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그렇지 아니한--만군의-여호와가 -말한다-그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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אפתח לכם את ארבות השמים
하사마임 오레보트 에트 라켐 에페타
heavens floodgates ** for-you I-throw-open
하늘들 문 너희를 위해 붓다.
והריקתי לכם ברכה עד־בלי־די׃
디 베리 아드 보라카 라켐 와하리코티
room-enough not until blessing upon-you and-I-pour-out
풍족히 아니하나 까지 복을 너희위에 내가 부은다
'시험'-잘못된해석. "시험하다" 원어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히브리어
1.נסה'나싸'- 헬라어 peirazo '페이라조-시험하다(test, tempt)
2.בחנ'빠한'- 헬라어 dokimazo'도키마조'-증명하여(prove)
그러나 말라기 3장10절의 시험은 בחנ'빠한'- "증명하여"이다.
십일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또한 공동체 자체를 유지시켜주는 그들의 신앙행위의 표현이다. 이 십일조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 지방의 많은 나라 즉 로마, 그리이스, 시리아, 카르타고 등 에서 행해졌다. 십일조는 종교적 뿐만 아니라, 세속적 통치자가 십일조를 받았다. 아마도 본래 신에게 드렸던 십일조를 신격화 된 통치자에게 드리게 됨으로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삼상 8:15-17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기 위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 떼의 십분의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사무엘은 왕을 세워 달라고 하는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 "왕을 세우면 너희들이 왕에게 십일조를 바쳐야 될 것이다."라고 하므로서 왕의 십일조가 왕 제도의 폐해의 하나 임을 지적하고 있다. 구약에서 십일조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생각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것, 바로 여기에 십일조의 본래의 출발과 의미가 있다.
(창 14:18-20)에서 "십일조"가 성경 처음으로 언급된 장면이다.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승리하여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맞아 그에게 축복하니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전리품 중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치는 장면이다.
특히 멜기세덱이 지니고 있는 제사장 직이 그 후에 나타날 완전한 제사장 직에 대해 멜기세덱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구약 제사 제도를 주관했던 레위인보다 훨씬 위대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땅의 소출이 아니라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후에 십분의 일을 반복해서 드렸다는 언급이 없다. 단지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형인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으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에 맞춘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종교적인 의무가 아니라, 당대의 문화 또는 풍습에 따라 드린 행위이다.
(창 28:20-22) 은 야곱이 하란으로 피난도중에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해주시고 훗날 자신을 갑부가 되게 하여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면 재물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그후 야곱이 전에 맹세한 대로 십일조를 바쳤다는 기록도 없고, 또 하나님께서 야곱의 십일조를 바치기를 요구하였다는 것도 전혀 찾을 수 없다. 그후 400년이 지나서야 십일조 제도가 모세 율법에 등장하고, 많은 지파들이 땅의 소산을 얻을 수 없는 레위 지파의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의식법이나 시민법과 함께 주어졌던 것이다.
(레위기 27:30-33) 여기엔 곡식과 가축의 십분의 일을 “여호와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따로 떼어 놓았는데 바치는 사람이 자기의 임의대로 선발하지 못하도록 막대기 밑을 통과하는 가축의 열 번째를 바치게 했다. 그것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벌금으로 20%까지 바치도록 하였다.
(민수기 18:21-32) 이스라엘 백성이 낸 십일조의 십일조이다. 십일조를 받는 레위인도 “주의 것”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 주께 돌려드린다는 표로 받은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아론 제사장에게 돌려드려야 했다. - 농산물에만 한정한다(18:27, 30).
(신명기 12:4-19) 백성들은 모두 중앙장소로 가서 거기서 십일조 음식을 먹어야 했다.
- 본문에서도 십일조는 농산물에 한정하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주변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어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씀이다.
(신명기 14:22-29, 26:12-15) 십일조를 받은 중앙 성소의 책임자들은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 모두에게 균등하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 했다. 3년 차 십일조는 사회보장 공동체에서 복지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는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들이 해당되었다. 이런 십일조는 성소로 가져가지 않고 자기 마을에서 소비하였다(14:28).
레위기에서는 십일조가 곡식과 가축이라면, 민수기와 신명기에서는 십일조가 밭에서 생산되는 것에 국한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나눔을 통해서 더불어 사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의 대체적인 십일조는 레위인만이 차지하는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성전이 아닌 자기가 거주하고 있는 각 성읍에 십일조를 직접 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게 나누어 줄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사회 보장제도이다. 그러나 이것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적으로 레위의 제사장들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십일조로 변해 갔다.
아모스 선지자는 사마리아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배역 행위를 열거하면서, 그들이 벧엘에서 제사를 행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자기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아모스 4: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그러면서 아모스는 십일조와 관련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꼬집는다.“삼 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려보려무나"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 의식 같은 것으로 복을 받을 수 있다면,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 삼 년마다 행하던 십일조를 삼 일에 한 번씩 하면서 복을 더 얻으라 하면서 사람들의 율법주의를 비웃으며 비꼬았던 것이다.
교회사적인면에서 십일조는 초대교회 이후엔 자발적으로 드려지다가 주후 585년에 교회법으로 확정시켜 그것을 안 바칠 경우 억지로 빼앗아 갔다고 한다. 이러한 규정에 따라서 그 이후 기독교 국가의 사람들은 교회에 십일조를 냈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개혁 이후에 비판을 받았고 따라서 카톨릭 교회는 십일조를 걷는데에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루터는 십일조를 교회에 내기 보다는 세속적인 통치자들에게 낼 것을 주장했지만 호응을 얻지 못했다.
개혁교회 즉 개신교회들은 십일조를 계속 실시 했으나, 점차 십일조를 배척하는 기운이 많아져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1789) 여러 나라들이 공식적으로 철폐했고, 그 나머지 나라들도 1848년 이후에는 모두 철폐했었다. 신앙심이 강한 홀랜드 국가에서는 몇 년전까지만 해도 십일조 및 각종 헌금을 일절 철폐하고, 교인들의 갹출로 이뤄나가는 교회들이 많아졌다. 이유는 신약에서는 레위족도 없을뿐만 아니라, 제사장 이라는 직분도 없기 때문이다.
말 3:7-12의 십일조 문제는 흔히들 강조하는 십일조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BC 5세기의 이스라엘 사회는 정치, 종교, 경제적으로 아주 암울했었다. 바사의 식민지로서 이사야, 학개,
스가랴 등의 선지자들이 외쳐대던 영광스런 메시야 왕국이 가시적이면서 즉각적으로 임할 것으로 믿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BC 537년 제1차 바벨론 포로 귀환후 1세기가 지났는데도 이뤄지지않자 의심이 깊어만 갔다. 좀더 구체적인 배경설명에 있어서 느헤미야와 말라기 선지자의 시대적 상황을 들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느헤미야와 말라기는 동 시대 인물이기 때문이다.
A). 느헤미야 10:37-39; 12:44-47;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느헤미야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에게 명령한다. 백성들이 예물로 드리는 밭의 소산물을 받고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여호와의 성전에 갖다 놓으라고 한다. 백성들이 포로 귀환 후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계를 지원토록 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거두어들인 십분의 일 중의 십분의 일을 성전 창고에 있는 각 방에 두어 백성들이 포로 귀환 후에도 성전을 잊어버리지 않고 체계적인 십일조와 헌물 관리하는 것을 생각하도록 하였다.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을 위해 율법이 정한 십일조, 거제물, 처음 익은 곡식, 등을여러 마을에서 수집하여 성전 창고에 쌓으라고 했다.“제사장들과 레위인은 하나님 섬기는 일만 힘썼으며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했다 ”. 그러나 포로 후 이런 조처가 있었지만 십일조의 혜택을 받아야 할 레위인은 정작 생계문제 때문에 성전의 일을 버리고 자기들의 생계를 찾아 도망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느 13:10 "내가 또 알아 본즉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 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기로 "). 그래서 성전 제사는 중단이 되고, 하나님의 성전은 관리하는 사람이 없이 방치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을 관리하던 제사장이 성전 창고에 모아둔 십일조를 횡령했기 때문이었다.
(느 13:7-9 "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갖춘 악한 일을 안지라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명하여 그 방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전의 기명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 놓았느니라 ")
근본적으로 십일조를 관리하는 사람들의 횡령의 문제였다. 당시 엘리아십 제사장과 도비야라는 사람이 서로 공모하여 성전 창고 바로 옆에 자기 개인창고를 만들어 놓고 십일조 및 각종 식량과 예물들을 자기창고로 빼돌림으로서 그 식량이 바닥났던 것이다. 그래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최초로 제사장에 의한 십일조 도적질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말 3:8, 9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이것은 제사장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그리하였다고 했지만, 그것이 성전에 있는 창고와 관련이 되었기 때문에 백성들보다는 성전과 관련이 있는 제사장, 레위인, 지도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도적질이라는 표현은 전 백성들의 문제가 아니라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성전 창고 강탈 행위를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으로 간주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그의 종들과 동일시 하셨기 때문이다.
말라기 2장은 제사장들의 도덕적 부패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내용이 담겨 있고,
3장에는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더러움을 깨끗케 해서 드려질 것과 헌물이 가난한 자들에게서 착취하였던 자들에게 심판이 내려질 것을 선포하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으로 요청되고 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십일조와 헌물”도적질 하는 것을 중단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구절 역시 1, 2장에서 제사장들에게 행한 심판 내용의 연속이다.
(말라기 3:7-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본문은 구약성경에 언급된 십일조와 관련된 마지막 언급으로서 십일조 지지자들이 인용하며 복의 근거로까지 제시한다. 십일조라는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선 말라기 전체를 이해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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