하게 보존하고 변호하려고 하였다. 성령의 출래에 관하여 로마교회와 결코 타협하지 않으려고 하므로 동서방 교회간의 성령의 출래의 논쟁과 시비를 계속하게 하였다.
11.3.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354-430)의 삼위일체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에서 일어난 최대의 신학자였다. 그는 그의 여러 저작을 통하여 기독교 신학을 바르게 정립하였다. 그는 “삼위일체에 관하여”에서 기독교의 기본 교리인 삼위일체 교리를 바르게 정립하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고 제3차 에큐메닉 공회의인 에베소 공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삼위일체 교리를 최종적인 결말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론 교리 형성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신학에서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가 결합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을 논리적인 전개가 아니라 성경에 의한 증명을 하고 성경의 주석에 의해 전개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한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시고 삼위일체가 한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가 한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전제한 후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아들과 성령의 관계를 다룬다. 그 다음 창조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므로 삼위일체의 상을 인간의 구조에서 찾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를 전개할 때 하나님의 “실체”(substantia)를 “본질”(essentia)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변하고 비가시적이시기 때문이다. “실체”를 사용하면 하나님의 성품이 하나님 자신과 구분되고 실체에 종속된 어떤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교회사에서 실체보다는 본질이 사용되어 삼 위격에 강조가 놓이는 사고가 본격화하게 되었다. 위격과 실체와의 관계를 추상적으로 사고하게 되었다.
“성령의 출래”에 대해서, 그는 동방신학과 달리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라고 주장하여 서방신학의 기초가 되게 하였다. 이 신학이 아다나시우스 신경에 그대로 표현되었다.
“위격”(persona)의 사용 이유에 대해서: 세 위격이란 용어를 하나님 에 대해 사용하면 세 개별자로 이해된다. 이것은 삼위일체에서 의도한 바가 아니다. 이것을 안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래도 위격이란 용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위격은 사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용하며 세 위격이라고 대답한다. 세 위격들이란 완전하게 언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언급하지 않고 남겨둘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삼위일체가 위격과 일치: 각 위격은 다른 위격보다 크심 아니고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세 위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연합이기 때문에 셋은 함께 한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을 개진하여 그의 신학이 공회의의 결정에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아다나시우스 신경에 표현되어 서방교회의 신학의 기본이 되었다.
11.4. 아다나시우스 신경
아다나시우스 신경은 정통 신앙의 수호자이고 대변인인 아다나시오스의 이름으로 작성되었지만 그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재생산한 것이다. 개신교회는 이 신경을 정당한 신경으로 받고 루터교회는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서에 이 신경을 표준신경으로 지목하였다. 이 신경으로 삼위일체 교리는 마지막 결정에 이르게 되었다. 성령의 출래에 대해서,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시는 것으로 확정하였다. 삼위일체 교리가 결말 되었으므로 이 삼위일체 교리를 믿어야 구원에 이름과 이 신앙을 거부하면 멸망에 이름을 명기하였다. 이로써 삼위일체 교리가 구원 얻음과 교회에 필수적임을 명기하여 이 교리가 영구한 교리임을 천명하였다.
제3편 기독론 교리
12. 기독론 논의의 시작
개요
기독론 교리의 공식화는 삼위일체 교리의 공식화에 이어서 일어났다. 기독론 교리의 공식화 이전에 삼위일체론의 논의에 기독론 교리가 이미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서 성육신하셨다는 것이 니카야 신경의 기본이 되었다. 이 신경이 기독론 논의의 시작점을 이루었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이라는 성경과 사도들의 증거에 근거하고 공식화되었으므로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는 서로 별개가 아니고 하나로 연결되어있다. 동방교회는 자기 교회 지반에서 이루진 두 교리 곧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로 만족하였다. 시리아 교회와 콥틱어를 사용하는 애굽 교회는 기독론의 문제에 개입하기를 거부하여 공교회에서의 분리되었다.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또 우리 구원을 위해서 그는 강림하사 성육신 하시어 사람이 되시고 수난받으셨다”는 니카야 공회의 신앙 공식에서 시작해서 “에베소”와 “칼케돈 공회의”를 거지며 마침내 “칼케돈 신경”으로 정통교리가 확정되었다.
12.1. 오리게네스 (Origenes, C. 185-254)의 기독론 논의
오리게네스는 신앙의 규범을 따라서 성육신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과 육체의 결합이 중간 매체인 영혼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식으로 성육신의 방식을 말하였다. 이 견해는 희랍 사상으로 혼이 영과 육체의 중간 존재이므로 물을 결합하도록 하는데 혼이 매개했다고 하는 것을 로고스와 육의 결합을 위해 영혼이 매개 역할을 하였다는 것으로 제시하였다. 오리게네스는 희랍 사상을 따라 인간 구성을 삼분설로 보았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르쳤다. 그의 기독론은 “두 본성론”이었다. 그는 신적 로고스와 인간의 육체가 합치는 “로고스-육”(Logos-sarx)의 기독론을 제시하여 인간 영혼을 부인하게 되었다.
12.2. 아레안파들과 유스타띠오스
오리게네스의 추종자들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오스 등은 성육신자에게 로고스가 합리적 영혼없이 인간 육체만을 취하여 영혼의 기능을 로고스가 행했다는 견해를 가졌다. 아레안파는 그리스도의 피조물을 증명하기 위해 육이 됨만 강조했다.
아레안파의 로고스-육 기독론에 대항하여 로고스-사람 기독론이 제시되었다. 유스타띠오스는 로고스의 성육신에 있어서 취해진 인성은 인간적인 합리적인 영혼으로서 주도적 원리와 생명과 운동의 중심이며 또 육체를 포함하지 배제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네스토리오스주의를 예시하였다.
12.3. 아다나시오스의 기독론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아다나시오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바로 변호하기 위해서 니카야 신경을 산출하였다. 그의 출발점은 요 1:14이었다. 로고스가 인간이 되시되 한 인간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고 보았다. 아다나시오스는 기독론을 제시하기 전에 성육신의 동기를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타락하여 멸망에 이르게 되어 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것이다. 로고스가 육체 안에 나타나심은 부패된 것을 죽지 않은 것에로 돌이키려고 함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돌리는 것은 다른 어떤 이의 권세 안에 있지 않고 태초에 만물을 무에서 만든 구주밖에는 없다. 성육신의 방식은 로고스가 한 몸을 지어 자기의 성전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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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아폴리나라스주의와 두 그레고리오스의 기독론
개요
기독론의 논의와 교리 공식화에 있어서 핵심은 로고스 하나님이 성육신 하였으면 “성육신자의 인격/주체가 하나님이냐 사람이냐”이다. 그리고 “한 인격이려면 인성과 신성이 어떻게 결합했느냐”하는 것이다.
13.1. 아폴리나리스주의
앞에서 제기한 그리스도의 인성에 있어서 활동의 주체에 있어서, 조화 문제는 아다나시오스의 친구인 아폴리나리스에 의해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제기되었다. 여기서 생긴 기독론 논쟁이 칼케돈 공회의에서 종결되었다. 아폴리나리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해 성육신에서 지성을 배제하였다. 그는 로고스가 육체와 영혼을 취하되 지성 곧 누스의 자리를 대신하므로 한 인격을 이룬 것으로 생각했다. 아폴리나리스에게는 신적 로고스가 인간의 이성을 대치하였다. 그의 기독론에 의하면 로고스는 의지와 지성의 기능을 행사한다.
그는 381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교부들은 삼위일체론에 집중하였지만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에 대한 반박에 있어서는 일치하였으므로 그를 정죄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니카야 공회의는 그리스도의 부분적인 인성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그리스도는 성육신에 있어서 몸과 영혼 뿐만 아니라 영 혹은 지성을 취하여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13.2.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의 기독론
그레고리오스는 아폴라리우스에 대해서, 반쪽 아담이 타락하였으면 그리스도가 취한 것과 구원한 것도 반쪽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본성 전체가 타락하였으면 그 본성은 출생하신 이의 전 본성에 연합되어야만 하고 그로써 전체로 구원되어져야만 한다고 했다. 아폴리나리스는 신성이 인간 지성을 차지했다고 말하지만 그레고리우스는 지성은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므로 영혼은 있어도 지성이 없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가 인간이겠는가 라고 했다. 물론 그는 성령론에 관심을 가졌으므로 기독론에 대해서 자기의 견해를 체계화시키지는 못했다.
13.3. 닛사의 그레고리오스(Gregorios of Nyssa)의 기독론
닛사의 그레고리오스는 하나님이 성육신하므로 하나님으로서의 인격에 두 본성을 가지셨음을 표현하였다. 로고스 하나님 곧 창조주가 사람의 낮은 본성에로 들어오심은 그가 창조한 인간본성을 고쳐 불멸에로 돌이키기 위함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성육신으로 육체로 수난받으나 그 행동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희랍교회의 이해와 성육신의 진리를 바로 제시하였다.
13.4. 4세기 교부들의 기독론에 있어서 일치점
그들 대부분은 그리스도가 두 본성을 가졌고 그의 인성은 완전하여 절단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성을 소유했으므로 그의 신체적인 제약과 연약성들과 수난들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인간의 지성을 소유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두 본성이 성육신으로 다른 본성으로 변화되지 않았다는데 일치하였다. 성육신자는 한 인격이었음을 공히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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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4. 안디옥의 네스토리오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퀴릴로스의 기독론
동방교회에서 안디옥파는 두 본성에 두 인격이 은혜로 연합한 것으로 주장하였다. 알렉산드리아파는 한 인격이려면 한 본성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기독론 교리 결정에 있어서 서방교회의 개입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한 인격에 두 본성”이 그 특성을 다 유지하는 것으로 확정하였다.
14.1. 안디옥파의 기독론
디오도로스는 378년 다소의 주교가 되었는데, 사후 백년이 지난 499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에서 네스토리오스주의의 창시자로서 정죄되었다. 그는 신인 안에서 로고스와 육을 정규적으로 대조하였다. 로고스와 육이 인간의 경우에서처럼 영혼과 육체가 이룬 실체적 통일을 이룬다면 신성이 축소되는 것으로 보고 둘을 분리하려고 하여 하나님의 아들과 다윗의 아들을 구분하게 되었다. “성경은 두 아들들의 활동들 간에 예리한 분계선을 긋는다”고 주장했다.
떼오도로스는 디오도로스의 제자로서 완전하고 독립적인 하나의 인간 본성을 전제하였다. 인간 본성은 신체적인 발전뿐만 아니라 선악의 식별과 지식의 발전을 경험하였고 유혹과 투쟁해야만 했다고 하였다. 때로는 로고스가 이미 실재한 한 인간 존재를 취했다고 기술하였다. 그는 “그 사람”과 “로고스”의 “완전성”과 “독립성”에 과도히 집중하여 인격의 통일성을 잃게 되었다.
14.2. 네스토리오스 (Nestorios of Antiocheia, 381-451)의 기독론
네스토리오스는 안디옥 출생으로 떼오도로스의 제자로서 안디옥 학파를 대변하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교구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떼오토코스가 아니라 크리스토토코스이여야 한다는 주장했다. 마리아는 단지 그리스도의 인성만 낳았으므로 그리스도를 낳은자(cristotokoj)가 적합한 표기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란 표기가 두 본성들의 결합에 합당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어머니(qeotokoj)를 가질 수 없으며 인간은 신성을 낳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떼오토코스란 칭호는 아다나시오스 때부터 교회의 공용 호칭이 되었고 또 마리아가 교회 신앙에서 존경을 받게 되었는데 이 칭호를 거부한 것은 사모사타의 파울로스의 견해가 살아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것은 두 아들이 도덕적인 연합에 의해 연합되었다는 4세기의 학설을 따른 것과 같다.
네스토리오스는 안디옥의 기독론 전통을 따라 성육신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각자는 그 고유한 특성을 유지한다고 보았다. 본성들의 병존은 결코 혼합에 이르지 않아서 혼합 없는 결합을 주장했다. 두 본성의 표현은 통일적인 인격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나는 두 본성은 나누나 경배는 연합한다고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인간 인격과 하나님의 인격이 공존하는 것으로 보아 인격의 통일성을 알지 못하였다. 동정녀에게서 출생한 이는 인간 예수 혹은 엄마누엘이므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14.3. 알렉산드리아의 퀴릴로스
퀴릴로스는 로고스가 성육신 하였으면 그 본성이 취해진 인성 내로 들어와야 한 인격이 될 수 있고 성육신이 될 수 있다고 믿어 두 본성을 분리한 네스토리오스를 정죄하였다. 떼오토코스를 거부하고 크리스토토코스라고 주장한 네스토리우스를 공격하여 에베소 공회의를 자기 신학의 승리로 이끌도록 하였다. 그는 니카야 신경대로 하나님의 독생자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강림하사 성육신 하셨다는 것을 그대로 받았다. 신성과 인성이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성한다고 믿었다. 그의 몸으로 수난 받아 로고스가 몸으로 죽음에 이르렀고 몸의 부활로 부활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퀴릴로스는 교회의 신앙을 보전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퀴릴로스는 로고스가 성육신함에 있어서 한 인간 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됨으로 그의 인격은 하나님으로서 인격이고, 취해진 육은 로고스의 육이므로 육의 일도 로고스의 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4.4. 431 에베소 공회의: 제3차 에큐메닉 공회의
떼오도시오스 황제에 의해 소집된 에베소 공회의는 퀴릴로스와 네스토리오스가 서로 정죄하고 둘 사이에 주교들의 의견이 분리되었다. 그래서 교리적 결정을 이루지는 못했다.
퀴릴로스의 견해는 아폴리나리스의 색채를 띤 것으로 여겨졌고 네스토리오스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둘로 나눈 것으로 제시되었으므로 공회의가 합의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로마교황 첼레스티누스가 퀴릴로스의 편에 서고 또 그에게 공회의의 집행을 위임했으므로 퀴릴로스가 우세하였다. 이 공회의에서 합의된 사항은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인격으로 마리아의 태에서 한 인성을 취하사 사람이 되시되 그 인격은 하나님으로서 하나이고 본성은 변화 없이 둘이지만 한 인격에 결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정녀는 하나님의 어머니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성육신자는 한 인격이고 두 본성을 가졌다는 데 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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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5. 칼케돈 공회의의 기독론 교리 확정
conc. (oecum. Ⅳ) Chalcedonense 451
개요
에베소 공회의는 기독론 교리에 있어서 동서방 혹은 알렉산드리와 안디옥 대교구 간에 완전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므로 기독론의 논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퀴릴로스의 신학의 영향아래 있는 알렉산드리아와 애굽의 수도승들은 계속해서 인성과 신성이 성육신으로 한 본성이 되었다는 한 본성론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자기들이 수도를 통하여 목표한 “신인합일”이 가능함을 발견하고 한 본성론 주장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유티케스가 이 퀴릴로스의 가르침을 과격화하여 그리스도는 성육신 전에는 두 본성이었으나, 성육신 후에는 한 본성이 되었다고 주장하므로 기독론 교리의 결정을 이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칼케돈 공회의에서 기독교의 근본진리인 기독론 교리가 확정되었고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15.1. 유티케스의 “단일본성론”(monophysitismus)
유티케스의 근본주장은 그리스도의 몸은 성육신 후에 우리와 동일실체가 아니고 오히려 성육신 후에는 그의 본성은 신적인 한 본성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아폴리나리스주 의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던 이단이었다.
15.2. 레오 감독의 가르침
서방교회는 교리를 공식화하는 일에 큰 공헌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레오 감독은 탁월한 정치적인 능력으로 칼케돈 신경의 공식화를 이루도록 도왔고 칼케돈 공회의를 주도하였다. 레오는 그리스도의 한 인격과 두 본성이 한 인격에 결합하였음을 강조하여 칼케돈의 공식화가 바로 이루어지게 일하였다. 이 성육신의 신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루어졌음을 잘 밝혔다. 참 하나님이신 이가 참 사람이 되셨음을 바로 밝혔다. 하나님으로서의 영광과 엄위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종의 형상을 취하셨다고 하여 각 본성이 그 특성을 그대로 유지함을 강조하였다.
15.3. 칼케돈 공회의
떼오도시오스의 승인아래 에베소 강도 총회가 진행되었으나 떼오도시오스가 죽자 그의 누이 풀케리아가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여 공회의의 소집에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레오가 원하는 대로 이탈리아가 아니고 칼케돈을 공회의의 소집지로 정하고 451년 공회의를 소집하였다. 6백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고 공회의의 전체적인 목표는 제국의 안목에서는 전제국 내에 단일 신앙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니카야 신경을 정통신앙의 표준으로 재확인하고 또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이단 반박용으로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퀴릴로스의 교리 서신들을 인정하고 또 레오의 교리 서신을 유 티케스 주의의 반박으로 합당한 것으로 수납하였다.
“칼케돈 신경”
(신성에서 아버지와 동일실체; 인성에서 우리와 동일실체) 그러므로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 우리 모두는 이구동성으로 한 동일한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할 것으로 가르친다. 신성에 있어서 동일한 완전한 자이시며 인성에 있어서 동일한 완전한 자이시며,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시며, 합리적인 영혼과 육체로 된 동일자이시며,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실체이시며, 인성을 따라서 우리와 동일실제이시고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하시다. 신성을 따라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마지막 날에 우리를 위해서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인성을 따라서는 그 동일자가 동정녀 마리아, 하나님의 출생자로부터 나셨다. 하나의 동일한 그리스도, 아들, 주님, 독생하신 자이시다.
(두 본성: 혼합, 변화, 분열, 분리 없이; 한 아들: 독생하신 하나님, 주 예수)
두 본성에 있어서 혼합 없이 변화 없이 분열 없이 분리 없이 인식되어야 하며, 결코 연합 때문에 본성들의 차이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고 더욱이 양 본성들의 특성들이 손상되지 않는 다. 그리고 한 인격에로 또 한 존재 방식에로 함께 들어갔고 두 인격에로 나뉘거나 분열되지 않으며 한 동일한 아들, 독생하신 하나님,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선지자들 이전에 그에 대해 또 그 자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가르치신 것처럼 교부들의 신경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셨다.
“칼케돈 신경의 핵심”
1) 칼케돈 신경의 핵심은 성육신자의 인격은 영원한 로고스의 인격으로 “한 인격이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 본성은 각기 그 특성을 유지한다”는 고백이다.
2) 칼세돈 신경은 “성육신한 로고스는 한 인격이지만 두 본성으로 성립한다.”고 확증한다. 두 본성의 연합이 서로 혼합 없이, 변화 없이, 분열 없이, 분리 없이, 한 인격에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네스토리오스주의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안에 한 인격만이 있음을 확정했다. 유티케스와 디오스코로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 안에 두 본성이 있어서 각기 자기의 특성을 유지한다고 하였다. 두 본성이 하나의 제삼의 본성으로 바뀌므로 한 인격을 이루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 이로써 성육신의 신비로 인하여 두 본성이 한 인격 안에 있음을 확정하였다.
칼케돈 신경은 성육신의 신비를 해명한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선포하고 믿게 하는 것이었다. 칼케돈 신경은 논리적인 사고의 형식이 아니다. 신앙 고백의 방식이다. 양극단을 절단하고 그 중도를 택하여 신비의 한계를 분명히 했다. 칼케돈 신경은 기독론의 모든 문제를 단번에 다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신앙에서 사변을 제거하고 신앙의 신비가 지속되게 하였다. 칼케돈 신경 이후, 하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면 이단이 되고 기독교가 되지 않음을 확립하였다. 성육신으로 한 인격이 해소되지 않음 을 강조하고 두 본성을 보존하였다.
16. 단일본성론 논쟁과 제5차 에큐메닉 공회의:
553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
단일본성론 주장
칼케돈 공회의(451)의 기독론 교리 결정 후 칼케돈 신경에 대한 반대가 격렬하게 일어났다. 레오 감독의 편지와 칼케돈 공회의의 교리 결정은 “두 얼굴을 가진 우상”으로 여겨졌다.
“알렉산드리아 기독론의 추종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들의 통일성을 더욱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백여 년에 걸친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이슬람이 와서 자기들의 존립을 휩쓸어버림으로 그 논쟁이 끝나게 되었다. 애굽과 시리아 일부와 아르메니아 지방에서는 단일 본성론자들이 우세하여 독립적인 민족교회를 형성하였다.
553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칼케돈파와 단일 본성론파로 나뉘어진 제국교회의 통일을 위해 553년 5월에 제5차 에큐메닉 공회의를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집하였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새칼케돈 주의라는 해석을 받아들여 칼케돈 신경을 네스토리오스 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완전히 배제하고 퀴릴로스의 신학을 기본으로 해서 451 칼케돈 신경의 새로운 해석을 하도록 하였다. 칼케돈 신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전통적인 해석을 금하고 단일 본성론적인 해석을 정통으로 확립하였다. 두 본성으로 구성되었지만 한 본성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며 네스토리오스적인 해석은 완전히 배제하도록 했다.
553 제5차 에큐메닉 공회의는 150명의 주교들로 소집되어 서방주교들은 별로 참석하지 않았다. 서방은 이에 반대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의 결정을 오히려 교회 존립의 위협으로 본 시리아의 단일본성론주의자인 야코보스 부르데아나는 유스티니아노스의 조치들이 자기 교회의 존립과 독립에 위협적인 것으로 보고 반대했다. 야코보스 이후에 이 서방 시리아의 교회는 야코보스교회라고 불리웠다. 이 교회도 새 칼케돈 주의를 반대하였다. 아르메니아 교회, 롭틱 교회, 에디오피아 교회도 칼케돈 신경을 반대했고 지금까지 반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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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7. 단일의지론 논쟁과 제6차 에큐메닉 공회의
: 680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
17.1. 단일의지론자들
칼케돈 신경은 단일본성론자들의 집요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정되지 않았다. 553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의 결정은 칼케돈 신경을 변경하고 수정한 것이 아니라 그 이해를 퀴릴로스의 신학으로 해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이제 그리스도의 의지는 하나이냐 둘이냐 하는 것이 논쟁이 시작되었다. 칼케돈 신경대로 두 본성이면 의지도 두 의지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단일 의지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인간본성을 비인격적으로, 비활동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의지나 인간적인 활동을 소유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단일 본성론자들은 두 본성을 인정하였으므로 능력까지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능력은 자체 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은 형식적인 것이고 내용적으로는 로고스의 원함이고 활동이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정통파는 이 두 가지를 본성의 관점에서 고찰하여 이중 실체를 강조했다.
막시모스는 “단일의지론”을 반대했는데, 그는 두 본성들은 필연적으로 의지와 에너지의 두 본성적인 능력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적인 의지없이 그리스도는 사람일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이 되신 로고스에는 두 본성적인 의지가 현존한다. 두 의지는 각각 자기의 본성적인 특성을 갖는다.
680 제 3 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가 두 본성 곧 두 실체를 가졌으므로 두 본성적인 의지와 두 본성적인 활동을 가진다고 결정하였다. 단일 의지론자들을 바른 교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로 정죄하였다.
“기독론 논의의 종결”
6차 에큐메닉 공회의는 성육신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두 본성을 가졌으므로 두 본 성대로 두 의지를 갖는다고 확정하였다. 이로써 성육신을 완성하고 기독론 논의를 종결하였다. 알랙산드리아 퀴릴로스의 가르침대로 성육신한 한 본성을 강조한 단일 본성론 자들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로마교회가 주도해서 결정한 칼케돈의 결정을 논리적인 귀결에 이르게 했다. 이제, 기독론 교리의 논쟁은 종결되었다.
우리는 “두 의지”는 “두 인격”을 연상하기 쉽게 하지만 두 본성적인 의지와 두 본성적인 역사를 확정 하므로 성육신을 완성하고 칼케돈의 결정을 그 논리적인 귀결에 이르게 하였다. 그리고 에큐메닉 공회의가 로마 교황 호노리우스를 정죄하므로 교황무오설 위에 서 있는 로마교회의 근거가 희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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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성상숭배와 787 제7차 에큐메닉 공회의
: 제2차 니카야 공회의
“성만찬 예식의 변환”
공교회가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들을 확정한 이후 이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교리를 받아들여 신앙을 체험하기 원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려고 신비적인 신인식을 위해 애썼다. 점점 의식(cultus)이 강조되고 의식 이 예배의 중심이 되었다. 이런 의식으로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이 이루어져 “신화”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찬이 이런 신화에 큰 힘을 갖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성례전에서 은혜의 힘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세례를 받을 때 기름을 바르면 악의 세력을 이기는 힘을 얻는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는 일에 성물들도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이그나치오스는 의식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지배한다고 보았다. 메또디오스는 그리스도의 특징과 형상이 정절과 동정성을 위해 덕이 되고 불멸에 이르게 하는 덕이라고 보았다. 유세비오스는 희생의 제사의 관점에서 보면 바쳐진 물질적인 요소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의 상징들이라고 보았다. 바실레오스는 우리가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먹으므로 그의 성육신과 가시적인 생명에 의해서 그의 생명과 그의 지혜의 동참자가 된다고 하였다. 마카리오스는 영적으로 먹음은 어떤 실재적인 것을 즐김을 뜻한다고 보았다. 예루살렘의 퀴릴로스는 화체설을 주장했다. 닛사의 그레고리오스는 성례전에 있어서 세례도 죄의 용서보다는 영의 통보로 보게 되었다. 이 영을 통보받으면 인간을 갱신하여 불사에로 이르게 하는 것으로 여겼다. 크리소스토모스는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인다는 주의 말씀을 그의 죽음과 부활로 보고 독수리들을 신자로 보았다. 반대로, 성찬상에 참여하는 자들이 하늘에로 오른다고 주장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퀴릴로스는 성육신으로부터 성찬식을 보고 교회는 성찬식과 성육신을 결합하게 된다고 보았다. 신앙고백자 막시모스는 안디옥의 신비적인 예배의식과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적인 신비주의를 결합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유티키오스는 그 원인은 효과들과 구별되어 따로 실재하지만 그 효과들에 자신을 배가하고 각자 안에로 전체로써 들어간다고 주장했다. 다메섹의 요한네스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에로 변화된다고 주장하여 그를 통해서 성례전이 완성되었다.
“성상 숭배 논란”
기독교는 이방종교들의 풍습과 영향을 받아들이게 된다. 기독교라는 신령한 신앙은 유물들과 순교자들의 뼈를 숭배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그림들을 숭배하게 된다. 성상숭배에 대해 논란과 반대가 많았고 황제들이 반대했지만 결국 대중의 관습이 이겨 기독교를 우상종교로 만들었다.
에피파니오스는 아나블라타의 교회의 휘장의 그림을 반대하고 하나님은 마음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암필로키오스는 성자들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을 금지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는 교회에 그리스도의 상을 세우는 것을 반대했다. 필록세노스는 그리스도의 상을 반대했고 천사들의 상도 반대했다. 6세기 안디옥과 에데사에서는 성상을 파괴했다. 8세기 니콜리아의 콘스탄티노스는 그림들에 반대했다. 소아시아의 주교들은 그림들, 성상 숭배가 하나님 경배에 배치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예수께서 성육신으로 사람이 되었으니 그림을 존경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았다. 대 바실레오스는 그림들은 색깔로 대상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는 그림을 반대했으나 교훈적 가치는 인정했다. 닛사의 그레고리오스는 교회에 성 떼오도로스의 그림을 그렸다. 앙퀴라의 네일로스는 그림을 보고 하나님을 섬기는 상태를 기억한다고 보았다. 네앞폴리스의 레온치오스는 그림은 경배용이 아니고 회상용이라고 보았다.
“성상 신학”
그림숭배가 만연해지자 그림숭배를 정당화할 신학이 필요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 게르마노스는 황제 레온이 성상 숭배에 반대하자, 오히려 황제에 반대하여 787 니카야 공회의에서 정통 성상론의 기초를 세우게 된다. 그는 그림의 목적은 신자들로 생활 개선하게 하고, 성경의 보고들을 요약할 수 있다고 했다.
754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표현이 불가하므로 피조물로 나타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모독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754 공회의는 787 니카야 공회의에 의해 배척된다. 이처럼 정치권력이 교회의 교리를 타락시켜 교회를 세속 종교, 우상종교의 하나로 만들었다. 신상들을 만들어 섬기던 이방종교의 관습이 그대로 교회에 들어와 그림숭배가 교회의 교리가 된 것이다. 영적인 종교가 물질적 종교가 된 것이다. 제7차 에큐메닉 공회의 이후 기독교는 미신과 우상숭배와 공교리가 혼합된 혼합 기독교가 되었고, 종교개혁의 전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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