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은 본래 부자집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가친척인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이호준 자신이 부자가 아니었던 것이죠. 이완용은 말년에 "내가 양자로 들어온 이후 재산을 물려받은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찌 나의 책임을 소홀히 하여 나를 양자로 데려온 본 뜻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바 있는데 그것은 이호준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즉 이완용의 재산은 이완용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죠.
그럼 이완용의 재산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요?
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이완용의 재산은 1925년에 3백만원(현재 가치로 보면 5~6백억원)으로 파악되어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파악된 재산만 3백만원이라는 이야기죠.) 당시 조선 최고의 재산가는 민영휘로, 이 작자는 무려 6천만원의 재산가(현재 가치로 환산 포기...)로 파악되었습니다. 이완용은 민영휘 다음의 부자였습니다.
이완용의 재산이 드러난 것은 1911년 시대일보에서 조선 자산가를 조사했을 때 50만원 이상의 자산가 32인 중 1인으로 그의 이름이 올랐을 때 부터입니다. 일단 조선에서 32 순번 내에 들어가는 재산가였다는 점을 알 수 있겠죠.
그리고 1925년 5월 7일 동아일보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립니다. 이완용 일가가 경성부에 납부해야 하는 학교비를 내지 않았다는 이야기였지요. 안 낸 이유는 재산이 과다평가되어 학교비가 과도하게 요구되었다는 이유였습니다. 경성부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완용의) 재산은 부동산 같이 눈에 띄는 것은 그리 많지 못하나 현금이며 내외간 은행의 저금 등을 합하면 수삼백만원에 이르러 (학교비) 오등급 3885원을 납부할만한 재력이 풍부하며 또 이항구 남작도 충분하다고 이번에 최후로 단정하였으므로...

부동산은 별로 없으나 현금과 은행 예금만도 3백만원이 넘는다는 이야기지요. 더구나 그후 동아일보 7월 2일자 보도에 의하면 이완용의 연수입은 무려 24만 2천원 이상이 분명하다는 것이 경성부의 주장이었습니다. 당시 쌀 1석의 가격이 39원. 군수의 연봉이 2000원. 일당 인부의 임금은 2원 50전이었습니다.(이기만, 1920년대 안성지역의 사회경제상 연구, [안성기략]을 중심으로, 중앙대 석사논문, 2004) 이완용의 부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죠.
합방 직후 그의 수입은 합방은사금 15만원의 연이자 7500원과 중추원 고문의 보수 2500원(조선총독부 중추원관제 칙령 제355호)을 합하여 최소 1만원 이상이었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저 두가지 수입만으로도 1만원입니다.) 당시 1만원은 지금의 2억원 이상의 수입이라 합니다.
그리고 경성부 주장의 "그리 많지 않은 부동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사가 나와 있습니다.

위 표(임대식, 「이완용의 변신과정과 재산축적」,『역사비평』, 1993년 가을호)는 1909-2항에서 보이는 것처럼 70만석(이건 너무 많습니다.)을 상정하는 등 부정확한 면이 없지는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소출에 대한 부정확함을 떠나 이완용 소유관계 확인에서는 잘못된 부분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완용 평전]에서는 민영휘와 비교하여 토지로부터 4천석 가량의 수입을 가졌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그 수입만해도 14만 6천원이 됩니다. 만일 이완용이 은사금의 이자 수입과 중추원 부의장(1912년 취임) 직 수입은 2500원이었다가 1921년 이후(1921년 4월 27일 개정) 4천원으로 오릅니다.
그렇다면 이완용의 현금 수입은 현재 파악된 것만 11500원이 됩니다. 여기에서 경성부가 밝힌 수입금 24만 2천원을 빼면 대략 23만원 어치를 토지 수입이라 가정해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완용은 5900석 가량의 소출을 거두고 있었던 셈입니다. (굳이 권하지는 않지만 궁금하신 분은 계산해 보세요.)
이완용은 중국에도 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20년 6월 8일자 신한민보에 따르면 이완용은 요양에 6만평의 땅을 사들여 경영한 것으로 나옵니다.
이완용은 한성은행에도 주식 지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23년 한주당 50원이었던 주식 중 5283주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만해도 26만 4150원이 됩니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53억원 가량됩니다.) 이 한성은행은 이완용의 조카 한상룡이 설립한 것으로 은행장은 이완용의 형인 이윤용이 맡고 있었습니다.
이완용은 1907년 5월 22일 내각총리대신으로 정부를 손아귀에 넣은 이후 자신의 친인척 60여명을 정부에 포진시켜(대한매일신보 1908.6.18) 정재계에 두루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이 내각은 고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등박문이 밀어붙여서 성립시킨 내각이죠. 이등박문은 내각에게 "여러분은 내게 다른 뜻이 없음을 맹세해야 한다"고 충성을 강요하죠. 물론 이완용은 얼른 충성을 다짐합니다. (일한외교자료집성 6 중 [제17회] pp508-509) 이등박문은 1906년에 고종이 자신을 통감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일한외교자료집성 6 상 [제7회] p240) 이등박문은 1908년 6월 17일 내각에 대해서도 "한황폐하(고종)의 신임은 표면적인 것이며 그 실정을 여러분에게 설명하면 여러분은 깜짝 놀랄 것이다"라고 토로하여 고종이 이완용 내각을 불신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일한외교자료집성 6 중 p922) 헤이그 밀사 사건은 그런 껄끄러운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밀어낼 수 있는 좋은 사건이었죠. 고종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제한되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방법은 매우 졸렬한 것이었습니다. 이등박문은 이완용 내각을 성립시키고 이완용은 이등박문의 뜻을 받들어 고종을 퇴위시키지요. 이제 조선은 급속하게 멸망을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이완용은 그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내려지던 하사금과 순종 즉위, 황태자 책봉에 따른 포상금들을 낼름낼름 받아먹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걸린 의혹을 보자면, 아관파천 당시 경인철도 부설과 관련하여 1만5천불의 뇌물, 전라북도 관찰사 시절 공금 횡령, 1909년 한미전기회사 설립 때 설립보조금 40만원, 철도보수금 70만원 착복 혐의가 있습니다. 이완용의 재산과 토지 구입 비용이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를 생각하면 이런 일이 사실이라는 것 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이렇게 조선에서 내노라 하는 재산가인 이완용은 사실 엄청난 구두쇠였습니다. 일본인들도 그가 검소하다고 기록할 정도로. 그는 단지 아끼는 것 뿐 아니라, 돈 되는 일에는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었습니다.

위 기사는 이완용이 이왕직의 경비로 쓰이는 친용금 9만원을 관리하는 자리를 놓고 민영휘 일파와 다투는 것을 조롱한 것입니다. 조선 최고의 부자와 둘째 가는 부자가 9만원 관리에서 떨어지는 푼돈을 먹겠다고 싸우는 것을 놓고 비웃은 것이죠. 여기서 다시 한 번 조선왕실조차 연수입 9만원에 불과했는데, 이완용의 연수입은 24만원이 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겠죠.
뿐만 아니라 이완용 일가는 재산을 위해서는 사기꾼 노릇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1925년 6월 16일자 시대일보를 보면 이완용의 처남 조민희 자작이 이완용의 마름을 시켜주겠다고 4백원을 사기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일들은 이 당시에 제법 횡행했던 일이었던 모양으로 다른 귀족들도 이런 사기극을 벌인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이완용은 친인척들과도 화목하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1922년 10월 이윤용은 5천원짜리 어음을 부도내게 됩니다. 이윤용은 한성은행의 사장이었는데, 한성은행이 이 어음의 지불을 거절해버리는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성은행은 이 일로 일시적으로 거래정지까지 당합니다. 그리고 이 일에 책임을 지고 이윤용은 한성은행에서 물러나고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한상룡이 사장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이완용과 이윤용의 갈등 때문에 이완용이 꾸민 일이라는 게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한상룡이 이완용 쪽으로 줄을 섰다는 것이죠. (1922년 10월 동명7월호)
이완용은 1925년 12월 16일에 유리창을 깨고 난입한 괴한에게 두들겨 맞는 봉변을 당합니다. 종로서 순사를 하던 이영구라는 조카가 순사직을 그만 둔 뒤 먹고살 도리를 만들어주지 않는 이완용에게 원한을 품고 한 행동이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구두쇠 이완용이 잘 챙겨줄 리가 없었겠죠. 아주 죽여버릴 작정으로 난입했다하니 이완용이 얼마나 큰 모욕을 주었을지는 가히 알고도 남음이 있겠습니다.
이러다보니 집안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겠죠. 이완용의 손자 이병희(이완용 둘째 이항구의 둘째 아들)는 경도(쿄토)로 유학을 가서는 백골단이라는 폭력조직에 들어가 행인의 금품을 터는 등 범죄행위를 벌이다가 체포되기에 이를 지경이었죠.

이완용에 대한 조선 백성의 경멸은 극에 달해 있었던 터라 심지어는 이완용이 며느리와 사통 중이라는 소문도 매우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1909년 7월 25일 대한민보의 신문만평입니다.

나무꾼이 나무를 하다가 도끼날이 빠져서 자기 발을 찍을 상황이죠. 그런데 나무에 적힌 한자를 잘 보아야 합니다.
"백이서지왈 임이완용 자부상피"라고 적혀 있습니다.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말하고 글로 이르되 "너 고집센 고용인아 네 도끼가 너를 상하게 하리라.
그런데 실제로는 위 글은 "이완용이 자부상피子婦相避한다"라는 뜻입니다. "자부"란 며느리고, "상피"란 붙어먹었다는 뜻이니 이완용이 며느리와 간통하고 있다는 이야기인 것이죠.
이 이야기는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당대 조선에서 이완용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를 보여주고 있죠. 이완용을 황실에 충성하는 신하라고 생각했다면(누군가는 이런 게 그 시대의 유교 관념이라고 우기고 있죠.)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는 없죠.
어쩌다 보니 이완용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 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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