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에 아버지가 양반이라고 거짓말 쳤죠! 덕쇠였는데 개명한것. 가족에 관한것 8가지 모두 거짓말
이명박이 쓴 자서전(신화는 없다)과 ‘어머니에 실려있는 출생부분의 내용은 모두 8개 인데 모두가 허위다. ’신화는 없다“와 ”어머니“에 실린 출생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다.
“우리 아버지 이름은 이충우, 3형제 중 막내였다. 할아버지의 땅뙈기는 두 형이 차지했고 아버지 혼자서 친구들과 함께 1935년에 총각으로 일본에 갔다. 자리 잡고 저축하여 한국에 나와 반야월 채씨 여인과 결혼을 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6남매를 낳았다. 아버지는 전통적인 유교풍을 이어받은 양반타입이었다. 남자 돌림자는 ‘상’자, 여자 돌림자는 ‘귀’자인데 나 혼자만 돌림자를 이탈했다. 명박이라 지은 것은 어머니 태몽꿈에 크고 밝은 달이 치마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
이명박이 숨겨놓은 호적을 보면 진실은 아래와 같다.
1. 이명박의 아버지 이름은 원래 떡쇠(德釗)였고, 32세였던 소화 14년에 이름을 충우로 바꾸었다. 이덕쇠는 1907년 생, 어머니는 1909년 생. 서기 1925년이 소화 1년.
2. 할아버지 땅뙈기를 큰 아버지 두 사람이 나누어 갖고 아버지 혼자 일본으로 갔다는 말은 거짓이다. 할아버지의 땅뙈기는 무특-경특-덕쇠 3형제 중 경특이 혼자 차지했고, 무특과 덕쇠는 오사카에 건너가 나란히 이웃하여 대가족을 이루고, 창씨를 스키야마(月山)로 고쳐서 살았다. 이명박의 일본 이름은 '스키야마 아키히로'.
3. 아버지 덕쇠가 1935년에 총각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1935년에는 이미 3남매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1930년에는 귀선이, 1933년에는 상은이, 1935년에는 상득이 태어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 채씨 여인과는 1931년에 혼인했다. 이명박이 지금에서야 밝히고 있는 덕쇠의 도일 연도는 1927년이다.
4. 3형제 중 아버지 혼자만 일본에 갔고, 큰 아버지 둘은 조선에 남아 있었다는 말도 거짓이다. 2형제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이웃하여 살았다.
5. 어머니의 본이 ‘반야월 채씨’라는 것도 거짓말이다. 그의 모친은 ’인천 채씨‘다.
6. 부친과 모친이 결혼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6남매를 모두 낳았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4째인 ‘귀애’는 1938년에 포항(영일군 의장읍 덕성동)에서 낳았다. 어머니가 귀국한 것이다. 어머니 채씨는 1938년에 귀국해 있었고, 그 후 이명박과 이말분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이 사실은 이명박과 그 아래 동생 ‘말분’을 일본에서 다른 여인이 낳았을 것이라는 세간의 의혹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더구나 위 두 개의 책을 보면 이명박과 이말분은 어머니 채씨로부터 혹독한 서자 취급을 받았다.
7. 아버지가 전통적인 유교풍을 이어받은 양반타입이라는 말도 거짓이다. 일본 총독부가 양반-상놈-노비의 계급을 없애면서 양반가에만 유지돼 오던 호적을 하류계급에도 만들어 주었다. 그 이전에는 양반가에만 호적이 있었고, 그 호적에는 노비들의 이름도 있었다. 호적은 즉 양반가의 노비문서이기도 한 것이다. 호적에는 아무렇게나 불리던 노비들의 이름이 이런 식으로 기록돼 있었다. ‘개똥이’는 ‘개동(介童)’이로, ‘이쁜이’는 이분(伊粉)으로, 떡쇠는 덕쇠(德釗)로 . . . 이명박 가문에게는 ‘덕쇠(德釗)’라는 이름이 싫었을 것이다. 아버지인 덕쇠는 32세(1938년)에 이름을 충우로 바꾸었고, 이 개명사실은 옛날 호적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명박은 1974년 구-호적을 버리고, 새로운 호적으로 바꾸었으며, 새로운 호적에는 이 개명사실이 깨끗이 지워져 있다. 이충우는 태어날 때부터 이충우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소위 호적 세탁인 것이다.
이명박은 필자와의 법정 다툼에서 호적이 유실될 우려가 있어 1974년에 재-작성 하였다고 변명하지만 영일군에서 보관하는 호적이 수만 명에 이를 터인데 유독 이명박의 호적만 유실될 우려가 있다는 것도 우습다. 또한 똑같이 영일군에서 보관하는 호적인데 구호적은 유실우려가 있고, 신호적은 유실우려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욱 더 어이가 없다. 또한 기록을 옮기려면 원래 것대로 옮겨야 한다. 가정법원 호적과에 가서 확인해 보니 개명사항은 필수 기록사항이라 한다.
8. 남자 돌림자는 ‘상’자, 여자 돌림자는 ‘귀’자인데 이명박은 자기 혼자만 돌림자를 이탈했다 변명한다. 이명박은 그의 자서전에서 자기 바로 아래 여동생의 이름을 ‘귀분’이라 기록했지만 호적에는 ‘말분’으로 분명하게 기록돼 있다. 명박이라는 이름은 일본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다. 이명박의 아래 동생의 이름이 ‘말분’이인지를 모르는 기자들은 이명박 한 사람만 돌림자를 이탈한 것으로 알고 왜 이명박 혼자서만 돌림자를 이탈했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이명박은 한자의 뜻 그대로 “어머니 태몽꿈에 크고 밝은 달이 치마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고 변명했다. 그렇다면 어머니로부터 이명박과 함께 서자 취급을 받은 말분이는 어째서 돌림자를 이탈하였는지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결 론
이명박이 스스로 기록해 놓은 두 개의 책(신화는 없다, 어머니)의 출생부분은 총 8개의 요소로 구성돼 있는데 그 8개의 요소가 모두 거짓말이다. 이는 단순한 연도의 오해가 아니라 너무 황당한 거짓말이며 그 거짓말은 출생부분을 미화하고 이복형제라는 항간의 소문을 감추기 위해 기도한 의도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호적을 세탁한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호적을 세탁한 이유에 대한 변명이 유치하기 이를 데 없다는 사실이다.
시스템미래당(미래당) 지만원 총재가 오늘 16일(월) 오전 11시에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이명박 전 시장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 대한 기자회견을 갖고 "이명박의 자서전은 황당하게 조작된 자작 영웅전"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지 총재는 보도 자료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 채택 후 일부 대선 후보들은 자신을 거짓으로 미화하며 황당한 표퓰리즘으로 유권자를 속이고 대통령에 당선된 결과 대한민국은 정체성을 잃고 혼란에 빠졌다"면서 이 전 시장의 자서전에 대해 판금가처분 신청할 것을 예고해 왔다.
지만원 총재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명박이 자연인이라면 문제 삼을 이유 없지만,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자신을 미화하고, 살아온 스토리를 극화하고, 결점을 교묘하게 감추거나 바꿈으로 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화적 신드롬을 확산시키는 것은 선거법 위반이요. 대국민 사기라고 생각한다"며 신랄히 비판했다.
지만원 총재는 출생(호적)의혹에 대해 "자서전에 '아버지는 전형적인 양반타입이다'고 적었는데 일본시대에 작성된 원 호적 갑제1호증을 보면 이 전 시장의 아버지 원래 이름은 '이덕쇠'였고 이는 떡쇠라는 이름을 한문으로 기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그 당시 '덕쇠'라는 이름은 유교풍의 양반에 어울리는 않는 이름이다"고 밝혔다.
▲ 이명박 전 시장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일제시대 원 호적, 덕쇠라는 이름이 명시돼 있다. 이 호적에는 이명박 전 시장의 아버지 본명이 이덕쇠에서 이충우로 개명했다고 설명되어 있다. ⓒ 뉴스타운
이어 "호적을 보면 이덕쇠(이명박 아버지)의 맏형인 이무특의 자손 8남매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 두 형제는 일본 오사카에서 같은 시기에 이웃하여 대가족을 이뤄 살았고 한마디로 일본가문이었다"며 "자서전대로 써졌다면 사람들은 이명박 가문을 친일파 가문이라고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이명박은 이런 비난을 피하기 위해 자서전을 사실과 다르게 쓴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또 "1935년에는 이덕쇠와 채태원 사이에 이미 세 아이들이 태어나 오사카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자서전에서는 1935년에 아버지는 고향친구들과 살 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적혀있으며 이것은 매우 황당한 거짓이다"라고 주장했다.
즉, 지 총재의 주장을 빌리면 이명박 자서전의 일부 내용과 증거가 되는 일본시대에 작성된 원 호적인 갑제1호증사이에 모든 것이 다르게 기술돼 있다는 말이 된다. 갑제2,3호증은 원본인 1호증의 중요부분을 번역한 것이다.
▲ 이명박 전 시장의 아버지 이충우씨 해방후 60-70년대 호적 이명박의 아버지가 이덕쇠에서 이충우로 개명되어 호적세탁 의혹을 증폭시킨 호적, 이 호적에는 개명전 이름이 이덕쇠 였다는 사실과 기록은 찾을 수 없다. ⓒ 뉴스타운
이어 병역부분에 대해서도 "그 당시 남들은 갖은 방법으로 군대를 기피하는 마당에 이명박만은 군대에 가고 싶었어도 가지 못했다는 아름다운 줄거리로 미화돼있다"면서 "군대에 가고 싶었지만 중병으로 부득이하게 면제될 수밖에 없는 사유가 적혀 있어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명박은 매우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들을 살펴보면 이명박의 병역부분은 '의혹'을 넘어 '확실한 병역부정'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지만원 총재는 "이명박은 병무청 기록처럼 1963년에 훈련소에 입대했다는 사실을 자서전에 그대로 쓰면 그 후의 일들이 모두 엇갈리게 된다. 그래서 자서전에 1962년에 입대했다고 적었다"고 전한 뒤 "자서전에 '이태원의 대폿집에서 막걸리 잔을 돌리며...'란 말이 있는데 이는 기관지 확장증 고도와 악성 축농증으로 군대까지 면제된 사람이 병원에서 1개월 있다가 나오자마자 대포를 마시고, 연일 소리를 질러가며 선거연설을 한 후 학생회장에 선거에 당선됐다는 것인데, 이는 무협지보다 더 황당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또 "악성충농증과 기관지 확장증을 동시에 앓던 사람이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군대에 자원입대했다는 것부터가 거짓으로 보인다"고 못 박았다.
지 총재 이 밖에도 "오늘 나열한 모든 의혹들은 이명박이 가지고 있는 의혹 중 일부"라고 밝혀 이 전 시장의 검증의지를 다시 한 번 확고히 했다.
▲ 시스템미래당 지만원 총재
다음은 지만원 총재 기자회견 1문 1답 요약
문 : 왜 이명박 전 시장의 네거티브만 다루는가
지 : 이명박 전 시장은 거짓말로 조작된 자서전으로 유권자의 눈을 멀게 하고 있고,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대한민국 모두가 불행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명박이 한나라당 후보가 되는 순간, 정보력을 장악하고 있는 여권에 의해 한나라당과 한국 보수세력들은 정권교체에 실패하고 말 것이다.
대통령이 될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 유권자들은 신이 아니라 정직한 사람을 원하는데 이 전 시장의 자서전을 검토해 본 결과 집안 내력의 미화, 호적 세탁, 병역 면제과정 등 모든 자료를 비교해 볼 때 조작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는 명확한 사실들을 발견했다. 문 : 박근혜 전 대표의 네거티브는 왜 다루지 않는가
지 : 이명박 후보에 비하면 박근혜 후보의 문제점은 조족지혈, 새발의 피다. 오히려 정치인 박근혜에 대한 좋은 면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본다. 그래서 박근혜에 대한 네거티브는 다룰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문 : 한나라당에서 검증해야 할 일을 왜 미래당에서 하나?
지 : 현재 한나라당은 보수세력의 의견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 검증위원회는 검증요구를 묵살하고 오직 '당이 깨지면 안 된다'는 획일적 논리로 검증을 회피해 오고 있다. 보다 못한 보수세력들이 결집해서 만든 대안 정당이 바로 '시스템미래당'이다.
한나라당은 정당의 이념인 정직성을 팽개치면서 차떼기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후보 검증이라는 국가적 과제의 방기이다. 그래서 시스템 미래당이 이 일을 주도적으로 해 가기로 한 것이다. 형식은 당 총재인 저 개인이 출판 및 판매가처분 신청을 한 것이지만 시스템 미래당 모두의 뜻이다. 문 : 이 자료들은 어떻게 모았나
지 : 10만 명도 안 되는 미니 정당이지만 당원들이 똘똘 뭉쳐 노력한 결과다. 당원들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 : 결과적으로 박 전 대표를 지원하는 것이 아닌가
지 : 우리는 이것이 박근혜 후보가 덕을 보게 될 것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스템 미래당 당원들은 그러한 결과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문 : 그렇다면 시스템 미래당은 이번 대선에서 후보를 내지 않을 것인가
지 : 지금은 말할 단계가 아니다. 한나라당 경선 결과를 지켜보면서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문 : 한나라당 검증위원회가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나
지 : '당이 깨지므로 네거티브는 할 수 없다'는 것은 유권자들을 우습게 보는 말이다. 검증과 네거티브는 다르다. 한나라당은 유권자의 알 권리를 존중해야 하며 자신의 출생지도 정직하게 밝히지 않고, 양반집 자손인 양 집안을 미화하고, 기관지 확장증 고도와 악성 축농증 환자로 귀가 조치된 사람이 어떻게 한 달도 안 되어 막걸리를 마시며 학생회장 선거에 나서 당선될 수 있는지도 밝혀줘야 한다.
우리나라 제1의 보수정당은 한나라당이라고 저와 미래당 당원들은 생각하지만 한나라당은 천박하게 돈을 모은 부자에게 관심이 쏠려 있다. 부끄러운 한나라당은 반성하고 자성해야 할 것이다. 문 : 박근혜 캠프와 어떤 교감은 없었나
지 : 창당 때도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그쪽은 그쪽 나름의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개의치 않는다. 다만, 우리의 갈 길을 갈 뿐이다. 문 : 앞으로 더 이런 일을 할 것인가
지 : 이명박 전 시장의 약점들이 너무 많다. 유권자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언론이 파헤쳐 줘야 하는데 기존 언론들이 보인 태도는 홍보매체에 불과했다. 작은 인터넷 신문보다 못한 태도였고 이 점에 대단히 실망했다.
언론이 사회적 공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고 한나라당도 정당의 역할을 못하는 한 시스템 미래당은 끝까지 사실관계를 파헤치며 유권자의 알 권리를 위해 봉사할 것이다.
그런데 저는 이명박 후보의 책을 여러 권 읽어본 뒤 그의 사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그는 이미 확신범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누가 어떤 근거를 대며 그의 지난 어린 시절에 대한 글들을 지적해도 이미 그의 머리 속에 그려진 자신의 미화를 번복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자신 스스로 이미 도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의 사고가 과연 어떤 것인지는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번엔 그가 펴낸 책 내용 중 그 자신이 10대 때 여학교 앞에서 뻥튀기 장사를 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한 번 따져보겠습니다. 우선 그의 저서 ‘새벽 다섯시’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어머니의 무서운 길거리 특강
10대에 이미 거리 한복판에서 세상사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나는,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는 뻥튀기 장사를 했다. 장사는 좀 나아졌지만 뻥튀기보다 더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여학교 앞에 나가 자리를 잡고 기계의 불을 조절해가며 뻥튀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명박 후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면 정확하게 1957년부터 1959년까지입니다. 이명박 후보의 고향은 경북 영일군 흥해읍이며 그의 여러 저서들을 보면 아마도 당시로서는 그나마 가까운 도시였던 포항에 나와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포항이라고 해야 인구 5만이 될까한 작은 소도시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포항은 1967년 제철소 부지로 선정되며 1968년 포항제철 공장의 착공식이 열리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작은 항구도시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지금의 포항 여고인 포항고등여학교가 1939년에 개교되었고 현재의 동지여상 전신인 동지여고는 1954년 동지상고에 한 학급이 병설로 개교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으므로 시 전체에 여자 고등학교가 하나뿐이었던 것으로도 증명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후보가 언급한 당시 여학교 앞에서 뻥튀기 장사를 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아는 뻥튀기 종류는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말 그대로 쌀 몇 알을 기계에 넣고 튀겨 어른 양 손바닥 크기의 하얀 원형으로 만들어 내는 그런 뻥튀기입니다. 이 뻥튀기는 지금도 어린이들이 많이 다니는 공원이나 여행객들이 많이 다니는 고속도로 휴게소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뻥튀기는 1970년대 이 후 등장했습니다. 따라서 이 후보가 언급한 뻥튀기는 이 뻥튀기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옥수수나 보리쌀, 또는 쌀, 누룽지 등을 원통형 기계에 넣고 돌리며 그 기계 밑에다 불을 지펴 익힌 뒤 튀겨내는 뻥튀기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길거리에서 비닐봉지에 들어 있는 튀겨진 옥수수(구형팝콘)봉지를 한 봉에 1,000원 정도를 주고 쉽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50년대는 이 옥수수 등을 튀기는 기계를 가진 아저씨들이 시골 장날 장꾼들이 많이 다니는 한 곳에 이 기계를 차려놓고 손님이 가져온 곡식들을 튀겨주고 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한 번씩 이 뻥튀기 기계를 가진 아저씨가 '구루마'에 이 기계들을 싣고 각 마을들을 순회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은 아이들 성화에 못 이겨 옥수수, 쌀, 등을 한 됫박 가져다 튀긴 다음 그 뻥튀기들을 한 소쿠리 안고 집으로 와서 아이들에게 주전부리로 주곤 했습니다. 지금 기억해 보면 아마 한 됫박 곡식을 튀긴 값으로 1원 정도를 받은 것 같습니다. 또 돈이 없으면 헌 고무신이나 빈병, 또 녹슨 쇠붙이 등도 그 삯을 대신했습니다.
이 때문에 가난한 집 엄마들은 옥수수나 쌀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보리쌀 등을 튀겼으며 그 삯으로 헌 고무신 등을 주기도 했지요. 따라서 1950년대 당시 이 기계를 가지고 옥수수 등을 튀기는 일을 했다면 이는 엄밀히 말하면 뻥튀기 장사를 한 것이 아니라고 보면 됩니다.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필자는 1952년생입니다. 그리고 어려서 이런 기억을 가진 필자로서는 이명박 소년이 자신 스스로 곡식을 튀긴 다음 그 튀겨진 주전부리를 봉지에 파는 장사를 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그것도 여학교 앞에서 그 장사를 했다는 것이니 더욱 이를 믿어야 할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하지만 그 다음의 문장을 우리는 조금 더 보아야 합니다. 위의 글에 이어지는 다음 문장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불거졌다. 아침 해는 야속하게도 기계를 돌리는 시커먼 손, 남루한 교복 차림, 땟국으로 얼룩진 내 얼굴을 훤히 비추는 것이다. ‘저 여학생들이 나를 보면 뭐라 할까….’ 아무리 자신을 추슬러도 뻥튀기 장사꾼 이전에 지나가는 여학생들과 같은 또래 남학생이라는 입장이 마음을 짓눌렀다. 내 앞을 지나치는 수많은 시선을 받을 때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너무 창피한 나머지 여학생들이 많이 지나가는 등교 시간에는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시선을 피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여학교 앞에서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으로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도 그가 여학교 앞에서 뻥튀기 기계를 돌려 튀겨진 주전부리를 팔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여학교 앞에다 기계를 설치하고 곡식을 가져온 손님들에게 튀겨주며 삯을 받았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을 읽어보면 그는 뻥튀기 과자를 만들어 팔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눈을 피할 방법은 없을까? 전전긍긍하다 보니 그럴 듯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구해 쓰는 거야, 밀짚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장사를 하면 그들 시선과 마주칠 염려가 없을 거다. 그렇게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뻥튀기 기계를 돌리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호통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하는 기고? 장사하는 놈이 웬 밀짚모자고?”
어머니는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버럭 야단을 치셨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거리에서 큰소리로 야단맞는 게 창피하고 서럽기도 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어머니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말씀하셨다.
“얘야, 사는 사람하고 파는 사람하고 시선이 마주쳐야 장사가 되는 기다. 상대방의 눈을 피하면서 어찌 물건을 팔래? 서로 마주치면 사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는 기라.”
어머니는 야단치는 것이 아니었다. 장사를 하려면 사람들 눈을 마주 보고 당당하게 해라. 그래야 장사가 된다! 정면으로 부딪쳐라. 그래야 산다, 그래야 이긴다! 어머니의 매서운 ‘길거리 특강’은 내가 더 이상 밀짚모자를 쓰지 않는 것으로 끝이 났다.
결국 이명박 후보는 자신이 여학교 앞에서 곡식을 튀겨 팔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필자는 여기서 굉장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명박 후보의 여러 자서전들을 보면 이 후보는 1957년에서 1959년까지 고등학교 3년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는 또 고등학교 2학년일 때 리어카로 과일행상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뻥튀기 장사를 했다면 1957년일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왜냐면 1959년이던 그의 고등학교 3학년 때 그의 부모는 먼저 서울로 상경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1957년 경 여학교 앞에서 뻥튀기 장사를 한 이명박 소년은 그 뻥튀기 장사를 위해서 이 장비들을 어떻게 장만하고 운반했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술지게미를 먹을 만큼 가난했던 그가 뻥튀기 장사를 하기 위해 어떻게 고가의 뻥튀기 기계를 장만했을까요?
또 지금도 옥수수 등을 튀기는 뻥튀기 기계는 기계 밑에 있는 화로에 불을 지핀 뒤 계속 돌린 다음 곡식이 다 익으면 긴 망태기를 기계 앞에 대고 튀겨 쏟아져 나온 뻥튀기들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1950년대 당시 우리나라의 뻥튀기 아저씨들은 대부분이 그 화로에 장작을 잘게 쪼개서 화로에 넣으면서 기계를 돌렸습니다.
그러면...다시 그 원초적 의문으로 돌아가서
1. 뻥튀기 기계 2. 화로 3. 화로에 넣을 장작 4. 뻥튀기를 받을 긴 망태기
이명박 소년이 여학교 앞에서 뻥튀기 장사를 햇다면 그는 이런 장비까지 다 가지고 학교 앞으로 이동해야 했을 것입니다. 또 튀겨서 팔 곡식을 옥수수로 썼는지, 아니면 쌀로 썼는지 그것도 의문이지만 우선 원초적 의문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명박 후보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58년 리어카로 과일행상을 했다고 했는데 이미 그 이전 해인 1957년에 리어카를 장만했을까요? 그런데 필자가 1940년대와 그 이전 출생하여 한국의 격동기를 살아오신 많은 분들에게 1950년대에 리어카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했으나 거의 전부의 어르신들은 당시 리어카를 본 기억이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리어카는 1960년대 새마을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보급되기 시작하여 급격하게 늘어났으므로 1950년대에 시골에는 그런 장비 자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 짐은 거의가 지게운반이 주류였으며 많은 짐은 소나 말이 끄는 우마차(또는 달구지, 일본어로 ‘구루마’란 용어가 보통명사로 쓰임)가 마을에 한두 대 있었다고 기억해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필자에게 든 의문을 10가지만 정리하겠습니다.
1. 이명박 소년은 위의 장비들을 매일 이 ‘이 구루마’로 운반을 했을까요? 2. 아니면 학교 앞에다 고정으로 설치해놓고 매일 그곳으로 갔을까요? 3. 그래도 또 의문인 것은 그럼 장작은 매일 지고 갔을까요? 4. 그리고 여학생들이 등교하고 하교하는 시간에만 뻥튀기를 튀겼을까요? 5. 그 뻥튀기를 종이봉지에 담아 얼마를 받고 팔았을까요? 6. 당시에도 비닐봉지가 있어서 1원에 한 바가지 쯤 담아서 팔았을까요? 7. 여학생들이 집에서 곡식 한 됫박씩을 가져와서 튀겨달라고 했을까요? 8. 그럼 그걸 튀겨주고 삯을 받았을까요? 9. 여학교 앞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라 그곳이 뻥튀기 몫이 좋았을까요? 10. 마지막으로 정말 이명박 소년은 뻥튀기 장사를 했을까요?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이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후보 일정 소화에 매우 바쁘실 이명박 후보님께서 이 글을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한 말씀을 드리지요. 아마도 후보님께서 텔레비젼을 보실 시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쯤 시간을 내셔서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면 1950년대~60년대에 우리나라에 있었을 뻥튀기 기계가 지금 sk텔레콤 회사 이미지 광고에 등장하거든요. 그 광고를 보면 해설자의 나레이션과 함께 우리나라 사람으로 보이는 한 아저씨가 아프리카 후진국으로 보이는 어느나라에서 뻥튀기 기계를 돌리는 장면과 그 뻥튀기 기계에서 나올 '펑'소리를 귀를 막고 기다리는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이 아주 아련한 추억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그 뻥튀기 기계가 허연 김에 쌓이며 '펑' 터지고 그 다음 그 기계에서 쏟아져 나온 튀겨진 옥수수들을 주어 담으며 즐거워 하는 아이들 모습도 아주 이련한 추억을 느끼게 합니다.
혹시 그 광고를 보시면 당시 후보님에 쓰셨던 그 뻥튀기 기계와 같은 기계인지를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뻥' 터지는 소리에 놀란 아이들의 모습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2007-10-08 18:28:45
포항시민() 2007-10-09 10:15:49
이런 터무니 없는 거짓말쟁이를 한나라당의 대선후보로 뽑은 한나라당 놈들이나 이런 거짓말쟁이를 지지하는 국민이 50% 라니,,,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하기야 국민지지율은 정확히 2,3% 로 나오고 있긴 합니다 만,,,,
사기꾼() 2007-10-09 09:58:31 19 0
이명박은 확실히 해라, 뻥튀기장사를 어떻게 했다는거냐? 지금처럼 도로에서 병목현상이 일어서 차가 밀릴때 비닐봉지에 담긴 뻥튀기를 팔았다는거냐? 아니면 그 옛날 57년도 뻥튀기 기계를 끌고 다니면서 튀밥을 튀겼다는거냐?
생각하는 사람() 2007-10-09 09:34:07 5 0
저는 포항지리를 잘모르지만 아마더 기적이나 우연으로 옮겼지 싶습니다.
산까치() 2007-10-09 09:12:14 9 0
제가생각하기엔 뻥튀기 기계가 사라호태풍이닌 바로 그후에나온걸로 생각됩니다 쌀등 곡식도 재료가 되지만 국수를 잘게 부수어 사카린을 조금넣고 단맛이 난걸로 아는데 뻥튀기 하는사람들 보니까 들고 다니며 하는것이 아니고 더구나 학교앞에는 더더욱 아니고 시골장터같은 일정한 장소에서 하는것 보앗고요 그때 일원짜리 들고가서 사먹은 기억납니다 이명박씨 자서전은 조작이 많다는것이 곳곳에 냄새가 풍깁니다 작가가 너무 오버한것맞습니다 너무 거짓말을 많이하니.......
설화산() 2007-10-09 08:51:00 9 0
웃기네/// 뭐? 십대대 풀빵자사 시작 했다고?근데 그럼 같은 십대때 발맛사지는 뭐고? 앞뒤가 맞지않는 홍보선전이다. 아마도 십대때부터 풀빵이 아니라 씹빵을 시작 했겠지
만약 이 글을 이씨가 읽는다면 또 뭐라고 둘러댈지 궁금하군요. 그러나 안봐도 비데오네요. 정답은 "뻥이야!"
김선달() 2007-10-09 05:33:02 8 0
땅바기의 숨소리조차 거짓말로 들리니 과거를 어떻게 믿습니까? 땅바기에는 이세상 모든것이 기적으로 이루어 집니다. 군 면제 받은 기관지확장증도 현대 의학에서도 못 고치는 병이 기적으로 치료대고 좌우지간 거짓말로 한평생을 장식 합니다.우리 국민들이 빨리 땅바기의 허상을 알아야 하는데 그넘의 경제가 뭔지 답답 합니다.
정의() 2007-10-09 02:50:30 12 0
마치 옛날 앨범을 펼쳐 보는듯 하군요! 저와 동갑이신지라 더욱 와닿는 그때 그시절 의 정경이 눈앞에 선합니다. 그 당시 뻥튀기라면 지금의 강냉이나 쌀튀밥 같은것 이었을텐데 여고 앞에서 직접 튀겨 팔았다니... 그 당시 저도 군것질이라면 빠지지 않아서... 풀빵장수에 이어 뻥튀기장수도 100% 거짓말로 꾸민 이야기란 단번에 알았지요. 아마 자서전 대필 작가의 나이는 많이 젊은가 봅니다. ㅎㅎㅎ
대니() 2007-10-09 02:02:33 4 0
몇가지 의문에 대한 개연적인 논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유사한 예로 시스템클럽에 지만원박사에 대한 금번 법원판결케이스에 많은 시사점을 느끼게 하는군요
심판자() 2007-10-08 23:55:16 14 0
추천 100만개 올립니다. 이놈은 부끄럽지도 않은지 입만 열면 시장쓰레기 청소 아르바이트도 했고, 뻥튀기장수, 풀빵장수도 했다는 것들을 자랑하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 순수해야 할 청소년기에 길바닥에서 아주 더러운 장똘뱅이 근성만 배워쳐먹은 모양입니다.
관찰자 왕팬() 2007-10-08 23:17:02 9 0
한강님은 네이션 코리아판 "그것이 알고싶다"를 연상케 하시는군요..명성에 걸맞게 2편에서도 최고의 접속률을 올리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1편에 이어 2편 정말 유익하게 잘 보고 갑니다...
영일만() 2007-10-08 22:43:24 6 0
저 고향이 포항입니다. 이 내용을 읽으니 그 당시의 생활상에 열일군 흥해읍에 산 사람이 어떻게 포항에 소유한 여자고등학교까지 펑튀기 기계를 운반 했을 까요? 지금은 흥해가 포항에 속해 있지만..포항가려면 높은 산하나를 넘어야 했지요.. 70년대만해도 지금의 봉고차 같은 버스가 하루에 겨우 두서대나 지나갈 형편이었거든요. 저의 외삼촌이 흥해 사람인데 그 당시 운전해서 포항시장 차의 기사를 해서 대충은 그 70년대의 생활상을 압니다..지나간 일이라고 우겨서 쓴 이씨의 글은 다소 의문점이 많이 남습니다..
하프라인() 2007-10-08 22:17:23 4 0
귀한 글, 정말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그 당시엔 뻥튀기에 조미료 삼아 넣던 삭가루(아마도 '사카린'이 표준말이겠지만)도 매우 귀한 시절이었습니다. 깨진 병 쪼가리나 사금파리마저도 강엿이나 호박엿으로, 또는 '아이슈께끼'로 바꿔먹던 시절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구루마'... 그거 끌 수 있는 집은 적어도 괜찮은 집안이었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 시골에서 5일장이 설 때마다 쌀이나 보리가마, 고춧자루를 운송하는 수단은 '구루마'가 유일했으므로 그 삯만 하더라도 쏠쏠했거던요. 그리고 종이봉지... 그거 엄청 귀했을 겁니다. 평소 존경해 마지 않는 우리 이명박 후보님보다 십 칠팔년 정도 뒤에 태어난 제 기억에 의하더라도 마을 유지께서 읽고난 신문지를 돈 주고 사서 벽지로 대용한 기억이 선연하거던요.
거시기() 2007-10-08 21:22:25 9 0
그렇다면 그당시에 이명박은 현장에서 뻥튀기도 튀기면서 직접 봉지에 넣어서 팔기도 했다는 말이군요,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그당시에 종이 봉지가 너무너무 귀했던것 같습니다, 아니 귀했던게 아니라 아예 없었다고 말해도 틀림이 없을 겁니다, 1957년도에 종이 봉지라,,,,, 그 시절엔 할배들 담배 말아 피울 종이도 없던 시절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