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에 의해 조작된 “YH노조 김경숙씨 사망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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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노조 김경숙씨 사망사건 조작됐다”
투신자살 아닌 후두부 치명적 상처 직접 사인인듯......... 진실화해위, 국가 사과 권고… 박정희 재가도 확인 ‘전태일 분신’과 함께 1970년대 양대 노동사건으로 거론되는 ‘와이에이치(YH) 여공 사망’ 사건이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조작된 사실이 29년만에 드러났다. 이 사건은 야당 총재 의원직 박탈과 부산·마산 시민들의 민주화운동, 유신정권의 붕괴로 이어진 도화선이 됐다. » 유신정권 말기인 1979년 8월11일 회사의 부당한 폐업 방침 철회를 요구하며 서울 마포구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던 YH무역 노조원들이 강제진압된 뒤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보도사진연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1979년 경찰이 신민당사 농성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숨진 YH무역 노조원 김경숙(당시 21)씨의 사인은 경찰의 과잉진압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19일 밝혔다. 당시 경찰은 “진압작전 개시 30분 전인 8월11일 새벽 1시30분에 김씨 스스로 동맥을 끊고 4층 강당에서 건물 뒷편 창문 아래로 투신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진실화해위는 “당시 작성된 부검 기록을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냈는데, ‘주검에 동맥을 절단한 흔적이 없었고 손등에 쇠파이프로 가격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처가 있다’는 회신을 받았다”며 “후두정부(머리꼭지에서 약간 뒤쪽)에서는 모서리진 물체에 의해 가격당한 것으로 보이는 치명적인 상처도 발견됐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또 “당시 부검의뢰서에 추락시간이 2시3분으로 기재돼 있고, 김경숙의 주검을 처음 발견한 경찰관 배아무개씨도 ‘작전이 개시된 뒤 사람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갔다’고 진술했다”며 “벽돌과 쇠파이프 등이 동원된 진압과정에서 노조 대의원이었던 김씨가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경찰의 강제진압은 박 전 대통령의 재가 아래 이뤄진 사실도 확인됐다. 진실화해위는 당시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과 고건 정무수석 등을 면담 조사한 결과, 진압 전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등이 참석한 회의에서 강제해산 계획이 세워졌고, 박 전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사실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진실화해위는 유가족과 폭행 피해자 등에게 사과하고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조처를 취할 것을 국가에 권고했다.
한편, 진실화해위는 1950년 9월10일 미군 전폭기가 네이팜탄을 떨어뜨려 민간인 희생자를 낸 ‘월미도 폭격 사건’에 대해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펴기 위해 전략적 위치에 있던 월미도를 폭격한 것”으로 결론 냈다. 또 ‘국토건설 사업장 강제노역 사건’(1961년)은 “5·16 군사쿠데타 주도 세력들이 국토건설이라는 명분으로 전과자 등을 강제노역시킨 사건으로, 1980년대 삼청교육대 계획 수립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한겨레신문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
Y-H 사건은 무엇인가?
4년만에 국내 최대 가발업체가 된 Y-H 억압과 착취....... 오랫동안 여성노동자들은 이 단어들의 1차적 대상이었다. 한국의 종속적 수출주도형 경제의 전개과정에 있어 여성노동자는 항상 가장 값싼 노동력으로 고용되었고, 저임금·장시간 노동으로 혹사되어 대외경쟁력을 보충해 온 것이다.
산업역군이라는 미명아래, 기본적인 생존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의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이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을 통한 여성노동자운동을 펼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회사측의 비인간적인 처사에 단결로 맞서며 목숨을 건 투쟁까지 불사한 Y-H무역회사의 여성노동자들이다.
지난 79년 YH사태 당시 경찰이 신민당사에 농성중인 여공들을 끌어내고 있다
자금 100만원, 종업원 10명, 작은 가발공장으로 1966년에 설립된 YH는 당시 밀어 닥치는 가발수출의 호경기와 정부의 수출정책에 힘입어 기적과 같은 성장을 보인 기업이다. 불과 4년만에 수출실적 100만불, 종업원 4,000명으로 국내 최대의 가발업체가 되었으며 당시 수출순위 15위로서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 동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사장 장용호의 영문이름 첫 글자를 따서 YH라 이름지은 YH는 1970년, 회사순이익 12억7천3백89만원으로 최대의 이익을 올렸다. 물론 이것은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의 땀과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결과이다.
같은 해 9월, 장용호는 동서 진동희를 사장으로 앉혀 국내경영을 전담시키고 자신은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상당액의 외화를 도피시킨 그는 YH제품을 수입하여 판매하는 <용 인터내셔널 상사>를 설립하고 호텔, 백화점 등을 경영하는 등 양쪽으로 부를 쌓아 올렸다. 이후 진동희 사장의 무리한 사세확장과 부정행위로 점차 기울어지기 시작한 YH무역은 감원이 행해졌고 은행빚이 늘어 났으며 75년부터 급격한 하향길에 접어 들게 되었다.
가발부에서 하나의 가발이 완성되기까지 거쳐야 하는 작업공정은 14단계가 있는데 이 중에서 11개반은 모두 도급제(일정노동시간 동안의 노동의 성과에 따라 시간당 임금을 지급하는 방식)로 이루어져 있고, 하루 12∼14시간의 연장근무를 하며 노동자들에게는 이에 따른 수당이 전혀 지급되지 않았다. 도급제가 적용되기 때문에 일이 없으면 월급(A급 최고 3만원, 당시 한달 밥값 3천원)이라는 것도 없어져 버리는 상황이었다.
"근로조건에 대한 불만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인상과 연장근로문제로 산발적인 단체행동들을 했지요. 한 두명이 빠지면 개인적 손해로 그치기 때문에 의견을 모아 단체로 연장근무를 안한다든지 출근을 거부한다든지 말이에요. 회사측에서는 간간이 일어나는 이런 일들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러려니 했습니다. 물론 그 때는 노조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몸으로 부딪히는 불만에 대한 표현 정도였습니다."
75년 설립된 섬유노련 YH노조지부장을 맡았던 최순영(현 부천시의원)씨의 설명이다.
김경숙열사의 죽음으로 이어진 휴·폐업투쟁 급성장과 사양길로 접어 드는 모든 과정에서 전체 직원들 중 90%에 달하는 여성노동자들은 항상 이용당하고 소외되었다. 75년 3월, 건조반 작업거부 사건은 노동조합결성의 디딤돌 역할을 하게 된다. 공임단가를 비롯한 제반문제를 담당하는 감독의 독단적인 인사이동을 계기로 건조반이 작업을 거부한 것이다. 건조반원 200명 전원이 참여하여 단결력을 보인 이 과정 속에서 당시 가톨릭노동청년회(J.O.C) 북부지구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철순씨가 노동조합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소개하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지침이 없고, 무엇보다 대등한 노사교섭력을 갖지 못하는 등의 눈 앞에 닥친 문제들 때문에 주의를 끌지는 못했다.
실패로 끝난 건조반 스트라이크 이후 노동자들의 좌절감과 허무감, 단체행동이 국가와 사회를 혼란시키는 죄로서 법에 저촉되는 것이라는 형사의 협박과 공포속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당시 건조반 조장으로 있던 김경숙, 박금순, 이옥자, 전정숙 등은 YH노동조합결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조직결성시도를 했던 그들은 그 후 해고되었고 수제반원 고참으로 있던 최순영은 강원도 하청공장으로 출장명령을 받았다.
75년 5월 24일은 4명의 희생이 있은 후 우여곡절 끝에 전국섬유노동조합 YH무역지부 결성대회를 가진 날이다. 그 순간에도 회사측은 어용노조를 결성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고, 뒤이어 지부장 최순영과 부지부장 이정옥의 해고, 사무장 민경애의 전출, 노동자들의 매수 등 민주노조의 설립 방해 책동을 멈추지 않았다. 노조설립신고를 한 후 무려 한달만인 6월 30일에야 신고필증이 나온 YH노동조합은 바로 다음 날부터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회의와 활동방향의 논의에 들어갔다. 조직강화 활동과 사내질서 안정을 기한다는 취지로 대의원대회를 비롯한 기숙사 자치회 구성, 소그룹활동, 교육, 수련회 등을 가지며 회사와의 지속적인 노사협의를 시도해 나갔다. 75년 12월, 50%의 상여금 지급은 YH노조의 투쟁의 첫 열매로서 회사 창립 이후 처음 받아보는 것이었다. 또한 단체행동을 통해 얻어진 최초의 성과라는 점에서 모두들 감격했다고 한다.
"노사협의를 통한 임금인상과 여타의 근로조건들은 당연히 저희 노동자들에게 주어졌어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원체 당하고 살아서 조금의 성과에도 기뻐했지만 사실 우리들의 요구는 근로기준법에도 제시되어 있는 조건만이라도 해 달라는 것이었거든요. 퇴직금, 야근수당, 하루 8시간 근무 등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회사측과의 협상이 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낮은 수준에서만 협상이 되어 좀 나아지고 지켜지면 천국이라고 여길 정도였지요."
최순영씨의 설명은 YH무역회사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여지없이 드러내 준다. 70년대 후반부터 세계경제구조가 재편됨에 따라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 진행되고 이에 사양산업이 된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은 휴·폐업의 악조건과 또 싸울수 밖에 없었다. 회사측의 무책임한 폐업조치에 대항하여 폐업철회를 요구하며 회사정상화투쟁을 하였으나 회사와 정부는 무관심과 책임전가에 바쁠 뿐이었다.
결국 200여명의 YH조합원들은 신민당사를 마지막 투쟁의 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이다."라며 목숨을 건 40시간 동안의 신민당사 농성시위는 정확히 23분만의 살인적 진압으로 끝났다. 이 과정에서 신민당 국회의원 및 당원 30여명, 취재기자 12명, 그리고 노동자 수십여명이 부상당했으며 개처럼 끌려나왔고 노조 상임 집행위원 김경숙이 싸늘한 시체로 변했다. 이후 YH사건은 정치이슈화되었고 부마항쟁과 대통령암살사건으로 이어지면서 유신체제의 종말을 가져오는 기폭제로 작용하였다.
생존을 건 YH노조원들의 치열한 투쟁은 여성노동자의 자주성과 투쟁성을 드러내는 귀중한 운동사이다. 가혹한 노조탄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상황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과 함께 조직적인 운동을 강하게 지켜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YH노조가 이렇게 노동운동의 규범적 존재로 위치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여성노동자들의 잘 무장된 도덕적 용기와 단결력이 아닐까? (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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